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강에서 《서경》을 강하고 대간 등이 하정의 억울함을 풀어주기를 청하다
조강이 있었다. 좌상(左相)과 동지사(同知事) 유희춘(柳希春), 특진관 윤현(尹鉉), 대사간 박근원(朴謹元), 병조 참판(兵曹參判) 심의겸(沈義謙), 지평 이현배(李玄培)가 입시하였다. 이훈(伊訓)156) 첫 장(章)까지 강독하였는데, 유희춘이 아뢰기를,
"상서(商書)의 이윤(伊尹)·부열(傅說)의 말에 대해 주자(朱子)는 매우 분명하여 알기 쉽다 하고 또 이훈편(伊訓篇)·태갑편(太甲篇) 등은 더욱 절실하다 하였는데, 임금이 참으로 체념(體念)해야 할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강독이 끝나고서 대간과 심의겸 등이 하정(河珽)의 억울함을 말하면서 마땅히 억울함을 풀어주어 그 벼슬을 회복시키고 적몰한 것을 환급시켜야 한다고 하였다. 유희춘이 나아가 아뢰기를,
"하정의 죄는 먼저 김식(金湜)의 죄의 경중을 논한 뒤에 정해야 합니다. 김식은 박식하고 기절(氣節)이 있는 선비로서 처음에 남행(南行)157) 으로 장령(掌令)이 되었고 기묘년 봄에 현량과(賢良科)158) 의 장원(壯元)이 되어 중종(中宗)의 지우를 받아 한 해 안에 벼슬이 부제학(副提學)·대사성(大司成)에 이르렀는데, 간흉이 참설(讒說)을 조작하여 천청(天聽)을 놀라게 함에 따라 화(禍)가 헤아릴 수 없게 되자 김식이 위에서 깨달으시기를 바라 죽음을 피하였으니, 이것은 신하의 바른 도리가 아니지만 대죄(大罪)는 아닙니다. 하정은 김식의 고구(故舊)로서 김식이 망명하여 온 것을 보고서 어찌 차마 평일에 죄가 없던 사람이 관에 잡혀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었겠습니까. 김식은 강개하여 고도(古道)를 회복하고자 하였으니 나라를 저버린 것은 아닙니다. 단지 성품이 지나치게 굳세고 악을 미워하여 사왕(邪枉)을 용납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하정이 하룻밤을 같이 잔 것은 본디 중죄가 아닌데, 간신이 김식을 매우 미워하여 하정에 분노를 옮겨서 대죄를 얽어 만들어 죽이고 나서는 또 그 가산(家産)을 적몰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형벌입니까? 그러나 달아났던 김식은 일찍이 그 가산을 적몰당하였다가 그 뒤 환급받은 지 이제 이미 30년이 되었는데, 하정만은 환급받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하정이 외방의 무사(武士)였기 때문에 조정의 신하들이 셈에 넣지 않고 상전(上前)에 아뢰지 않아서 아래로 입히는 임금의 은택을 입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중종 말년에 아직 살아 있던 조광조(趙光祖) 등의 동류(同類)를 불러 쓰셨고 인종(仁宗)께서 유명(遺命)으로 현량과를 회복시키라고 명하셨고 명종(明宗) 만년(晩年)에는 인정(仁政)이 매우 많았으니, 이 때에 하정의 일을 아뢰었다면 어찌 따르지 않으셨을 리가 있겠습니까."
하고, 또 남곤·심정 등이 임금을 속이고 함부로 형벌한 죄를 논하여 아뢰기를,
"대저 망명(亡命)이라는 것을 옛사람이 풀이하기를 ‘망명은 죽음을 피한다는 말과 같다.’ 하였으니, 이는 죽을 목숨을 말하는 것이지 임금의 명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율(律)에도 ‘무릇 죄를 짓고 달아난 자는 본죄(本罪)에서 2등을 가중시킨다.’ 하였습니다. 이에 의거하면 중죄를 짓고 도망한 자는 그 죄가 더욱 가중되지만 본디 죄가 없는 자는 도망한 죄가 있을 뿐 중대한 죄가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김정(金淨)은 기묘년에 형조 판서로서 사화(士禍)를 당하여 금산(錦山)에 귀양갔는데, 금산은 김정의 고향인 보은(報恩)에서 겨우 하룻길이었으므로 김정이 늙은 어미를 만나 보겠다고 군수(郡守) 정웅(鄭熊)에게 고하여 정웅이 허락하였습니다. 그날 배소(配所)를 옮기기 위해 도사(都事)가 금산에 들어왔으므로 곧 사람을 보내어 김정을 불러서 돌아왔는데, 권간이 이 사실을 듣고서 김정이 도망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정웅을 잡아다 국문하니, 정웅이 위세에 눌려 뜻을 맞추느라고 몰랐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김정을 잡아다가 형신(刑訊)하고 마침내 망명이라 하여 제주(濟州)의 해도(海島)로 보냈습니다. 신사년159) 에 안처겸(安處謙)이 대신을 제거하려다가 일이 발각되어 달아나자, 이에 김정·기준(奇遵)을 다시 조율(照律)하였으나 율에는 정조(正條)가 없었기 때문에 본국을 배반하고 몰래 다른 지경으로 갔다는 것으로 죄를 만들었으니, 그 지나치게 억울한 것을 이루 말할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위에서는 하정이 부당한 대륙(大戮)을 받고도 오래도록 풀지 못한 억울함을 더욱 가엾게 여기시어 쾌히 은전을 베푸소서."
하고, 좌상 박순(朴淳)도 하정을 풀어주어야 한다는 것을 극력 말하였고 대관(臺官)이 마지막에 다시 여쭈니, 상이 이르기를,
"하정의 일은 의논하여 조치하겠다."
하였다. 지평 이현배가 아뢰기를,
"평상시 사정문(思政門) 밖에서 대간이 영사(領事)에게 절하면 앉은 채로 굽혀 답하고 지사(知事) 이하는 일어나서 답하는 것은 언관(言官)의 체모를 중히 여겨서인 것입니다. 오늘 소신(小臣)이 나아가 절하였더니 동지사(同知事) 이하가 앉은 채 일어나지 않았으니 대간을 공경하는 뜻이 아주 없습니다. 소신이 외람되게 풍헌(風憲)의 지위에 있으면서 남에게 이렇게 깔보였는데 이것은 실로 소신이 경천(輕賤)한 탓이므로 낯두껍게 무릅쓰고 있으면서 법관(法官)의 중임(重任)을 욕되게 할 수 없습니다. 신을 체직시켜 주소서."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는데, 이현배가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심의겸·윤현·유희춘이 아뢰기를,
"오늘 아침 합문(閤門) 밖에서 경연관(經筵官)이 모여 앉아 있을 때에 대사간이 들어와 앉았는데 신(臣) 유희춘이 머리를 돌려 사사로이 옛일을 물었으므로 신 윤현과 신 심의겸이 유희춘과 박근원에게 눈을 돌릴 즈음에 지평 이현배가 행례(行禮)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때 미처 일어나지 못하고 않아서 답하였으니, 신들이 혼망(昏忘)하여 살피지 못한 것이 심했습니다. 황공하여 대죄합니다."
하였는데, 미처 입계하기 전에 대관이 와서 아뢰기를,
"지사 이하가 대사간에게는 일어나서 답례하고 지평에게는 일어나지 않았으니 또한 잘못이 없을 수 없습니다.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동지사 이하의 일은 우연히 미처 살피지 못한 것이니 추고까지 할 것은 없다.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책 7권 51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277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사법-행형(行刑) / 가족-가산(家産) / 변란-정변(政變)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註 156]이훈(伊訓) : 《서경(書經)》의 편명(篇名).
- [註 157]
남행(南行) : 과거에 급제하지 않고 부조(父祖)의 음덕(蔭德) 또는 자신의 재능·학행(學行)으로 벼슬길에 오른 사람.- [註 158]
현량과(賢良科) : 조광조(趙光祖) 등이 종래의 과거 제도(科擧制度)의 폐단을 고치기 위하여 중국 한대(漢代)의 현량방정과(賢良方正科)를 본떠 마련하여 건의해서 중종 14년(1519)에 실시한 과거. 그 방법은 대개 육조(六曹)·홍문관(弘文館)·사헌부(司憲府)·사간원(司諫院)의 관원과 관찰사(觀察使)·수령(守令) 등이 선비를 천거하여 예조에 알리면 종합하여 검토한 뒤에 합당한 자를 임금이 친림(親臨)하여 대책(對策)으로 시험하는 것이었다. 당초에는 천거과(薦擧科)라 하던 것인데 뒤에 현량과라는 이름이 만들어졌다. 《중종실록(中宗實錄)》 14년 4월 13일 기사에 "상이 근정전(勤政殿)에 나아가 천거된 선비를 책시(策試)하였다." 하였고, 《인종실록(仁宗實錄)》 원년 4월 27일 기사에 "특진관(特進官) 정만종(鄭萬鍾)이 ‘기묘년 천거과 때에 신(臣)은 이미 출신(出身)하였으므로 그 일을 대강 아는데, 그 때에는 현량이라는 이름이 없었고 그 뒤에 헐뜯는 자가 이 이름을 만들었다.’ 하였다."고 하였다.- [註 159]
신사년 : 1521 중종 16년.○戊寅/有朝講。 (○) 左相與同知事柳希春、特進官尹玹、大司諫朴謹元、兵曹參判沈義謙、持平李玄培入侍。 講至《伊訓》首章, 希春曰: "《商書》 伊尹、傅說之言, 朱子以爲最分明易曉。 又以《伊訓》、《太甲》等篇, 尤爲痛切, 人君誠宜體念處故也。" 講畢, 臺諫及沈義謙等言: "河珽之冤枉, 當申雪, 復其官爵, 還其籍沒。" 希春進曰: "河珽之罪, 當先論金湜罪之輕重, 然後定之。 湜以博識氣節之士, 初以南行爲掌令。 己卯春, 爲賢良科壯元, 遇知中廟, 一年之內, 超遷至副提學、大司成。 及姦兇讒說, 震驚天聽, 禍在不測, 金湜逃死, 冀上有意悟之時。 是雖非人臣之正道, 然非大罪也。 河珽以湜之故舊, 見湜之亡命來見, 豈忍視平日無罪之人, 捉納於官乎? 湜慷慨欲復古道, 不負於國矣。 但性過剛疾惡, 不容於邪枉耳。 珽之一夜同宿, 本非重罪, 而姦臣惡湜之深, 遷怒於珽, 織成大罪, 旣殺戮之, 又籍沒其家産, 此何等刑耶? 然金湜之逃, 嘗籍沒其産, 厥後還給, 今已三十年。 獨珽未蒙還給, 此良由珽乃外方武士, 朝臣不復記數, 無有陳白於 上前, 以致未蒙漏泉之澤耳。 中宗末年, 召用趙光祖等同類之尙存者。 仁宗末(命), 命復賢良科。 明宗晩年, 仁政甚多。 當此之際, 若有陳達河珽之事, 豈有不從之理乎?" 又論南袞、沈貞等欺罔淫刑之罪曰: "凡所謂亡命, 古人釋之曰: ‘亡命猶言逃死。’ 蓋言其死命, 非謂亡君命也。 律又云: ‘凡犯罪在逃者, 於本罪者, 加二等。’ 據此, 則重罪逃亡者, 其罪尤重。 若本無罪者, 只有逃亡之罪, 而無重大之罪明矣。 金淨, 己卯年間, 以刑曹判書, 遭士禍, 謫錦山。 錦山去淨之本鄕報恩, 纔一日程。 淨以老母相見, 告于郡守鄭熊, 熊許之。 其日移配都事入錦山, 卽遣人招淨來還。 權姦聞之, 欲以淨爲逃亡, 拿問鄭熊, 熊怯威希旨, 以不知爲對。 權姦拿淨刑訊, 率以爲亡命, 投之濟州海島。 至辛巳年, 安處謙除去大臣事覺, 右逃乃重, 照金淨奇遵之律, 律無正條, 以謀背本國, 潛從他境爲罪, 其冤濫, 可勝言哉? 願上當念珽濫蒙大戮, 久未伸雪, 尤爲可(怜)〔憐〕 , 而快施恩典也。" 左相朴淳亦極言珽之當釋。 臺官於終更稟。 上曰:"珽事當議處之。" 持平李玄培 啓曰: "常時思政門外, 臺諫拜領事, 則俯而答之。 知事以下, 起以答之, 所以重言官體貌也。 今日小臣進拜, 則同知事以下, 坐而不起, 殊無敬臺諫之意。 小臣忝冒風憲之地, 爲人所慢如是, 此實由於小臣輕賤所致, 不可强顔冒處, 以辱法官重任。 請命遞臣職。" 上答曰: "勿辭, 玄培退待物論。" 沈義謙、尹鉉、柳希春啓曰: "今朝閤門外, 經筵官會坐時, 大司諫入坐。 臣希春回頭私問故事, 臣鉉、臣義謙注目希春、謹元之際, 持平李玄培行禮時, 及未起立, 坐而答之。 臣等之昏忘不察甚矣。 惶恐待罪, 未及入啓。" 臺官來啓曰: "知事以下, 於大司諫, 起而答禮, 於持平, 不起。 亦不能無失, 請推。" 上答曰: "同知事以下事, 偶未及察, 不必至於推考。 不允。"
- 【태백산사고본】 4책 7권 51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277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사법-행형(行刑) / 가족-가산(家産) / 변란-정변(政變)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註 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