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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실록32권, 명종 21년 3월 13일 갑진 1번째기사 1566년 명 가정(嘉靖) 45년

이준경·심통원 등이 대제학으로 피선된 사람을 귄점을 쳐서 올리다

영의정 이준경, 영중추부사 심통원, 【자질이 용렬하고 언어가 허황되고 희로(喜怒)를 종잡을 수 없었다. 김안로에게 아첨하여 괴방에 뽑혔으나 청의에 용납되지 못하고 척속을 반연하여 삼공의 자리에 이르렀다. 전혀 탐득을 일삼아 문을 열어 놓고 뇌물을 받아들이면서도 조금도 부끄러워함이 없었고 둑을 막아서 만든 전토(田土)가 주읍(州邑)에 널려 있었다. 윤원형이 패한 뒤 곳곳에서 방(榜)을 붙여 심통원을 꾸짖고 수죄(數罪)하기를 윤원형보다 더하다 하고 심지어 ‘대탐(大貪)·대적(大賊)’으로 지적하였다. 이때 이준경과 이명이 함께 재상으로 있는데, 그가 가운데에 끼었으므로 사람들이 다 ‘수정영자(水精纓子)에 오목(烏木)이 끼어 있네.’라고 하며 기롱하니, 부득이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야 말할 것도 없지만 이 어찌 국가의 수치가 아니겠는가.】 좌의정 이명, 우의정 권철, 좌찬성 홍섬, 우찬성 오겸, 형조 판서 송기수, 【시세를 잘 살피고 교묘하게 일을 잘 피할 줄 알았다. 뜻이 영위(營爲)와 취렴(取斂)하는 데 있었으므로 가세가 매우 부유하였다. 전장(銓長)으로 있을 때 몰래 보내는 선물을 많이 받아 들였고 권문에 매달려 비위를 맞추기에 겨를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의 무시를 받았다.】 좌참찬 원혼, 【간결하고 조행(操行)이 있어, 시세에 따라 추이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진복창이 용사할 때 대소의 정신들이 다 진복창에게 매달려 화를 모면하려 하였으나 원혼만이 한번도 찾아가지 않으므로 진복창이 두 차례나 찾아와서 자못 섭섭해 하는 말을 남기는 한편, 고개를 숙이고 찾아와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진복창이 패할 때까지 끝내 찾아가지 않으면서 ‘화복은 그 명(命)에 있는 것이지 진복창에게 부탁해서 모면될 일이 아니다. 가사 대화를 당한다 하더라도 어찌 뜻을 굽혀 사인(邪人)을 찾아볼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일찍이 형조 판서로 있을 때 사람들이 혹 자주 출사한다고 말을 하자, 대답하기를 ‘오늘 출근하지 않으면 아무 옥사(獄事)를 판결할 수 없고 내일 출근하지 않으면 아무 송사(訟事)를 판결할 수 없으므로 늘 출근하는 바이다.’ 하였다. 평생에 성문(城門)을 나가 사람을 영접하거나 전송하는 적이 없었는데 ‘어찌 재상으로서 술병과 찬합을 들고 여염에 드나드는 사체가 있겠는가.’ 하였다. 그러나 성격이 조급하고 성을 곧잘 내어 자못 용량이 없었다.】 우참찬 조언수(趙彦秀), 병조 판서 박충원, 이조 판서 민기, 호조 판서 이탁, 【풍신이 의연하고 지상(志尙)이 속되지 않았으며, 기량이 천협하지 않고 회곡(回曲)한 행동을 하지 않아 처사가 번거롭지 않았고, 가산을 영위하지 아니하여 거처가 매우 협소하였다. 이양이 한창 득세할 때 신병을 핑계로 벼슬을 그만두고 이양을 찾아가지도 않았는데 이양이 패한 뒤 여러 차례 대사헌이 되었으며 이양과 윤원형을 청주(請誅)할 때 다 그의 힘이 컸었다.】 등이 빈청에 모여, 대제학(大提學)으로 피천(被薦)된 사람 【민기·박충원·이황·오상·박순이다.】 을 권점(圈點)을 쳐서 올리니 답하였다.

"권점은 후정(後政) 때 계하하겠다."


  • 【태백산사고본】 20책 32권 34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73면
  •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물(人物)

    ○甲辰/領議政李浚慶、領中樞府事沈通源 【性資愚庸, 言語浮誕, 喜怒不中。 謟譽金安老, 得(摧) 〔捷〕巍科, 已不爲淸議所容。 夤緣戚屬, 致位三公, 一以貪得爲務, 開門受賄, 略無愧恥。 防(提)〔堤〕 作田, 幾遍州邑。 及元衡(敗)〔貶〕 處歲, 掛榜詬罵通源, 數其罪惡, 以爲過於元衡, 至標以大貪大賊。 時與李浚慶李蓂幷相, 而通源居中, 人皆以水精纓子烏木隔兒譏之。 不得已辭相。 通源不足道也, 豈非國家之羞恥乎?】 左議政李蓂、右議政權轍、左贊成洪暹、右贊成吳謙、刑曹判書宋麒壽 【善觀時變, 巧解避事, 志在營斂, 家甚饒富。 爲銓長也。 頗受潛遺, 奔走權門, 取旨不暇移, 爲人所少。】 左參贊元混 【簡而有操, 不肯隨勢, 推移方陳。 復昌用事, 大小廷臣莫不奔走免禍, 混獨不一往。 復昌至再來訪, 頗有憾恨之語, 冀致來屈, 而終其敗, 竟不往見曰: "禍福有命, 非干謁復昌可免。 假蒙大禍, 豈可屈志, 而見邪人乎?" 曾爲刑判, 人或言其頻告。 答曰: "今日不仕, 未斷某獄; 明日不仕, 未決某訟, 是故常仕也。" 平生未嘗出城迎餞曰: "豈有宰相人, 提壺挈榼, 出入閭閻之事體乎?" 然性躁易怨, 頗無容量。】 右參贊趙彦秀、兵曹判書朴忠元、吏曹判書閔箕、戶曹判書李鐸 【風神毅然, 志尙不俗。 非淺狹器, 不爲(典) 〔曲〕行, 而所爲不煩, 不營産業, 居甚湫溢。 李樑方盛, 稱疾解官, 不肯往見。 敗屢爲都憲, 其請誅李樑尹元衡, 皆有力焉。】 會議于賓廳, 以大提學被薦人 【閔箕、朴忠元、李滉、吳祥、朴淳】 圈點而入, 答曰: "圈點, 當下於後政矣。"


    • 【태백산사고본】 20책 32권 34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73면
    •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