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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실록 31권, 명종 20년 8월 14일 무인 1번째기사 1565년 명 가정(嘉靖) 44년

윤원형의 죄악을 26조목으로 올린 대사헌 이탁과 대사간 박순 등의 봉서

대사헌 이탁(李鐸)과 대사간 박순(朴淳) 등이 봉서(封書)를 올렸다. 그 내용에,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는 인심을 순히 하는 데 있고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은 공론을 펴야 합니다. 인심이 순하면 나라는 그 때문에 안정이 되고 공론이 펴지면 나라는 그 때문에 편안해지는 것이니, 이는 필연적인 이치입니다. 만약 인심이 거슬렸는데도 순히 할 줄을 모르고 공론이 막혔는데도 펼 줄을 모른다면 나라 형편은 틀림없이 위태롭게 되고 나라의 근본은 결국 쓰러지게 될 것입니다. 예로부터 나라를 융성하게 한 임금은 모두 인심을 순히 하고 공론을 폈으며, 나라를 어지럽게 한 임금은 인심을 거슬리고 공론을 막았습니다. 이는 이미 지나가 버린 잘잘못이지만 장래의 귀감이기도 합니다.

전 영의정 윤원형은 본래 간사하고 음흉한 사람입니다. 국구(國舅)로서 왕실(王室)과 가깝다는 핑계로 공신의 자리에 참여했으며 영상의 자리에 올라 일국의 정권을 쥐고 임금의 위엄을 빌어 생살 여탈을 제마음대로 하였으며 정신(廷臣)들을 얽어 놓아 성쇠가 그의 입에 달려 있었습니다. 위엄과 권세가 날로 높아져서 형세가 양기(梁冀)의 가문보다 더 빛나고, 축재하는 욕심이 한이 없어 동탁(董卓)의 만세오(萬歲塢)113) 보다 더 호화롭습니다. 백관이 앞을 다투어 뜻을 받들고 팔도(八道)에서 남보다 뒤질세라 뇌물을 바칩니다. 도로에 다니는 사람은 마음속으로 성을 내고 눈을 흘기며 항간에 있는 사람은 마음속으로 비방하고 구석에서 한탄합니다. 임금의 세력이 날로 약해지고 국운이 장차 엎어지려 하니, 이것이 어찌 일조일석에 생긴 일이겠습니까. 그 유래가 오래되었습니다. 저지른 죄악은 이미 극도에 달하여 머리카락을 뽑아가며 셀지라도 이루 셀 수 없고 온갖 간사한 작태는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신들은 우선 만인의 입에 오른 것과 만인의 눈으로 본 것을 뽑아서 전하를 위해 조목별로 진술하겠습니다.

첫째, 거리낌없이 제마음대로 결정하여 행한 것이 열 가지 조목이 있습니다.

1. 혼례(婚禮)를 갖추면 아내가 되고 야합하면 첩이 되는 것은 고금의 공통된 의리입니다. 명문가의 처녀라고 하더라도 한번 첩으로 이름지어지면 다시 바꿀 수 없는 것인데 더구나 관비(官婢)의 소생을 올려서 부인으로 삼았습니다. 이는 왕법(王法)을 무너뜨리고 기강을 어지럽힌 것이니 과연 조정을 의식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2. 측실 소생을 사대부에게 시집보내는 것은 옹주(翁主)를 하가(下嫁)하는 예법입니다. 덕흥군(德興君) 이초(李岹)의 아들은 중종 대왕의 손자이고 벼슬이 정2품인데, 측실의 소생을 존귀한 사람과 혼인시키려고 도모했으니 명분을 범함이 이보다 심한 것은 없습니다. 과연 임금을 의식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3. 을사년114) 난리를 평정했을 당시에 이미 ‘역적과 혼인하면 모두 북변(北邊)으로 내어쫓아 왕법을 보이겠다.’고 하였는데, 더불어 결혼하여 일가를 삼고 죄를 씻어주고 서용하였으니, 이는 국가의 역적임을 잊어 버리고 임금의 원수를 대단치 않게 여긴 처사입니다.

4. 궁위(宮闈)는 지엄한 곳이므로 내외가 현격하여 외부인이 출입할 수 없는데, 문정 왕후의 병세가 위중하실 때 첩을 보내어 사가(私家)와 다름없이 곧바로 들어가서 문안하였고, 심지어 내의(內醫)에게 호령하고 함부로 잡약을 올렸는데도 의관과 제조가 감히 막지 못하였습니다.

5. 별처럼 벌여 있는 팔도의 군읍(郡邑)과 바둑판처럼 펼쳐진 크고 작은 진보(鎭堡)에, 앞뒤로 절월(節鉞)을 받은 자는 모두 빚을 진 장수이고 병부(兵符)를 차고 출입하는 자는 모두가 은혜를 입은 관리들입니다. 육지로 뇌물을 운반하느라고 백성들은 거의 흩어져 방랑하고, 바다로 곡식을 운송하느라고 군졸들도 극도로 병들고 쇠약해졌습니다. 멀고 가까운 곳을 따질 것 없이 청탁하는 편지가 구름처럼 날아들고 전최(殿最)할 때에 마음대로 못하도록 방백들을 견제하였습니다.

6. 관작(官爵)은 임금의 대권(大權)이고 형옥(刑獄)은 천하의 대명(大命)입니다. 그런데 뇌물을 받고 벼슬을 제수하되 벼슬의 고하는 그의 청탁에 따라 주고 뇌물을 받고 형벌을 면하게 해주되 죄의 경중은 그의 지시에 따라 정하니, 전관(銓官)은 제수하는 도목만 조심하여 시행할 뿐 현우(賢愚)를 따져 묻지 못하고 사구(司寇)는 공손히 명하는 대로 따를 뿐 경중(輕重)을 논하지 못하였습니다.

7. 사람을 죽인 자를 사형에 처하는 것은 나라에 상형(常刑)이 있으므로 아무리 의빈(儀賓)·공자(公子)라 해도 너그럽게 용서할 수 없는 것인데, 사나운 종이 세도를 빙자하여 남의 아내를 속여 간음하고 전택(田宅)을 약탈했으며 심지어 대낮에 사람을 죽였는데도 관리가 감히 문죄하지 못하였으니, 위세가 어떠한지는 이것만 보아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8. 산림(山林)과 천택(川澤)은 백성과 함께 향유해야 하는 것이므로 나라를 가진 임금도 오히려 그렇게 합니다. 수락산(水落山)은 서울과 아주 가까이 있어서 나무꾼들도 가고 꿩과 토끼 사냥하는 사람도 가는 곳인데, 온 산을 절수(折受)하여 시장(柴場)으로 만들어 그곳에 거주하는 백성을 내쫓고 그곳에 있는 무덤을 파헤치는데도 인근에 사는 사람들은 호소할 길조차 없었습니다. 심지어 약조를 만들어 관가의 부역처럼 나무를 세로 바치게 하였습니다.

9. 노마(路馬)115) 는 법도가 있어서 꼴만 차도 목을 베는데 감히 궁중의 준마에 첩을 태우면서 조금도 꺼리는 마음이 없었고, 산릉(山陵)의 역사는 국가의 대사인데 사복시의 거마(車馬)를 자기 집 문전까지 부역시켜 관리가 쓰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10. 무고(武庫)에서 일하는 철공(鐵工)은 병기를 만들어 급한 일이 생길 때를 대비하는 것인데 사사로이 집에서 일을 시켜 국사를 돌볼 겨를이 없게 하였고, 차량(車輛)을 두는 것은 무기를 운반하여 군국(軍國)의 일을 엄중히 하는 것인데, 사사로이 물건을 운반하여 수레가 부서지고 소가 죽었습니다.

둘째, 부정한 짓으로 끝없이 재물을 탐하는 것이 열 가지 조목이 있습니다.

1. 하늘 높이 치솟은 화려한 저택을 가항(街巷)까지 연하도록 10여 채를 짓고, 부정하게 들어온 보화가 그 속에 가득하며 가혹하게 거둬들인 재물이 밖에까지 넘치는데도 끊임없이 집을 지어 토목 공사가 한창이고, 진(秦)·농(隴)에서 생산되는 재목이 강 머리까지 연이었으니, 어찌 목요(木妖)116) 가 일어났다는 기롱에서 그칠 뿐이겠습니까.

2. 해변의 간척지와 내지(內地)에 죽 잇닿은 기름진 전답을 모두 사사로이 점유하고 관(官)에서 종자를 대어주고 수령이 감농(監農)하게 하니, 관창(官倉)에 저축한 곡식의 절반은 일꾼들 밥해 먹이는 데 쓰이고 밭에서 일하는 농부는 모두 경작하는 종이 되어 농장이 있는 곳마다 모두 원성이 대단하니, 어찌 지벽(地癖)117) 이란 기롱만 있겠습니까.

3. 상인(商人)을 불러모아 집 앞에다 시장을 열어 수레와 말에 실어온 청동(靑銅)과 백금(白金)을 구름처럼 모아놓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건을 간품(看品)하고 멋대로 값을 정해서 사들인 물건을 산적해 두므로 시장의 물건이 하루아침에 거의 다 없어졌으니, 동취인(銅臭人)118) 이라 하더라도 이렇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4. 역관(譯官)을 불러놓고 잡물(雜物)을 주며 남금(南金)·대패(大貝)·제환(齊紈)·촉금(蜀錦)을 조목별로 적어서 연경(燕京)의 시장에서 사오게 하는데 값은 적게 주고 물건은 많이 가져오게 하니 반드시 남에게 꾸어서 부족한 숫자를 채워야만 호독한 질책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욕심 많은 오랑캐 상인도 이렇게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5. 반력(伴力)은 정수가 있는 것인데, 여러 고을의 양정(良丁)과 부호(富戶)를 함부로 점유하고 예속시켜 그 숫자가 크게 늘어났습니다. 부역의 대가를 징수하는데 독촉이 성화(星火)보다 급하고 미포(米布)를 차출하는데 해독이 인족(隣族)에게까지 미쳤습니다. 심지어 강제로 욱대기면서 요구하여 함부로 전민(田民)을 약탈하므로 가산을 탕진한 자가 계속 생겨 거처를 잃고 방랑하면서도 호소할 길이 없었습니다.

6. 사납고 억센 자가 주인을 배반하는 것은 강상(綱常)을 범한 죄에 해당하는 것인데, 죄짓고 도망한 자들을 불러들여 소굴을 만들어 놓으니 죄를 지은 노복(奴僕)들이 서로 이끌고 모여들어 그 수가 대단히 많습니다. 그리고 송사를 좋아하는 무리가 자신이 불리한 것을 알고 되면 되고 안되면 그만둘 생각으로 일단 이익을 등분할 계획을 세우고 문서를 만들어 그의 집으로 보내면, 정당한 사람이라도 말을 못하고 물러나와 감히 다투지 못하였습니다.

7. 와서(瓦署)의 보병(步兵)은 관가의 벽돌과 기와를 만들기 위하여 있는 것인데 스스로 절반을 차지하므로 역부(役夫)가 치우치게 고생하고, 지사(紙司)에서 만드는 자지(咨紙)는 사대 문서(事大文書)를 작성하기 위한 것인데 사사로이 닥나무 껍질을 보내어 공공연히 팔아먹었으니, 국가에 손해를 끼치고 사복을 채운 것이 거의 이와 같습니다.

8. 공물(貢物)을 방납(防納)하는 것은 시정배가 하는 짓인데 하나를 바치고 열을 징수하여 많은 이익을 취하였고, 고초(藁草)를 판매하는 것은 촌민도 하려 들지 않는 것인데 배로 경강(京江)에 운반하여 곡식과 포목 값을 받고 팔았으니 이익이 되는 것이라면 하찮은 것도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9. 윤백원(尹百源)은 그의 친조카인데 죄를 짓고 귀양가던 날 모든 노비와 성 근처의 기름진 전답을 협박과 우격다짐으로 빼앗아서 자기 소유로 삼았고, 김경석(金景錫)은 재상을 지낸 사람인데 을묘년119) 에 잡아다 국문할 당시 금부 당상으로서 많은 돈과 영단(纓緞)을 뇌물로 받았습니다.

10. 여러 곳의 농장에 소를 분양하고 장부를 만들어 점검하며 들판에 가득하게 하였으며, 번식하는 숫자가 더러 줄기라도 하는 날이면 마구 징수하는 폐단이 이웃에까지도 미쳤습니다.

세째, 사치스럽고 참람되며 능멸하고 핍박한 죄인데, 그 조목이 3가지가 있습니다.

1. 여자가 부엌일을 맡는 것은 가정의 상례인데 내옹(內饔)과 같이 선부(膳夫)를 따로 두었고, 호화롭고 큰 상에는 팔진미(八珍味)를 고루 갖추어 하루에 만전(萬錢)씩을 소비하면서도 항상 하증(何曾)이 수저 둘 데 없다고 탄식120) 하듯 했습니다.

2. 사복시의 타락죽은 상공(上供)하는 것인데 임금께 올릴 때와 똑같이 낙부(酪夫)가 기구(器具)를 가지고 제 집에 와서 조리하게 하여 자녀와 첩까지도 배불리 먹었습니다.

3. 집에는 비단으로 만든 휘장을 치고 금은으로 꾸민 그릇을 사용하였으며 사치스러운 가구와 집기는 임금에게 비길 만하고 첩들의 사치한 복식은 대궐보다 지나쳤습니다.

네째, 잔인한 마음과 경박한 행동인데 3가지 조목이 있습니다.

1. 문정 왕후가 지위로는 국모이시고 친분으로는 동기이십니다. 평생에 입은 은총이 하늘과 같이 넓고 커서 망극한데, 승하하시던 날 부음을 듣고 입궐하여 평시와 같이 밥을 먹었고, 재궁(梓宮)에 모실 때에는 빨리 뚜껑을 덮게 하며 조금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습니다.

2. 동궁이 돌아가신 이후 옥체가 편치 않으시어 자주 약을 올리므로 중외의 신료들이 모두 민망스럽게 여겼는데 수상의 신분으로 문안드리는 일 같은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조정에서 먼저 말을 꺼내면 범범하게 따라서 행했을 뿐입니다.

3. 부부란 인륜이 시작되는 바인데, 정처를 버리고 혼수 예물을 추후로 징수하였으며 가산(家産)까지 빼앗아 굶어죽게 만들어 영원히 한없는 원한을 품게 하였으므로 듣는 자가 눈물을 흘렸습니다.

대체로 이 26가지 일은 작은 것은 백성을 병들게 하고 정치를 어지럽게 할 만하며 큰 것은 국가를 패망하게 할 만합니다. 신하로서 이 중에 한 가지라도 있으면 하루도 조정에 용납할 수 없는 것인데 하물며 여러 가지를 고루 갖춘 자이겠습니까. 윤원형은 이와 같은 죄를 짓고서도 오만하게 조정에 버티고 앉아서 간악한 짓이 늙어갈수록 심해지는데도 충성된 사람이 곧은 말을 못하고 직언하는 사람이 항변하지 못하였던 것은 두려운 위세를 건드릴 수 없고 대단한 세력을 범하기 어려워서였습니다. 조야(朝野)가 허둥대고 상하가 두려워하여 몸을 움추리며 조석을 보전하지 못할 것 같았는데, 다행히 하늘이 은밀히 유도하고 종사가 묵묵히 도와서 울분해 하던 인심이 격발하여 공론을 일으켰으니, 이는 참으로 위태로운 것을 바꾸어 편안하게 만들고 막힌 운수를 뒤집어 터진 운수로 돌아오게 하는 계기입니다. 나그네가 서로 경하하고 신민이 모두 기뻐하여 고개를 빼고 발뒤꿈치를 들고서 귀양보내라는 명이 있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정승의 직위만 체직하라고 한번 명하신 이후로 도리어 그대로 밀고 나가시려는 뜻을 보이시어 분부하실 적마다 원훈 대신은 귀양보낼 수 없다고 하시니, 신들은 의혹이 됩니다. 우리 나라의 이숙번(李叔蕃)태종을 도와 좌명 공신(佐命功臣)이 되었고 유자광(柳子光)은 세 조정에서 공을 세웠으니, 그 공이 위대합니다. 그러나 죄를 짓자 하루아침에 귀양보내어 외지에서 늙어 죽게 하였으니, 이는 공이 있다고 하여 죄를 덮어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윤원형이 국구이고 또 원훈 대신이라 하더라도 은총 때문에 법을 폐하거나 공 때문에 죄를 덮어둘 수 없는 것은 분명합니다.

전하께서 등극하신 이래로 단잠을 설치고 식사를 제때에 못하면서 정성을 다해 정치에 힘써, 성색(聲色)을 좋아하고 사냥을 즐기며 토목 공사를 일으키고 신에게 기도하는 허물이 있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치화(治化)가 드러나지 않아 나라의 형편이 날로 위축되고 덕택이 끝까지 미치지 못하여 백성이 날로 곤궁해져서 조종조의 어렵고도 큰 사업과 열성조의 넓고도 정밀한 터전을 누란의 위기에 이르게 하고도 전하께서는 스스로 깨닫지 못하시니, 전하께서는 형체를 보지 못하시겠으면 그림자라도 살피소서. 요즈음 하늘은 천변을 보이고 땅은 지진을 일으켜 발생하지 않은 재변이 없고 일어나지 않은 재앙이 없으니, 무슨 일 때문에 나타난 것이라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으나 밝은 하늘이 성내는 이유가 왜 없겠습니까. 더구나 가을 천둥과 우박의 재변이 모두 공론을 굳이 거절하신 날 일어났으니 인자한 하늘이 전하에게 경고한 까닭이 여기에 있지 않다고 어찌 알겠습니까. 아, 화합되려던 인심이 사기가 꺾여 놀라고 의심하며 신장되려던 공론이 막혀서 통하지 못하게 되자 중외(中外)가 흉흉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전날보다도 심하니, 하늘은 우리 백성을 통해서 보고 듣는다는 것을 또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정승의 직위를 체직시킨 가벼운 벌을 가지고 윤원형의 죄에 합당한 것이라고 생각하시어 하늘의 노여움에 보답하고 인심을 위로하고자 하시는 것입니까? 신들은 국가의 일이 끝내 어떻게 될지를 모르겠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열흘이 넘도록 정성을 바치며 스스로 물러날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그래도 결단을 명쾌하게 내리지 않으시면 어찌 공론이 막히고 인심이 잘못되기만 하겠습니까. 틀림없이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 있게 될 것입니다. 굳은 얼음이 닥치는 것은 반드시 서리를 밟을 때에 경계해야 하고121) , 굴뚝을 굽게 만드는 계책은 이마를 그을리기 전에 있어야 하는 것122) 이니 전하께서는 유념하소서.

신들은 모두 변변찮은 인물로 언관(言官)의 자리에 있으면서 항상 충성을 다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나 조금도 보답하지 못하였는데 국가의 일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을 보고 차마 끝까지 잠자코 있을 수 없어서 감히 인심이 같이 느끼는 것과 일국의 공론을 전하에게 아뢰니, 보시고 신중히 생각하시어 흔쾌히 먼 곳으로 귀양보내시면 국가가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전 영상의 일은 논집한 지가 벌써 열흘이 지났다. 상소한 26조목은 내가 불민하기는 하나 어찌 공론이 어떻다는 것을 알지 못하겠는가. 계사(啓辭)가 들어오는 것을 볼 적마다 내 마음은 항상 불안하다. 내가 흔쾌히 따르지 못하는 것은 종사에 큰 공이 있고 문정 왕후의 동기이기 때문이다. 귀양은 보내지 않았더라도 하루아침에 정승의 직위를 면직시키고 제조까지 체직하여 국정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였고, 또 문 밖 출입을 금하고 근신하며 성문 밖에 퇴거하라 하였으니 국가에 무슨 해로움이 있겠는가. 공신의 관작과 봉록만 보존하고 있을 뿐이니 귀양까지 보내는 것은 결코 따를 수 없다. 양사는 나의 간곡한 분부를 유념하고 번거롭게 고집하지 말라.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귀양보내라고 세 번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홍문관이 귀양보내라고 두 번 차자를 올렸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 【태백산사고본】 19책 31권 54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27면
  • 【분류】
    재정(財政) / 신분(身分) / 사법-탄핵(彈劾) / 왕실-비빈(妃嬪) / 윤리(倫理) / 농업-경영형태(經營形態) / 인사-관리(管理)

  • [註 113]
    동탁(董卓)의 만세오(萬歲塢) : 동탁은 후한(後漢)의 권신(權臣)으로 욕심이 무척 많은 사람인데, 섬서성(陝西省) 미현(郿縣)에 만세오라는 커다란 집을 짓고 그 속에 수만 근이나 되는 금은(金銀)을 저장하여 두었다는 고사가 있다. 《후한서(後漢書)》 권72 동탁전(董卓傳).
  • [註 114]
    을사년 : 1545 명종 1년.
  • [註 115]
    노마(路馬) : 임금이 타는 수레를 끄는 말.
  • [註 116]
    목요(木妖) : 제택(第宅)을 지나치게 화려하게 치장하는 사람을 기롱하는 칭호. 당(唐)나라 내신(內臣)이었던 융수(戎帥)가 지나치게 정관(亭館)을 치장하여 시속이 그를 목요라고 호칭한 데서 유래되었다.
  • [註 117]
    지벽(地癖) : 지나치게 토지 구입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일컫는 칭호.
  • [註 118]
    동취인(銅臭人) : 돈을 가지고 관작(官爵)을 사거나 돈 많은 사람을 기롱하는 칭호임. 후한 때 최열(崔烈)이 돈을 가지고 벼슬을 샀는데 사람들이 그를 미워하여 동취라고 칭했다. 《후한서(後漢書)》 권52(卷五十二) 최인열전(崔駰列傳).
  • [註 119]
    을묘년 : 1555 명종 10년.
  • [註 120]
    하증(何曾)이 수저 둘 데 없다고 탄식 : 지나치게 사치스런 식생활을 지적한 말임. 진(晉)나라 하증(何曾)이 사치를 좋아하여 유장(帷帳)과 거복(車服)을 화려하게 꾸몄을 뿐만 아니라 음식도 임금보다 더 사치스럽게 하여 하루에 만전(萬錢)이나 되는 많은 돈을 소비하면서도 수저가 갈 만한 곳이 없다고 하였다. 《진서(晉書)》 권33 하증전(何曾傳).
  • [註 121]
    굳은 얼음이 닥치는 것은 반드시 서리를 밟을 때에 경계해야 하고 : 무슨 일을 당하기 전에 기미를 보아 미리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뜻. 《주역(周易)》 곤괘(坤卦)에 "서리를 밝으면 굳은 얼음이 오느니라."고 경계하였다.
  • [註 122]
    굴뚝을 굽게 만드는 계책은 이마를 그을리기 전에 있어야 하는 것 : 일을 당하기 전에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뜻. 굴뚝을 굽게 만들고 나뭇단을 아궁이에서 멀리 옮겨 놓으라는 충고를 무시하였다가 화재를 만나 이웃의 도움으로 살아난 사람이 소를 잡아 잔치를 벌이고 공을 논하면서 불을 끄느라 이마를 그을린 사람을 제일로 치고 사전에 대책을 세우라고 충고한 사람은 잔치에 청하지도 않았다가 나중에 뉘우치고 청했다는 고사. 《한서(漢書)》 권68 곽광전(霍光傳).

○戊寅/大司憲李鐸、大司諫朴淳等, 上實封其書曰:

治國之要, 在順人心; 爲邦之道, 當伸公論; 人心順, 則國以之安, 公論伸, 則邦以之寧也, 必然之理也。 如或人心拂, 而不知順, 公論沮, 而不知伸, 則國勢必至於危, 邦本終至於蹶矣。 自古興隆之君, 莫不順人心, 而伸公論; 衰亂之主, 莫不拂人心, 而沮公論。 此旣往之得失, 而將來之龜鑑也。 前領議政尹元衡, 本一憸邪陰險人也。 托國舅肺腑之親, 參山河帶礪之盟, 身躋具瞻之位, 手秉一國之鈞。 狐假主威, 而與奪隨手, 嬰撫廷臣, 而榮瘁在口。 威權日隆, 形勢赫於梁門, 溪壑無底, 蓄積剩於董塢, 百俺馳走, 承風旨之必先; 八方饋遺, 輸上第之恐後。 道路心怒而側目, 閭巷腹誹而向隅, 主勢至於日孤, 國步阽於將顚。 此豈一朝一夕之故哉? 其所由來者漸矣。 稔惡已極, 擢髮難數; 奸狀萬端, 不可殫記。 臣等姑撮其萬口所騰, 萬目所睹者, 爲殿下條陳之。 一曰專擅無忌, 其目有十焉。 聘則爲妻, 奔則爲妾, 古今之通義也。 雖名門處子, 一名以妾, 不可改易。 況以公賤之産, 陞之爲夫人, 敗毁王章、變亂人紀, 可謂有朝廷乎? 此其專擅之一也。 側室之女, 適於士夫, 翁主下嫁之禮也。 德興君之子, 中廟之孫, 而正二品之官也。 欲以孽妾之賤息, 圖婚尊貴之人, 干名犯分, 莫此爲甚, 可謂有君上乎? 此其專擅之二也。 當乙巳武定之時, 旣曰逆賊之姻族, 則竝投於有北, 示王法也, 而與之結婚, 作爲一家, 則雪其罪而敍其人, 是忘國家之賊, 忽君父之讎, 此其專擅之三也。 宮闈至嚴, 內外有截, 非外出入之地, 而當文定大漸之時, 乃遣其妾, 直入問安, 無異私家, 至於號令內醫, 妄進雜劑, 醫官提調, 莫敢支梧, 此其專擅之四也。 八方星羅之郡邑, 大小(基)〔碁〕 布之鎭堡, 前後授鉞者, 無非負債之師, 出入佩符者, 盡是銜恩之吏。 陸走貨貝, 生民之流亡殆盡; 柁運米穀, 軍卒之凋瘵亦極; 尺牘雲飛於遠近, 方白掣肘於殿最, 此其專擅之五也。 官爵, 人主之大權; 刑獄, 天下之大命; 官以賂授, 崇卑視其請囑; 獄以賄免, 低昻隨其指嗾。 銓官謹行除目, 而賢愚不問; 司寇拱手聽命, 而輕重莫論。 此其專擅之六也。 殺人者死, 邦有常刑, 雖儀賓公子, 常不得寬饒, 而豪悍之奴, 憑藉勢焰, 騙奸人妻女, 奪掠人田宅。 甚至白晝殺越, 而吏不敢問。 威勢所及, 擧此可知。 此其專擅之七也。 山林川澤, 與民共之, 王者有土, 尙猶然也。 水落之山, 密邇都城, 芻蕘所往, 雉兔所投, 而環山折受, 以爲柴場, 驅逐其居民, 掘發其塚墓, 傍近之人, 控訴無地, 至立約條, 共納稅柴, 無異官家之役。 此其專擅之八也。 路馬有式, 蹴芻有誅, 而敢以內閑天驥, 駄載姬妾, 略無畏忌。 山陵之役, 國家大事, 而太僕車馬, 復役其門, 吏不得用之。 此其專擅之九也。 武庫鐵工鑄鍊兵戈, 以需緩急之用也, 而私役其家, 不遑國事, 車輛之設, 運轉戎器, 以重軍國之事也, 而私輸其物, 轅摧牛斃。 此其專擅之十也。 二曰貪贓無厭, 其目有十焉。 凌雲甲第, 輪奐華構, 連街接巷, 滿十有餘。 悖入之總貨, 充牣其中, 讎斂之剩財, 衍溢于外。 猶且營繕不輟, 土木方興, 秦隴之連筏, 陸續於江頭, 豈特木妖之興剌哉? 此其貪贓之一也。 濱海築堰, 內地沃壤, 田亘阡陌, 盡入私占。 公家給種, 守令監農, 官倉儲穀, 半爲饁餉之資。 南畝農夫盡作耕耘之奴, 農庄所在, 闔境怨苦, 奚啻地癖之有譏哉? 此其貪贓之二也。 招集廛商, 開市其家, 靑銅白金, 車輦馬駄, 而雲擾於門, 手持看品, 上下市直, 而貿販山積。 市上之物, 一朝幾空, 雖銅具之人, 未必如斯, 此其貪贓之三也。 招致譯官, 關給雜物, 而南金大貝, 齊紈蜀錦, 條別名目, 俾貿於燕市之上。 價少徵多, 必稱貸於人, 輳足不準之數, 然後得免苛責。 雖賈胡之欲, 豈至於此哉? 此其貪贓之四也。 伴力之人, 自有其額, 而列邑之良丁, 諸郡之富戶, 冒占濫屬, 寔繁有徒, 徵納役債, 侵督急於星火, 責出米布, 毒虐延於隣族。 甚至勒要刁蹬, 橫奪其田民, 傾家破産者, 比比有之, 而流離失所, 籲呼無路。 此其貪贓之五也。 豪悍背主, 罪在綱常, 而招納逋亡, 作爲淵藪, 負罪橫逆之蒼頭, 相率來投, 十百其群。 兼且好訟之輩, 自知理屈, 必以等棄之心, 輒生分利之計, 立券持文, 一投其門, 則雖理直之人, 緘口而退, 莫之敢爭。 此其貪贓之六也。 瓦署步兵, 爲埏埴也, 而自占居半, 役夫偏苦; 紙司咨紙, 爲事大也, 而私送皮楮, 公然兌換。 瘠公肥私, 率皆類此。 此其貪贓之七也。 防納貢物, 市井之所趨也, 而納一徵十, 規取倍蓰之利; 販賣藁草, 村民之不屑也, 而船運京江, 販入穀布之價, 利之所在, 不遺錙銖。 此其貪贓之八也。 尹百源乃其猶子也, 當得罪被竄之日, 百口(贓)〔臧〕 獲, 負郭良田, 脅勒索要, 奪爲己有。 金景錫宰相之人也, 當乙卯拿鞫之時, 以禁府堂上, 敢受百金。 纓段之賂遺, 此其貪贓之九也。 各處農庄, 分養牛隻, 成籍點閱, 彌滿原野, 孶息之數, 如或剋減, 則侵徵之弊, 延及其隣保。 此其貪贓之十也。 三曰奢僭陵偪, 其條有三。 女僕執釁, 家人之常也, 而別立膳夫, 無異內饔; 食前方丈, 饌兼八珍之味, 日費萬錢, 每嘆何曾之筯, 奢僭陵偪, 此其一也。 太僕酥酪, 爲上供也, 而至令酪夫, 捉携器具, 煮熟於家, 有同御進。 子女僕妾, 亦皆飽飫, 奢僭陵偪, 此其二也。 家圍羅綉之帳, 器用金銀之飾, 供帳什物之華侈, 擬於王者; 姬妾服飾之奢麗, 過於宮禁, 奢僭陵偪, 此其三也。 四曰忍心薄行, 其條有三。 文定王后, 尊則國母也, 親則同氣也。 平生恩寵, 昊天罔極, 而昇遐之日, 聞訃赴闕, 晏然喫飯, 有若平時。 及其入梓宮之時, 趣覆天蓋, 一不下淚。 忍心薄行, 此其一也。 前星失耀之後, 玉體微愆, 屢進藥餌, 中外臣僚, 莫不憫迫, 而身爲首相, 未嘗念及問安等事, 朝議先發, 泛然隨行。 忍心薄行, 此其二也。 夫婦人倫之始也, 而棄別正妻, 追徵婚幣, 竝奪家産, 使之飢餓而死, 永抱無窮之冤, 聞者爲之流涕。 忍心薄行, 此其三也。 凡二十六條之事, 其小者, 足以病民亂治, 其大者, 足以敗國喪家。 爲人臣而有一於此, 尙不可一日容於朝廷之上, 況俱備而兼有之者乎? 元衡負如此之罪, 偃蹇廊廟之上, 售奸縱惡, 至老益甚, 而讜言結於忠舌, 抗論箝於直口者, 豈不以震疊之威稜, 不可觸, 而熏灼之氣焰, 爲難犯哉? 朝野遑遑, 上下懍懍, 跼高蹐厚, 莫保朝夕, 幸賴上天陰誘, 宗社默佑, 人心之憤鬱, 激而爲公論。 此實轉危爲安, 傾否反泰之機也。 行旅相慶, 臣民胥悅, 翹首跂足, 佇聞投畀之命, 而一命遞相之後, 反示邁邁之意, 每敎以元勳大臣不可竄謫, 臣等竊惑焉。 國朝李叔蕃, 佐命太宗, 柳子光立勳三朝, 厥功偉矣。 及其有罪, 則一朝竄黜, 老死于外, 是不以其功, 而掩其罪也。 元衡雖曰元舅元勳, 其不可以恩而廢法, 以功而掩罪也, 較然矣。 臣等伏見, 殿下臨御以來, 宵旰憂勤, 勵精圖治, 未聞有聲色遊畋、土木禱祀之過擧, 而治化未著, 國勢日蹙; 德澤未究, 生靈日困; 使祖宗艱大之業、列聖宥密之基, 將至於岌岌累(卯)〔卵〕 之地, 而不自覺也。 殿下不見其形, 願察其影。 近者天文示變, 坤象載震, 無災不生, 無孽不作。 雖不可指爲某事之應, 而曰明之天, 豈無方懠之由乎? 況秋雷之變, 雨雹之災, 竝作於牢拒公論之日, 亦安知仁愛之天心, 所以警告於殿下者, 不在於此乎? 嗚呼! 欲合之, 人心沮喪而驚疑, 欲伸之, 公論抑塞而不暢。 中外之洶懼, 反有甚於前日, 則視聽自我之天心, 亦可知矣。 殿下以遞相之微罰, 爲足以當元衡之罪, 而欲以答天怒、慰人心乎? 臣等未知, 國家之事終至於何如也? 此所以叫閤逾旬, 而不自知退者也。 殿下猶不卽快斷, 則豈徒公論沮而人心拂哉? 必有不可及之後悔也。 堅氷之戒, 必在於履霜, 曲堗之策, 要先於爛額。 伏願殿下留神焉。 臣等俱以無狀, 待罪言責之地, 常懷犬馬之誠, 未有涓埃之報 目見國事之至此, 不忍終默, 敢以人心之所同、一國之公論, 仰塵睿鑑之下, 倘賜乙覽。 更加三思, 快示三危之竄, 則國家幸甚。

答曰: "前領相事, 論執已過一旬, 疏上二十六條, 予雖不敏, 豈不識公論之所在乎? 每見啓辭之人, 予心常爲不寧, 予不快從者, 但爲宗社之大功, 文定之同氣故也。 雖不竄謫, 一朝免相, 竝遞提調, 使勿參議於國政。 又命杜門謹愼, 退居門外, 則於國有何害乎? 只保功臣爵祿而已。 至於竄謫, 則決不可從也。 兩司須念丁寧之敎, 毋煩固執可也。 不允。" 三啓請竄, 不允。 弘文館請竄, 再箚, 不允。


  • 【태백산사고본】 19책 31권 54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27면
  • 【분류】
    재정(財政) / 신분(身分) / 사법-탄핵(彈劾) / 왕실-비빈(妃嬪) / 윤리(倫理) / 농업-경영형태(經營形態) / 인사-관리(管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