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년 이후의 금부 죄인 노수신·김난상·유희춘 등을 신원하다
임금이 삼공(三公)과 영평 부원군(鈴平府院君) 및 금부 당상을 명해 불렀다. 영평 부원군 윤개(尹漑), 영의정 이준경(李浚卿), 【성품이 엄중하고 염결했으며 우애가 돈독해 형제간에 상대함을 붕우와 같이 하였다. 나이 60에 형 이윤경(李潤慶)의 상을 당했는데, 최복을 입고 기년상을 지내니 사람들의 칭송이 많았다. 얼마 전 임금의 체후가 미령했을 때 국가의 대계를 위하여 입후를 먼저 거론했었다. 그 진소의 내용이 간절해 대신의 체통을 얻었다고 이를 만했다. 그런데 그 진소의 내용을 승지를 시켜 쓰게 하였고 윤건(尹健)으로 하여금 이를 통하게 하였는데, 사관은 처음에 이를 알지 못했다.】 좌의정 심통원(沈通源), 【용렬하고 비루하며 무식했다. 심술이 바르지 못하고, 뜻은 부귀에 있어 염치가 없기가 너무 심했다. 등제하던 날 김안로(金安老)에게 아부를 하였는데, 남들의 말을 염두에도 두지 않아 세론이 그를 비루하다 하여도 항상 유쾌한 마음이었고 다행히 외척이 되는 관계로 지위가 정승에까지 올랐다. 날로 주구(誅求)와 겁탈로 일을 삼았으며 사람들이 많이 원망해 길가에 방을 붙여 놓고 욕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또 윤원형이 스스로 기세가 고립되는 위태로움을 알고 그에게 도움을 받고자 금은 주옥으로 아첨해 왔을 때, 심통원은 그 뇌물들을 달게 받고 사양하지 않았다. 그 이익을 탐하는 무상(無狀)함이 여기에까지 이르렀다. 얼마 전 상의 체후가 미령하여 대신들이 국가 대계를 위해 세자를 세울 것을 청했는데, 중전이 덕흥군(德興君) 이초(李岹)의 세째 아들 하성군(河城君) 이균(李鈞)을 세우고자 한다고 답하니, 심통원은 전교를 듣고 급히 일어나, 나는 가서 궁을 지키겠다 하고 이어 시약청으로 돌아갔다. 이준경이 그를 비양거려 ‘저기 가서 무슨 일로 꾸밀까.’ 하였고, 이명(李蓂)은 ‘이익이 있는 곳이니까.’라고 하였다. 동렬에 있는 사람들의 경시와 모욕이 이와 같았다.】 우의정 이명(李蓂), 판의금부사 김명윤(金明胤), 지의금부사 송기수(宋麒壽), 【행신이 온공하였고 특이한 것을 입론하는 데 힘쓰지 않았다. 재산 관리를 힘써 가산이 매우 부유했다.】 동지의금부사 이건(李楗)이 명을 받들고 와 빈청에 모였다. 임금이 금부 및 이조에서 써서 아뢴 단자(單子)를 빈청에 내리면서 이르기를,
"근일 정현(鄭礥)의 상소가 있었고 역시 판부사의 계사(啓辭)가 있었다. 금부 죄인 가운데 억울함을 풀어주어야 할 사람이 있기 때문에 이미 써서 아뢰도록 하였다. 지금 내려준 단자가 그것이다. 그 가운데 원도(遠道)에 나가 있는 자는 중도(中道)로 옮기며 중도에 나가 있는 자는 근도(近道)로 옮기고 놓아 줄 만한 자는 놓아 주고, 직첩을 줄 만한 자는 직첩을 주되, 공론에 오르는 사람들을 경들이 잘 헤아려서 회계(回啓)하라."
하니, 대신 및 금부 당상 등이 회계하기를,
"신들이 지금 내린 단자를 삼가 보건대, 각 인의 죄명에 별로 뚜렷하게 지적되는 범죄 사실이 없습니다. 모두가 일시적인 말과 의논을 편 것이 더러 당시의 집권자 【이기와 윤원형.】 에게 거슬려 시기를 타 모함에 말려든 자들인 것 같습니다. 성상의 마음이 여기에 미치고 하문함이 신들에게 미치니, 인은(仁恩)이 미치는 바를 누군들 감격해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사람들을 이미 오래도록 귀양살이했다는 이유로써 이제 만약 그 억울함을 풀어 주게 된다면 이것은 바로 커다란 은명(恩命)인 것입니다. 은명에 관계되는 바를 아래에서 어찌 감히 논의할 수 있겠습니까. 죄명이 갖추어져 있으니 【이명이 ‘죄명이 갖추어져 있다는 말은 온당하지 못한 것 같으니 빼는 것이 어떠한가?’ 하였는데, 좌우에서 대답이 없었다.】 임금께서 깊이 통찰하시고 반드시 영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그런 뒤에 은혜가 위에서 나와 인심이 감복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히 아룁니다."
하였다. 죄인의 서계 단자(書啓單子)를 대내(大內)로 도로 들이고 얼마 있다가 단자에 부표(付標)하여 빈청으로 도로 내렸다. 진도에 안치된 노수신(盧守愼), 【심지가 고명하고 학문에 연원이 있으며 처신과 행사에 솔선하여 실천함이 모두 정직하였다. 정미년에 적소에 유배된 뒤 방안에서 조용히 지냈는데 조수(操守)가 더욱 굳었다.】 남해에 안치된 김난상(金鸞祥), 【효성과 우애의 행실이 있다.】 종성에 안치된 유희춘(柳希春) 【천품이 온아하고 경사에 박통했다.】 이상은 중도로 상량해 옮기고, 이성(利城)에 부처된 한주(韓澍), 태안에 부처된 이진(李震), 【연악하고 결단력이 없다. 이임(李霖)의 형으로 함께 적소로 쫓겨났다.】 강진에 부처된 윤강원(尹剛元) 이상은 근도로 양이(量移)하고, 경흥(慶興)에 안치된 유감(柳堪), 강계에 안치된 이원록(李元祿) 【이기(李芑)가 권세를 부릴 때를 당하여 비록 조카라는 지친간이었으나 여러번 이기의 전횡을 그르다고 지적하니 이기가 미워해 몰래 부하를 시켜 멀리 귀양을 가게 하였다. 일시의 사림들은 이원록의 무죄를 슬퍼하였고 이기의 흉악하고 잔인함이 심하다 하였다.】 이상은 놓아 보내고, 전 헌납 백인걸(白仁傑), 【성품이 강직하고 언론이 강개하였다. 을사년 위태한 때를 당하여 생사를 불계하고 감히 밀지의 그름을 논하니, 사림들이 이를 옳게 여겼다.】 전 정랑 이담(李湛), 【성품이 총명하고 강학에 힘썼다.】 전 도사 민기문(閔起文), 전 찰방 황박(黃博), 전 봉사 윤충원(尹忠元), 전 목사 송희규(宋希奎) 이상은 직첩을 환급하게 하였다. 【이명이 ‘죄명이 갖추어져 있다는 말을 뺀다면 은명(恩命)이 반드시 여기에서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 김충갑(金忠甲)·이염(李爓)·임복(林復) 등도 모두 죄가 없는데 그들만 용서를 받지 못하니 이것이 한탄스러운 일이다.’ 하니, 이준경이 ‘천은은 밑에 있는 자로서 간여할 바가 아니다. 이것도 다행한 일이다.’ 하였고, 이명이 또 ‘이 사람들은 모두 죄없이 20여 년을 귀양지에 버려진 사람들이다. 그 억울하고 원통함이 이미 극에 이르렀다면 밑에 있는 자의 도리에 당연히 그 애매한 정상을 힘써 진달해 상의 의심을 풀고 천은을 다함께 받게 하는 것이 또한 옳지 않은가.’라고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제공은 영해(嶺海)에서 20년을 지냈는데 하루아침에 양이(量移)되었다. 명이 내리던 날 우부 우부(愚夫愚婦)들도 흔쾌히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는 대개 천리의 자연(自然)이니, 인심을 어찌 속일 수 있겠는가. 이때 노수신은 옮겨진다는 말을 듣고 그 날로 길을 나서 얼첩과 아이들을 모두 남겨둔 채 돌아보지 않고 오직 돌아가 부모를 뵙겠다는 생각에 급했다. 곤궁한 데에 처해서도 변하지 않은 지조를 여기에서 더욱 징험할 수 있다 하겠다. 이원록은 지체하며 출발하지 않고 그 전토와 자산을 전부 팔아, 올 때는 바리에 실은 것이 길을 메웠고 지나치는 군읍에 우마를 색출해 이를 운송케 하니 사람들이 이로써 그를 비루하다 하였다. 윤충원(尹忠元)은 사류(士類)가 아니라 그 사람을 논할 필요는 없지만 당초의 득죄가 또한 잘못된 것이어서 억울하다 하겠다.
사신은 논한다. 회계(回啓)의 글을 고찰하건대 ‘죄명이 갖추어져 있다.’라고 하였다. 이른바 그 죄명이라는 것이 모두 얽어맨 데에서 나온 것인데 임금이 어떻게 능히 그렇게 된 까닭을 통찰할 수 있겠는가. 만약 그 죄명대로 그들을 단죄한다면 유배당한 여러 사람들을 임금으로 하여금 의심치 않게 할 수 있겠는가. 마침 성상의 마음에 먼저 이미 깨우침이 있어 반드시 그들을 풀어 놓아 주겠다는 결단이 있었기 때문에 은명이 크게 베풀어져 모두가 관용을 입게 된 것이다. 애석하다, 이준경은 일시의 명망이 있던 사람인데 그 머뭇거리고 두리번거림이 이와 같음이여. 하물며 다른 사람들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 【태백산사고본】 19책 31권 106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53면
- 【분류】사법-행형(行刑) / 변란-정변(政變) / 인사-관리(管理) / 역사-사학(史學) / 인물(人物)
○乙丑/上命召三公、鈴平府院君及禁府堂上。 鈴平府院君 尹漑、領議政李浚慶。 【性嚴重兼潔? 篤於友愛, 兄弟相待, 如朋友, 行年六十, 値兄潤慶之喪, 服衰服行期年之喪, 人多稱之。 頃者上體未寧之時, 爲國家大計, 倡立後之議, 陳請懇懇, 可謂得大臣之體也。 但陳請啓辭, 使承旨書之, 令尹健通之, 史官初不與知焉。】 左議政沈通源 【庸鄙無識, 心術不正, 志在富貴, 無恥太甚。 登第之日, 諂附金安老, 不恤人議, 物論鄙之。 常懷快快, 幸以戚理之故, 位至台鼎。 日以誅求刼奪爲事, 人多怨苦, 粘榜街路, 罵詈不已。 且尹元衡自知氣勢孤危, 欲爲攀援, 啗以金銀珠玉。 通源甘其厚賂, 略不辭讓, 其爲嗜利無狀至此。 頃日上體未寧, 大臣等爲國大計, 請建儲副, 中殿答以德興君第三子河城君 鈞欲立爲後。 通源聞傳敎, 遽起曰: ‘吾往守宮。’ 仍歸于侍藥廳。 李浚慶譏之曰: ‘往彼成何事。’ 李蓂曰: ‘利之所在也。’ 同列之輕侮如此。】 右議政李蓂、判義禁府事金明胤、知義禁府事宋麒壽 【行己溫恭, 不務立異。 營産甚力, 家計極富。】 同知義禁府事李楗, 承命來會于賓聽。 上以禁府及吏曹書啓單子, 下于賓聽曰: "近日有鄭礥,上疏, 亦有判府事啓辭。 禁府罪人可爲疏通者有之, 故已令書啓, 今下單子矣。 其中遠道者中道, 中道者近道, 可放者放之, 可給職牒者給職牒, 公論所在之人, 卿等商量回啓。" 大臣及禁府堂上等回啓曰: "臣等伏見今下單子, 各人罪名, 別無指的顯犯刑迹, 似皆一時言語議論之發, 或有見忤於當時執權之人 【李芑、尹元衡等也。】 乘時構陷者。 聖念及此, 問及臣等, 仁恩所及, 孰不感激? 第以此等諸人, 旣被久謫, 今若疏通, 則此乃大恩命也。 恩命所關, 在下何敢容議乎? 罪名俱在 【李蓂曰: "罪名俱在之言, 似乎未穩, 去之何如?" 左右不答。】 聖鑑洞照, 必須聖斷, 然後恩出於上, 人心斯服, 故敢啓。" 以罪人書啓單子, 還人于內。 有頃, 以單子付標, 還下于賓廳。 珍島安置盧守愼 【心地高明, 學問有源, 處身行事, 率履俱正。 丁未被謫之後, 靜居一室, 操守益固。】 南海安置金鸞祥 【有孝友之行。】 鍾城安置柳希春 【資稟溫雅, 博通經史。】 以上中道量移。 利城付處韓澍、泰安付處李震 【巽軟無斷。 以李霖之兄, 竝被謫黜。】 康津付處尹剛元, 以上近道量移。 慶興安置柳堪、江界安置李元祿 【當李芑用權之時, 雖以猶子之親, 累斥專擅之非。 芑銜之, 陰囑(瓜) 〔爪〕牙, 使之遠竄, 一時士林悲元祿之無罪, 甚李芑之凶忍。】 已上放送。 前獻納白仁傑 【性剛直, 言論慷慨。 當乙巳危疑之際, 不計死生, 敢論密旨之非, 士論韙之。】 前正郞李湛 【性聰悟, 力於講學。】 前都事閔起文、前察訪黃博、前奉事尹忠元、前牧使宋希奎, 已上職牒還給。" 【李蓂若去罪名俱在之言, 則恩命必不止此。 金忠甲、李爓、林復亦皆無罪, 獨不蒙宥, 是可歎惜。 李浚慶曰: "天恩非在下之所預, 此亦多幸。" 李蓂又曰: "斯人等, 俱以無罪之人, 謫廢二十餘年, 冤枉旣極。 在下之道, 固當力陳其曖昧情狀, 務釋上心之疑, 咸被天恩, 不亦可乎?】
【史臣曰: "諸公在嶺海二十年, 一朝量移命下之日, 愚夫愚婦, 莫不快之。 蓋天理之自然, 人心寧可誣哉? 是時盧守愼聞量移, 卽日登途, 所蓄孽妾兒子, 皆置而不顧, 惟以歸見父母爲急, 處困不變之操, 於此益可驗矣。 李元祿則遲回不發, 盡賣其田土資産, 來時駄載盈路, 所歷郡邑, 索出牛馬以運之, 人以此鄙之。 忠元則非士類, 而其人不足論。 但當初得罪, 亦冤枉耳。"】
【史臣曰: "按回啓之辭, 乃曰: ‘罪名俱在。’ 其所謂罪名, 皆出於羅織, 人主豈能洞照其所以然之故乎? 若因其罪名, 而斷之, 則被謫諸人, 其能使人主無疑乎? 適上心先已覺悟, 必以疏放爲意, 故大沛恩命, 咸得蒙宥。 惜乎! 浚慶爲一時倚望, 其逡巡顧望如此, 況其他乎?"】
- 【태백산사고본】 19책 31권 106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53면
- 【분류】사법-행형(行刑) / 변란-정변(政變) / 인사-관리(管理) / 역사-사학(史學) / 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