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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실록 33권, 명종 21년 10월 7일 갑자 1번째기사 1566년 명 가정(嘉靖) 45년

사정전에 나아가 조식·김범 등을 불러들여 만나보다

상이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 상서원 판관(尙瑞院判官) 조식(曺植)과 옥과 현감(玉果縣監) 김범(金範)을 불러들여 만나보았다. 상이 내시에게 두 사람을 불러 앞으로 나오게 하고 이어 전교하기를,

"불민한 내가 외람되이 신민(臣民)의 주인이 되어 비록 어진이를 좋아하는 정성은 모자라나 어찌 어진이를 구하고 싶은 뜻이야 없겠는가. 이제 말세를 당하여 경서(經書)에 밝고 행실이 닦여진 반열에 참여되었으니 어찌 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이 때문에 아름답게 여긴다. 고금의 치란(治亂)과 세도(世道)의 청탁,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과 학문을 하는 방법, 가언(嘉言)과 선정(善政)에 대해 듣고 싶다. 숨김없이 모두 말하라." 【전교를 마치고 어찰(御札)을 내려 두 사람에게 위와 같은 내용으로 하시(下示)했다.】

하니, 조식이 아뢰기를,

"고금의 치란에 대해서는 방책(方策)198) 에 모두 갖춰져 있으니, 신이 비록 아뢰지 않더라도 어찌 모르시겠습니까. 신이 아뢰려고 하는 것은 별도의 다른 뜻이 있습니다." 【오래도록 아뢰지 않은 것은 임금의 답을 기다린 것이라는 말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마땅히 생각하고 있는 것을 말해야 한다."

하니 조식이 아뢰기를,

"군신(君臣) 간에는 상하의 정(情)이 틈이 없어야 참된 마음으로 서로가 미덥게 되는 것입니다. 위에서 마음을 열고 말을 받아들임에 있어 먹은 마음을 없이하여 중문을 활짝 열어젖히듯 하신다면, 군하(群下)들도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신하로서의 도리를 다할 수 있을 것이며, 위에서도 현부를 똑똑히 꿰뚫어 보아 거울처럼 밝게 인재(人材)를 판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사람은 조심성 있고 중후하니 뒤에는 반드시 어떤 사람이 될 것이라고 하고, 이 사람은 재주 있고 민첩하니 뒤에는 반드시 어떤 사람이 될 것이라고 하고, 이 사람은 굳세고 곧으니 마땅히 귀에 거슬리는 말을 진언할 것이라고 하고, 이 사람은 줏대가 물렁하니 반드시 아첨하는 무리가 될 것이라고 하게 되실 것입니다. 군하도 역시 성념(聖念)의 발하는 것을 알아서, 이것은 선한 생각이니 마땅히 십분 개발하고 인도하여 확충시켜야 할 것이라고 하고, 이것은 불선한 생각이니 마땅히 막고 끊어 뻗어나가지 못하게 해야 할 것이라고 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상하가 사리를 강명(講明)하여 정의(情意)가 서로 통하는 이것이 바로 출치(出治)의 근본인 것입니다.

신은 먼 곳에 있어서 시사(時事)를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수십년 안의 일을 직접 보건대, 군민(軍民)이 물 흐르듯 유리하여 여리(閭里)가 텅 비었습니다. 지금을 위한 계책은 마땅히 불난 집처럼 해야 할 것인바 여러 사람이 함께 서둘러 구제해도 오히려 미치지 못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위에서 늘 진념(軫念)하고 계신다 하더라도 폐단은 오히려 전과 같으니, 신은 감히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군하가 위의 뜻을 잘 봉행하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까, 아니면 위에서 혹 옳은 말을 받아들이지 않으셔서 그런 것입니까? 신하가 서로 합심하여 국사(國事)에 힘쓰는 도리가 어떠한 것이기에 이렇게 한단 말입니까? 임금의 학문은 출치(出治)의 근본이므로 스스로 터득하는 데에 귀함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갓 청강(聽講)만 하실 뿐이라면 이익될 것이 없습니다. 평소에 서사(書史)를 보시면서 반드시 스스로 터득하시도록 해야 됩니다."

하고, 김범은 아뢰기를,

"소신(小臣)은 사장(詞章)만 일삼았을 뿐 본래 학식이 없는데 이제 하문(下問)을 받들게 되니, 부응할 수 있을지 걱정스럽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학문을 강구하여 이치를 밝히고 덕성(德性)을 함양해서 마음을 한결같이 화평하게 한 다음에야 조정이 공경하고 겸양하여 정화(政化)가 널리 미치어 만민(萬民)이 편안하게 될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고금의 치란은 널리 방책(方策)에 기재되어 있으니, 다스려졌을 때와 같은 도(道)를 행하면 흥하지 않을 리 없고 어지러워졌을 때와 같은 일을 행하면 망하지 않을 리 없는 것입니다. 요컨대 선을 본받고 악을 경계하는 데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두 사람의 말이 모두 마땅하다. 상하의 정이 서로 통한 다음에야 정의(情意)가 서로 미덥게 된다는 말은 더욱 좋다. 옛날 도유 우불(都兪吁咈)199) 하던 것은 어느 때에 있었고, 임금은 어둡고 신하는 아첨하던 것은 또한 어느 때 있었는가? 비록 방책에 있다 하더라도 들은 바에 따라 말하라."

하니, 조식이 아뢰기를,

"도유 우불하던 것은 삼대(三代) 때이고, 임금은 어둡고 신하는 아첨하던 것은 역대(歷代)가 다 그러했습니다. 대저 임금이 현명하면 신하는 곧고 임금이 혼암하면 신하는 아첨을 했는데, 이것은 자연의 이치입니다. 옛날의 임금은 신료(臣僚)들을 벗처럼 친근하게 접대하며 그들과 더불어 치도(治道)를 강명하였었는데, 지금은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정의를 서로 통하여 상하가 서로 미덥게 된 연후에야 일이 제대로 될 것입니다. 위에 진실로 이러한 마음이 있다면 또한 마땅히 확충해야 합니다. 이러한 일은 내실에서 환관(宦官)이나 궁첩(宮妾)들과 더불어 하셔서는 아니되고 반드시 시종(侍從)이나 정사(正士)와 더불어 하셔야 합니다."

하고, 김범은 아뢰기를,

"치도는 반드시 오래 계속되고 전일하여야 완성될 수 있습니다. 끊임이 없으면 오래 계속되고 잡되지 않으면 전일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덕(德)을 굳게 지킨 연후에야 끊어지거나 잡됨이 없고, 마음을 잡고 놓는 기미와 선과 악이 소장(消長)하는 이치를 깊이 통찰하여 맹성(猛省)한 연후에야 오래도록 정치에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옛날에 초려(草廬)에 있으면서 세 번이나 찾아가게 한 신하가 있었는데, 그때는 어떠했길래 한 번 불렀을 때 오지 않고 세 번이나 찾아간 다음에야 왔는가?"

하니, 조식이 아뢰기를,

"이것은 소열(昭烈)200) 의 일입니다. 당시는 시끄럽고 혼란했었으므로 반드시 영웅을 얻어 더불어 함께 일하여야만 꾀하는 바를 성취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세 번이나 찾아가기에 이른 것입니다. 제갈량(諸葛亮)은 영웅입니다. 일을 헤아리는 것 역시 어찌 범연하였겠습니까만, 한 번 불렀을 때 나아가지 않은 것은 반드시 당시의 형편이 그럴 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비와 함께 거의 30여 년에 가까운 장구한 세월 동안 부흥을 도모하였지만 천하를 회복할 수 없었으니, 그가 나온 것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하고, 김범은 아뢰기를,

"당시는 매우 시끄럽고 혼란하였으므로 반드시 현재(賢才)를 얻어야 함께 큰 일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소열이 세 번이나 찾아가기에 이른 것입니다. 공명(孔明) 역시 감당해 낼 수 없을까 두려워했기 때문에 세 번 찾은 다음에야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세히는 알 수가 없습니다."

하고, 조식은 아뢰기를,

"소신은 헛된 이름만을 훔쳐 임금을 기망할 수 없었기 때문에 빨리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하고, 김범은 아뢰기를,

"옛사람은 징소(徵召)하여도 나가지 않은 이가 있었는데 그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신이 요량하건대 역시 민망(悶望)한 【속어(俗語)인데, 대개 감당할 수 없을까 걱정한다는 뜻이다.】 일이 있기 때문에 그러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였다.

【○상이 학문하는 방법과 지치(至治)에 이르는 요점을 묻자 모두 묻는 데 따라 대답했다. 상이 조식에게 ‘제갈량이 꼭 세 번 찾기를 기다려 일어난 것은 어찌해서인가?’ 하고 묻자, 조식은 대답하지 않았다. 인견한 후에 상이 해조(該曹)에게 헤아려서 승서(陞敍)하라고 명함에 따라 조식을 판관(判官)으로, 이항(李恒)을 군수로, 한수(韓脩)를 현감으로 삼았고, 그 외의 사람에게는 모두 6품의 관직을 주었다. 그런데 식은 사양하지 않고 돌아갔고, 항(恒)과 임훈(林薰)은 모두 병을 칭탁하고 벼슬을 버리고 갔다. 사람들은 모두들 상관(上官)에게 업신여김을 받았기 때문에 버리고 갔다고 여겼다. 식의 호(號)는 남명(南冥)인데, 기상이 초매하고 소견이 매우 고상했으며 세상일에 대해 분개하는 뜻이 항상 말에 드러났다. 서울로 오자 사대부 및 위포(韋布)들이 다투어 그의 집으로 몰려들었는데, 사람들이 무엇을 물어도 모두 대답하지 않았으므로 혹 해학으로 희롱하기도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학식의 깊이를 알 수가 없었다. 항의 호는 일재(一齋)인데 젊을 때 무술을 익히다가 분발하여 학문에 힘썼고, 여러 해 동안 《대학(大學)》 공부에 힘을 기울여 스스로 터득한 것이 대단히 많았으므로 학생들이 많이 따랐다. 그의 학문은 확실함을 주로 했고 가르치는 것에도 역시 차서가 있었다. 서울에 있을 때 찾아와 보는 사람들이 만일 무엇을 물으면 반드시 숨기지 않고 다 말한 뒤에야 그만두었는데 남명은 이러한 것을 보고 때로 웃으며 업신여기기도 하였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갈 때는 논자(論者)들 가운데 헐뜯고 기리는 사람이 반반이었다. 성운(成運)은 노성(老成)하다고 일컬어졌으며 고장 사람들에게 매우 존경을 받았는데, 늙고 병들었음을 이유로 관직을 사양하고 돌아갔다. ○항은 몸을 닦고 언행을 삼간다는 것으로 소문이 있었고, 식은 고결하다는 것으로 일컬어졌으며, 수(脩) 등도 역시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성상께서 겸허한 마음으로 인접(引接)할 적에 한두 가지 본받을 만한 말을 하였을 뿐, 의(義)와 이(利)를 따져 밝게 분변하여 출치(出治)의 근본을 열지 못하였으니 애석하다. 품고 있었던 것은 많았으나 갑자기 한번의 인접에서 모두 말할 수가 없어 그러했던 것인가? ○식은 품성이 뛰어나고 기질이 출중했으며 마음이 고명(高明)하여 젊어서부터 구속을 받지 않았고, 산림(山林)에서 초연하게 지내면서 천번 반가이 맞이하려 해도 돌아보지 않는 절조가 있었다. 문정 왕후(文定王后)가 섭정(攝政)할 때 유일(遺逸)로서 특별히 단성 현감(丹城縣監)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상소(上疏)를 하여 시정(時政)의 잘잘못을 논하였는데 말이 매우 박절했으므로 임금이 진노하여 다시 부르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여러 번 예명(禮命)을 받았으므로 마지못하여 올라왔다. 사대(賜對)한 뒤에 즉시 호연한 마음으로 고향으로 돌아갔다. 전부터 조식은 여러 번 징소(徵召)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김범 역시 상소를 올려 사양했기 때문에 상이 특별히 세 번 찾아간 일에 대해 하문하여 그들의 숨은 뜻을 살피려 했던 것인데, 식 등이 또한 각각 자기들의 거취(去就)를 이렇게 아뢰었다. 대체로 당일 입대(入對)했을 때에 식의 말은 대단히 예리했고, 범은 지나치게 겸손하여 말이 시원하지 못했다.】

사신은 논한다. 간신이 제거된 뒤에는 해가 다시 중천에 뜬 것 같아 음산한 기운이 모두 사그라들고 밝고 따뜻한 햇살이 자라나서 초야의 선비들을 불러 모아 편전(便殿)에서 인견하며 마음을 열고 성의를 다해 접대하니, 어진이를 좋아하고 선한 일을 즐거워하는 본심이 여기에서 드러났다. 가령 이기(李芑)·윤원형(尹元衡)·이양(李樑)의 무리가 전후(前後)에 나와서 임금의 총명을 가리지 않았다면 치도(治道)가 어찌 수렁에 빠졌을 것이며, 또한 어찌 잘못을 뉘우치고 길을 바꾸어야 하는 수고로움이 있었겠는가.


  • 【태백산사고본】 20책 33권 54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122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정론-정론(政論) / 인사(人事) / 역사-사학(史學) / 역사-고사(故事) / 인물(人物)

  • [註 198]
    방책(方策) : 곧 책(冊)을 말함.
  • [註 199]
    도유 우불(都兪吁咈) : 군신이 토론하는 것으로, 선정의 뜻.
  • [註 200]
    소열(昭烈) : 유비(劉備).

○甲子/上御(恩政殿)〔思政殿〕 , 召見尙瑞院判官曹植玉果縣監金範。 上使內侍, 召二人進前。 仍傳曰: "予以不敏, 叨主臣民, 雖乏好賢之誠, 豈無求賢之意? 當今末世, 參在經明行修之列, 豈不可貴? 予用嘉焉。 古今治亂、世道淸濁、治國之道、爲學之方、嘉言善政, 予願聞焉。 悉陳無隱。" 【傳敎畢, 以御札下示二人如前。】 曹植曰: "古今治亂, 俱在方策, 臣雖不言, 豈不知之? 臣所欲啓者, 別有他意。" 【言久不啓, 蓋待上之答也。】 上曰: "宜陳所懷。" 曰: "君臣之際, 上下之情無間, 然後誠意相孚矣。 自上開心聽約, 無有蘊奧, 有如洞開中門, 則群下盡心竭力, 得展其股肱心膂, 上亦照察賢否, 如鑑之明, 能辨別人材, 以爲此人謹厚, 他日必爲某樣人也。 此人才敏, 他日必爲某樣人也。 此人勁直, 當進逆耳之言。 此人軟熟, 必爲謟諛之徒。 群下亦知聖念所發, 以爲此善念也。 所當十分開導以擴充之, 此不善之念也。 所當遏絶, 不使滋蔓, 上下講明, 情意相通, 則此乃出治之本也。 臣伏在遐方, 未諳時事, 然目見數十年內, 軍民離散, 如水之流, 閭里空虛。 爲今之計, 當如失火之家, 雖衆人汲汲共救, 猶或不及。 自上雖常軫念, 弊猶如舊, 臣不敢知, 群下不能奉承而然耶? 自上或不能聽納而然耶? 同寅協恭之道, 未知何如, 而如此乎? 人主之學, 出治之本也。 貴於自得, 若徒聽講而已, 則無益矣。 燕居之時, 觀覽書史, 必須自得可也。" 金範曰: "小臣徒務詞章, 素無學識。 今承下問, 恐不足以仰塞也。 臣意以爲: ‘講學明理, 涵養德性, 一心和平, 然後朝廷敬讓, 政化旁達, 萬民寧謐矣。’ 古今治亂, 布在方策, 與治同道, 罔不興, 與亂同事, 罔不亡, 要在法善戒惡而已。" 上曰: "二人所言皆當, 而上下之情相通, 然後情意交孚之說, 尤好。 古者都兪吁咈, 在於何時, 君暗臣謟, 亦在於何時乎? 雖在方策, 宜以所聞言之。" 曰: "都兪吁咈, 三代之時也。 君暗臣謟, 歷代皆然。 大抵君明則臣直, 君暗則臣謟, 此自然之理也。 古之人君, 親遇臣僚, 有若朋友, 與之講明治道。 今雖不能如此, 必情意相通, 上下交孚, 然後可也。 自 上苟有是心, 則亦宜擴而充之。 如此之事, 不可於袵席之間, 與宦官宮妾而行之, 須與侍從正士, 而爲之也。" 曰: "治道必須久且專, 乃可以有成。 不有間斷, 則久矣; 不有相雜, 則專矣。 執德固, 然後無間無雜, 一心操舍之機, 陰陽消長之理, 深察而猛省, 然後可致久安之治矣。" 上曰: "古有三顧臣於草廬之中, 其時如何, 而一招不至, 至於三顧然後乃至歟? 曰: "此昭烈之事也。 當時擾攘, 必得英雄, 與之同事, 乃成所圖, 故至於三顧。 諸葛亮, 英雄也。 料事亦豈偶然, 而一顧不起者, 必有時勢然也。 然與劉備共圖興復, 幾近三十餘年之久, 不能恢復天下, 則其出未可知也。" 曰: "時甚擾攘, 必得賢才, 可與有爲。 故昭烈至於三顧, 孔明亦恐不堪, 故三顧而後起爾。 然不可詳知矣。" 曰: "小臣竊取虛名, 不可以欺罔君上, 故不能速就。" 曰: "古人有徵召不就者, 其意則不可知也。 以臣料之, 則亦有悶望 【俗語也。 蓋憂其不敢當之意也。】 事, 故然爾。 【上問以爲學之方, 致治之要, 皆隨問而答。 上問曹植以諸葛亮必待三顧而起, 何也? 植不對。 引見後, 上命該曹量宜陞敍。 乃以曺植爲判官, 李恒爲郡守, 韓脩爲縣令, 其餘皆六品職。 植不辭而歸, 恒與薰皆稱疾棄官而去, 人以爲皆爲上官所慢, 以此棄去云。 植號南冥。 氣象超邁, 所見甚高, 憤世之意, 常見於言。 來京師, 士大夫及韋市之徒, 爭集其門。 人有所問, 皆不答。 或以所諧戲之, 人莫知其淺深。 恒號一齋, 少時業武, 發憤力學, 用功於《大學》之書, 至於累年, 頗有自得焉。 學者多從之。 其學以確實爲主, 敎人亦有序, 在京師, 往見者若有所聞, 必盡言而後已。 南冥見其如此, 時或笑侮。 及其歸也, 論者毁譽相半焉。 成運以老成稱, 甚爲鄕人所敬, 以老疾辭歸。 ○恒以修飭聞, 植以高潔稱, 脩等亦有高名, 而當聖上虛懷引接之際, 致有一二言之可法, 而不能推明義利之辨, 以闡出治之本。 惜哉所蘊雖多, 而不能遽盡於一接之間而然耶? ○植稟氣英遵, 玩心高明, 自少倜儻不羈, 嘯傲山林, 有千屣不顧之節。 當文定攝政時, 以遺逸超授丹城縣監, 不就。 上疏論時政得失, 言甚迫切, 上宸怒, 遂不復召。 至是屢承禮命, 不獲已上來, 賜封之後, 便有浩然還鄕。 曹植從前累徵不就, 金範亦上疏以辭, 故上特以三顧爲問, 以觀其微意。 植等又各繼陳其去就如此。 大抵當日入對之辭, 植則頗銳, 範則過遜, 言語不暢。】

【史臣曰: "去奸之後, 如日再中, 陰曀消盡, 陽淑方長, 收召草野之士, 引見便殿, 開心見誠而待之, 好賢樂善之本心, 於是乎呈露矣。 設使李芑尹元衡李樑之輩, 不出於前後而壅蔽之, 則治道何至於汚下? 又安有悔過改轍之勞哉?"】


  • 【태백산사고본】 20책 33권 54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122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정론-정론(政論) / 인사(人事) / 역사-사학(史學) / 역사-고사(故事) / 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