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도 납의 경차관 정철의 서계
함경도 납의 경차관 정철(鄭澈)의 서계를 정원에 내리면서 일렀다.
"해조(該曹)로 하여금 철저히 궁구하여 자세히 살핀 뒤에 회계하게 하라."
【정철의 서계는 다음과 같다."소신이 성상의 명을 받들고 함경남북도의 각 고을과 각 진보(鎭堡)를 다니면서 토병(土兵)의 재주를 시험하고 군사를 점고해 보니, 그간 폐단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았습니다. 북방의 여러 고을은 강(江)을 따라 진(鎭)을 설치하였는데 사나운 적들과 이웃하고 있어서 관방(關防)이 매우 긴요하고 사기(事機)가 매우 중대합니다. 그런데 오늘의 육진(六鎭)의 형편은 불에 타는 기름과 같아서 장차 다 타 없어져도 깨닫지 못하게 되었으니 매우 한심스러웠습니다. 토병의 원액(元額)은 해가 갈수록 줄어들어 경신년에 6천 명이던 것이 지금은 5천 명뿐이니, 점점 줄어들 것은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현존하는 자들을 말하면 비록 큰 고을이나 큰 진이라 하더라도 활을 쏘아 적을 막을 수 있는 자는 몇 없고, 이른바 활을 다룰 줄 아는 건장한 자들이라는 것도 대부분 지쳐서 잔약하기 때문에 부릴 수가 없었습니다. 배고프고 춥고 피곤하고 괴로운 빛이 얼굴에 드러나 있었고 심한 경우는 걸치고 있는 홑옷이 해지고 찢어져 맨살이 드러났는데, 어떻게 살아가느냐고 물으니 겨를 저장했다가 양식으로 쓰고 풀을 고아 장(醬)을 만든다고 했습니다. 불행히도 노약자들은 입을 것도 먹을 것도 없어서 이 구렁 저 구렁에 죽어 나뒹굴고 있었으므로 그 참혹하고 가련한 정상은 차마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신은 이러한 정상을 민망히 여겨 유념하고 찾아가 물어보니, 지난날 열진(列鎭)의 장수들 가운데 적격자 아닌 사람이 많아서 끝없는 욕심에 염치도 없어 오직 사리(私利)에만 급급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서피(貂鼠皮)나 말[馬]을 뇌물로 바치고 출세를 하려고 도모했기 때문에 백성의 고혈을 짜냄에 있어 못하는 짓이 없어서, 혹 관고(官庫)의 곡식을 빼내고 혹 민염(民鹽)을 거두어가면서 가전(價餞)이라는 명목으로 식구 수에 따라 배로 징수했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또 말이나 초서피를 가진 호인(胡人)들이 대체로 소로 바꾸러 가려 했으므로 어렵게 여기지도 않고 백성들의 소를 빼앗았기 때문에 많은 전지(田地)가 묵게 되고 소도 줄어 백성들이 심히 고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남도는 피인(彼人)들이 다니는 길이 지척에 서로 바라보이므로 관방의 중요성이 북도와 다를 것이 없었는데, 삼수(三水)·갑산(甲山)은 도내(道內)의 큰 진이지만 이미 심하게 피폐되어 갑산은 1백 90여 호(戶)였고 삼수는 3백여 호로, 토병의 액수가 북도보다 더 줄어들어 현존하는 수도 오을족(吾乙足)과 쌍청(雙靑) 이외의 진보에는 많으면 20∼30호였고 적으면 2∼3호 내지 6∼7호였는데, 역시 모두 병들어 파리하고 쇠잔하여 적을 막을 수도 없었습니다. 백성들이 사는 마을은 영락할 대로 영락하여 사람이 살지 않았고 그 때문에 보기에도 비참했습니다. 관찰사 홍담(洪曇)이 두 고을의 피폐한 상황을 신에게 말하며 ‘갑산에 가니 호소하는 부민(府民)이 길에 가득했는데 모두들 청밀(淸蜜)과 초서피의 공납을 가장 감당하기 어렵게 여겼다. 오산(吾山)은 높아서 다른 곳보다 더 추워 벌을 기를 수도 없고, 그곳에서 나는 모피는 품질이 좋지 못해 쓰지 못하므로 공납할 임시가 되면 백성들에게 베[布]를 거두어 꿀은 강원도에서 사오고 초서피는 북도에서 사오는데, 혹 봉진(封進)하는 일이 급하면 반드시 값을 곱절로 줘야 살 수 있다. 이것이 백성들이 떠돌게 되어 열 집 중 아홉 집을 비게 한 원인이다.’ 하였으니, 진실로 걱정됩니다. 백성들이 병들어 시든 것은 남도나 북도가 다 그러했는데 또 분방 군사(分防軍士)도 한갓 빈 숫자만 있을 뿐 어떤 자는 도망쳤다 하고 어떤 자는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절호(絶戶)된 자들이 헛되이 공부(公簿)에만 기재되어 있었으므로 방어하러 오는 자들 역시 젊고 건장한 사람은 적고 쇠잔하고 나약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혹은 어린애로 보충하기도 하므로 장수들이 병사(兵使)에게 논보(論報)하여 다스리기를 재촉하였으나 본 고을에서는 차라리 파면될지언정 끝내 충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는 직분을 충실히 봉행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백성이 모자라서 그런 것입니다. 남도는 더욱 심하여 관방(關防)하는 군사가 모두 농군(農軍)이 아니면 영속(營屬)이라고 하였으므로 신이 그 허실(虛實)을 알아보기 위해 병사에게 이첩(移牒)하여 물어보니, 과연 모두 증거할 만한 말을 하였습니다. 삼가 듣건대 영속으로 들어가면 주장(主將)의 힘을 빌어 요역(徭役)에 나가지 않게 되므로 종군(從軍)을 고생스럽게 여기는 장정들이 여기로 모여들어 정수(定數) 이외로 남점(濫占)한 것이 그 수를 셀 수도 없을 정도이므로 큰 폐단이 되고 있다 합니다. 정수 이외의 사람들을 사태(沙汰)하여 군액에 보충하면 변방을 튼튼히 하는 계책에 합당할 것 같습니다."】
- 【태백산사고본】 20책 33권 59장 B면【국편영인본】 21책 124면
- 【분류】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군사-군정(軍政) / 군사-휼병(恤兵) / 군사-군역(軍役) / 재정-공물(貢物) / 호구-호구(戶口)
○以咸鏡道衲衣敬差官鄭澈書啓, 下于政院曰: "令該曹希究詳察回啓。" 【鄭澈書啓: "小臣祗奉聖命, 出入南北道各官各鎭保, 土兵試才、軍士點考, 則其間弊端, 不可勝言。 北方列邑, 沿江設鎭, 豺虎爲隣, 關防甚緊, 事機甚重, 而今日六鎭之勢, 如火消膏, 不覺將盡, 良可寒心。 土兵元額, 隨歲隨減, 庚申六千, 今只五千, 漸至銷縮, 推此可知。 以今現存者言之, 雖大官巨鎭, 能射禦敵者無幾。 其所謂操弓壯健者, 亦多疲癃殘弱, 不可驅使。 飢寒困苦, 著於面目, 甚者單衣破裂, 肌膚赤露。 問其生利, 貯糠爲糧, 煮草爲醬。 不幸老弱, 無衣無食, 分死溝壑, 慘惻之狀, 所難忍見。 臣憫其如此, 留心訪問, 則往時列鎭諸將, 多不得人, 不厭無恥, 唯利是急, 貨貂與馬, 以圖發身, 故剝民膏血, 無所不爲。 或發倉粟, 或收民鹽, 名爲價餞, 而逐口倍徵。 又胡人之持馬與貂者, 率皆索牛, 故奪民牛隻, 略不爲難。 田多荒茀, 牛利縮民, 甚憫焉。 南道則彼人往來之路, 咫尺相望, 關防之重, 與北無異。 而三水、甲山以道內巨鎭, 殘弊已甚。 甲山則一百九十餘戶, 三水則三百餘戶, 土兵耗縮, 甚於北道。 時存之數, 吾乙足、雙靑外, 其餘鎭保, 多則二三十, 少則二三六七, 而亦皆疲癃殘劣, 不可禦敵。 民居零落, 烟火蕭條, 所見慘如。 觀察使洪曇語臣以二官疲弊。 及到甲山, 府民之號訴者滿路, 皆以爲淸蜜貂鼠皮之貢, 最難支吾, 山高倍寒, 不能養蜂。 府地所産皮毛, 惡不用, 故臨時則收布於民間, 貿於江原, 貨皮於北道。 或封進事急, 價必以倍。 用此流離, 十室九空云。 誠可慮也。 凋瘵南北皆然, 而又分防軍士, 徒核虛數, 或稱逃亡, 或稱物故, 通謂之絶戶, 而空累掛公。 到防人亦壯勇者少, 殘劣者多, 或以童子充補, 列將論報兵使催理木官事被罷免, 而竟不得充定。 非盡奉職, 不稱民不足而然也。 南道則甚焉。 軍士之關防者, 皆稱農軍營屬。 臣欲知虛實, 移問兵使, 則果皆有言可據, 而竊聞之, 營屬爲任, 憑依主將, 徭役不及, 故丁壯之以從軍爲苦者, 窟穴於此, 數外濫占, 不勝其衆, 積成深弊云。 汰出數外之人, 以補軍額, 似合實邊之策。】
- 【태백산사고본】 20책 33권 59장 B면【국편영인본】 21책 124면
- 【분류】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군사-군정(軍政) / 군사-휼병(恤兵) / 군사-군역(軍役) / 재정-공물(貢物) / 호구-호구(戶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