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원형의 졸기
윤원형이 강음(江陰)에서 죽었다. 처음 윤원형은 물론을 입어 재상에서 파면되었는데도 며칠을 지체하며 머물러 있다가 동문 교외로 나갔다. 많은 사람들의 분노가 그치지 않고 공론이 더욱 격렬함을 듣고 끝내 면하기 어려움을 알았으나, 또 가산이 흩어질 것을 염려해 어둠을 틈타 부인의 행색처럼 밤에 교자를 타고 도성에 들어와 집으로 돌아왔었다. 이어 그의 첩 정난정과 더불어 강음 전사(田舍)에 가서 거처하였는데, 정난정의 죽음을 보고 드디어 분울해 하다가 또한 죽었다.
윤원형이 사림들을 풀베듯 죽이며 흉악한 짓을 있는 대로 다했는데, 오래도록 천벌을 면하더니 금일에 이르러 마침내 핍박으로 죽으니, 조야가 모두 쾌하게 여겼다. 윤원형이 일단 패하고 나니 원수졌던 집에서 떼를 지어 빼앗겼던 재물에 대한 송사를 다투어 일으켰다. 조정에서도 그러한 사실을 알고 바로 각도에 이문(移文)하여 관원을 차출해 재물들을 본주인에게 돌려주게 하니 그 집안에서도 온갖 고통을 견딜 수 없게 되었다. 임금은 위사(衛社)의 공이 있다 하여 3등의 장례를 하사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전대의 권간으로 그 죄악이 하늘까지 닿기로는 윤원형 같은 자가 드물 것이다. 중종 말년, 인종이 동궁에 있을 때 사자(嗣子)가 없음을 보고, 그의 형 윤원로(尹元老)와 더불어 서로 어울려 헛소문을 만들어 동궁의 마음을 동요시켰으며 문정 왕후가 안에서 그 의논을 주장하였다. 이리하여 대윤(大尹)이니 소윤(小尹)이니 하는 말이 있게 되어 중종이 이 걱정으로 승하하였다. 혹자는 동궁이 실화한 것이 모두가 윤원형 등의 행위라고 하였다. 그 뜻이 또한 흉참하다 하겠다. 인종이 승하함에 미쳐, 윤임(尹任)을 핍박해 내쫓고는 스스로 편안하게 여기지 못하다가 끝내는 윤임이 다른 마음을 가졌다 하였으니, 실은 윤원형 등이 빚어낸 말이었다. 이 이후로 사림들 가운데 당시 명망이 있던 사람들을 일체 배척해 모두 역적의 무리로 몰아, 죽는 자가 계속되었다. 명종이 친정을 하게 되었지만 문정 왕후의 제재를 받아 자유롭지 못했는데, 윤원형은 무슨 일이고 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문정 왕후와 내통하여 명종을 위협하고 제재하여 임금의 우분(憂憤)이 언사와 안색에까지 나타나게 하였다. 내수(內竪) 중 혹 이를 아는 자가 있으면 윤원형은 궁인들에게 후히 베풀어 모두에게 환심을 얻었다. 때문에 임금의 일동 일정을 모르는 것이 없었다 하루는 상이 내수에게 ‘외친이 대죄가 있으면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라고 하였는데, 이는 대개 윤원형을 지칭한 것이었다. 이 말이 마침내 누설되어 문정 왕후에게 알려졌는데 문정 왕후가 이를 크게 꾸짖어 ‘나와 윤원형이 아니었다면 상에게 어떻게 오늘이 있었겠소.’ 하니, 상이 감히 할말이 없었다. 모든 군국(軍國)의 정사가 대부분 윤원형에게서 나와 상은 내심 그를 미워하여 이양(李樑)을 신임해 그 권한을 분산시켰다. 정사를 잡은 지 20년, 그의 권세는 임금을 기울게 하였고 중외가 몰려가니 뇌물이 문에 가득해 국고보다 더 많았다. 윤원로의 권세가 자기와 비슷해짐을 저어해, 윤춘년(尹春年)을 사주해서 그 죄목을 열거해 글을 올리게 해서 죽게 하였고, 천첩을 몹시 사랑해 정처를 버리더니 필경에는 그를 독살하는 변을 빚었으며 이어 첩으로 부인을 삼았다. 첩에게서 낳은 자식들을 모두 사대부가에 혼인시켰으며 자신이 죽은 뒤에라도 이에 이의를 제기하는 자가 있을까 두려워 첩의 자식도 벼슬을 허락해야 한다는 주장을 힘써 내세워, 이를 미봉하였다. 당시의 재집(宰執)들이 휩쓸려 그를 따랐지만 오직 임권(任權)만은 처음부터 끝까지 따르지 않았다. 기타 흉악한 죄들은 머리털을 뽑아 헤아린다 해도 다 셀 수가 없다. 비록 견출(譴黜)이 가해졌으나 체형(體刑)을 면했으니, 세상 인심의 분함을 이길 수 있겠는가.
- 【태백산사고본】 19책 31권 101장 B면【국편영인본】 21책 50면
- 【분류】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 / 변란-정변(政變) / 윤리(倫理)
○尹元衡死于江陰。 初元衡被論免相, 猶遲留數日, 乃出東郊外。 聞衆(恕)〔怒〕 不止, 公議尤激, 度其終不得免, 且慮家儲散失, 乘昏夜乘轎, 如婦人行, 入都門還家, 仍與其妾闌貞, 往處于江陰田舍。 自見蘭貞之死, 遂憤惋亦死。 元衡芟刈士林, 積惡窮兇, 久逭天誅, 以至今日, 卒以蹙迫而死, 朝野咸快。 一敗之後, 仇家成群, 爭訟攘奪之物。 朝廷亦知其然, 乃移文各道差官, 刷給本主。 其家亦不勝侵苦。 上以有衛社功, 賜葬三等禮。
【史臣曰: "前代權奸, 罪惡通天, 如元衡者鮮矣。 中宗末年, 見仁宗在東宮無嗣, 與兄元老, 胥動浮言, 動搖儲副, 而文定內主其議, 於是有大小尹之說。 中宗以憂薨, 或云東宮失火, 皆元衡等所爲, 其志兇且慘矣。 及仁宗薨, 逼迫尹任, 出不自安。 卒以尹任爲有異心, 實元衡等醞釀, 而成之也。 自是以後, 士林之有時望者, 一切貶斥, 皆以逆黨爲名, 死者相繼。 明宗旣親政, 猶爲文定所制, 不得自由, 而元衡凡有所爲, 必潛通文定, 脅制明宗, 上憂憤, 至形於辭色, 內竪或有知之者。 元衡厚施宮人, 皆得其歡, 故凡上之一動一靜, 無不知之。 一日上謂內竪曰: ‘外親有大罪, 何以處之?’ 蓋指元衡也。 語遂洩聞於文定, 大責之曰: ‘非我與元衡, 上安得有今日乎?’ 上不敢有所言。 凡軍國之政, 多出於元衡。 上心實惡之, 信任李樑, 以分其權。 秉政二十年, 權傾人主, 中外輻輳, 賄賂盈門, 富於國儲。 恐元老權侔於己, 嗾尹春年, 上書數罪, 致之於死。 酷愛賤妾, 棄別正妻, 竟致鴆殺之變。 仍以妾爲夫人, 孽産, 皆婚嫁於士大夫家。 恐身死之後, 猶有議之者, 力主妾子許通之議, 以彌縫之。 一時宰執, 靡然從之, 唯任權終始不從。 其他凶惡之罪, 擢髮難盡。 雖加譴黜, 得免金木, 輿情之憤, 可勝之哉。"】
- 【태백산사고본】 19책 31권 101장 B면【국편영인본】 21책 50면
- 【분류】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 / 변란-정변(政變) / 윤리(倫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