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에 사자가 상차에 입거하다
진시에 사자가 상차(喪次)에 입거(入居)하였다. 【경성전(慶成殿)이다.】 이날 축시에 도승지 이양원(李陽元), 동부승지 박소립(朴素立), 주서 황대수(黃大受), 대교 이정호(李廷虎)가 중전의 명을 받들고 사직동 덕흥군의 집으로 달려갔는데, 밤이 아직 밝지 않아서 문이 닫혔으므로 들어가지 않고 승지 등이 문밖에 공립(拱立)하고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병조 참지 박대립(朴大立), 부총관 남궁침(南宮忱), 의금부 도사 정사회(鄭思晦)가 뒤따라왔으나 나장과 군사들은 그때까지 오지 않았다. 창졸간의 일이어서 잡인들이 함부로 들어오니, 승지가 병조와 금부로 하여금 잡인들을 금하도록 했으나 중지하지 못했다. 얼마 후 포도 대장(捕盜大將) 이원우(李元祐) 【무인(武人)으로, 이기(李芑)의 아들이다.】 가 군사를 이끌고 이르니, 승지 등이 이원우를 불러 원령 군사(原領軍士)를 거느리고 저궁(邸宮)을 둘러싸고 서 있게 하여 잡인을 금하였다. 날이 비로소 밝아지자 곡산 군수(谷山郡守) 정창서(鄭昌瑞) 【정세호(鄭世虎)의 아들인데 사왕(嗣王)의 외삼촌이다.】 가 저궁의 문을 열어 승지가 마침내 중문 안으로 들어가 좌정하니 남궁침, 박대립도 함께 들어가 뜰에 좌정하고 잇달아 승전색(承傳色) 정신붕(鄭信朋) 【이 사람은 내전(內殿)의 명으로 보낸 사람이다.】 및 여러 환자(宦子) 10여 인과 사알(司謁)·사약(司鑰)·별감(別監)·중금(中禁)·청로대(淸路隊)·소련(小輦)·소여(小輿) 및 의장(儀仗)이 함께 이르렀다. 모든 일을 정제한 후에 승지 등이 정창서를 불러 명을 받들어 봉영한다는 뜻을 아뢰라고 말하니, 얼마 후 창서가 나와서 말하기를,
"사군이 지금 빈소 곁에 있는데 【덕흥군 부인 정씨(鄭氏)가 6월에 졸하였는데 이때까지 발인(發靷)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빈소 옆에 있다고 말한 것이다.】 망건을 쓰지 않고 있어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상인(喪人)이 망건을 쓰지 않는 것은 그 색이 검고 모발을 정제하는 것을 혐의해서이다. 사군이 갖추지 않은 것이 비단 그것뿐이었겠는가? 이는 굳이 사양하는 일단인 것이다.】
하였다. 승지 등이 이르기를,
"이미 내명(內命)이 계셨으니 이처럼 굳게 거절하시면 안 됩니다. 이런 말로 진달하십시오."
하니, 창서가 다시 들어갔다. 진시에 사군이 백단령(白團領)에 오사모(烏紗帽)를 쓰고 흑각대(黑角帶)를 두르고 흰 신을 신고 걸어서 익랑(翼廊) 처마 밑으로 나왔다. 승지와 사관 등이 함께 내정으로 들어가 사군에게 절하고 뵌 다음 모시고 중정(中庭)으로 나왔다. 사군은 소련을 타고 군자창(軍資倉) 앞길에 있는 삼간 병문(屛門)으로 해서 광화문 동협(東夾)으로 들어가 근정문 문 밖에 이르러 연에서 내렸다. 걸어서 근정전 동쪽 뜰을 거쳐 경성전(慶成殿)으로 들어가 거처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도승지 이양원은 이미 호가(扈駕)하라는 명을 받고도 한 가지도 처리한 일이 없이 다만 정창서를 불러 봉영한다는 뜻만 알렸다. 대체로 대위(大位)는 간인들이 엿보게 마련이다. 덕흥군에게는 세 아들이 있는데 누가 맏이고 누가 가운데이고 누가 세째인 줄도 모르고 갑자기 맞아오려 하였으니, 혹시 맏이와 둘째가 서로 다투는 변고가 있었다면 마침내 어떻게 처리했을지 모르겠다. 생각건대 그의 가슴속에 전혀 정한 바가 없어 속수무책으로 아무일도 못했을 것이다. 또 저궁에서 봉서(封書) 하나를 내주었는데 바로 정창서가 공(功)을 바라는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한 것이었다. 주서가 그걸 받아서 정원에 와서 여러 날 동안 머물러 두었으니 승지들의 살피지 못함이 너무 심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1책 34권 50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162면
- 【분류】왕실-국왕(國王) / 역사-사학(史學)
○辰時, 嗣子入居于喪次。 【慶成殿也】 是日丑時, 都承旨李陽元、同副承旨朴素立、注書黃大受、待敎李廷虎奉中殿之命, 馳詣社稷洞 德興君第, 夜猶未明, 閉門不納。 承旨等拱立于門外, 以待天明, 兵曹參知朴大立、副摠管南宮忱、義禁府都事鄭思晦繼至, 而羅將軍士尙未及到。 事出倉卒, 雜人攔入, 承旨令兵曹、禁府禁其雜入而不能止。 俄而捕盜大將李元祐 【武人, 芑之子。】 領兵而至。 承旨等招元祐, 率原領軍士圍立邸宮, 防禁雜人。 天始明, 谷山郡守鄭昌瑞 【世虎之子, 於嗣王爲舅也。】 開邸宮門。 承旨遂入, 坐于中門之內; 南宮忱、朴大立竝入, 坐庭中。 繼而承傳色鄭信朋 【此乃內殿命送之人也。】 及諸宦者十餘人、司謁、司鑰、別監、中禁、淸路隊、小輦、小輿及儀仗竝至。 諸事整齊後, 承旨等招鄭昌瑞謂之曰: "以承命奉迎之意達之。" 俄而昌瑞出曰: "嗣君方在殯側, 【德興君夫人鄭氏六月卒, 時未發引, 故云殯側。】 不御網巾, 不知何以爲也。" 【哀人不着網巾者, 以其色皂而嫌其整髮也。 嗣君之不御, 豈特爲此而已乎? 此乃固讓之一端也。】 承旨等謂曰: "旣有內命, 不可如此固拒也。 將此意用達可也。" 昌瑞還入。 辰時, 嗣君以白團領、烏紗帽、黑角帶、白靴子, 步出于翼廊簷下。 承旨、史官等竝入內庭, 拜見嗣君, 侍出中庭。 嗣君乘小輦, 路由軍資倉前途三間屛門, 入自光化門東夾, 至勤政門外降輦, 步入由勤政殿東庭, 入處于慶成殿。
【史臣曰: "都承旨李陽元旣承扈駕之命, 無一處置之事, 但招鄭昌瑞, 告以奉迎之意。 蓋大位, 奸之窺也。 德興君有三子焉, 不知某爲伯某爲仲某爲季, 而遽欲奉迎而來。 伯仲之間, 脫有相爭之變, 則未知終何以處乎? 想其胸中兀兀無定, 束手而無所爲矣。 且自邸中出一封書, 乃昌瑞錄希功人姓名者也。 注書受之, 到政院, 累日留置, 承旨等不察, 亦甚矣。"】
- 【태백산사고본】 21책 34권 50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16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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