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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실록31권, 명종 20년 7월 25일 기미 1번째기사 1565년 명 가정(嘉靖) 44년

행 동지중추부사 신희복의 졸기

행 동지중추부사(行同知中樞府事) 신희복(愼希復)이 졸(卒)하였다.

자(字)는 양숙(養叔)이다. 소시 적에 재예(才譽)가 있어서 이름 있는 선비들과 꽤 사귀었다. 상이 잠저(潛邸)에 있을 적에 중묘(中廟)가 전조(銓曹)를 시켜 사부(師傅)를 가릴 때에 성세창(成世昌)이 판서로 있으면서 그를 천거하여, 시강(侍講)한 지 가장 오래되었다. 상이 즉위하게 되어서는 은권(恩眷)이 매우 융숭하고 사여(賜與)가 끊이지 않았다.

계축년108) 에 금산 군수(錦山郡守)로서 향시(鄕試)에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전시(殿試)에서 장차 취사(取士)할 적에 명하여 40여 인을 취하게 하고 비록 제술(製述)에서 입격하지 못하였더라도 다 급제(及第)를 하사하였으니, 대개 신희복을 위해서였다. 과거에 급제한 뒤로 옥당(玉堂)·대간(臺諫)의 직에 종사하다가 수년이 못 되어 점차 정경(正卿)에 이르게 되니, 논평(論評)하는 이를 이미 감릉(甘陵)의 기평(譏評)109) 이 있었다.

사람됨이 자질과 행동이 느리고 둔하며 편협하고 밝지 못하였다. 그래서 일을 당하면 캄캄하여 처결하지 못하였다. 일찍이 한성 판윤(漢城判尹)으로 있을 적에 아전이 문서를 가지고 와서 올리면 가부를 결정하는 바가 없고 머리만 끄덕일 뿐이니, 당시 사람들이 눈금 없는 저울[無星之稱]에 비하기도 하였다. 주상이 옛날 은정(恩情)으로 때때로 비밀히 찾아가는 일이 있었으므로 교통(交通)하는 형적이 많이 있었다. 만년에 와서는 방종 탐욕이 매우 방자하여 마음이 늘 탐욕에 있었고, 남에게 구걸을 잘하여 탐욕하고 비루한 일을 많이 행하였다. 그 자제를 보내어 주현(州縣)에 전지를 개간하고 혹 백성과 나누어 가지기를 약속하고서 뒤에는 혼자 차지하기도 하였다. 또 남의 집을 강제로 사들여서 헐값으로 치러 주니 듣는 이는 그를 더럽게 여겼다.

계해년110) 에 우참찬으로 개성 유수(開城留守)가 되었는데 잦은 방법으로 백성에게 거두어들여 비루한 행적이 더욱 드러났다. 어느 선비의 집에 괴석(怪石) 하나가 있었는데 곧 화원(花園) 【고려 말엽의 후원(後苑).】 의 구물(舊物)로 그의 조선(祖先) 때부터 숨겨두고 애완(愛玩)하면서 보물로 전해왔다. 신희복이 강제로 구경하기를 요구하고 밤을 틈타서 몰래 싣고 왔다. 그 주인이 정탐하여 알고 중도에서 가로막으니, 신희복이 크게 노하여 곧 깨뜨려 버리게 하였다.

개성부에 있을 적에 병이 위중하자 이미 사직장(辭職狀)을 올리고는 또 사람을 보내어 사직장 가지고 가는 자를 중지시켰는데, 사직장을 가지고 가던 자가 곧 지름길로 빨리 가서 정원(政院)에 서둘러 올려버렸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두 더럽게 여겼다. 그가 병으로 들것에 실려 돌아오자 욕하는 이가 길에 가득하였다. 죽은 해의 나이 60이다. 주상이 명하여 그 상을 도와주게 하고 특별히 제수(祭需)를 내렸다.

신희복이 일찍이 그 아비를 천장(遷葬)하고는 스스로 평생에 부귀하게 지내는 것이 풍수(風水)의 좌청룡 우백호(左靑龍右白虎)의 도움을 얻은 것이라 하여 일찍이 지리설(地理說)을 중하게 여겼다. 어떤 사람은 ‘정릉(靖陵)의 천장이 반드시 이 사람이 종용한 것이 아니라 할 수 없다.’고 하였다. 다만 개성 유수로 있을 적에 윤원형의 집에서 개성부 사람과 서로 송사하여 그 재물을 빼앗으려고 도모하여 말로써 위협하기까지 하였으나 끝내 듣지 않았으니, 이것만은 무던하다.


  • 【태백산사고본】 19책 31권 47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24면
  • 【분류】
    인물(人物)

  • [註 108]
    계축년 : 1553 명종 8년.
  • [註 109]
    감릉(甘陵)의 기평(譏評) : 임금이 자기 스승을 특별히 등용함에 대한 비평. 후한 환제(後漢桓帝)가 여오후(蠡吾侯)로 있을 적에 감릉(甘陵)의 주복(周福)에게 수학하였는데, 황제의 자리에 오른 뒤에 주복을 발탁하여 상서(尙書)로 삼았다. 당시 향인(鄕人)이 노래를 지어 부르기를 "스승이므로 벼슬한 자는 주중진(周仲進)이다." 하였다. 곧 주복의 자(字)가 중진(仲進)이다. 신희복(愼希復)이 정 2품의 한성 판윤·우참찬 등 정경(正卿)의 지위에 오른 것을, 후한(後漢)의 주복이 환제(桓帝)의 스승이므로 상서(尙書)에 오른 일에 비겨 비평한 것이다.
  • [註 110]
    계해년 : 1563 명종 18년.

○己未/行同知中樞府事愼希復卒。 字養叔, 少有才譽, 頗結交知名士。 上在潛邸, 中廟令銓曹擇師傅。 時成世昌爲判書, 薦之。 侍講最久。 及卽位, 恩眷甚隆, 賜與不絶。 癸丑/以錦山郡守中鄕解, 首殿試將取士, 命取四十餘人, 雖製未入格, 皆賜及第。 蓋爲希復也。 捷科以來, 出入玉堂臺諫, 不數年, 馴致正卿, 論者已有甘陵之譏。 爲人質貌遲鈍, 執滯不明, 臨事朦然, 不能剖決。 嘗判京兆, 吏抱案以進, 無所可否, 唯點頭而已。 時人或比無星之稱焉。 上以舊恩, 時有密訪之事,, 縱欲恣甚, 心常在得, 善乞於人, 多行貪鄙之事。 遣其子弟, 墾田州縣, 或與民約分, 而後則專之。 且抑買人家, 歸以賤直, 聞者唾之。 癸亥, 以右參贊, 留守松都, 斂民多端, 鄙迹尤彰。 士家有一怪石, 乃花園 【麗季後苑。】 舊物也。 自其祖先, 秘玩而傳寶之。 希復强而求玩, 乘夜潛載而來。 其主偵知, 而遮截於中路, 希復大怒, 乃使打破焉。 在府病重, 旣已上辭, 而又遣人中止持狀者, 而持狀者乃從捷路, 亟呈政院, 人皆鄙笑。 及其舁還, 詈者載路。 卒年六十。 上命護其喪, 特賜祭需。 希復嘗遷葬其父, 自以平生富貴, 謂得風水龍虎之助, 嘗以地理之說爲重。 或言靖陵之遷, 未必非此人縱臾也, 唯在松都時, 尹元衡家與府人相訟, 謀奪其財, 至脅以言, 而終不聽。 是則可矣。


  • 【태백산사고본】 19책 31권 47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24면
  • 【분류】
    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