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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실록 33권, 명종 21년 6월 15일 갑술 2번째기사 1566년 명 가정(嘉靖) 45년

독서당에 선온하고 율시를 짓게 하다

독서당(讀書堂)에 선온(宣醞)하고 ‘어진이를 불러도 오지 않는 데 대한 탄식[招賢不至嘆]’이라는 어제(御題)를 내고 율시(律詩)로 짓게 하면서 어필(御筆)로 이황(李滉)을 가리킨 것이라고 주를 달았다.【이황은 타고난 자품이 순수하고 학식이 뛰어났다. 소시부터 선현(先賢)의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뜻을 두어 마음으로 생각하고 힘써 실천하여 뜻을 맑게 가지고 행실을 독실하게 하였다. 권세를 쥔 간신들이 정권을 도맡아 국사가 날로 비하해질 때를 당하여 그는 결국 병을 핑계삼아서 경상도 예안(禮安) 지방으로 물러가 살았다. 여러 번 조정의 소명을 받았으나 모두 거절하고 나가지 않았으며, 혹 나갔다 해도 곧 돌아오곤 하였다. 식량이 자주 떨어졌으나 조금도 개의치 않았고 날마다 경서를 궁구하고 도를 즐기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중년 이후에는 소견이 더욱 밝고 얻은 바가 매우 높았다. 학문이 심오하고 실천이 투철하였으니 비록 박문(博文)·약례(約禮)147) 를 둘 다 극진히 했다 이르더라도 옳을 것이다. 지금 권세를 휘두르던 간신들이 자취를 감추자 상이 정신을 가다듬어 정치를 하니 국정이 날로 새로워졌다. 이무렵 이황의 문장 도덕이 한때 으뜸간다고 추천한 자가 있자 봄 초엽부터 전지를 내려 불렀는데, 이황은 신병이 쌓였을 뿐만 아니라 출처 문제를 놓고 매우 염려한 나머지 본도에서 여러 번 사퇴하였다. 그러자 위에서는 어의(御醫)를 급파하여 진찰케 하는 등 은권(恩眷)이 집중하였는데도 끝내 소명에 응하지 않았다. 그런 때문에 이처럼 시를 짓게 하였으니, 대개 은근히 측석(側席)의 뜻을 보인 것이다.】


  • 【태백산사고본】 20책 33권 4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97면
  • 【분류】
    왕실-사급(賜給) / 인사-관리(管理) / 인물(人物)

  • [註 147]
    박문(博文)·약례(約禮) : 박문은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여 학식을 넓히는 일이고, 약례는 언행 등을 예절로 단속하여 정도에 벗어나지 않게 하는 일이다. 《논어(論語)》 옹야(雍地).

○宣醞于讀書堂, 出御題: "招賢不至嘆律時" 御筆註之曰: "指李滉也。" 【滉天資純粹, 學識超詣, 自少有志於先賢爲己之學。 心息力踐, 淸意篤行。 當權奸損政, 國事日卑, 滉遂引疾, 退居于慶尙道 禮安地。 累被朝命, 皆不起, 或起而卽還, 甔石屢空, 不以介懷, 日以窮經樂道爲事。 中年以後, 所見益功, 所得益高, 淵深浩博, 發越條暢, 雖謂之博約兩極可也。 今者權姦屛竄, 上勵精爲治, 朝政日新, 有以文章道德爲一時所冠, 而薦陳之者, 自春初, 下旨宣召, 而滉非徒身病沈綿, 深以出處爲慮, 在道屢辭。 急遣御醫診疾, 恩眷沓至, 而終不就召, 故令製詩如此。 蓋示拳拳例席之意也。】


  • 【태백산사고본】 20책 33권 4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97면
  • 【분류】
    왕실-사급(賜給) / 인사-관리(管理) / 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