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사 조식의 졸기
처사(處士) 조식(曺植)이 죽었다. 조식의 자(字)는 건중(楗仲)이니 승문원 판교(承文院判校) 조언형(曺彦亨)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용모가 단정하고 어른처럼 정중하였으며 장성하여서는 통달하지 않은 책이 없었고 특히 《좌전(左傳)》과 유종원(柳宗元)의 글을 더욱 좋아하였으며, 저술(著述)에 있어서는 기발하고 고상한 것을 좋아하고 형식에 구애되지 않았다. 국학(國學)에서 책문(策問)할 때에 유사(有司)에게 올린 글이 여러번 높은 성적으로 뽑혀 명성이 사림(士林)들 간에 크게 알려졌다. 하루는 글을 읽다가 허노재(許魯齋)001) 의 ‘이윤(伊尹)이 뜻했던 바를 뜻하며 안연(顔淵)이 배웠던 바를 배운다.’라는 말을 보고 비로소 자기가 전에 배운 것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아 성현의 학문에 뜻을 두고 과감하게 실천하여 다시는 세속의 학문에 동요되지 않았다. ‘경의(敬義)’ 두 자를 벽 위에 크게 써 붙여놓고 말하기를 ‘우리 집에 이 두 자가 있으니, 하늘의 해와 달이 만고(萬古)를 밝혀 변하지 않는 것과 같다. 성현의 천만 가지 말이 그 귀취(歸趣)를 요약하면 이 두 자 밖에 벗어나지 않는다.’ 하였다.
일찍이 문인들에게 말하기를 ‘학문을 함은 어버이를 섬기고 형을 공경하는 예(禮)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만일 여기에 힘쓰지 않고 갑자기 성리(性理)의 오묘함을 궁리하려 한다면 이는 인사(人事)에서 천리(天理)를 구하는 것이 아니어서 결국 마음에는 아무런 실지 소득이 없을 것이니 깊이 경계하여야 한다.’라고 하였다. 천성이 효우(孝友)에 돈독하여 친상(親喪)을 당하여서는 상복을 벗지 않고 여막을 떠나지 않으면서 아우 조환(曺桓)과 숙식을 같이하며 따로 거처하지 않았다. 지식이 고명하고 진퇴(進退)의 도리에 밝아 세도(世道)가 쇠퇴하여 현자(賢者)의 행로(行路)가 기구해지자 도를 만회해 보려는 뜻을 두었으나 끝내 때를 못 만났음을 알고 산야(山野)로 돌아갈 생각을 품었다. 만년에는 두류산(頭流山)002) 아래에 터전을 닦고 별도로 정사(精舍)를 지어 산천재(山天齋)라 편액(扁額)하고 여생을 보냈다.
중종조(中宗朝)에 천거로 헌릉 참봉(獻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명종조(明宗朝)에 이르러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여러번 6품관에 올랐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다시 상서원 판관(尙瑞院判官)으로 불러들여 대전(大殿)에서 상을 대하였는데, 상이 치란의 도와 학문하는 방법을 물으니, 응대하기를 ‘군신간은 정의(情義)가 서로 믿게 된 연후에야 선치(善治)를 할 수 있고, 인주(人主)의 학문은 반드시 자득(自得)을 해야 하는 것으로 남의 말만 들으면 무익합니다.’ 하고 드디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금상(今上)이 보위를 이음에 교서(敎書)로 불렀으나 노병(老病)으로 사양하였고, 계속하여 부르는 명이 내리자 상소를 올려 사양하면서 ‘구급(救急)’이라는 두 글자를 올려 자기의 몸을 대신할 것을 청하고 인하여 시폐(時弊) 열 가지를 낱낱이 열거하였다. 그 뒤 또 교지를 내려 불렀으나 사양하고 봉사(封事)를 올렸으며, 다시 종친부 전첨(宗親府典籤)을 제수하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신미년003) 에 흉년이 크게 들어 상이 곡식을 하사하자 사례하고 상소를 올렸는데 언사가 매우 간절하였다. 임신년004) 에 병이 심하자 상이 전의를 보내어 치료하도록 하였으나 도착하기도 전에 죽으니 향년 72세였다. 부음이 알려지자 상은 크게 슬퍼하여 신하를 보내 사제(賜祭)하고 곡식을 내려 부의하였으며, 사간원 대사간을 증직(贈職)하였다. 친구들과 제자 수백 명이 사방에서 찾아와 조상하고 사문(斯文)을 위하여 애통해 하였다.
조식은 도량이 청고(淸高)하고 두 눈에서는 빛이 나 바라보면 세속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언론(言論)은 재기(才氣)가 번뜩여 뇌풍(雷風)이 일어나듯 하여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도 모르게 이욕(利慾)의 마음이 사라지도록 하였다. 평상시에는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 게으른 용모를 하지 않았는데 나이가 칠십이 넘도록 언제나 한결같았다. 배우는 자들이 남명(南溟) 선생이라고 불렀으며 문집 3권을 세상에 남겼다.
- 【태백산사고본】 3책 6권 1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239면
- 【분류】인물(人物) / 왕실-사급(賜給) / 인사-관리(管理)
- [註 001]허노재(許魯齋) : 원(元)의 학자 허형(許衡). 노재는 호.
- [註 002]
○乙未/處士曺植卒。 植字楗仲, 承文院判校彦亨之子也。 自爲兒齒, 容貌粹然, 靜重若成人。 及長, 於書無不通, 尤好左、柳文字, 製作好奇高, 不拘程式。 因國學策士, 獻藝有司, 屢被高選, 名動士林。 一日讀書, 得許曾齋志伊尹之志、學顔淵之學等語, 始悟舊學不是, 刻意聖賢之學, 勇猛直前, 不復爲俗學所撓。 大書敬義二字於窓壁間曰: "吾家有此兩箇字, 如天之有日月, 洞萬古而不易, 聖賢千言萬語, 要其歸, 都不出二字外也。" 嘗語門人曰: "爲學, 禮不出事親、敬兄之間。 如或不勉於此。 而遽欲窮探性理之奧, 是不於人事上求天理, 終無實得於心, 宜深戒之。" 天性篤於孝友, 執親之喪, 身不脫衰, 足不出廬。 與弟桓, 合食共被, 未嘗異居。 智識高明, 審於進退, 一自世道衰喪, 賢路崎嶇, 雖有志於挽回, 知終不遇, 卷懷山野。 晩卜頭流山下, 別搆精舍, 扁曰山天齋, 以終老焉。 在中廟朝, 以薦獻陵參奉不起。 至明廟朝, 又以遺逸, 屢遷六品官, 皆不就。 復以尙瑞院判官徵入, 引對前殿, 上問治亂之道、爲學之方, 對曰: "君臣情義相孚, 然後可以爲治。 人主之學, 必須自得, 徒聽人言無益。" 遂歸故山。 今上嗣服, 以敎書召之, 辭以老病。 繼有徵命, 又辭奏疏, 請獻救急二字, 以代獻身, 因歷擧時弊十事。 其後又下旨趣召, 辭上封事, 轉授宗親府典籤, 終不赴。 辛未大饑, 上賜之粟, 因陳謝獻疏, 辭甚剴切。 壬申病甚, 上遣醫治疾, 未至而終, 年七十有二。 訃聞, 上震悼, 賜祭賻粟, 贈爵司諫院大司諫。 故友諸生, 自四方來弔者, 幾數百人, 爲斯文慟也。 植氣宇淸高, 兩目炯燿, 望之, 知非塵世間人。 言論英發, 雷厲風起, 使人不自覺其潛消利慾之心也。 燕居, 終日危坐, 未嘗有惰容, 年踰七旬, 常如一日。 學者稱爲南溟先生, 有文集三卷, 行于世。
- 【태백산사고본】 3책 6권 1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239면
- 【분류】인물(人物) / 왕실-사급(賜給) / 인사-관리(管理)
- [註 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