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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7권, 선조 6년 11월 30일 병오 1번째기사 1573년 명 만력(萬曆) 1년

주강에 《서경》을 강하고 검소함, 이항·조식 등에 대해 논하다

주강(晝講)이 있었다. 특진관 강섬(姜暹)·윤현(尹鉉), 도승지 유전(柳㙉)유희춘(柳希春)이 입시하였다. ‘이윤(伊尹)이 말하기를 선왕(先王)이 먼동틀 때에 비현(丕顯)하여’라는 단락과 ‘그 검덕(儉德)을 삼간다.’라는 단락을 강독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먼동틀 때에 비현하여 앉아서 아침을 기다리는 것은 야기(夜氣)가 청명(淸明)한 데에 관계되는 일인가?"

하니, 유희춘이 아뢰기를,

"참으로 그렇습니다. 《맹자(孟子)》에 있는 야기의 주(註)에 ‘밝은 낮에 마음이 물욕에 얽매여 상하지 않으면 야기가 더욱 맑게 되고 야기가 맑으면 아직 사물을 접하지 않은 아침에 담담하여 허명(虛明)한 기상을 볼 수 있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또 ‘그 검덕을 삼간다.’ 한 데를 강독할 때에 아뢰기를,

"주자(朱子)가 ‘공자(孔子)는 온(溫)·양(良)·공(恭)·검(儉)하다.’는 검(儉)을 풀이하여 ‘검은 검약(儉約)에 그치지 않고 무릇 방사(放肆)하지 않고 수렴(收斂)을 힘쓰는 것이 모두 이것이다.’ 하였습니다. 무릇 사치하고 방사하면 나라를 망치지 않는 경우가 없으니, 걸(桀)의 경궁(瓊宮)·요대(瑤臺)와 주(紂) 주지(酒池)·육림(肉林)과 진(秦)의 아방(阿房)182) ·여산(驪山)183) 과 진 무제(晉武帝)의 액정 양차(掖庭羊車)184)진 후주(陳後主)삼각 황음(三閣荒淫)185) 과 수 양제(隨煬帝)가 넓게 궁실(宮室)을 지은 것과 당 의종(唐懿宗)이 절도 없이 교사(驕奢)하여 천하의 재력(財力)을 고갈시킨 것과 송 휘종(宋徽宗)이 토목 공사를 크게 일으키고 널리 화석(花石)을 모은 것이 다 방사한 일인데, 곧은 말을 듣기 싫어하였으므로 복철(覆轍)이 한결같았습니다. 한 무제(漢武帝)만은 여러번 군사를 일으키고 또 백량대(柏梁臺)·건장궁(建章宮)을 짓고서도 우연히 망하지는 않았지만 도둑이 천하에 들끓었으므로 무제가 깊이 뉘우치고 윤대(輪對)의 조(詔)186) 를 내렸기 때문에 겨우 망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대개 검(儉)은 덕(德)의 공순함이요, 치(侈)는 큰 악(惡)입니다마는, 《시경(詩經)》 위풍(魏風) 갈구편(葛屨篇)에 일설(一說)이 있습니다. 장식(張栻)이 ‘부자(夫子)가 「쓰는 것이 검(儉)에 지나치다. 」 하였고, 또 「예(禮)가 사치스럽기보다는 차라리 검소하게 하라. 」 하였으니, 검은 본디 악덕(惡德)이 아니다. 그러나 검이 지나치면 인색하고 막히게 되어 이익을 꾀하는 마음이 급박해진다.’ 하였고, 또 공자가 ‘남에게 주기는 마찬가진데 출납(出納)이 인색한 것을 유사(有司)라 한다.’ 하였으니, 검이 지나쳐 인색한 데에 이르면 당연히 주어야 할 때에도 주저하고 주지 않게 되어 마침내는 인심을 잃게 됩니다. 대개 모든 일은 중도에 맞게 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인(仁)이 지나친 경우에는 가엾게 여기는 데에 치우치기도 하고 의(義)가 지나친 경우에는 가엾게 여기는 데에 치우치기도 하고 공순이 지나친 경우에는 수고롭게 되고 검이 지나친 경우에는 인색하게 되니, 이것을 살피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동틀 때에 비현(丕顯)하여 앉아서 아침을 기다리는 것은 곧 《중용(中庸)》에 이른바 ‘재계(齋戒)하고 복장을 가다듬고 예(禮)가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며, 뛰어난 선비를 널리 구한다는 것은 곧 이른바 ‘어진이를 높인다.’는 것입니다. 대개 《대학》·《중용》의 도(道)는 다 먼저 덕을 밝힌 뒤에 어진이를 높이는 것이고, 또 먼동이 틀 때에 비현하여 앉아서 아침을 기다린다는 것은 곧 경(敬)인 것입니다."

하였다. 강독이 끝나고서 유희춘이 나아가 아뢰기를,

"지난번 홍문관의 차자에서 아뢴, 이황(李滉)의 문인으로서 서술한 자란 바로 조목(趙穆)을 가리킨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황의 문인 가운데 조정에서 벼슬하는 자가 있는가?"

하니, 아뢰기를,

"정유일(鄭惟一)·정탁(鄭琢)·김취려(金就礪) 등입니다."

하였다. 이황걸신(乞身)187) 하여 떠날 때에 상이 노쇠하고 병든 것을 근심하였고 신들도 위에서 굳게 만류하도록 권하지 못하였으므로 그때에는 늘 한스럽게 여겼으나 이제와서 생각하면 또한 유감이 없다. 이황기사년188) 에 사직하고 돌아가 경오년189) 에 죽었는데 그 문인들도 모두들 겸퇴(謙退)하여 감히 행장(行狀)을 지어 올리지 못하였다. 그래서 사림(士林)들은 다들 빨리 역명(易名)190) 을 보기를 바랐는데, 이는 공론이었다. 이황《주자대전(朱子大全)》의 교정에 지극한 공이 있으니, 《주자대전》의 교정은 이황의 공이 반을 차지하였다. 이황이 아직 살아 있다면 어찌 상사(賞賜)를 받지 않았겠는가. 상이 김우옹에게 하문하기를,

"조식(曺植)은 사람을 어떻게 가르쳤는가?"

하니, 김우옹이 아뢰기를,

"조식의 박문(博文)·궁리(窮理)는 이황만 못하지만, 사람에게 정신과 기개를 가르쳤으므로 흥기된 자가 많았는데, 최영경(崔永慶)·정인홍(鄭仁弘) 같은 사람들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항(李恒)은 사서(四書)만을 읽게 한다는데 이것도 옳다. 대개 서적이 많지 않은 옛날에는 어진 사람이 많았으나, 글이 더욱 많아질수록 사람들의 성취는 더욱 적어졌다."

하니, 유희춘이 아뢰기를,

"글을 널리 보는 것을 단점으로 여길 수는 없습니다만 널리 보고도 정밀하지 못하여 시비(是非)·정조(精粗)의 구별을 모른다면 많은들 무엇하겠습니까. 널리 배우고 상세히 밝혀서 반드시 그 이치를 궁구한다면 어찌 유익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학문은 넓기를 바라되 잡되기는 바라지 않고 간략하기를 바라되 고루하기는 바라지 않는 것인데, 잡된 것은 넓은 듯하고 고루한 것은 간략한 듯하니, 이 점을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항은 오로지 간략을 힘썼으므로 이런 말이 있는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학문이 넓은 것은 요체를 아는 것만 못하고 요체를 아는 것은 실행이 절실한 것만 못합니다. 임금은 만기(萬機)가 번다한데, 어찌 지엽적인 것에 정신을 둘 수 있겠습니까. 글에서는 긴요한 것만을 취하여 체념(體念)해야 합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책 7권 59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281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인사-관리(管理) / 인물(人物) / 역사-고사(故事)

  • [註 182]
    아방(阿房) : 궁명(宮名).
  • [註 183]
    여산(驪山) : 진 시황이 묻힌 곳.
  • [註 184]
    액정 양차(掖庭羊車) : 진 무제는 본디 검소하였으나, 오(吳)를 평정하여 삼국을 통일한 뒤에는 액정(掖庭:후궁, 궁녀)이 거의 1만 명이나 되고 총애하는 자도 매우 많았다. 그래서 양이 끄는 수레를 타고 양이 끄는 대로 가서 자니, 궁인들이 댓잎을 문에 꽂고 소금물을 땅에 뿌려 양을 유인하여 임금의 수레가 오게 하였다. 《진서(晉書)》 권31 호귀빈전(胡貴嬪傳).
  • [註 185]
    삼각 황음(三閣荒淫) : 남조(南朝) 진(陳)의 후주(後主)는 광소전(光昭殿) 앞에 임춘각(臨春閣)·결기각(結綺閣)·망선각(望仙閣)을 짓고 임춘각에는 자신이 거처하고, 결기각에는 장 귀비(張貴妃)를, 망선각에는 공 귀빈(龔貴嬪)·공 귀빈(孔貴嬪)을 거처하게 하고 세 각을 복도로 이어 왕래하였으며, 또 왕미인(王美人) 등 10여 인을 번갈아 그곳에 들어오게 하여 주색으로 날을 보냈다. 《남사(南史)》 권12 장귀비전(張貴妃傳).
  • [註 186]
    윤대(輪對)의 조(詔) : 윤대는 한(漢)나라가 개척하여 군사를 주둔시켰던 서역(西域)의 땅으로 지금의 신강성(新疆省)에 속하는 것인데, 무제 말기에 이곳을 흉노(匈奴)에게 빼앗기고 나서 무제가 애통해 하고 뉘우치는 뜻의 조서(詔書)를 내렸다. 《한서(漢書)》 권96 서역전(西域傳).
  • [註 187]
    걸신(乞身) : 나라에 바쳐 벼슬하던 몸을 임금에게 청하여 도로 받아서 고향에 돌아가 묻는다는 뜻으로, 사직을 청원하거나 청원하여 면직됨을 뜻하는 말로 쓴다.
  • [註 188]
    기사년 : 1569 선조 2년.
  • [註 189]
    경오년 : 1570 선조 3년.
  • [註 190]
    역명(易名) : 시호.

○丙午/晝講。 特進官姜暹尹鉉、都承旨柳㙉柳希春入侍, 講《伊尹》, 乃言曰: "先王昧爽丕顯一段, 愼乃儉德一段。" 上曰: "昧爽丕顯, 坐以待旦, 是夜氣淸明之事。" 希春對曰: "誠然。 《孟子》夜氣註云: ‘若於旦晝之間, 不至梏亡, 則夜氣愈淸。’ 夜氣淸, 則平旦未與物接之時, 湛然虛明, 氣像自可見。" 又講愼乃儉德曰: "朱子孔子溫良恭儉之儉曰: ‘儉不止儉約, 凡不放肆、務收斂, 皆是。’ 凡奢侈放肆, 未有不亡其國。 之瓊宮瑤臺, 之酒池肉林, 阿房驪山, 之掖庭羊車, 陳後主之三閣荒淫, 煬帝之廣營宮室, 懿宗之驕奢無度, 竭四海之財力, 徽宗之大興土木, 廣聚花石, 皆恣肆, 而惡聞直言, 覆轍如一。 惟 武帝屢興師旅, 又作栢梁迷章宮, 而偶得不亡。 然盜賊滿於天下, 帝又深悔, 下輪對之詔, 故僅得不亡耳。 蓋儉德之恭也; 侈惡之大也。 但有一說, 詩《魏風》 《葛屨》篇, 張拭〔張栻〕 曰: ‘夫子曰用過乎儉。 又曰禮與其奢也, 寧儉。’ 儉本非惡德, 然儉之過, 則至於吝嗇迫隘, 而謀利之心, 始急矣。 又孔子曰: ‘猶之與人也, 出納之吝, 謂之有司, 儉而至於吝, 則遲疑不決。 當予不予, 終失人心。 蓋凡事, 貴乎得中。 仁之過者, (惑)〔或〕 至於之其所哀矜而辟焉;義之過者, 或至於之其所賤惡而辟焉; 恭之過者, 至於勞;儉之過者, 至於吝。 此不可不察。" 又曰: "昧爽丕顯, 坐以待旦, 卽《中庸》所謂齊明盛服, 非禮不動也。 旁求俊彦, 卽所謂尊賢也。 蓋《大學》《中庸》之道, 皆以先明德而後尊賢。 又昧爽丕顯, 坐以待旦, 卽敬也。" 講畢, 希春進曰: "頃日, 館箚子所云, 李滉門人敍述者, 指趙穆。" 上曰: "李滉門人, 亦有立朝者乎?" 對曰: "鄭惟一, 鄭琢金就礪等是也。 李滉之乞身而去也, 上愍其衰病, 臣等亦不勸上强留, 其時常以爲恨。 至今觀之, 亦爲無憾。 己巳告歸, 而庚午身沒也。 其門人亦皆謙退, 不敢呈行狀, 士林咸欲速見易名, 此公論也。 之校正《朱子大全》, 至爲有功。 《朱子大全》之校正, 之功居半, 使尙在, 豈不受 賜? 上問金宇顒曰: "曹植敎人如何?" 宇顒曰: "之博文窮理, 不如李滉。 然敎人精神氣槪, 多有興起者, 如崔永慶鄭仁弘之類是也。" 上曰: "聞李恒, 只令讀四書, 此亦是。 蓋書不多時, 古人多賢, 文字愈多, 而人之成就愈下。" 柳希春對曰: "博觀文字, 亦不可少。 蓋博而不精, 不知是非精粗之別, 則雖多何爲? 若能博學詳說, 而必窮其理, 則豈不有益乎? 但學欲博, 不欲雜, 欲約不欲陋, 雜者似博, 陋者似約, 此不可不察也。 (李恒)〔李滉〕 專務簡約, 故有此說耳。" 又曰: "學之博, 未若知之要, 知之要, 未若行之切。 人君萬機之繁, 豈能留神於枝葉? 文字上, 但當取其緊要者, 而體念耳。"


  • 【태백산사고본】 4책 7권 59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281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인사-관리(管理) / 인물(人物) / 역사-고사(故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