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을 강했는데 이황·기대승이 진강하다
상이 비현각(丕顯閣)에서 소대(召對)하여 《대학》을 강하였는데 ‘요임금과 순임금은 인으로써 천하를 거느렸다. [堯舜帥天下以仁]’에서부터 ‘위의 문장을 통괄하여 맺었다. [通結上文]’까지 하였다. 이황이 아뢰기를,
"‘임금이 되면 인(仁)에 머물러야 한다.’ 하였으니 인(仁)자는 임금에게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인의예지(仁義禮智)가 성(性)의 사덕(四德)이나 인은 그중에서 으뜸이 됩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인이란 것은 마음의 덕이요, 사랑의 이치이다.’ 하였으니, 인은 바로 성(性)이고, 그것이 발하여 측은한 마음이 생기는데 이것이 바로 정(情)입니다. 천지는 만물을 생성하는 것으로 근본을 삼아 변화와 운행이 잠시도 간단이 없어서 만물이 각기 성명(性命)을 바르게 가지니 이것이 이른바 인(仁)인 것입니다. 이 세상은 처음 개벽한 이래 거칠고 소박할 뿐이었는데 복희(伏羲)에 이르러 팔괘(八卦)를 그리고 신농(神農)이 온갖 풀을 맛보아 의약을 제조하였으며 황제(黃帝) 때에 비로소 제도를 만들고 요순(堯舜) 때에 인문(人文)이 크게 갖추어졌습니다.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위(位)를 물려주면서 ‘중정(中正)한 것을 진실로 잡아야 한다.’고 하였고, 순임금이 우(禹)임금에게 위를 물려주면서 ‘인심(人心)은 위태롭기만 하고 도심(道心)은 은미하기만 하니 오직 정밀하고 전일하여야 진실로 그 중정을 잡을 수 있다.’라 하여 그 당시에는 제왕이 서로 전하던 법을 중(中)자로써 말하였습니다.
기자(箕子)가 무왕(武王)을 위하여 홍범(洪範)을 진술했는데 ‘임금은 그 극(極)을 세우는 것이다. [皇建其有極]’라 하여 그 때에는 극(極)자로 말했습니다. 공자에 와서 비로소 인(仁)자를 말했는데 공자 문하의 제자들 역시 ‘인’을 많이 질문했으며, 맹자(孟子)에 이르러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아울러 말하여 미진한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인은 임금에게 있어서 과연 중대하니 한번 호령하고 한번 생각하는 때에도 모두 인으로 마음을 삼아야 합니다. 인(仁)자와 서(恕)자는 뜻이 같으나 또한 같지 않는 점이 있는데, 서자에는 공부가 미진하고, 인자에는 자연스럽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미루어 상대에게 미치는 것을 ‘서’라 하고 자기로써 바로 상대에 미치는 것을 ‘인’이라 합니다. 맹자가 말하기를 ‘서(恕)를 힘써 행하면 인을 구하는 데 이보다 더 가까운 것은 없다.’고 했으니 대개 인과 서의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서자는 앞에서는 보이지 않다가 이 장 및 다음 장에서 비로소 보이기 시작합니다. 자기를 다스리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다스리고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이른바 서라고 하므로 수신장(修身章)의 아래에서 처음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다만 서자의 뜻을 세속에서 잘못 알고 ‘자기가 하지 못하는 것으로 다른 사람을 책하지 않는 것이 서이다.’라고 하기 때문에 관대하고 해이한 뜻이 되어 버렸으니 이른바 서자의 본뜻이 아닙니다.
옛날에 한 광무제(漢光武帝)가 죄없는 황후를 폐하려고 질운(郅惲)에게 말하자, 운이 말하기를 ‘부부의 법도는 아버지가 자식에 대해서도 어떻게 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신하로서 임금에게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광무가 ‘서기양인(恕己量人)020) 을 잘 한다.’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 주자는 글자 한 자를 분명하게 알지 못하는 해가 크다고 하였습니다. 대개 남의 신하된 자는 임금을 책난(責難)021) 하여 임금에게 허물이 없도록 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아야지, 자기가 하지 못한다고 해서 실천하기 어려운 일을 임금에게 권유하지 않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임금된 사람도 또한 오로지 선을 행하는 데에만 힘써서 타고난 고유의 덕성(德性)을 밝혀 백성을 스스로 새로워지게 한 뒤에야 이른바 자기의 처지를 미루어 상대에게 미치는 서(恕)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자신을 책하기를 후하게 하고 남을 책하기를 박하게 한다고 한 《논어》의 말은 서(恕)의 뜻이 아닙니다. 대체로 제왕의 서는 천하 국가를 소유하고 예악(禮樂)과 형정(刑政)이 다 있으니 반드시 자기가 싫어하지 않는 그것을 미루어 상대에 미치게 한 뒤에야 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임금의 악덕 중에서는 욕심 많고 사나운 것이 가장 중하니 부득이 본심을 단정히 하고 근원을 맑게 한 뒤에야 난을 일으킬 염려가 없게 됩니다. 한 사람이 나라를 안정시킨 경우는 바로 요임금과 순임금인데 후세의 임금을 두고 본다면 명령을 내리고 시행하는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선을 행하면 거의 망해가던 나라가 도리어 안정이 되고, 실로 조그마한 악이라도 있게 되면 굳건하던 나라가 역시 멸망하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주 선왕(周宣王)은 주나라 왕실이 이미 쇠퇴한 뒤에 즉위하였지만 자신을 낮추고 덕을 닦아 주나라의 왕도가 다시 일어났습니다. 한 사람이 탐욕을 부리고 사나왔던 경우는 곧 걸(桀)과 주(紂)로서 천하의 악명이 모두 걸과 주로 모였는데 걸과 주의 악함이 그렇게 심한 것은 아니었으되 악명이 모두 모였습니다. 그래서 자공(子貢)도 ‘군자(君子)는 하류에 처하기를 싫어한다.’ 하였습니다. 후세에도 착하지 못한 임금이 역시 많았지만 반드시 걸 주라고 칭하는 것은 탐욕스럽고 포악했기 때문입니다. 걸과 주는 천자라는 높은 지위에서 천하의 낙을 누리다가 하루아침에 필부가 되었습니다. 걸이 명조(鳴條)로 달아나 죽으니 하우씨(夏禹氏)의 4백 년 기업(基業)이 순식간에 무너졌고, 주가 보옥으로 장식한 옷들을 걸친 채 불속에 뛰어들어 자살하자 상탕(商湯) 6백 년의 왕통 역시 끊어졌습니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은(殷)나라의 거울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夏)나라 시대에 있다.’ 하였고, 우(禹)가 순임금에게 경계하기를 ‘단주(丹朱)와 같이 거만하지 마소서.’ 했는데, 순임금이 어찌 단주와 같았겠습니까마는 우임금이 경계하여 고한 도리는 실로 이와 같았습니다. 맹자는 말하기를 ‘요 순은 인륜의 지극한 경지이다. 순임금이 요임금을 섬기던 방법으로 임금을 섬기지 않으면 이것은 임금에게 불경(不敬)하는 것이며, 임금된 자는 요임금이 백성 다스리던 방법으로 백성을 다스리지 않으면 이는 백성을 해치는 것이다.’ 하였으니, 후세의 임금들은 마땅히 요 순으로 법을 받고 걸 주로 경계를 삼아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요임금과 순임금도 우열이 있는가?"
하니, 기대승(奇大升)이 아뢰기를,
"어찌 우열이 있겠습니까. 복희(伏羲)·신농(神農)·황제(黃帝)·요·순은 다같이 생지(生知)의 성인이라 실로 우열이 없습니다. 다만 우(禹)의 덕은 무왕(武王)과 비슷하고, 문왕(文王)의 덕은 요·순과 비슷합니다. 만약 탕왕(湯王)이나 무왕을 요·순에 비교한다면 다소 차이가 있을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요임금과 순임금 중에 누가 나은가?"
하니, 기대승이 아뢰기를
"요순 시대는 1년으로 말한다면 4월과 같은 때로서 요임금의 덕은 공손하고 총명하고 우아하고 신중하시어 온유하셨습니다. 순임금은 여러 가지 고난을 두루 경험하여 농사 짓고 질그릇 굽고 물고기까지 잡았습니다. 깊은 산중에 있으면서 목석(木石)과 같이 살고 사슴이나 멧돼지와 같이 놀았지마는 한 마디 착한 말을 듣거나 한 가지 착한 행동을 보게 되면 양자강이나 황하의 물을 터놓은 듯 막힘이 없이 통달하였습니다. 정자(程子)는 ‘요와 순은 서로 우열이 없다.’고 했는데 이 말이 과연 그렇습니다. 문왕 역시 생지(生知)의 성인이신데 《시경》에 이르기를 ‘슬기도 없고 지혜도 없는 속에 천리(天理)를 순응한다.’ 하였고, 또 ‘상천(上天)의 일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 문왕을 본받으면 온 세상이 믿고 따르게 되리라.’고 했습니다. 문왕의 뒤에는 공자가 주(周)나라 말기에 태어나 모든 임금의 본보기가 되었는데 그 제자의 말에 ‘내가 선생님을 본 바에 의하면 요임금이나 순임금보다도 훨씬 더 훌륭하시다.’라고 했습니다. 대개 요순 시대에는 백성이 잘 다스려져 화평을 누렸는데 그 은택이 한 시대에만 있었으나, 공자는 만세토록 법을 드리워 그 공이 요 순보다 더하였으니 이른바 성(聖)이라는 지위로 말하면 다름이 없겠지만 공으로 보면 다른 점이 있습니다.
요·순·우·탕·문왕·무왕·주공(周公)·공자는 도(道)의 정통으로, 요·순 시대에는 고요(皐陶)·직(稷)·설(契) 같은 이가 있었고, 탕의 시대에는 이윤(伊尹) 같은 사람이, 문왕에게는 태공망(太公望)·산의생(散宜生) 같은 이가 있었습니다. 공자에게는 3천 제자가 있었는데 3천 제자들 중에서 안자(顔子)와 증자(曾子)가 그 종지(宗旨)를 얻었으며, 그 뒤에 자사(子思)가 증자의 전승을 받았고, 맹자(孟子)는 자사의 문인에게서 수업(受業)하였습니다. 맹자가 죽은 뒤에 사도(斯道)가 끊어져서 천여 년을 내려오다가 송(宋)나라 때 이르러서는 염계 선생(濂溪先生) 주돈이(周惇頤)가 있었는데 학문이 고명하여 저술로 《태극도(太極圖)》와 《통서(通書)》가 있습니다. 또 두 정 부자(程夫子)가 나왔는데 형인 호(顥)는 호를 명도 선생(明道先生)이라 하여 저술로 《어록(語錄)》이 있고, 아우 이(頤)는 호를 이천 선생(伊川先生)이라 하여 저술로 《역전(易傳)》이 있습니다. 후학들에게 학문을 강론하여 사문에 공로가 있었는데, 그 제자는 귀산(龜山) 양시(楊時)와 예장(豫章) 나종언(羅從彦)입니다. 연평(延平) 이동(李侗)은 나종언에게서 배웠고, 주자는 이동의 제자로서 경서의 주(註)를 찬정(撰定)했는데 여러 유자(儒者)의 학설을 집대성했습니다. 삼대(三代) 이상은 위에서 몸소 실천함으로써 통솔했는데 후세에는 비록 큰 일을 한 업적도 있었으나 학자의 일을 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우리 나라는 바다 모퉁이에 치우쳐 있으면서 학문하는 일을 모르다가 세종조(世宗朝) 이후에 비로소 학문을 일삼았고 유자들 역시 학문을 숭상할 줄 알았습니다. 이제 위에서 학문을 좋아하시어 모든 사람들이 성대(聖代)의 현명한 군주가 나오셨다고 하니 당대의 어진이들이 어찌 나와서 응하지 않겠습니까. 《주역(周易)》에 ‘구름은 용을 따르고 바람은 호랑이를 따르며, 성인이 나타나니 만물이 우러러본다.’고 했는데, 성인이 만물의 우러르는 대상이 되는 것은 필연적인 이치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요·순·탕·무는 모두 훌륭한 신하를 얻어 함께 지치(至治)를 이룩했으나 삼대 이후에는 비록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할 어진이가 있더라도 벼슬하기를 좋아하지 않고 도를 스스로 지키면서 은거하였다. 이는 그들이 때를 얻지 못하여 그런 것인가, 시사(時事)가 좋지 못해서 그런 것인가? 비록 성대(聖代)를 만나더라도 이러한 사람들이 있는 것은 무엇 때문에 그러한가?"
하니, 기대승(奇大升)이 아뢰기를,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은 체용(體用)의 학문입니다. 만약 참된 유자가 있다면 어찌 독선(獨善)만 하겠습니까. 한쪽으로 치우친 산림(山林)의 선비들이라면 간혹 멀리 가서 돌아오지 않는 자도 있습니다. 삼대 이후로 팔원 팔개(八元八凱)022) ·고요(皐陶)·기(虁)·후직(后稷)·설(契)은 모두 성인의 지우(知遇)를 받은 자들입니다. 탕(湯)의 시대에는 이윤(伊尹)이 유신(有莘)의 들에서 농사를 지었는데 탕이 사람을 보내 폐백(幣帛)으로 초빙하자, 이윤이 말하기를 ‘내가 나가는 것이 어찌 밭 가운데서 살며 요순의 도를 즐기는 것만 같으랴.’ 하다가 탕이 세 차례나 사람을 보내 폐백을 갖추어 초빙하자 그제서야 비로소 생각을 바꾸어 일어나면서 말하기를 ‘내가 어찌 이 임금을 요순같은 임금으로 만들며, 이 백성을 요순 시대의 백성으로 만드는 것만 같으랴.’ 하였습니다. 탕이 그를 걸(桀)에게로 보냈으나 걸이 등용하지 않자 또 탕에게로 갔는데 이렇게 다섯 번을 오가다가 결국 탕을 도와 걸을 쳤습니다. 고종(高宗)이 3년 동안의 상중에 말을 하지 않으니 그의 신하가 간하기를 ‘임금께서 말씀을 하지 않으시면 신하들은 명령을 받을 길이 없습니다.’ 하자, 고종이 ‘꿈에 상제(上帝)께서 훌륭한 보조자를 보내주시었으니 그가 나를 대신하여 말하게 될 것이다.’ 하고, 꿈에서 본 대로 초상(肖像)을 그려 집짓는 공사장에서 부열(傅說)을 찾아 내어 함께 이야기해 보니 과연 성인(聖人)이었으므로 그를 등용하여 재상으로 삼은 사실이 열명(說命) 3편에 실려 있는데 이는 꿈속에서 서로 정신이 감통(感通)한 까닭이었습니다. 공자와 맹자는 몹시 급하고 안타까와하여, 3개월 동안 섬길 임금이 없어도 그를 찾아 위문하는 자세로 도의 시행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기 때문에 감히 은퇴하지 못하고 두루 여러 나라를 방문한 것입니다.
한 무제(漢武帝)는 진 시황(秦始皇)이 분서 갱유(焚書坑儒)한 뒤에 육경(六經)023) 을 드러내었으니 함께 일해 볼 만한 임금이라고 할 수 있으나 대체로 큰 공로를 좋아하여 내심에는 욕망이 많고 외면으로는 인의(仁義)를 과시했기 때문에 동중서(蕫仲舒) 같은 어진이를 얻고서도 등용하지 못하고 강도왕(江都王)의 재상으로 삼았습니다. 송 신종(宋神宗)은 정명도(程明道)를 감찰 어사(監察御史)로 삼아 융숭히 사랑하였으나 왕안석(王安石)과 의논이 화합되지 않아 명도가 물러났는데, 신종 역시 그의 훌륭함을 몰랐기 때문에 끝내 등용하지 않았습니다. 정이천(程伊川)은 나이 25∼26세 때에 과거에 응시했으나 급제하지 못하자 그 뒤에는 천거하는 사람이 있어도 스스로 학문이 미진하다고 하면서 벼슬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철종(哲宗) 초년에 사마광(司馬光)과 여공저(呂公著)가 그를 천거하여 숭정전 설서(崇政殿說書)를 삼았습니다. 그러자 이천은 ‘유자(儒者)로서 권강(勸講)하는 관원이 되었으니 신으로 하여금 스스로 처할 곳을 선택하게 하더라도 이보다 더 나을 데가 없다.’ 하고 즉시 소명(召命)을 받들어 벼슬하여 아는 것은 모두 말하였는데 경연(經筵) 석상에서 반복하고 유추(類推)하니 당시 청강(聽講)하던 자들이 지루하다고 하자, 이천은 ‘임금을 보도(輔導)하면서 이같이 하지 않는다면 어찌 성의를 다한다고 하겠는가.’라고 말하였습니다. 천하 사람들이 한창 존숭하여 신임하게 되었는데 그 당시 소식(蘇軾)이란 자가 있었으니 이른바 소동파(蘇東坡)로서 문장의 재주는 있었으나 심사가 바르지 못하여 정자와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식이 공문중(孔文仲)을 시켜 상소하기를 ‘간사하고 비속하여 항간에서 그를 오귀(五鬼)의 괴수라고 지목한다.’고 논박했는데, 이에 서경 국자감(西京國子監)이 되었습니다.
주자는 송 고종(宋高宗)조에 급제했으나 마침 어려운 시기를 만났고 또 노친이 있었기 때문에 물러갔습니다. 효종조(孝宗朝)에 이르러 구언(求言)에 따라 상소, 소명(召命)을 받고 입대했으나 때마침 금(金)나라와의 화친으로 논의가 합치되지 않아 물러갔습니다. 절동 제거(浙東提擧)가 되어 지대주(知台州) 당중우(唐仲友)의 장오(贓汚)를 조사하여 상소를 처음 올렸을 때 왕회(王淮)와 중우(仲友)는 인척간이라 즉시 배척을 받았습니다. 또 병부 낭중(兵部郞中)이 되었을 때 시랑(侍郞) 임율(林栗)이 와서 함께 강학(講學)을 했는데 의논이 같지 않자 즉시 상소하여 ‘희(熹)는 문자도 모르며 정이(程頤)와 장재(張載)의 계통이다.’고 하여 이로 인하여 물러갔습니다. 장재는 바로 장횡거(張橫渠)입니다. 주자가 영종(寧宗) 초년에 시강(侍講)에 입시했다가 강을 마친 뒤 상소하여 품고 있던 생각을 다 말하자 영종이 ‘처음 주희를 경연관으로 제수했을 뿐인데 일마다 참여하려고 한다.’ 하고 시강을 파면하여 남경 제거(南京提擧)로 삼았습니다.
옛날의 성현들이야 어찌 감히 하루인들 천하사를 잊을 리가 있겠습니까. 이천이 서경 국자감이 되었을 때 표(表)를 올려 사퇴하면서 ‘어찌 왕을 저버리겠습니까. 충성은 지극하지만 부득이해서입니다.’라고 했는데 이는 거취의 의리상 당연한 것이었고, 또 말하기를 ‘의리상 꼭 가야 할 경우가 되어 자신의 포부를 펼 길이 없습니다.’ 했습니다. 성현의 마음에 어찌 감히 하룬들 임금을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어진이가 임금을 모심에 있어서 반드시 공경과 예를 다하는 것은 자기 스스로 존대(尊大)하게 되려고 해서가 아니라 덕을 높이고 의를 즐기기를 그처럼 하지 않으면 함께 큰일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후세에는 간혹 조용히 물러나서 세상에 나오지 않으려는 자도 있고, 위에서는 알아주나 동류들의 질투로 용납되지 못하는 자도 있으며, 임금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여 뜻이 맞지 않아 물러가는 자도 있는데, 성심으로 어진이를 구한다면 후세라고 어찌 어진이가 없겠습니까. 또 유자(儒者)로서 오직 학문에만 힘을 쏟고 왕후(王侯)를 섬기지 않으면서 자기의 지조를 고상하게 가지는 자가 어찌 없겠습니까. 대체로 어진이가 자중(自重)하지 못한다면 비록 등용한다고 한들 국가에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정자나 주자가 물러간 것은 그 당시 임금이 지성으로 대우하지 못했기 때문에 소인이 참소하여 이간질을 한 것이다. 만약 지성으로 했더라면 어찌 참소가 있겠는가."
하니, 기대승이 아뢰기를,
"상의 하교가 지당하십니다. 소인이 군자를 해치는 데는 천만 갈래의 길이 있기 때문에 임금이 비록 지성으로 어진이를 등용하려 해도 어진이가 접근할 수 없습니다. 효종(孝宗)은 남송의 유능한 임금인데, 주자가 근본을 바로잡고 근원을 깨끗이 하려고 했기 때문에 세 번 들어가서 논한 것이 모두 환시(宦侍)를 다스려야 한다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잠저(潛邸) 때의 총행(寵倖)이 많았기 때문에 효종이 비록 어질다고 하더라도 인정을 이기지 못하는 점이 있었는데, 주자는 폐행(嬖倖)이 조정을 주관하고 있으면 비록 진심으로 국사를 해도 끝내는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이 때문에 물러갔습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어진이를 알아보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알고서 신임하는 것이 어렵다.’고 했습니다. 만약 신임하지 않는다면 소인의 참소와 이간질이 어찌 이르지 않겠습니까. 조종조로 말하더라도 중묘(中廟) 초년에 조광조가 정성을 쏟아 지치(至治)를 도모하고 마음을 다하여 국사에 임했는데 그 학문이 성현의 경지에 미치지 못하여 당시 실시한 일들이 간혹 적중하지 않기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소인의 무리들이 끝내 사직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라고 하자 중종께서도 믿지 않을 수 없어 결국에는 큰 죄를 입게 되었습니다. 대신을 신임하게 되면 소인은 이간질할 수가 없습니다. 어진이 하나가 참소를 받고 물러가면 사방이 해이해져서 사람들은 세상을 등지고 발걸음을 멀리 할 것이며 조정에 나오는 자들은 녹만을 탐할 뿐입니다. 만약 어진이를 신임한다면 자연히 온 나라의 교화가 일어나 아름다운 이름이 삼대와 나란해질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전교를 받드니 감격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옛날 사람이 어진이를 등용하지 못한 이유와 정성껏 찾으면 어진이를 구할 수 있다는 뜻을 상께서 알고 계시니 온 나라 신민의 복입니다. 지난번에 이황(李滉)·이항(李恒)·조식(曺植)을 올라오게 하는 일로 하서하신 것은 이것이 비록 선왕의 뜻이었다고는 하나 상께서 계승하시는 것이 더욱 중요하니 이 이상 가는 것이 없습니다. 다만 이황은 신유생024) 이고, 이항은 기미생025) 이며, 조식 역시 신유생으로 모두 70세의 고령입니다. 이처럼 날씨가 매우 추운 때에는 불러올 수 없는데 이미 소명(召命)이 있었으니 물러나 있기가 미안하여 필시 괴로와할 염려가 있습니다. 만약 집에 있으면서 병을 조리하는 것을 어렵게 여겨 길을 떠났다가 병이라도 얻게 되면 길에서 죽을까 걱정됩니다. 위에서 만나보시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고 하더라도 어진 선비를 기다리는 데는 관대하게 해야지 몰아붙여 촉박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날씨가 춥고 병이 있다면 사세를 보아가면서 올라오도록 다시 하유하심이 어떻겠습니까?
이준민(李俊民)이 아뢴 ‘어진이라면 의심없이 신임해야 된다.’는 말은 그 본의는 지당하나 또한 폐단이 없을 수 없습니다. 지금 사람들이 어찌 한결같이 옛날 사람들과 같겠습니까. 그 인물을 살펴보고 그가 군자임을 확실히 안 뒤에 신임하여 등용해야 할 것입니다. 한때 선하다고 해도 미진한 데가 있으면 자연히 행동에 드러나는 것이니 부득이 어떠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서 등용해야 합니다. 미천한 신하로서 진실로 상달하기 어려운 일입니다마는, 이황과 이항(李恒)은 신이 보아서 알고 있고 조식은 신이 보지 않아 모르지만 일찍이 벗들을 통해 그 사람에 대해 들은 바가 있습니다. 이황의 의논을 보면, 자질이 매우 고명하고 정자(程子)와 주자를 조술(祖述)했기 때문에 그 저술이 정자·주자에 근사하여 근래 우리 나라에서는 이러한 인물이 드문데 그의 성품이 염퇴하기를 좋아하여 젊어서부터 벼슬살이를 싫어하며 고향에서 사느라 고생이 많다고 합니다.
이항은 당초 무예를 일삼으며 멋대로 행동하던 인물이었으나 크게 깨달아 학문을 알고는 공부에 뜻을 두었으니 그 용기는 옛날 사람과 비교해서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두문 불출하고 글을 읽었고 덕행과 기국(器局) 또한 성숙되어 외모로 볼 때 근엄합니다. 다만 무인으로서 처음에는 과거보는 학문을 하지 않다가 만년에야 학문을 알았기 때문에 해박하게 통하지 못하였습니다.
조식은 기질이 꼿꼿하여 천길 절벽이 우뚝 서 있는 것 같다고 했으니 무딘 자를 흥시키고 나약한 자를 일으켜 세울 만하나 학문은 법도를 따르지 않는 병통이 있습니다. 성운(成運) 역시 유일(遺佚)의 선비로서 선왕조에 소명(召命)을 받들고 올라 왔다가 병으로 사직하고 물러갔는데 나이가 이미 70여 세가 되었습니다. 이 사람에 대해서는 들은 것이 없으나 대개 명리(名利)를 탐내지 않고 스스로의 절조(節操)를 지키는 자입니다. 한 시대의 어진이는 한 사람만이 아니나 이황 같은 사람은 우뚝하게 뛰어난 자입니다.
옛날에 왕통(王通)이란 자가 있었는데 이른바 문중자(文中子)입니다. 수 문제(隋文帝) 때에 상소하여 계책을 올렸는데, 주자가 ‘자신의 능력이 이윤(伊尹)이나 주공(周公)에 미치지 못하는 줄을 알지 못했다.’고 했으니, 이는 이윤이나 주공의 사업이 어려웠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상께서 저들 두세 사람을 부르시는 것은 삼대(三代)의 정치를 이루고자 하심이겠으나 저들 몇 사람이 어찌 이윤이나 주공으로 자부하겠습니까. 책임이 너무 무거우면 학문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핑계댈까 두렵고, 접대가 지나치게 후하면 또 기대에 감당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날씨가 따뜻해져서 올라온 뒤에 불러보신다면 그 사람들은 반드시 상달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신임하는 성의는 한결같이 해야 하며 그 사이의 접대는 참착해서 해야 하니 한때는 극진하게 접대하다가 끝까지 그렇게 계속하지 못하면 참소하는 말이 이로부터 생깁니다.
송 인종(宋仁宗)조에 한기(韓琦)·부필(富弼)·범중엄(笵仲淹)·구양수(區陽脩)·두연(杜衍)은 등용된 지 얼마 안 되어 참소를 받고 흩어졌는데 등용될 처음에 이미 그들을 위하여 미리 염려한 자가 있었습니다. 지금 이와 같이 하는 것은 세상에 드문 기이한 일이나 식견 있는 사람들은 혹 후환을 염려하는 자도 있을 것입니다.
음양의 소장(消長)은 또한 자연의 이치이지만 지성으로 마음을 굳게 정한 뒤에라야 후일 폐단이 없을 것이고 당우(唐虞)의 시대를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부득이 성상의 학문이 고명해지신 뒤에야 정사의 득실과 시비, 여러 신하들의 현부(賢否)와 사정(邪正)을 볼 수 있으실 것입니다. 《중용》의 구경장(九經章)에 이르기를 ‘몸을 수양하면 도가 확립된다.’고 하여 《중용》의 도는 수신을 근본으로 삼았고, 정이천(程伊川) 역시 입지(立志)와 구현(求賢)과 책임(責任)026) 을 천하를 다스리는 요체로 삼았습니다. 근본을 바로잡고 근원을 맑게 한 뒤에야 어진이가 기꺼이 등용되려 할 것입니다. 어진이를 등용하지 못한다면 어진이들이 비록 큰일을 하려고 해도 어찌 진심을 다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뜻을 상께서는 유념하셔야 합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9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180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사상-유학(儒學) / 역사-고사(故事) / 인사-관리(管理)
- [註 020]서기양인(恕己量人) : 자기의 처지를 미루어 다른 사람의 입장을 헤아림.
- [註 021]
책난(責難) : 실천하기 어려운 일을 권유하여 행하게 하는 것.- [註 022]
팔원 팔개(八元八凱) : 고신씨(高辛氏)의 여덟 제자와 고양씨(高陽氏)의 여덟 제자.- [註 023]
육경(六經) : 《주역》·《서경》·《춘추》·《시경》·《예기》·《악기》.- [註 024]
○戊辰/上召對于丕顯閣。 講《大學》, 自堯、舜帥天下以仁, 止通結上文。 李滉啓曰: "爲人君, 止於仁。 仁字, 於人君最大。 仁義禮智, 性之四德, 而仁爲四德之元。 古人曰: ‘仁者, 心之德, 愛之理。’ 仁是性也, 發而爲惻隱, 是情也。 天地以生物爲心, 氣化運行, 無少間斷, 萬物各正性命, 所謂仁也。 開闢以來, 鴻荒朴略而已。 至伏羲始畫八卦, 神農嘗百草、劑醫藥, 黃帝時, 始有制度, 堯、舜之時, 人文大備。 堯之授舜曰: ‘允執其中。’ 舜之授禹曰: ‘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 其時帝王相傳之法, 則以中字爲言。 箕子爲武王陳《洪範》, 則曰: ‘皇建其有極。’ 其時則以極字爲言, 至孔子, 始以仁字爲言。 孔門弟子, 亦多以仁爲問。 至孟子, 竝言仁義禮智, 而無餘蘊矣。 仁於人君, 果爲重大。 一號令間、一念慮之際, 皆當以仁爲心也。 仁字恕字同義, 而亦有不同者。 恕字爲未盡工夫, 仁字有自然意思, 故推己及物之謂恕也, 以己及物之謂仁也。 孟子曰: ‘强恕而行, 求仁莫近焉。’ 仁恕之分, 蓋可見矣。 恕字不見於前, 而始見於此章。 及下章者, 以治己之心治人, 以愛己之心愛人, 所謂恕也。 故始見於修身章之下也。 但恕字, 世俗誤見, 以己所不能, 不以責人爲恕, 故終爲寬緩解弛之歸, 非所謂恕也。 昔漢 光武欲廢無罪皇后, 言於郅惲, 惲曰: ‘夫婦之則, 父不能得之於子, 況臣能得之於君乎?’ 光武謂善恕己量人。 朱子則以爲, ‘一字不明之害大矣。’ 蓋爲人臣者, 當以責難於君, 納君無過, 爲己任, 而不可以己所不能, 而不以難事, 責於君也。 爲人君者, 亦專務爲善, 明德而新民, 然後可謂推己及物之恕矣。" 又啓曰: "躬自厚而薄責於人, 則非恕也。 大抵帝王之恕, 則有天下國家, 禮樂刑政俱在, 必須無惡於己, 而推以及物, 然後可謂恕也。 且人君惡德, 貪戾爲重, 不得已端本淸源, 然後無作亂之患矣。 一人定國, 堯、舜是也。 以後世人主觀之, 號令向背之間, 少有爲善, 則垂亡之國, 轉而爲安固; 少有爲惡, 則安固之邦, 亦至於覆亡矣。 周 宣王卽位於周室旣衰之後, 而側身修德, 周道復興。 一人貪戾, 桀、紂是也。 天下之惡, 皆歸於桀、紂, 桀、紂之惡, 不如是之甚也, 而惡名皆聚。 子貢亦曰: ‘君子惡居下流。’ 後之不善之君亦多, 而必稱桀、紂者, 貪戾故也。 桀、紂以天子之尊, 享天下之樂, 而一朝爲匹夫, 則桀走死鳴條, 而夏 禹四百年之基業, 忽墜。 紂衣室玉自焚, 而商 湯六百年之統緖亦絶。 《詩》曰: ‘殷鑑不遠, 在夏后之世。’ (禹)〔堯〕 戒舜曰: ‘無若丹朱傲。’ 舜豈若丹朱? 禹〔堯〕 告戒之道, 固如是也。 孟子曰: ‘堯、舜, 人倫之至也。 不以舜之事堯事君, 是不敬其君者也。 不以堯之所以治民治民, 是賊其民也。 後世人主, 當以堯、舜爲法, 而以桀、紂爲戒也。" 上曰: "堯、舜有優劣乎?" 奇大升啓: "豈有優劣者乎? 伏羲、神農、黃帝、堯、舜, 同是生知之聖人也。 固無優劣。 但禹之德, 似湯、武, 文王之德, 似堯、舜。 若以湯 武比於堯、舜, 則似有少間矣。" 上曰: "堯、舜孰優?" 大升啓曰: "堯、舜之時, 以一歲言之, 則如四月之時, 堯之德則欽明、文思、安安。 舜則歷試諸難, 耕稼陶漁, 居深山之中, 與木石居, 與鹿豕遊。 及其聞一善言, 見一善行, 沛然若決江河。 程子曰: ‘堯與舜, 更無優劣。’ 斯言信矣。 文王亦是生知之聖人也。 《詩》曰: ‘不識不知, 舜帝之則。’ 又曰: ‘上天之載, 無聲無臭, 儀形文王, 萬邦作孚。’ 文王之後, 孔子生於周末, 爲百王表率。 其弟子之言曰: ‘以予觀於夫子, 賢於堯、舜遠矣。’ 蓋堯、舜之時, 黎民於變時雍, 其澤在於一時。 孔子則垂法萬世, 其功加於堯、舜。 所謂語聖則不異, 而事功則有異也。 堯、舜、禹、湯、文、武、周公、孔子爲道統, 而堯、舜之時, 則有若皋陶、稷、契。 湯之時, 則有若伊尹。 文王則有若太公望、散宜生。 孔子則有三千弟子, 而三千之中, 顔子、曾子得其宗。 其後有子思者, 得曾子之傳。 孟子受業子思之門人, 孟子沒後, 斯道之絶。 千有餘年, 至宋有濂溪先生 周惇頤, 學問高明, 有所著《太極圖》、《通書》。 又有兩程夫子出焉, 兄顥號明道先生, 有所著《語錄》; 弟頤號伊川先生, 有所著《易傳》, 講明後學, 有功斯文。 其弟子, 則龜山、楊時、豫章、羅從彦也。 延平 李侗學於羅從彦。 朱子, 李侗之弟子, 撰定經書之註, 集大成於諸儒矣。 三代以上, 則自上躬行以率之, 後世則雖或有爲, 而不過爲學者事也。 我國僻在海隅, 不知學問之事, 而自世宗朝以後, 始事學問, 儒者亦知崇尙學問矣。 今日自上好學, 人皆謂聖代明主出矣。 一時賢者, 豈無出而應之者乎? 《易》曰: ‘雲從龍, 風從虎。’ 聖人作而萬物覩, 聖作物覩, 必然之理也。" 上曰: "堯、舜、湯、武, 皆得賢臣, 共成至治。 三代以下, 則雖有濟世安民之賢者, 不樂仕宦, 以道自守, 而隱居者, 不得其時而然耶? 時事不善而然耶? 雖遇聖時, 而亦有如此者, 何以然也?" 大升啓曰: "明德新民, 體用之學也。 若眞儒, 則豈可獨善乎? 一偏山林之士, 則或有長往不返者矣。 三代以下, 則如八元、八凱、皋、夔、稷、契, 皆遇知乎聖人者也。 湯之時, 則伊尹耕于有莘之野, 湯使人以幣聘之。 伊尹曰: ‘吾豈若處畎畝之中, 由是而樂堯、舜之道哉?’ 湯三使往聘之, 旣而翻然起曰: ‘吾豈若使是君爲堯、舜之君哉、 使是民爲堯、舜之民哉?’ 湯使就桀, 桀不用。 又就湯, 如是者五, 相湯伐桀。 高宗亮陰三年, 不言。 其臣諫之曰: ‘君不言, 臣下罔有稟令。’ 高宗曰: ‘夢帝賚予良弼, 其代予言。’ 以物色, 求得傅說於板禁之間, 與之語, 果聖人也。 立而爲相, 有說命三篇, 夢寐之間, 精神感通故也。 孔、孟遑遑如也, 三月無君, 則弔。 以行道爲己任, 故不敢退去, 歷聘諸國矣。 漢 武帝承秦焚坑之後, 表章六經, 可與有爲之君也。 而大抵好大喜功, 內多慾, 而外示仁義, 故得董仲舒之賢, 而不能用, 以爲江都相。 宋 神宗, 以程明道爲監察御史。 上眷隆重, 而與王安石議論不合, 故退去。 神宗亦不知其賢, 故終不能用。 程伊川, 年二十五六時, 赴擧下第。 其後雖有薦擧者, 自以所學未至。 而不願仕也。 哲宗初年, 司馬光、呂公著薦之, 以爲崇政殿說書, 而伊川以爲儒者, 得爲勸講之官, 使臣自擇所處, 亦無以過此。 卽承召就職, 知無不言, 經筵之上, 反覆推類, 一時所聽者, 以爲支離。 伊川曰: ‘輔導人主, 不如是, 則於何盡心乎? 天下方尊信之。 其時有蘇軾者, 所謂蘇東坡也。 有文章才器, 而心不能正, 與程子不合, 使孔文仲上疏駁之, 憸汚鄕黨, 指爲五鬼云, 而仍以爲西京國子監。 朱子於宋 高宗朝及第, 適遇時難, 且有老親, 故退去。 至孝宗朝, 因求言而上疏, 承召入對。 適其時, 與金和親, 議論不合, 故退去。 爲浙東提擧, 按劾知台州。 唐仲友贓汚, 封章初上時, 王淮與仲友姻親也, 卽爲排斥之。 且爲兵部郞中時, 侍郞林栗來與講學, 議論不同, 則上疏曰: ‘熹不知文字, 竊程頤、張載緖餘。’ 云。 因此退去。 張載卽張橫渠也。 朱子於寧宗初年, 以侍講入侍, 因講畢, 奏疏極言。 寧宗曰: ‘始除熹經筵耳, 今欲事事與焉。’ 罷侍講, 爲南京提擧。 古之聖賢, 豈敢一日忘天下乎? 程伊川爲西京國子監時, 上表辭退, 其辭曰: ‘豈舍王哉? 忠戀之誠雖至, 不得已也。 去就之義當然。’ 又曰: ‘義迫當去, 無路自伸。’ 聖賢之心, 豈敢一日忘君乎? 賢者必侍人君, 致敬盡禮者, 非欲自爲尊大也, 尊德樂義不如是, 則不足與有爲也。 後世或有恬退, 而不能行於世者。 或有自上知之, 而同類嫉妬, 不能容者。 或有不得於君, 不與契合, 而退去者。 以誠求賢, 則雖後世, 亦豈無賢者乎? 儒者專力學問, 不事王侯, 高尙其志者, 亦豈無其人乎? 大抵, 賢者不能自重, 則雖用之, 何益於國家乎?" 上曰: "程、朱之出去, 其時人君不能待以至誠, 故小人讒間矣。 若以至誠, 則豈有讒間乎? 大升啓曰: "上敎至當。 小人之害君子, 千蹊百徑, 故人君雖欲至誠用賢, 而賢者不得接迹矣。 孝宗 南宋大有爲之君也, 而朱子欲端本淸源, 故三入, 而其所論, 皆攻治宦寺之事, 以當時潛邸寵倖之多, 故孝宗雖賢, 而不勝人情者有之。 朱子以爲嬖倖當朝, 則雖盡心國事, 終必有患, 因而退去。 古人曰: ‘知賢非難, 知而信任爲難。’ 若不信任, 則小人之讒間, 何所不至乎? 以祖宗朝言之, 中廟初年, 礪精圖治, 盡心國事, 雖其學問不及聖賢, 當時設施之事, 或未適中, 而小人之徒, 終以爲謀危社稷, 中廟未免信聽, 終被大罪。 信任大臣, 則小臣不得以間之。 賢者一人, 被讒而退, 則四方解體, 在林下者, 高蹈遠引, 立於朝者, 食祿而已。 若信任賢者, 則自然興起一國之化, 而可與三代竝美矣。" 又啓曰: "伏承傳敎, 不勝感激。 古之不能用賢及誠求, 則得賢之意, 自上知之, 一國臣民之福也。 頃日, 李滉、李恒、曹植上來事, 下書雖是先王之意, 而自上所以繼述之者尤重, 無以加矣。 但李滉則辛酉生, 李恒則己未生, 曹植亦辛酉生, 皆七十之年也。 如此日氣甚寒之時, 不能召來, 而旣有召命, 退在未安, 必有悶迫遑窘之患, 若以在家調病爲難, 而登途得病, 則亦有死於道路之患。 自上欲見之心雖切, 而待賢士, 所當從容寬暇, 不可驅迫也。 若日寒有疾, 則觀勢上來事, 更爲下諭何如?" 李俊民所啓 "賢者則信任無疑之言, 其意至當, 而亦不能無弊矣。 今之人, 豈能一一如古人乎? 觀其人, 而的知其君子, 然後信而用之可也。 一時以爲善, 而有所未盡, 則自然見於行處矣。 不得已知其然, 而用之可也。 微臣固難仰達, 然李滉、李恒則見而知之, 曹植則不見不知, 而嘗因朋輩, 亦聞其人矣。 觀李滉議論, 則地位甚高, 祖述程、朱, 故其所著述, 與程、朱相近, 我國近來, 則如此之人稀罕矣。 其性恬退, 自少不樂仕宦。 其居鄕最爲艱苦云。 李恒則當初業武妄行之人, 而悟而知學, 做得工夫。 其勇, 與古 人何異? 閉門讀書, 德器亦成, 見之儼然。 但武人, 而初不爲科擧之學, 晩年知學, 故於學問, 不能該通矣。 曹植氣質磊落, 可謂壁立千仞, 可以激頑立懦, 而學問, 則有不循規模之病矣。 成運亦遺佚之士也, 先王朝, 承召上來, 而辭病退去, 年已七十餘矣。 此人則無因聞之, 而大槪恬惔自守者也。 一時賢者, 不一其人, 而如李滉則表表者也。 昔有王通者, 所謂文中子也。 隋 文帝時, 上疏獻策。 朱子以爲, ‘不知其身之不足以爲伊ㆍ周, 言伊ㆍ周事業之難也。 自上召彼數人者, 欲致三代之治, 而彼數人, 豈以伊ㆍ周自許乎? 責任太重, 則恐以學問未至爲嫌, 而接待過厚, 則亦恐其不敢當也。 日暖上來後引見, 則其人必有所達矣。 信任之意則所當專一, 而其間接待, 則斟酌爲之可也。 一時極其接待, 而終不能繼之, 則讒說之所由生也。 宋 仁宗朝韓琦、富弼、范仲淹、(歐陽脩)〔歐陽修〕 、杜衍, 登用未幾, 被讒退散。 登用之初, 已有爲彼數人, 而預慮者矣。 當今如是爲之, 不世奇事, 而有識之士, 亦或有慮其後患者矣。 陰陽消長, 亦其理也。 以至誠堅定, 然後無後日之弊, 而措世唐虞矣。 且不得已聖學高明, 然後政事之得失是非, 群臣之賢否邪正, 可見矣。 《中庸》九經章曰: ‘修身則道立。’ 《中庸》之道, 以修身爲本, 而程伊川, 亦以立志求賢責任, 爲治天下之要矣。 端本淸源, 然後賢者樂爲之用。 不能用賢, 則賢者雖欲有爲, 而豈能盡心乎? 此意自上留念, 可也。"
-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9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180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사상-유학(儒學) / 역사-고사(故事) / 인사-관리(管理)
- [註 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