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 사화의 신원과 노수신·유감에 관한 성천 부사 정현의 상소
성천 부사(成川府使) 정현(鄭礥)이 상소하기를,
"삼가 생각건대 대역은 천하 만세에 함께 주살할 바로, 세월이 오래되었다고 하여 일시에 가벼이 놓아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 홍은(鴻恩)이 크게 펴져 중외가 서로 기뻐하는데, 막힌 것을 틔우는 조치가 을사 사화의 연좌인에까지 이르니 신은 놀라움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전하의 똑같이 사랑하는 마음에서 이미 결정한 명일 것이므로 소급해 고칠 필요는 없겠습니다. 그렇지만 일이 인심에 합당함을 잃은 것이 있으므로 신 같은 경우에 성명(聖明)께 사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위사(衛社)의 공훈은 선신(先臣) 정순붕(鄭順朋)이 실로 제일입니다. 당시의 일을 신이 비록 약관이었으나 참여해 알지 못하는 것이 없습니다.
노수신(盧守愼) 등의 경우는 처음에 역당(逆黨)의 공술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단지 이름이 세상에 널리 드러나 부박한 무리들에 의하여 추대된 것입니다. 몇 해 뒤에 횡액에 걸려 절도(絶島)로 쫓겨난 것은 그의 죄가 아닙니다. 《정난기(定難紀)》 가운데 그의 죄명이 실려 있지 않으니 이것이 변별할 점이 있는 것입니다. 유희춘(柳希春) 같은 경우는 당시 언관(言官)으로 있으면서 비록 실책이 있다고는 하지만, 선신의 상소를 보고서 비로소 그 일을 알고 놀라 후회하였으니 그 본심은 반드시 참여해 알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또 백인걸(白仁傑)은 종사의 대기(大幾)를 알지 못하고 밀지(密旨)의 그릇됨을 함부로 말했으니, 그 죄가 당연하나 위의(危疑)한 때를 당하여 홀로 서서 항언(抗言)했으니 강직하지 않고서야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선신은 그가 타의가 없음을 알고서 다시 대간으로 삼고자 하였으나 다른 사람에 의해 저지되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람이 한둘에 그치는 것이 아니며, 모두가 정범(情犯)의 잘못은 아닙니다. 또 쓸 만한 인재들로서 폐고(廢錮)된 지 20년의 오랜 기간에 이르고 있으니, 이른바 천지(天地)의 큼에도 오히려 유감된 바가 있다는 것입니다.
유감(柳堪)의 일은 신도 그 내용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가 《무정보감(武定寶鑑)》을 필요한 책이 아니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이조(吏曹)의 인책(印冊)을 맡은 아전으로서 종이를 함부로 훔친 자가 또 인지(印紙)를 청하므로 유감(柳堪)이 홧김에 ‘또 종이를 훔치려는가? 책은 찍어 뭐하는가.’라고 꾸짖었습니다. 창졸간의 한마디 말이 마침 《보감》 간행 시기에 당했는데 옆에서 보던 동료 【유감이 정준(鄭浚)을 이조에 천거하지 않았는데, 정준은 윤원형의 첩 정난정의 종형이었다. 한지원(韓智源)이 윤원형에게 아첨하고자 하였고 또 유감이 자기에게 아부하지 않는 것을 미워해 이것으로써 윤원형에게 알리고 이기에게 모함하였다.】 가 죄를 빚어 만들어 평일 비위를 거스른 사람 【이원록(李元祿).】 까지 아울러 얽어매니 끝내 스스로 변명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 정상이 가련합니다. 성명께서는 이를 살펴 주소서.
선신의 평생 우국(憂國)의 정성은 천지 신명 앞에 환하여 부끄러운 점이 없습니다. 그런데 정승이 된 뒤 같은 공신이 윗자리에 거하여 【이기(李芑).】 일을 다 스스로 독단하였습니다. 선신이 하고자 했던 것은 걸핏하면 제지를 당해 답답히 뜻을 펴지 못하고 마쳤으니 신의 비통함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신이 일을 만나 문득 말을 하는 것은 감히 명예를 구하고 진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대개 선신의 유의(遺意)를 이어 전하의 망근한 은혜에 보답하려는 까닭에서입니다. 신이 전일에 진작 말씀드리려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만, 사세에 구애됨이 있어 입을 열 수 없었습니다. 이제 멀리 떠나감을 당하여 품고 있던 바를 간략히 개진하니, 전하께서는 이를 살펴 주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이 계사(啓辭)를 보니 위에서 서서히 헤아려 처리해야 하겠다."
하였다. 【당시 윤원형이 이미 제거되어 정론(正論)이 한창 비등해 을사년의 무죄한 사람들을 설원(雪冤)코자 하였는데, 정현(鄭礥)이 인심의 울분을 짐작하고 갑자기 이러한 소를 올리니, 타기하고 비루하다고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사신은 논한다. 을사의 화는 정현의 아비 정순붕이 주창했다. 그가 병중에 쓴 소 하나를 보면, 그 흉악하고 참독한 정상이 만세에 전해 폐간(肺肝)을 보듯 분명한데 어찌 알기가 어렵겠는가. 정현은 그때 약관으로 음험하고 각박한 것이 천성처럼 되어 남을 해치는 데 뛰어났다. 세상에서는 정순붕의 이 소가 정현의 손에서 나왔다고도 했다. 그 아비는 항상 귀역 같은 음모를 품고 사림을 일망 타진하고자 하였는데, 얽어맬 만한 꼬투리가 없었고 탈 만한 틈이 없었다. 그 흉악함이 익고 쌓인 것은 하루이틀의 일이 아니었다. 인종이 승하한 뒤 주상이 유충함을 틈타 드디어 임백령·윤원형·이기 등과 작당하여 서로 손발을 맞추어 반역의 이름으로 만부(萬夫)의 입에 재갈을 물리려 하였다. 그러나 인심이 정해지지 않아 억눌러 막을 수가 없자 정현에게 몰래 밤낮으로 임백령·윤원형·이기의 집을 왕래하며 백방으로 얽어맬 궁리를 하게 하니, 정현이 마침내 먼저 저들의 생각을 짐작하고 일을 만들어 영합하면서 좌우에 따라 모두 알맞도록 하였다. 늙은 간흉들의 음계가 미처 미치지 못했던 것을 정현은 반드시 먼저 생각해 냈고, 정순붕은 매사를 그에게 자문하였다. 정현의 형 정염(鄭𥖝)은 착한 사람이다. 그 아비의 악행이 여기에까지 이른 것을 슬퍼하여 밤낮으로 울며 간했다. 정순붕은 일을 그르칠까 두려워 정현과 공모하여 정염을 죽이려 했다. 정염은 일생 동안 거의 산중에서 지내다가 슬픔을 안고 죽었다. 이를 지금까지 선비들은 슬퍼하고 있다. 그 흉모가 드디어 이루어지니 사람들은 결딴이 났다. 그 공을 기록해 정난 공신(定難功臣)이니 위사 공신(衛社功臣)이니 했는데 정순붕이 첫째가 되었으며 정현도 거기에 참여되니, 이리저리 뛰어다닌 공로였다. 정현이 훈부(勳府)에 있었을 때 그 벽에 다음과 같은 시를 적어 놓았다. 을사년 가을 나라에 우환이 있자 뭇 현인이 협력하여 종사를 보호했네 벽에 이름이 적혀 있는 곳을 쳐다보니 우리 아버지가 제일 위에 있네 윤원형이 복죄한 뒤 위와 같은 소로 백인걸과 노수신 등을 구해 말하기를 ‘이는 실로 선신 정순붕의 뜻이다.’ 하였다. 바야흐로 백인걸이 밀지의 잘못됨을 논한 것이 위로 자전(慈殿)의 노함을 촉발했을 때, 정순붕은 수의(收議)에서 마땅히 죄를 주어야 한다고 했었다. 그런데 도리어 정순붕이 그를 다시 대간으로 삼고자 하였다 하니, 국인의 이목을 속일 수 있겠는가. 심하다, 효경(梟獍) 같은 악인의 자식이 감히 임금을 속임이여! 여항의 일반 사람들 속에서는 팔을 걷어붙이고 큰소리로 ‘을사년 일에 관련된 사람은 그 죄로써 죄를 받은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들을 신구(伸救)하자는 의논이 있으니 이것은 문정 왕후가 한 일을 잘못된 것이라고 한 것이니 될 말인가.’ 하고는, 드디어 터무니없는 말을 얽어 장차 난을 만들고 화를 일으키려 하였다. 조정이 죄를 주려 해도 임금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없고 화단(禍端)을 더 만들까 두려워 우선 외직을 제수해 형적이 없도록 하였다. 통탄스럽다, 정현은 일개 천부(賤夫)로서 그 죄악이 또 이와 같은데 조정 공론이 제대로 행해지지 않으니 어찌 상심할 일이 아니겠는가.
- 【태백산사고본】 19책 31권 96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48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사법-행형(行刑) / 변란-정변(政變) / 역사-사학(史學)
○壬辰/成川府使鄭礥上疏曰:
伏以, 大逆天下萬世之所共誅, 不可以歲月之久遠, 輕釋於一時也。 今者鴻恩大霈, 中外胥悅, 而疏通之擧, 至及於乙巳緣坐, 臣不勝驚駭。 然必殿下一視同仁之盛心, 已成之命, 不必追改, 而事有失宜於人心者, 如臣則不得不白於聖明之下也。 衛社之勳, 先臣順朋實居第一。 當時之事, 臣雖弱冠, 靡不與知。 如盧守愼等, 初不出逆黨之供, 只以名重一世, 爲浮薄徒所推許, 橫罹於數年之後, 投畀絶島, 非其罪也。 定難紀中, 不載其罪名, 此有所辨明也。 若柳希春, 方在言官, 雖云有失, 及見先臣疏章, 始知其事, 愕然追悔, 其本心必不至與聞也。 且白仁傑不知宗社大幾, 妄論密旨之非, 固可罪也。 然當危疑之際, 獨立抗言, 非剛而能若是乎? 先臣知其無他, 欲更以爲臺諫, 爲他議所沮。 如此等人, 非止一二, 皆非情犯之辜。 又有適用之才, 而廢錮至於二十年之久, 所謂天地之大, 猶有所憾也。 至於柳堪事, 臣亦嘗聞其實矣。 非以武定寶鑑, 爲不關之書, 吏曹印冊之吏, 濫竊紙地者, 又請印紙, 堪乘怒叱之曰: ‘又欲偸紙乎? 何用印冊?" 爲倉卒一言, 適當寶鑑之印, 傍觀同列, 【堪不薦鄭浚于天官。 浚, 尹元衡妾蘭貞之從兄也。 韓智源欲諂元衡, 而又惡堪之不附己, 以此聞于元衡, 而構于李芑。】 釀成其罪, 而幷及平日見忤之人, 【李元祿。】 終無自明之路, 情可憫也。 伏願, 聖明垂察焉。 先臣平生憂國之誠, 臨之質之, 炳然無愧, 而作相之後, 同功者居上, 【李芑。】 事皆自專, 凡先臣所欲爲, 動被掣肘, 悒悒齎志而終。 臣之悲慟, 寧有紀極? 臣之遇事輒論, 非敢以要名進取。 蓋所以遵先臣遺意, 報殿下罔極之恩也。 臣非不欲早言於前日,而勢有阻礙, 未能開口矣。 今當遠離, 略陳所懷, 伏願, 殿下垂察焉。
傳曰: "觀此啓辭, 自上徐當量處。" 【時元衡旣去, 正論方騰, 欲雪乙巳無罪之人, 礥揣人心之憤, 遽上此疏, 人莫不唾鄙。】
【史臣曰: "乙巳之禍, 礥之父順朋倡之。 觀其病中一疏, 其兇譎慘毒之狀, 傳之萬世, 如見其肺肝, 豈難知乎? 礥於其時, 年甫弱冠, 陰刻成姓, 戕伐才長。 世云: ‘順朋此疏, 或出於礥手。’ 乃父常懷鬼蜮之謀, 欲以一網打盡士林, 而無形可構, 無釁可乘, 積兇稔惡, 蓋非一日。 方仁廟賓天之後, 乘主上幼沖, 遂與林百齡、尹元衡、李芑等, 締結心腹, 首尾相應, 欲以叛逆之名, 箝制萬夫之口, 而人心不定, 抑遏不得。 於是密令礥, 晨夜往來於百齡、元衡、芑之家, 百般羅織, 礥遂先意迎事, 左右宜之。 凡老奸陰計之所未到者, 礥必先領會, 順朋每事咨詢焉。 礥之兄𥖝, 善人也。 憫其父之爲惡至此, 日夜泣諫。 順朋恐其敗事, 與礥謀殺之。 𥖝之一(主)〔生〕 , 多在山中, 抱憫以沒, 至今士類悲之。 及其兇謀旣遂, 士林魚肉。 錄其功曰: ‘定難衛社。’ 以順朋爲首, 而礥亦參焉, 奔走之勞也。 礥嘗在勳府, 題其壁上曰: ‘乙巳之秋國有憂, 群賢協力保金甌。 試看壁上題名處, 吾父之名最上頭。" 元衡伏罪之後, 又以此疏, 救白仁傑、盧守愼等曰: "此實先臣順朋之意也。’ 方白仁傑論密旨之非, 上觸慈殿之怒, 順朋嘗於收議, 以爲當罪之, 而反謂順朋欲更以爲臺諫, 國人之耳目, 其可欺乎? 甚矣! 梟獍之雛, 敢於罔上也! 至於閭巷廣衆之中, 則攘臂大倡曰: ‘乙巳之人, 以罪罪之, 而今有伸救之議。 是以先后所爲, 爲謬擧, 其可乎? 遂潛搆無形之言, 將造亂基禍, 朝廷欲加之罪, 而恐不能感動上心, 益成厲階, 姑除外職, 而俾無形迹。 吁! 礥一介賤夫, 其罪惡又如此, 而朝廷公論不得行焉, 豈不傷心哉?"】
- 【태백산사고본】 19책 31권 96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48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사법-행형(行刑) / 변란-정변(政變) / 역사-사학(史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