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경 등이 내수사의 인신과 양종의 선과의 설립 등에 이의를 제기하다
이준경 등이 새로 세운 과조(科條)에 부표하여 입계하자, 전교하기를,
"예조에서 서계한 조목 안의 내수사의 사지 내관(事知內官)과 함흥 본궁(咸興本宮)의 별차 내관(別差內官)의 인신(印信) 【내수사 내관의 인신은 성종조 이전에는 서울에 없었는데 중종 초년에 이미 있었다고 하니 대체로 폐정(弊政)을 답습하고 혁파하지 못한 것이다. 내수사 내관은 바로 그 제조를 일컫는 것이다. 각도에다 공문을 보내어 정형에 간여를 하면서 모두 내지(內旨)라고 칭탁하니 폐단이 여러 가지로 극심하였다. 함흥은 곧 태조의 옛 관향(貫鄕)으로 본궁(本宮)을 설치한 지가 오래되었다. 그런데 그 별차 내관은 몇년 전에 시작되었으며 인신을 만든 것도 여기에 사용하려는 것이었다.】 은 바로 간사한 일을 방지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양종(兩宗)의 선과(禪科)는 지금 새로 세운 것이 아니고 《대전(大典)》에 기재되어 있는 것인데, 더구나 문정 왕후의 유교가 뚜렷하니 바로 통령(統領)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자격장(自擊匠) 【관상감(觀象監)의 누구(漏具)를 새겨서 만드는 자이다.】 등에게도 단령(團領)을 착용하도록 허락하였는데 그것도 공인(工人)들을 권면하는 것이다. 그리고 형조에서 서계한 조목의, 시관(試官)으로 참망(參望)된 자로 낙점(落點)된 인원이 숙배하기 전에 곧장 물러가는 것 【위의 죄는 앞서는 더러 가벼운 율(律)로 적용했는데, 이제는 중한 죄로 적용하여 고신(告身) 3등을 빼앗게 하였다.】 은 스스로 편하게 하는 데 관계되며, 입계한 문서에 신자(臣字)를 쓰지 않는 것 【위의 죄는 앞서는 공죄(公罪)로 적용했는데, 이제는 사죄(私罪)로 적용하여 고신 1등을 빼앗게 하였다.】 은 무례(無禮)한 데 가까우며, 국기일(國忌日)에 도로에서 풍악을 울리는 것 【예전에는 기일에만 금지시켰는데 이제는 재계(齋戒)하는 날까지 모두 금지시켰다.】 은 불경이 더욱 크다. 사치스런 지공을 금하는 것 【전에는 행수 장무(行首掌務)만 파직하였는데, 이제는 그것을 먹은 인원도 함께 파직하였다.】 과 백첩(白帖)을 곡종(曲從)하는 폐단 【백첩은 바로 인(印)이 없는 첩(帖)이다. 상급 관사[仰司]에서 백첩으로 해당 관할 각사에다 영을 내리매 아전이 그것을 인연하여 간사한 짓을 하기 때문에 금지시켰다.】 과 질이 나쁜 쌀을 엄격히 금지하는 것 【질이 나쁜 쌀을 사용하여 사람이 먹을 수 없게 한 자는 전가 사변(全家徙邊)시켰다. 지난번에 시중에서 간사함이 극도로 많았기 때문에 법을 마련하여 엄격하게 금지시켰는데, 오히려 개혁되지 않고 있다.】 과 사산(四山)에 척간(擲奸)하는 것과 형관을 제관으로 차임하지 말라는 등의 일은 모두 불가한 것이 아니니,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때문에 백첨(白籤)을 붙여서 도로 내린다."
하였다. 이준경 등이 회계하기를,
"내수사 및 함흥 본궁 별차 내관의 인신(印信)은 바로 간사함을 막기 위한 뜻임을 신들이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것은 조종조 수백년 동안 없었던 일인데, 이제 시작하시니 지금은 성명이 위에 계시므로 의심할 만한 일이 없겠지만 후세(後世)에는 틀림없이 폐단이 생겨 무궁토록 비난을 받을 것입니다. 때문에 신들이 이것을 염려하여 감히 부표(付標)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양종(兩宗)의 선과(禪科)는 《대전(大典)》에 있으며, 문정 왕후(文定王后)의 유교(遺敎)가 실로 또렷합니다. 그러나 《대전》의 법이 중간에 폐지된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지난번에 다시 설립하자 물정이 분하고 답답하게 여기고 있으므로 신들이 감히 부표하지 않은 것인데 지금 만약 부표한다면 인심이 불안해 하고 조정이 다시 소요스럽게 될까 매우 두렵습니다.
그리고 자격장(自擊匠) 등에게 단령(團領)을 착용하는 것을 허락하신 것이 비록 공인을 권면하는 뜻에서 나왔으나, 근래 인심이 참람하여 분수를 편안하게 여기지 않고 함부로 비례를 범하고 있으니, 이는 실로 방금(防禁)이 엄하지 않고 예법(禮法)이 크게 무너진 데서 나온 것입니다. 지금 각자장(刻字匠)·능라장(綾羅匠)·자격장은 지극히 천한 장류(匠類)요, 단령은 바로 사류(士類)의 의관이며 예복입니다. 만약 이들 무리에게 모두 착용하도록 허락한다면 더욱 참람한 단서가 열려 풍속을 법식으로 방지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모두 부표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시관(試官)이 곧바로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것과, 지공(支供)을 사치하게 하는 것과, 백첩(白帖)을 곡종(曲從)하는 것과, 입계 문서에 신(臣)자를 쓰지 않은 것과, 질이 나쁜 쌀을 엄격하게 금하는 것과, 국기일(國忌日)에 풍악을 올리는 등의 일은, 바로 법사(法司)가 규찰할 일이고 해조가 간여할 일이 아니며, 사산에 척간하는 것은 바로 공조(工曹)가 관장할 일이며 형조가 간여할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형관을 제집사(祭執事)로 차임하지 말라는 것은 바로 이조가 관장할 일이며 또한 형조가 간여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처음에는 부표하지 않았었는데, 이제 전교를 받들어 모두 부표해서 들여보냈습니다."
하니, 상이 신과조 단자를 다시 빈청에 내리고 이어 전교하기를,
"요즈음 내수사(內需司)에 허술한 일이 많아 간사한 것을 방지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부득이 차지 내관(次知內官)의 인신(印信)을 마련하여 자문(尺文) 【무릇 잡물(雜物)을 관에 바친 뒤에 반드시 조그마한 종이에다 표(標)를 만들어 증거와 참고로 삼으며 그것을 자문이라고 부르는데 대개 방언(方言)이다.】 에만 찍게 하였으니 그것이 있건 없건 간에 무슨 관련이 있겠는가. 이것을 큰 폐단이 생긴다고 하는 것은 나도 모르겠다.
그리고 양종의 선과는 중간에 폐지했다고 말하더라도 승도(僧徒)들을 통령하기 위하여 다시 세운 것인데, 국가에서 승군(僧軍)을 활용할 때의 일이 또한 편리하고 쉬울 것이니 통령의 이익이 없지 않을 것이다. 대저 이 두어 가지 일은 모두 문정 왕비의 성단(聖斷)에서 나온 것인데 내가 어찌 감히 그것을 고치겠는가. 신자된 도리에 있어서는 더욱 마음대로 경솔히 고칠 수 없으니 아울러 부표하는 것이 옳다. 그리고 별차 인신(別差印信)이 무슨 큰 방해로움이 있겠는가."
하였다. 이준경 등이 아뢰기를,
"양종의 선과와 내수사 인신 등의 일은 삼가 하교를 받들고 신들이 감격스러움을 견디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지금이야말로 경시(更始)의 처음이라 이는 바로 치도(治道)의 쇠퇴와 융성 그리고 인심의 간사와 정직을 가름하는 일대(一大) 기회이므로 다시 세우는 것이 불가하다는 뜻을 앞서 이미 모두 아뢰었습니다. 세 번 더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밤이 깊었으므로 신들이 감히 대궐 안에 머물러 있을 수 없어 이러한 뜻만 아뢰고 물러나겠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지금 그것을 고칠 수 없다는 뜻을 지난날에 이미 말하였으니, 치지 도외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0책 32권 46장 B면【국편영인본】 21책 79면
- 【분류】공업-장인(匠人) / 신분(身分)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사법-법제(法制) / 사법-탄핵(彈劾) / 출판-인쇄(印刷) / 왕실-궁관(宮官) / 재정-상공(上供) / 재정-국용(國用) / 의생활(衣生活) / 상업(商業) / 금융-화폐(貨幣) / 군사-관방(關防) / 사상-불교(佛敎) / 인사-선발(選拔)
○李浚慶等, 以新立科條, 付標入啓。" 傳曰: "禮曹書啓條內, 內需司事知內官及咸興本宮別差內官印信, 【內需司內官印信, 成廟朝以前, 則無有焉, 而中廟初年, 已有之云。 蓋循弊政, 而未革者也。 內需司內官, 卽其稱提調者也。 文移各道, 干與政刑, 皆托內旨, 弊極多端。 咸興乃太祖古貫, 本宮之設古矣, 而其別差內官, 則創始於數年之前, 印信之作, 亦用於此。】 此乃防奸之事也。 兩宗禪科, 非今新立, 載在《大典》。 況文定遺敎丁寧, 正出於統領之意。 自擊匠 【觀象監漏具雕造者。】 等, 許着團領, 亦所以勸工也。 刑曹書啓條, 試官參望者, 落點人員, 肅拜前, 徑自退去, 【右罪, 前或照以輕律, 今照以重律, 奪告身三等。】 涉於自便。 入啓文書, 不書臣字, 【右罪, 前照以公, 今照以私, 奪告身一等。】 近於無禮。 國忌日道路動樂者, 【昔時只禁忌日, 今竝禁齋戒之日。】 不敬尤大。 支供奢侈之禁, 【前則只罷行首掌務, 今則竝罷所食之員。】 曲從白帖之弊, 【白帖卽無印之人也。 仰司以白帖, 令于該管各司, 而吏緣爲奸, 故禁之。】 痛禁惡米 【用惡米人不可食者, 全家徙邊。 頃因市上奸細極多, 故設法峻禁, 而猶未革。】 四山擲奸及刑官勿差祭官等事, 俱非不可, 似可仍用, 故付白韱還下矣。" 李浚慶等回啓曰: "內需司及咸興本宮別差內官等印信, 乃是防奸之意, 臣等非不知之。 但此祖宗朝數百年所無之事, 而今乃創爲, 今則聖明在上, 固無可疑之事, 後世則必生弊端, 而取譏無窮也。 故臣等慮此, 而不敢付標。 兩宗禪科, 在於大典, 文定王后遺敎, 實爲丁寧。 然大典之法, 中廢已久, 頃復設立, 物情憤鬱。 臣等不敢付標。 今若付標, 則深恐人心不安, 朝廷復致騷擾也。 自擊匠等許着團領事, 雖出於勸工之意, 然近來人心僭越, 不安其分, 冒犯非禮, 實出於防禁之不嚴, 禮法之大壞也。 今此刻字匠、綾羅匠、自擊匠, 皆至賤匠類, 團領乃士類衣冠禮服。 若許此類皆着, 則益開潛濫之端, 無以防範乎風俗, 故皆不爲付標矣。 試官徑自還家, 支供奢侈, 曲從白帖, 入啓文書, 不書臣字, 惡米痛禁, 國忌動樂等事, 乃係法司糾察之事, 非該曹所預。 四山擲奸, 乃工曹所掌, 非刑曹所預。 刑官勿差祭執事, 乃吏曹所掌, 亦不預於刑曹, 故初不付標, 而今承傳敎, 皆付標以入。" 上以新條單子, 復下賓廳。 仍傳曰: "近來內需司, 事多虛疎, 不可不防奸, 故不得已設次知內官印信, 只踏尺文, 【凡雜物納官之後, 必以小紙成標, 以憑驗, 考名曰尺文, 盡方言也。】 有何關於有無乎? 以此大生弊端, 則予未知也。 兩宗禪科, 雖曰中廢, 欲爲統領, 僧徒復立, 而國家用僧軍之時, 事亦便易, 不無統領之益也。 大抵此數事, 皆出於文定聖斷, 予安敢改之乎? 在臣子之道, 則尤不可擅便輕改。 竝付標可也。 別差印信, 有何大妨乎?" 李浚慶等啓曰: "兩宗禪科, 內需印信等事, 伏承下敎, 臣等不勝感激。 但方今更始之初, 此乃治道汚隆, 人心邪正, 一大機會, 不可復立之意, 前已盡啓, 願加三思。 今日夜深, 臣等不敢留在闕內, 只啓此意而退。" 傳曰: "今不可改之之意, 前者已盡言矣。 置之度外可也。"
- 【태백산사고본】 20책 32권 46장 B면【국편영인본】 21책 7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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