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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실록 32권, 명종 21년 4월 4일 을축 2번째기사 1566년 명 가정(嘉靖) 45년

이준경 등이 문정 왕후의 상의 의궤에 대해 의논드리다

영의정 이준경, 영중추부사 심통원, 좌의정 이명, 우의정 권철, 좌찬성 홍섬, 우찬성 오겸, 예조 판서 송기수, 우참찬 조언수, 병조 판서 박충원, 이조 판서 민기, 호조 판서 이탁, 판윤 유강, 병조 참판 성세장, 우윤 임열, 이조 참판 정종영, 판결사 이우민, 예조 참판 이건, 예조 참의 홍천민이 의논드리기를,

"간원이 아뢴 것을 가지고 경전(經傳)과 《문공가례(文公家禮)》를 널리 고찰하니, 기년(期年)이 되어 소상(小祥)을 지내고 연복(練服)을 입는다는 설이 예경(禮經)에 섞여 나왔습니다. 《예기(禮記)》 잡기편(雜記篇)에 ‘삼년상에는 연관(練冠)은 대공복(大功服)075) 에 쓰는 마(麻)로 바꾼다.’ 하고, 그 주(註)에 ‘삼년상을 입되 연제 때에 이르러 관에서 수질(首絰)을 이미 제거하기 때문에 「삼년상에는 연관이 있다.」고 한 것이다.’ 하였으며, 《의례경전(儀禮經傳)》 상복 변제조(喪服變除條)에 ‘계환자(季桓子)의 상에 강자(康子)가 연복을 입었는데 최(衰)가 없으므로, 자유(子游)공자에게 질문하기를, 「이미 연복을 입었는데 최가 없어도 됩니까?」 하자, 공자가 말하기를, 「최의(衰衣)가 없으면 손님을 보지 못하는데 어떻게 제거하겠는가?」 하였다.’ 하였으며, 《예기(禮記)》 단궁편(檀弓篇)에 ‘연의(練衣)는 누런 천으로 안집을 대고 분홍 천으로 옷깃과 소매에 선을 두른다.’ 하였고 그 소(疏)에 ‘연제는 소상(小祥)이며 소상에는 연관(練冠)과 연중의(練中衣)를 입기 때문에 연제라고 한다. 연의는 연포로 중의를 만든 것이고, 누런 천으로 안집을 댄다는 것은 누런 천으로 중의의 안집을 대는 것을 말한다. 정복(正服)은 변경할 수 없다. 중의는 정복이 아니고 다만 최복에 받쳐 입는 옷일 뿐이다. 연(緣)은 중의의 깃과 소매의 가장자리를 말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관찰하여 보면 이른바 연제라는 것은, 혹은 ‘수질(首絰)을 이미 제거했다.’ 혹은 ‘연복은 최(衰)가 없을 수 없다.’ 혹은 ‘소상에 수질을 제거한다.’ 혹은 ‘정복은 변경할 수 없다.’고 하기도 하였으니, 이른바 정복은 최복(衰服)입니다.

그리고 《예기》 복문편(服問篇)에는 잡기편(雜記篇)의 소를 인용해서 이르기를 ‘삼년상에 연제 뒤의 최는 승수(升數)가 대공복의 승수와 같기 때문에 최라고 한다.’ 하였습니다. 이것을 보면 소상에 연복이 있는 듯하나 여러 학설의 같지 않음이 또한 이와 같으며, 《문공가례》 소상장(小祥章)에 ‘연복을 마련하여 차례로 진열한다.’고 하였는데, 그 아래 주(註)에 옷을 짓는 제도를 말하지 않고 다만 연복으로 갓을 만들며 수질(首絰)·부판(負版)·벽령(辟領)·최(衰)를 제거한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궐문(闕文)이 아닙니다. 경전(經傳)의 학설이 뒤섞여 나와 일정하지 않으니 생각하건대 절충(折衷)하기가 어려워서 그랬을 것입니다. 【절충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라고 한 것은 아마도 온편하지 않은 듯하다. 주자(朱子)가 모친상을 당하여 《가례(家禮)》를 지었으나 모두 바로잡지 못한 것을 동자(童子)가 훔쳐 갔는데, 주 문공(朱文公)이 죽자 책이 비로소 나왔기 때문에 옛사람이 혹은 완성되지 않은 책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어찌 주자가 절충하기가 어려워 의심스런 예를 두었겠는가.】 거기에 말한 ‘연복을 마련하여 차례로 진열한다.’고 한 것은 바로 옛날의 뜻을 보존하기 위한 것이니, 그 아래에 그 복제(服制)에 대하여 언급이 없는 것은 어찌 옛날의 예는 상고할 수 없고 다만 온공(溫公)076) 이 지은 《서의(書儀)》의 법만을 따라서 제도를 삼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문공(文公)은 바로 집대성(集大成)한 후성(後聖)으로서 경전(經傳)을 참작하여 세교(世敎)를 세우는 데 있어 어찌 소홀히 하고 지리멸렬하게 할 자이겠습니까.

근세(近世) 구준(丘濬)《가례의절(家禮儀節)》은 잡되게 고경(古經)의 말을 인용하고 헤아려서 연복의 제도를 만들었으나 구준은 바로 근세의 해박한 유학자이지 성현의 유는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문공이 절충한 것을 버려두고 근세의 소견을 따르는 것은 온당치 못한 듯합니다. 또 당(唐)·송(宋) 때에는 모두 소상에 복식을 변경하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두 우문주(宇文周)077) 의 제도를 그대로 답습하였으므로 일을 상고하지 않은 것이 없으나 법을 삼기에는 부족합니다. 《오례의》에 이른바 연포로 관(冠)을 만든다고 한 것은 빠뜨렸거나 착오된 것은 아니며 반드시 《문공가례》를 의거하여 상고하기 어려운 문구는 버리고 시행할 만한 조목만 기록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또 조종조 때에 연제(練祭)에는 백관이 옛날의 최복(衰服)을 세탁하여 입었다고 하였으니, 그 뜻은 대체로 고례(古禮)의 연복 제도에 의거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홍치(弘治)078) 8년 성종의 상에 최복을 세탁하려 하자 당시의 의논이, 세탁하는 것은 예문(禮文)의 본의(本意)에 어긋난다고 하여 연관(練冠)만 변경하고 최복은 옛날대로 두고 변경하지 않았기 때문에 백관이 그대로 최복을 착용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이것을 근거로 문공의 제도를 상세하게 참고하여 소상에 수질·부판·벽령·최를 제거하게 하였으니, 연복을 하지 않더라도 예가 강쇄(降殺)된 것을 보이기에는 충분합니다. 조종께서 최복을 그대로 착용한 제도 역시 충후(忠厚)한 의미가 있습니다.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예는 후한 편을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으니, 단지 네 가지 물건만 제거하고 최복을 그대로 착용하는 것은 실로 예에 어긋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문공가례》에 따라 《오례의》를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 결함이 없을 듯합니다. 더구나 《오례의》는 바로 조종조의 명현(名賢)이 전성하던 때에 수정한 것이므로 지금 가볍게 고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예조가 앞서 정한 의주(儀註)에 의거하여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판돈녕부사 김명윤, 형조 참판 송찬은 의논드리기를,

"효자(孝子)가 집상(執喪)함에 있어 삼년 동안 애경(哀敬)하는 마음은 마칠 때나 시작할 때나 조금도 해이함이 없지만 그 상복의 제도에는 강쇄하는 것이 있습니다. 때문에 기년(期年)인 소상에는 소상에 입는 상복을 입어야 마땅하고, 재기(再期)인 대상에는 대상에 입는 상복을 입어야 마땅하며 27개월인 담제(禫祭)079) 에는 상복을 벗는데, 담제는 곧 길제(吉祭)이니 예경(禮經)을 상고하고 선현의 논변을 참작해 보면 간혹 한때의 다른 제도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점차로 강쇄하는 의의는 모두 남아 있으니, 소상에 단지 연관만 하고 연복을 하지 않는 것은 아마도 예경의 근본 의도는 아닌 듯합니다. 이 때문에 중앙이나 지방에서 집상하는 사람들도 연복을 입는 자가 있습니다. 신들은 다만 본 것을 진술할 뿐이며 국조에서 의례를 이미 정했으면 감히 함부로 의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신은 논한다. 최(衰)니 연(練)이니 담(禫)이니 길(吉)이니 하는 것은 모두 복(服)을 강쇄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최·담·길 이 세 가지는 이미 모두 복색의 명칭인데 어찌 연만이 이름만 있고 복색이 없겠는가. 주자(朱子)《시경(詩經)》의 소관(素冠)을 해석하기를 ‘상(祥)을 마친 관(冠)이다.’ 하고 소의(素衣)를 해석하기를 ‘소관을 쓰면 소의를 입어야 한다.’고 하였으니, 복이 관의 색깔을 따르는 것이 분명하다. 《가례(家禮)》에 연복의 문구는 있어도 연복의 제도는 없으니 이것이 이른바 완성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마도 후세의 견해에만 맡기고 살피지 않아서는 안 될 듯하다.

하고, 이준경·심통원·이명·권철·김명윤·홍섬·오겸·송기수·조언수·박충원·민기·이탁·유강·성세장·임열·정종영·이우민·이건·송찬·홍천민은 의논드리기를,

"문덕전에 입번한 종친의 복색은 들어가면 최마를 입으면서 나와서는 길복을 입고 여러 사람을 따르는 것은 과연 예의 뜻에 어긋나니 출번(出番) 때에도 그대로 백의를 입게 하고 참봉(參奉)에게 이 예(例)에 따르도록 하는 것이 인정과 예의에 적합할 듯합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0책 32권 41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76면
  • 【분류】
    왕실-의식(儀式) / 의생활-예복(禮服) / 역사-사학(史學)

  • [註 075]
    대공복(大功服) : 오복(五服)의 하나. 종형제(從兄弟)·자매(姉妹), 중자부(衆子婦), 중손(衆孫)·중손녀(衆孫女), 질부(姪婦)와 남편의 조부모(祖父母), 백숙부모(伯叔父母), 질부(姪婦), 남편이 입후일 경우 남편의 생가부모의 상사(喪事)에 아홉 달 동안 입는 복제이다. 《주자가례(朱子家禮)》 대공조(大功條).
  • [註 076]
    온공(溫公) : 사마광(司馬光).
  • [註 077]
    우문주(宇文周) : 중국 남북조(南北朝)의 북조(北朝)의 하나인 우문각(宇文覺)이 세운 북주(北周). 즉 후주(後周)를 가리킨다.
  • [註 078]
    홍치(弘治) : 명 효종(明孝宗)의 연호.
  • [註 079]
    담제(禫祭) : 대상(大祥)을 지낸 뒤 한 달을 건너서 지내는 제사. 즉 대상을 치른 뒤 다음다음달[中月]로 초상부터 윤달을 따지지 않고 27개월이 되는 달 하순에 정일(丁日)이나 해일(亥日)을 정하여 지내는 제사이다. 제사지내는 식은 대상의 의식과 같다. 《주자가례(朱子家禮)》 담조(禫條).

○領議政李浚慶、領中樞府事沈通源、左議政李蓂、右議政權轍、左贊成洪暹、右贊成吳謙、禮曹判書宋麒壽、右參贊趙彦秀、兵曹判書朴忠元、吏曹判書閔箕、戶曹判書李鐸、判尹兪絳、兵曹參判成世章、右尹任說、吏曹參判鄭宗榮、判決事李友閔、禮曹參判李楗、禮曹參議洪天民議: "將諫院所啓, 博考經傳及《文公家禮》, 期而小祥及練服之說, 雜出於禮經。 《禮記》 《雜記篇》曰: ‘有三年之練冠。’ 則以大功之麻易之註云: "居三年之喪, 至練時首絰已除。’ 云, 故有三年之練冠也。 《儀禮經傳》 《喪服變除》條云: ‘季桓子康子、練而無衰。 子游問於孔子曰: 『旣服練服, 可以無衰乎? 孔子曰: "無衰衣者, 不以見賓, 何以除焉?’ 《襢弓篇》曰: ‘練衣黃(裏)〔裹〕 縓緣。’ 《疏》曰: ‘練, 小祥也。 小祥而着練冠, 練中衣也, 故曰練也。 練衣者, 以練爲中衣; 黃(裏)〔裹〕 者, 以黃爲中衣(裏)〔裹〕 也。 正服不可變, 中衣非正服, 但承衰而已。 緣謂中衣領及(裏)〔裹〕 之緣也’ 云。 以此觀之, 則所謂練者, 或以爲首絰已除, 或以爲練服, 不可以無衰; 或以爲小祥除首絰, 或以爲正服, 不可變。’ 云。 所謂正服, 則衰服也。 惟服問篇引雜記疏云: ‘三年喪, 練後之衰, 升數與大功同, 故云衰也。’ 以此見之, 則小祥似有練服, 而諸說之不同又如此。 《文公家禮》 《小祥章》曰: ‘設次陳練服, 其下註, 不言製服之制, 只曰以練服爲冠, 而去首絰、負版、辟領、衰云。」 此非闕文也。 經傳之說, 雜出而不一, 意必難於折衷。 【難於折衷云者, 恐未穩。 朱子丁內憂, 作《家禮》, 未盡釐正, 而爲童子竊去, 公亡而書始出, 故古人或論以未成之書, 豈朱子難於折衷, 而存疑禮乎?】 其曰: ‘設次陳練服。’ 乃存古之義也。 其下沒其服制者, 豈不以古禮不可攷, 而只從溫公書之法, 而爲之制乎? 且文公乃集大成之後聖, 而參酌經傳, 爲立世敎, 是豈鹵莾滅裂, 而爲之者也? 惟近世丘氏濬 《家禮儀節》, 雜引古經之語, 擬爲練服之制。 丘濬乃近世該博之儒學, 非聖賢之比。 今棄文公之折衷, 而從近世之所見, 似爲未安。 且之時, 皆有小祥變服之制, 然皆因循宇文周之(之)制, 事無不稽, 不足爲法也。 《五禮儀》所謂練布爲冠者, 亦非闕誤也。 必依《文公家禮》, 棄其難考之文, 而只錄可行之條耳。 且祖宗朝練祭, 百官嘗澣濯舊衰, 而服之云, 其意蓋欲依古禮練服之制也。 然弘治八年, 成廟之喪, 欲澣衰服, 而時議以澣濯, 爲有乖禮文本意, 只改練冠, 衰服則因舊不變, 故百官仍着衰服云。 臣等據此參詳文公之制, 小祥去首絰、負版、辟領、衰, 雖不練服, 而足以示禮之殺也。 祖宗仍衰之制, 亦有忠厚之意。 朱子曰: ‘禮宜從厚。’ 只去四物, 而仍用衰服, 實非違禮。 今擬《文公家禮》, 而仍用立《五禮儀》, 似無欠闕。 況《五禮儀》乃祖宗朝名賢全盛之時所修, 在今似難輕改。 依禮曹前定儀註, 施行何如?" 判敦寧府事金明胤、刑曹參判宋賛議: "孝子執喪, 三年哀敬之心, 則終始未嘗少弛, 而其喪服之制, 則有降殺焉。 故期而小祥, 當服小祥之服; 再期而大祥, 當服大祥之服; 二十七月, 而釋禫卽吉。 考諸禮經, 參以先賢之論, 雖或有一時之異制, 而降殺有漸之意, 則皆存焉。 小祥只練冠, 而不練服, 恐非禮經本意。 以此京外執喪之人, 亦有練其服者矣。 臣等祗陳所見而已, 國朝已定儀禮, 則不敢妄有所議。"

【史臣曰: "曰衰, 曰練, 曰禫, 曰吉, 皆以服殺言之也。 三者旣皆服也, 則豈獨練名而無服乎? 朱子《詩》之素冠曰: ‘旣祥之, 冠素衣(曰)〔白〕 。’ 素冠, 則素衣矣, 則衣從冠色明矣。 《家禮》有練服之文, 無練服之制, 此所謂未成處也。 恐不可諉以後世之見, 而不省也。"】

李浚慶沈通源李蓂權轍金明胤洪暹吳謙宋麒壽趙彦秀朴忠元閔箕李鐸兪絳成世章任說鄭宗榮李友閔李楗宋賛洪天民議: "文德殿入番宗親服色, 入則衰麻在身, 出則吉服從衆, 果乖禮意。 出番仍着白衣, 參奉亦依此例, 似合情禮。"


  • 【태백산사고본】 20책 32권 41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76면
  • 【분류】
    왕실-의식(儀式) / 의생활-예복(禮服) / 역사-사학(史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