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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1권, 총서

총서

선종 소경 정륜 입극 성덕 홍렬 지성 대의 격천 희운 현문 의무 성예 달효 대왕(宣宗昭敬正倫立極盛德洪烈至誠大義格天熙運顯文毅武聖睿達孝大王)의 휘는 연(昖)이다.

중종 공희 대왕의 손자이며, 덕흥 대원군(德興大院君) 이초(李岹)의 셋째 아드님이다. 모친은 하동 부부인 정씨(河東府夫人鄭氏)로 증 영의정 정세호(鄭世虎)의 따님이다.

가정(嘉靖) 31년001) 임자년 11월 11일 기축일에 인달방(仁達坊)의 사제(私第)에서 왕이 태어났다.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고 기백과 도량이 영특하여 모두들 특이하게 여겼다. 처음에는 하성군(河城君)으로 책봉되었다.

정묘년002) 6월 28일 신해일에 명종 대왕의 병이 매우 위중하였다. 이날 밤중에 대신을 불러들였는데, 영의정 이준경이 도당(都堂)에서 관복을 갖추고 대기하고 있다가 부름을 받고 들어왔다. 어상(御床)으로 올라가 상의 손을 잡았으나 상께서는 이미 말을 하지 못하였다. 준경이 울면서 중전 【인순 왕후. 】대계(大計)003) 를 정할 것을 청하니, 중전이 하교하기를,

"을축년004) 에 결정한 대로 하려 한다."

고 하였다. 【이보다 앞서, 을축년에 명종 대왕이 병을 앓았는데, 당시 세자였던 이부(李暊)는 이미 죽었고, 아직 후계자가 정해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대신들이 조카들 중에서 미리 선정해 두기를 청하였다. 상이 마침내 하성군을 들어와 병 시중에 참여하도록 하였고, 유사(儒士) 중에서 특별히 가려서 사·부(師傅)로 삼아 교도(敎導)하도록 하였다. 상의 총애가 특별하였으므로 국내의 민심이 모두 하성군에게 집중되어 왔다. 그런 때문에 이 하교가 있었던 것이다. 】 준경이 아뢰기를,

"나라의 대계가 결정되었으니 더 아뢸 말씀이 없습니다. 양사의 장관들도 같이 들어와 듣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큰 소리로 상께 아뢰기를,

"신들은 물러가겠습니다."

하니, 상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였으나 하지 못하였다. 곁에 있던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울음을 터뜨렸다. 이윽고 상이 훙하였다. 대신이 왕비가 받은 유명(遺命)에 의해서, 시위할 관원들에게 세자 행차에 필요한 의장물을 갖추어 사제(私第)에 가서 하성군을 모시고 오도록 하였다. 하성군은 당시 모친상을 입고 있었는데, 울면서 굳이 사양하였다. 신하들이 옹립하여 재촉을 한 뒤에야 비로소 길을 나섰다. 침전 곁방으로 들어와 상주로서 거상을 하였다. 【나이는 16세였다. 】 이때 요행을 바라는 무리가 몰려들어 수레 뒤를 따랐다. 이들의 이름을 기록한 것이 한 두루마리나 되었는데, 어떤 자가 이들을 녹공(錄功)할 것이라고 하였지만, 이준경은 말하기를,

"예전에 결정된 일인데 신하가 무슨 공이 있단 말인가?"

하고, 재촉하여 태워버리게 하였다.

배신(陪臣)을 중국에 보내 부음을 전하고 아울러 왕위 계승에 대해 청하였다. 이듬해 봄에 황제가 태감(太監) 요신(姚臣)이경(李慶)을 보내 조선 국왕으로 책봉하는 조서를 전하고, 책봉문과 면복(冕服)을 하사하였다.

재위 41년, 향년 57세이다.

상이 훙서한 지 9년째 되는 병진년005) 에 지금의 상께서, 종계(宗系)를 올바르게 밝히고, 왕업을 중흥한 공로를 들어 "계통 광헌 응도 융조(啓統光憲凝道隆祚)"라는 존호를 추가해 올렸다.

묘호(廟號)를 "선조(宣祖)"라 하였다. 【왕께서는 왕위를 이어받은 초기에 정신을 가다듬고 정사를 잘 다스리려 애썼으며, 어진이를 존중하고 도를 소중히 여겼기 때문에 우리 나라의 백성들은 치세에 살게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 임진년의 난리를 만나 26년 동안의 훌륭한 치적에 대한 기록들이 모두 타버려 남은 것이 없게 되었다. 이제 여러 신하들의 가장 일기(家藏日記)에 의하여 약간의 사적을 수습해서 겨우 편찬하였다. 그러나 10에 8∼9는 없어졌으니 어찌 가슴 아프고 애석한 일이 아니겠는가? 왕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대강 내용은 모두 지문(誌文)과 행장(行狀) 등에 저술하여 권말에 첨부하였다. 】


  •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1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172면
  • 【분류】
    왕실-종사(宗社) / 왕실-국왕(國王) / 왕실-종친(宗親)

  • [註 001]
    가정(嘉靖) 31년 : 1552 명종 7년. 가정은 명 세종의 연호.
  • [註 002]
    정묘년 : 1567 명종 22년.
  • [註 003]
    대계(大計) : 후계.
  • [註 004]
    을축년 : 1565 명종 20년.
  • [註 005]
    병진년 : 1616 광해군 8년.

宣宗昭敬正倫立極盛德洪烈至誠大義格天熙運顯文毅武聖睿達孝大王, 中宗恭僖大王之孫 德興大院君 之第三子也。 母河東府夫人 鄭氏 贈領議政世虎之女。 嘉靖三十一年壬子十一月十一日己丑, 誕王于仁達坊之私第。 天資岐嶷 氣度英毅 人皆異之。 初封河城君。 丁卯六月二十八日辛亥, 明宗大王疾大漸, 是日夜半, 宣召大臣, 領議政李浚慶在都堂, 冠帶以竢, 承召以入, 升御床, 執上手, 上已不能言。 浚慶泣請中殿 【仁順王后】 定大計, 中殿敎曰: "欲依乙丑年所定。" 【先是, 乙丑, 明宗大王有疾, 世子暊旣卒, 儲嗣未定, 大臣建議請預選於諸臣中, 上遂令河城君入侍醫藥, 因命別擇儒士爲師傅, 敎導之。 眷受特厚, 國內人心咸屬焉, 故有是敎。】 浚慶曰: "國事大定, 更無可啓之言, 兩司長官, 竝命人參聽何如。" 高聲啓于上曰: "臣等退去矣。"

上欲言而不得, 左右不覺失聲。 已而上薨, 大臣以王妃所奉遺命, 令侍衛諸官, 具世子儀物, 迎河成君于私第, 河城君方服母喪, 涕泣固讓, 群臣擁戴, 迫而後乃行, 遂入翼室宅卹 【年始十六】 時, 僥倖之輩, 坌集從駕, 書名成軸, 或以錄功爲言,。李浚慶曰: "事出預定, 臣下何功。" 促令焚之。 遣陪臣, 告訃于天朝, 且承襲。 翌年春, 皇帝遣太監姚臣李慶, 賫詔, 封爲朝鮮國王, 欽賜誥命冕服。 在位四十一年, 壽五十七。

王薨之九年丙辰, 今上以辨明宗系中興大業, 追上尊號曰啓統光憲凝道隆祚, 廟號曰宣祖 【王嗣服之初, 勵精圖治尊賢重道, 東方之民爲見至治, 而不華遭壬辰之亂, 二十六年之間宏謨美政簡冊所紀, 盡歸灰燼, 無復存老。 今因諸臣家藏日記, 雖收拾若干事績, 僅成編秩, 而什無八九, 誠可痛惜。 若其王之始終梗槪, 具載誌文、行狀等著述, 竝附于卷末。】


  •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1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172면
  • 【분류】
    왕실-종사(宗社) / 왕실-국왕(國王) / 왕실-종친(宗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