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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7권, 선조 6년 3월 17일 정유 1번째기사 1573년 명 만력(萬曆) 1년

조강에 유성룡 등이 토지 겸병, 명의 왕수인, 교서관 출판 등을 논하다

조강(朝講)이 있었다. 특진관(特進官) 좌의정(左議政) 박순(朴淳), 지경연(知經筵) 김귀영(金貴榮), 특진관 첨지(僉知) 유희춘(柳希春), 형조 참판(刑曹參判) 박대립(朴大立), 승지(承旨) 이중호(李仲虎), 사간(司諫) 신점(申點), 장령(掌令) 박응복(朴應福), 수찬(修撰) 유성룡(柳成龍)조정기(趙廷機)가 입시(入侍)하였다. 강관(講官)의 강독(講讀)이 끝나고서, 유성룡이 아뢰기를,

"지금 밭둑을 잇대어 많은 전지(田地)를 차지하고 있는 자는 대부분이 세력이 강하여 공부(貢賦)를 내지 않는 무리이고, 소민(小民)이 소유하고 있으면서 공부를 바치고 있는 전지는 매우 적습니다."

하고, 유희춘이 아뢰기를,

"전결(田結)의 공부를 강한 세력을 믿고 바치지 않는 자는 세상에 드뭅니다마는, 가멸고 어질지 않은 자는 땅을 잇댄 이웃 전지를 겸병(兼倂)하려는 데에 뜻을 두고 침탈(侵奪)하여 억지로 사들이니, 이들이 바로 미워하여 다스려야 할 자입니다."

하였다. 좌상 등이 번갈아 나아가 말하다가 말이 ‘왕수인(王守仁)이 꺼림없이 스스로 훌륭한 체하며 주자(朱子)를 헐뜯자 중국의 성급한 자들이 부화 뇌동하였다. 진건(陳建)《학부통변(學蔀通辨)》을 지었는데 이것은 참으로 이단(異端)을 물리치는 정론(正論)이니, 교서관(校書館)을 시켜 개판(開板)하고 호남과 영남에서도 그렇게 해야 하겠다.’는 데에 미쳤는데, 상이 이르기를,

"왕수인도 재기(才氣)가 있고 공업(功業)을 세웠다."

하였다. 신(臣) 희춘(希春)이 나아가 아뢰기를,

"왕수인은 성질이 어그러져 강퍅(强愎)하고 공손하지 않아서 ‘오상(五常)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며 없애 버려도 괜찮다.’ 하고, 또 ‘진 시황(秦始皇)의 분서(焚書)는 산술(刪述)을 금지한 뜻에 맞는다.’ 하고, 또 주자가 저서하여 입언(立言)한 것을 헐뜯어 ‘홍수나 사나운 짐승의 재앙보다 참혹하다.’ 하였으니, 그의 설이 사특하기가 막심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특하다고 하는 것은 지나치지 않은가?"

하였다. 대답하기를,

"왕수인이 당초에는 사물이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을 싫어하여 어그러지고 치우친 말을 만들었으나 말이 이토록 바르지 않으니, 왕안석(王安石)이 탐욕하고 간사하지는 않더라도 흉사(凶邪)한 자를 이끌어 쓰고 충직(忠直)한 사람을 물리쳐서 마침내 정치를 어지럽히는 소인이 된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신이 교서관 제조(校書館提調)이었을 때에 《내훈(內訓)》《황화집(皇華集)》을 박은 것을 보았는데, 그 정하게 하지 않은 죄는 본디 아랫사람과 감교관(監校官)에게 있으나 먹[墨]은 바꾸지 않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대개 국가가 충청·전라·경상 세 도의 생산지에서 열 두 고을에 송연묵(松烟墨)을 분정(分定)하여 책을 박는데, 무진년047) 에 흉년이 들어 호조(戶曹)가 백성을 구제하기 위하여 10년 동안의 먹을 면제하였으므로, 지금 책을 박는 것은 다 7∼8년 동안 누상고(樓上庫)에 넣어 두어 흙비에 빛이 바랜 먹으로 하기 때문에 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상례(常例)대로 거두어들이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이 옳다."

하였다. 유희춘이 또 아뢰기를,

"글자에 새것과 헌 것이 있는데, 헌 글자는 닳아서 가늘고 새 글자는 크고 명백하므로, 글자가 서로 다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은 세종 때에 박은 책을 보았는가? 그 때에는 온갖 일이 다 정미(精微)하여 책을 박는 데에 있어서도 매우 명백하였는데, 그 때의 먹이 송연묵(松烟墨)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였다. 유희춘이 또 아뢰기를,

"《내훈》의 둘째 권은 1백 34장이나 되는데, 한 책이 1백 장을 넘으면 너무 많아서 책을 펴기가 불편합니다. 그 가운데에서 화희등 황후(和憙鄧皇后) 이상이 77장이고 대명마 황후(大明馬皇后) 이하가 57장인데, 두 권으로 만들면 알맞을 것입니다. 또, 둘째 권의 첫부분에 부부(夫婦)의 논별을 논한 데에 ‘혹 때리고 혹 욕하는 것이 바로 그 분(分)이다.’ 했는데, 금본(今本)에는 분(分)자가 잘못되어 공(公)자로 되었습니다. 또 세째 권의 발문(跋文)에는 전하(殿下)의 하(下)자도 없고 그밖에도 고쳐야 할 곳이 있습니다. 그러니 대내(大內)에 들인 85건(件)을 도로 내려서 고쳐서 들일 수 있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책은 이미 궁인(宮人)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제 더 박아야 하겠다. 원수(元數)가 너무 적어서 나누어 준 것도 적기 때문이다."

하였다. 유희춘이 대답하기를,

"나누어 주시는 것은 반드시 할 것 없고 대내에 들인 건(件)은 다시 박을 수 없겠습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전일에 바친 《육서부록(六書附錄)》의 상권(上卷)에 고쳐야 할 곳이 두세 곳이 있으니, 도로 내려 주소서."

하니, 상이 승지에게 이르기를,

"중국에서 전폐(殿陛)에 함부로 들어간 도둑이 있었던 것은 지극히 큰 변고인데, 사신이 중국에서는 장계(狀啓)할 수 없더라도, 어찌 월강(越江)하여서도 곧 장계할 수 없겠는가."

하였다. 조보(朝報)를 보니, 존호사(尊號使) 이희검(李希儉)이 어제 들어와서 서계(書啓)하기를 ‘올해 정월 19일에 황제가 시조(視朝)하려는데 어떤 남자가 내관(內官)의 복식(服飾)을 가장하고 건청궁(乾淸宮) 문밖의 자갈 깐 곳 아래로 들어와 달려 올라가려다가 문을 지키는 화자(火者)에게 잡혔는데, 방에 가두어 두고 심문하여 보니 그 범인의 이름은 직례 상주부(直隷常州府) 생진현(生進縣)의 백성 왕대신(王大臣)이고, 그 범인의 몸에서 칼집 하나를 찾아냈는데 장식해 만든 철검(鐵劍) 2구(口)와 철첨도(鐵尖刀) 1파(把)가 있었으며, 대내(大內)에 들어온 까닭을 추구하니 입을 굳게 다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황제가 변사 교위(辨事校尉)에게 명하여 추국하여 와서 말하게 하였는데, 장거정(張居正)이 아뢰기를 「궁정(宮庭)안은 시위(侍衛)가 매우 엄하여서 평소에 다니던 사람이 아니라면 길이 생소할 것인데, 어찌 곧바로 올 수 있겠는가. 날붙이를 품고 곧바로 올라온 것을 보면 역모(逆謀)를 꾸민 것이 하루이틀이 아니고 중간에 반드시 주장하여 시키고 끌어들인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 공초(供招)한 것에 의거하면 성명(姓名)·관향(貫鄕)도 진실한 것이 아닐 듯하다. 문형 아문(問刑衙門)을 시켜 여러 방도로 찾아서 거처를 알아내어 화(禍)의 근본을 아주 끊게 해야 한다. 」 하니, 황제가 그대로 따랐습니다. 전에는 문금(門禁)이 해이하여 바깥 궐문(闕門)부터 황극(皇極)의 좌우 액문(掖門)까지 출입하는 사람이 마음대로 다녔으나 변고를 당하고부터는 문졸(門卒)이 갑옷을 입고 능장(稜杖)을 들어 조금 삼엄한 뜻이 있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책 7권 13장 B면【국편영인본】 21책 258면
  • 【분류】
    외교-명(明) / 왕실-경연(經筵) / 농업-전제(田制) / 재정-전세(田稅) / 재정-공물(貢物) / 사상-유학(儒學) / 출판-인쇄(印刷) / 출판-서책(書冊)

○丁酉/有朝講。 特進官左議政朴淳、知經筵金貴榮、特進官僉知柳希春、刑曹參判朴大立、承旨李仲虎、司諫申點、掌令朴應福、修撰柳成龍趙廷機入侍。 講官講畢, 柳成龍曰: "今之田連阡陌者, 皆豪勢拒貢賦之徒, 小民納貢賦之田至少。" 希春曰: "田結之貢賦, 託豪勢而不納者, 世罕有之。 但爲富不仁者, 志在兼幷隣田之接壤者, 侵奪而抑買, 此正可惡而當治者也。" 左相等更秩進言。 語及王守仁自聖無忌、詆毁朱子, 中國好經者, 從而和之。 陳建《學蔀通辨》, 此實闢異端之正論, 宜令校書館開板, 又於亦然。 上曰: "王守仁亦有才氣, 建功業。" 臣希春進曰: "王守仁, 資性狠戾, 强愎不遜, 謂: ‘五常有亦可、無亦可, 剗而去之亦可。’ 又稱 始皇焚書, 以爲合於禁冊述之意。 又毁朱子著書, 立言曰: ‘慘於洪水猛獸之災。’ 其爲邪說甚矣。 上曰: "謂之邪, 無乃過乎?" 對曰: "守仁當初厭事物之干心, 而爲乖僻之論。 然言之不正, 至於此。 與王安石雖非貪邪, 而引用凶邪, 排擯忠直, 而卒爲亂政, 小人何異? 又陳: "臣爲校書館提調, 觀《內訓》《皇華集》之印, 其不精之罪, 固在下人與監校官。 然墨則不可不改。 蓋國家於忠淸全羅慶尙三道所産處, 分定松烟墨十二邑, 而印冊。 戊辰年, 戶曹爲年兇救民, 減除十年之墨。 今之印冊, 皆以七八年所納, 樓上庫霾雨變色之墨, 是以不精。 請自今徵納如常。 上曰: "此言是矣。" 希春又曰: "字有新舊, 舊字磨盡而微細, 新字大而明白, 故字有雌雄。" 上曰: "卿見世宗朝印冊乎? 其時百事皆精微, 而至於印冊, 甚明白。" 意其墨不但松烟而已。 希春又陳: "《內訓》第二卷至一百三十四張。 凡一冊過百張, 則太夥而舒卷不便。 其中鄧皇后以上, 爲七十七張, 大明 馬皇后以下五十七張爲二卷, 則適中。 又二卷, 首論夫婦之分曰: ‘或歐或罵, 乃其分也。’ 今本分誤作公。 又第三卷跋尾, 殿下亦無下字。 其他亦有當改處, 請內入十五件還下, 偶得改正以入。" 上曰: "其書已分賜宮人。 今當添印, 以元數太少, 頒賜亦少故也。" 希春對曰: "頒賜不必爲, 而內入件不可更印。" 又陳: "前日所獻《六書附錄》, 上卷有當改二三處。 請下。" 上語承旨曰: "中朝闌入殿陛之賊, 至爲大變, 使臣雖不可狀啓於中土, 豈不可越江, 而卽狀啓乎? 見朝報, 則尊號使李希儉, 昨日入來書啓曰: ‘今年正月十九日, 皇帝將視朝, 有不知人男子, 假粧內官服飾, 入於乾淸宮門外礓䃰下, 要往上走, 當被守門火者, 捉住挐在爲房, 審得本犯名喚, 則係直隷 常州府生進縣民王大臣也。 本犯身邊, 搜出一鞘, 則裝成鐵劍二口, 鐵尖刀一把。 審仇進內情由, 則堅執不語。 皇帝勑令辨事校尉, 推鞫來說。 張居正奏云: 「宮庭之內, 侍衛甚嚴, 若非平昔曾行之人, 則道路必生, 豈能一經便到? 視其挾刃直上, 則其造蓄逆謀, 殆非一日。 中間必有主使句引之人, 據其所供, 姓名鄕貫, 恐亦非眞。 乞勑問刑衙門, 多方緝訪, 務得下落, 永絶禍本。」 皇帝從之。 前此門禁解弛, 自外闕門, 至皇極左右掖門, 出入之人, 任意自如。 自遭變以來, 門卒着甲, 手持稜杖, 稍有森嚴之意。’ 云。"


  • 【태백산사고본】 4책 7권 13장 B면【국편영인본】 21책 258면
  • 【분류】
    외교-명(明) / 왕실-경연(經筵) / 농업-전제(田制) / 재정-전세(田稅) / 재정-공물(貢物) / 사상-유학(儒學) / 출판-인쇄(印刷) / 출판-서책(書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