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연에서 《서경》을 강하고, 불교·향약·교서관의 교정 등을 논의하다
오시초(午時初)에 상이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수찬 이경명이 우공(禹貢)008) 의 ‘뇌하(雷夏)가 이미 못이 되고……그 나무는 길다.’는 단락을 진강(進講)하다가 《산해경(山海經)》에 있는 용신(龍神)의 괴탄(怪誕)한 이야기의 인용을 인하여 드디어 아뢰기를,
"불씨(佛氏)의 설(說)은 대개 세 번 바뀌었습니다. 당초에 석가(釋迦)는 구담(瞿曇)이라 이름하였고 가유왕(迦維王)의 적자(嫡子)로서 계모(繼母)에게 용납되지 않아서 산에 들어가 고행(苦行)하고, 이 도리가 막히는 것을 싫어하여 불생 불멸(不生不滅)할 생각을 하였으며, 사람들에게는 천당(天堂)이니 지옥(地獄)이니 하며 복을 주고 죄를 준다고 꾀거나 을렀습니다. 한 명제(漢明帝) 때에 불법(佛法)을 받아들였는데,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이 있을 뿐이었는데 말이 매우 속된 것이었으나, 중국이 부처를 좋아하며 그 속된 것을 깨닫지 못하고 따라서 사설을 덧보태었습니다. 진(晉)·송(宋) 즈음에 이르러 혜원(惠遠)·도림(道林) 등이 서로 경의 뜻과 문장을 강설(講說)하였습니다. 양 무제(梁武帝) 때에 이르러 중 달마(達磨)가 또 서역(西域)으로부터 와서 그 설이 이미 궁색해진 것을 보고, 직지 인심(直指人心)·견성 성불(見性成佛)의 설을 창시하여, 인심은 지극히 착하므로 신고(辛苦)하며 수행(修行)할 것 없다 하고, 사람들에게 안에 공부를 쌓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이 때 유자(儒者)의 학문에는 기송(記誦)의 비루한 것과 사장(詞章)의 화려한 것이 있을 뿐이어서 마음을 닦을 만하지 못하였으므로 저들에게 졌으나, 실은 공허하여 진실한 것이 없었습니다. 《이정(二程)》009) 에 이르러 사서(四書)의 도를 창명(倡明)하고 주자(朱子)가 또 더욱 밝혀서 광명 정대하게 하니, 정(程) 주(朱) 이후로는 유자가 유식하여져서 석씨(釋氏)를 입에서 끊고 말하지 않았고 단지 어리석은 백성들이 미혹(迷惑)하여 빠지는 일이 있었을 뿐입니다. 이것을 다스리는 도는 민생(民生)을 두텁게 하고 교화를 밝혀서 이것이 무거워지고 저것이 가벼워지게 해야 할 뿐이고, 갑자기 절을 헐어서는 안 되므로, 남헌(南軒)010) 이 고을을 다스릴 때에 먼저 사묘(祀廟)를 헌 것을 주자가 온당하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또 《주자대전(朱子大全)》을 살펴보면, 장경부(張敬夫)011) 에게 답한 글에 향약(鄕約)을 논하여 ‘실은 행하기 어렵다.’ 하였는데, 대개 여씨(呂氏)의 향약은 한 고장의 마음을 같이하고 뜻을 같이하는 선비와 함께 만든 것이므로 천하일국(天下一國)에 통행(通行)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대개 일은 좋으나 정미(精微)한 곡절(曲折)이 있어서 궁리(窮理)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입니다."
하였다. 강독이 끝나고서, 도승지 박승임(朴承任)이 수찬 우성전(禹性傳)과 함께 탑전(榻前)에 나아가 아뢰기를,
"요즈음 날씨가 춥습니다. 내일 문소전(文昭殿)·연은전(延恩殿)에서 시선(視膳)하신다고 들었는데 하지 마소서. 성체(聖體)가 쾌하지 않으시니, 손상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하였는데, 이 때 위에서 유행하고 있는 감기를 앓은 끝이므로 신들이 이렇게 말한 것이다. 상이 이르기를,
"새해에 아직 거행하지 못하였으므로 하려는 것이다."
하였다. 유희춘 등이 아뢰기를,
"날씨가 따스해지기를 기다려 스무날 뒤에 하여도 늦지 않습니다."
하고, 유희춘이 또 아뢰기를,
"신이 교서 제조(校書提調)가 되어 접때 《송사(宋史)》는 이미 선본(善本)을 구하여서 인출(印出)하였습니다마는, 이제는 유림(儒林)이 다 《주자대전(朱子大全)》을 인출하기를 바라니, 인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인출해야 한다마는, 교서관(校書館) 관원의 교정(校正)이 정하지 못하여 인출한 데에 잘못이 많았다. 이제는 경이 제조가 되었으니, 정하게 교정할 것이다. 경은 학문이 뛰어나니, 읽지 않은 글이 없겠다."
하였다. 유희춘이 아뢰기를,
"전에 중종 계미년012) 에 《주자대전》을 인출했으나, 그 때에는 교서(校書)하는 관원이 거칠고 정하지 못함이 많았으므로 식자(識者)가 한탄했습니다. 이제는 이황(李滉)이 교정(校定)한 문자를 얻었고 아울러 우신(愚臣)의 좁은 소견으로 여러 장점을 모아서 바로잡았습니다. 그러나 허다한 책이 죄다 정할 수야 있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심경부주(心經附註)》 끝에 이황의 발문 두어 장이 있는데 의론이 정하고 절실하니, 《심경(心經)》의 판본(板本)에 보태어 새겨서 학자에게 보이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한어(漢語)에 능통하여 어전 통사(御前通事)를 감당할 문신(文臣)이 매우 적으니, 국가에서는 반드시 미리 배양해야 합니다. 세종 때에는 중국의 명사(名士)가 요동(遼東)에 귀양왔다는 말을 듣고 신숙주(申叔舟)·성삼문(成三問) 등을 보내어 가서 한어와 이문(吏文)을 배우게 하였고, 중종 때에는 최세진(崔世珍)·윤개(尹漑) 등이 한어를 잘하는 장기 때문에 중종께서 권장하여 책임지우셨으니, 그 중하게 여긴 것이 이와 같았습니다. 지금은 김계(金啓) 한 사람이 있을 뿐인데 또 동래 부사(東萊府使)에 차출되었고, 승문 제조(承文提調)는 거의가 착오가 많습니다. 신이 전에 김계에게 ‘그대가 늙으면 누가 그대를 대신하여 어전 통사가 될 만하겠는가?’ 하니 ‘주서(注書) 이준(李準)이 화어(華語)를 잘 알아서 어전의 직임을 감당할 수 있다. 중국 사신의 말을 통사가 다 전하기도 전에 이미 먼저 알더라.’ 하였습니다. 이러한 사람을 서장관(書狀官)이나 질정관(質正官)으로 차출해서 여러번 부경(赴京)하게 하면 자연히 익숙해질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준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주서가 한어를 잘 아니, 참으로 가상하다. 더욱 힘쓰라."
하니, 이준이 일어나 사례하였다. 상이 김계를 보내지 말아야 할 것을 알면서도 답사(答辭)가 없었다. 우성전이 기대승(奇大升)의 사제(賜祭)를 청하였으나, 상이 응답하지 않았다. 또 평안 감사(平安監司)가 병이 위중하여 외출하지 못함을 아뢰니, 상이 묻기를,
"이는 갈기를 청하는 것인가?"
하니, 우성전이 아뢰기를,
"머물러 두면 한 도(道)의 일이 폐기될 것입니다."
하였다. 강(講)이 끝나고 차례로 물러갔다.
- 【태백산사고본】 4책 7권 1장 B면【국편영인본】 21책 252면
- 【분류】어문학-어학(語學) / 인사-임면(任免) / 왕실-의식(儀式) / 왕실-경연(經筵) / 왕실-사급(賜給) / 사상-불교(佛敎) / 사상-유학(儒學) / 향촌-지방자치(地方自治) / 출판-서책(書冊)
- [註 008]우공(禹貢) : 《서경(書經)》의 편명(篇名).
- [註 009]
《이정(二程)》 :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註 010]
○癸巳/午初, 上御經筵。 修撰李景明進講《禹貢》 "雷夏旣澤, 厥木惟條。" 因《山海經》龍神之怪誕。 遂言佛氏之說, 凡三變, 其初釋迦名瞿曇, 以迦維王嫡子, 不容繼母, 入山苦行, 厭此理之充塞, 爲不生不滅之計, 其於人也, 以天堂地獄, 誘脅以福罪。 漢 明帝時, 迎佛法, 只有四十二章經, 辭甚鄙俚。 中國好佛, 而不覺其陋者, 從而增加之。 至晋 宋間, 惠遠 道林等, 相與講說經義文辭。 至梁 武帝時, 僧達磨又來自西域, 見其說已窮, 而創爲直指人心, 見性成佛之說, 以爲人心至善, 不用辛苦修行, 敎人用工於內耳。 是時, 儒者之學, 只有記誦之陋, 詞章之華, 不足以治心, 故爲彼所勝, 然其實虛空而無實。 至二程出, 倡明四書之道, 朱子又益闡明, 而光大之。 程、朱以後, 儒者有識, 絶口不談釋氏。 只有愚民, 迷惑沒溺, 治此之道。 但當厚民生、明敎化, 使此重彼輕, 不當遽爲撤毁寺社之事。 故南軒治郡, 先爲坼祠廟, 朱子以爲未當。 又按《朱子大全》答張敬夫書, 論鄕約曰: ‘其實難行。’ 蓋呂氏之約, 乃與一鄕同心同志之士爲之, 非可通行於天下一國也。 蓋事雖好, 而有精微曲折, 非窮理, 不能知也。" 講畢, 與都承旨朴承任、修撰禹性傳, 進 榻前陳曰: "近來日候寒澟, 伏聞明日文昭殿、延恩殿視膳, 請勿爲聖體不快, 恐有傷也。" 上, 是時, 感冒時令之餘, 故臣等云然。 上曰: "新歲未行, 故欲爲。 希春等曰: "待日溫念後爲之, 亦未晩也。" 希春又曰: "臣爲校書提調, 頃日, 《宋史》, 旣以求得善本, 然後印出。 今則儒林咸願印出, 《朱子大全》, 請印何如?" 上曰: "當印。 但校書館官員校正未精, 印出多誤。 今則卿爲提調, 必精校矣。 卿學問超出, 無書不讀。" 希春曰: "往在 中廟癸未年間, 嘗印《朱子大全》, 而其時校書之員。 多草率不精, 識者恨之。 今則得李滉校定之字, 幷以愚臣管見,合衆長而正之, 然許多冊, 豈能盡精乎? 又陳曰: "《心經附註》, 李滉有跋尾數張, 議論精功, 請於《心經》板本添刻, 以示學者。 又陳曰: "文臣能漢語, 堪爲 御前通事者至少, 故國家必預爲之培養。 在世宗朝, 聞中朝名士謫遼東, 至遣申叔舟、成三問等, 往學漢語吏文。 在中廟朝, 崔世珍、尹漑等, 以善漢語之長, 中廟勸奬, 而責任之, 其重之也如是。 今只有金啓一人, 而又差東萊府使, 承文提調, 率多差誤。 臣嘗謂金啓曰: ‘君若衰老, 誰可代君爲御前通事者。’ 答曰: ‘注書李準曉解華語, 可以當御前之任。’ 天使之語, 通事傳之未畢, 準已解其初。 如此之人, 宜差書狀質正, 累次赴京, 則自然慣熟矣。 上顧李準曰: "注書能解漢語, 誠是嘉也。 須益勉。 準起謝。 上知金啓當勿遣, 而無答辭。 禹性傳請奇大升賜祭, 上不應。 又陳平安監司病重, 不出閤。 上曰: "此請遞乎? 性傳曰: "留之, 則一道事廢闕矣。" 講畢, 以次退。
- 【태백산사고본】 4책 7권 1장 B면【국편영인본】 21책 252면
- 【분류】어문학-어학(語學) / 인사-임면(任免) / 왕실-의식(儀式) / 왕실-경연(經筵) / 왕실-사급(賜給) / 사상-불교(佛敎) / 사상-유학(儒學) / 향촌-지방자치(地方自治) / 출판-서책(書冊)
- [註 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