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대비전이 쓴 문정 왕비의 행적을 내리다
정원에 전교하기를,
"문정 왕비(文定王妃)의 행적은, 전일 마음이 어지러운 중에 대강 써서 내렸는데, 왕 대비전(王大妃殿)061) 께서 또 이것을 써서 내리려 하시므로 아울러 써서 내리니, 제지관(製誌官)으로 하여금 참고하여 잘 짓게 하라."
하였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문정 왕비는 소시적부터 정정 단일(貞靜端一)하고 효경 자혜(孝敬慈惠)하였으며, 총명이 남의 의표에서 뛰어났다. 춘추(春秋) 11세에 모부인(母夫人)의 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소(素)를 행하였으며 모든 상례(喪禮)를 살펴보면 성인(成人)과도 같았다. 아버지 부원군(府院君)을 섬김에 있어 의식(衣食)을 효도로 봉양하여 한결같이 모부인의 생시와 같았고, 나이 어린 동기(同氣)를 무양(撫養)함도 모부인의 생시와 같았으므로 종족들이 모두 칭찬하였다.
을해년062) 늦봄에 장경 왕비(章敬王妃)가 승하하자 정현 왕비(貞顯王妃)가 중종 대왕에게 분부하기를, ‘조년(早年)에 현배(賢配)를 잃었으니 마땅히 숙덕 명가(宿德名家)에서 어진이를 가려 비(妃)로 세우라.’ 하고, 드디어 가려 정하였다. 거북등 무늬로 그 상서로움을 정하여 태평관(太平館)에 친영례(親迎禮)를 행하니 중궁(中宮)의 자리에 앉은 뒤에 위로 정현 왕비를 섬김에 있어서 능히 부도(婦道)를 다하였으므로 정현 왕비가 항상 말씀하시기를, ‘중궁이 현명하니 궁중의 일은 내가 염려하지 않는다.’ 하셨다. 기축년063) 에 금원(禁苑)에서 친잠(親蠶)을 하여 근본에 힘쓰는 의사를 보였다.
인묘(仁廟)가 원자(元子)로 있을 때 부지런히 애써 무양(撫養)함이 자기 소생보다 더 나았다. 항상 인묘의 학문이 날로 달로 진취함을 기뻐하여, 유모·보모(保母)·시인(侍人)의 무리에게 자주 상을 주었다. 인묘와 효혜 공주(孝惠公主) 【장경 왕후(章敬王后)의 딸로, 연성위(延城尉) 김희(金禧)에게 출가하였다.】 가 어려서 어머니를 잃은 것을 애통히 여겼고, 공주의 자제에 【공주는 다만 딸 하나가 있었는데 문정 왕비가 그의 오라버니 윤원로(尹元老)의 아들 윤백원의 아내로 삼게 하였다.】 이르러서도 모든 일을 일체 공주의 예에 의하였다.
경인년064) 여름에 정현 왕비가 편치 않으실 때 마침 그때 경현 공주(敬顯公主) 【영천위(靈川尉) 신의(申檥)에게 출가하였다.】 를 잉태하였는데 밤낮으로 곁에 모시고 잠시도 해이하지 않았다. 정현 왕비의 병이 위독해지자 문정 왕비는 공주가 태생한 지 7일 안이어서 걸음을 걸을 수 없으므로 보자기 위에 편안히 앉아 나인을 시켜 들고 입시하게 하니, 정현 왕비께서 ‘중궁이 자기 몸을 잊는 성의가 이러하니, 내 병이 나은 듯하다.’ 하셨다. 정현 왕비가 승하하시게 되어서는 애통이 망극하여 3년 동안 소(素)를 행하고, 내간의 모든 일 및 제사를 예규(禮規)대로 능히 다하였다.
임진년065) 무렵에 중묘(中廟)께서 우연히 큰 종기를 앓아 여러 달 고생하실 때에 곁을 떠나지 않고 시병(侍病)하여 동정(動靜)에 꼭 알맞도록 하였었다. 중궁의 자리에 있은 지 28년 동안에 국모의 도리에 조금도 태만함이 없었고, 중묘를 공경히 섬겨 군신의 예처럼 하였다. 하루는 양전(兩殿)066) 이 편전(便殿)에 납시니, 인묘가 옆에 모시고 첩(妾) 【왕대비의 자칭이다.】 도 편전의 말석에 앉았는데, 중묘께서 역대 치란 흥망의 자취와 우리 나라 정치의 일을 논란하셨다. 문정 왕비가 ‘상벌(賞罰)이 적당하지 않으면 비록 10인의 황제가 있더라도 다스릴 수 없으니, 상께서는 모름지기 광명 정대하여 군자를 진용(進用)하고 소인을 물리치소서. 이것이 치란의 큰 관건입니다.’ 하니, 중묘께서 기뻐서 ‘이 말이 지당하다. 평상시에 이처럼 논란하면 정치를 내조함이 극진하지 않는 바가 없을 것이다.’고 답하셨다. 후궁을 무휼(撫恤)하여 정이 형제와 같았다.
갑진년 한겨울에 중묘께서 승하하시자 붙잡고 호곡(號哭)하였으나 미칠 수 없었다. 진향(進香)하는 명일이 아니면 으레 별제(別祭)를 몸소 행하였다. 매년 중묘의 탄신에는 별도로 옷을 지어 또한 몸소 제사를 지냈다. 후궁의 왕자나 왕손도 고루 기르고 더욱 후히 대하여 시종 한결같았다. 그러므로 궁 내외가 천은(天恩)에 감사하지 않는 사람이 없어서 항상 만수(萬壽)하기를 축원하였다. 그런데 뜻밖에 승하하니 사람들이 모두 슬퍼함이 망극하였다.
평상시에 천성이 검소하여 사치함을 좋아하지 않고 행동은 예법을 준수하였다. 항상 선왕의 수릉관(守陵官) 및 중묘조의 원훈(元勳)의 집에 물품을 보내는 것은 폐하지 않고 후대하여 해이하지 않았다. 매양 국가의 무강한 향국과 백성들이 생업을 얻어 안락하게 사는 것을 생각하여 향을 사르고 하늘에 축원하되, 비록 한겨울이나 한여름에도 폐하지 않고 ‘하늘의 살피심이 더욱 밝으시니 하고자 하는 바를 반드시 얻게 해주소서.’ 하였으니, 나라를 위하는 성의가 극진함이 이와 같으셨다.
평일에 하교하기를, ‘석교(釋敎)는 곧 이단(異端)이니 마땅히 거절해야 한다. 다만 조종조 이래로 아주 끊어 버리지 않았으니 내가 어찌 유독 폐하랴. 내가 이 일 때문에 주상에게 부끄러움이 있으나 이 또한 내가 나라를 위하는 성의의 일단(一端)이다.’ 하셨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9책 31권 27장 B면【국편영인본】 21책 14면
- 【분류】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註 061]왕 대비전(王大妃殿) : 인종 비(仁宗妃) 박씨(朴氏).
- [註 062]
을해년 : 1515 중종 10년.- [註 063]
기축년 : 1529 중종 24년.- [註 064]
○傳于政院曰: "文定王妃行跡, 前日心亂之中, 大槪書下, 而王大妃殿, 又以此欲爲書下, 故竝書下矣。 令製誌官, 參考善製可也。" 其書曰:
文定王妃, 自少貞靜, 端一孝敬, 慈惠聰明, 出人意表。 春秋十一歲, 丁母夫人憂, 行素三年, 凡察喪禮, 似同成人。 事考府院君, 衣食孝養, 一如母夫人生時; 撫養年幼同氣, 亦同於母夫人生時, 故宗族莫不稱贊。 歲在乙亥暮春, 章敬王妃昇遐, 貞顯王妃, 敎中宗大王曰: "早失賢配, 當於宿德名家, 擇賢立妃也。" 遂擇定焉。 文定厥祥, 親迎于大平館, 正位于中宮之後, 仰事貞顯, 克盡婦道, 貞顯王妃常曰: "中宮賢明, 宮禁之事, 吾不念慮矣。" 歲在己丑, 親蠶于禁苑, 以示務本之意。 仁廟爲元子時, 孜孜撫育, 過於所生。 常喜仁廟學問, 日就月將, 頻頻賞給於乳保母侍人之輩。 哀痛其仁廟與孝惠公主 【章敬王后女也。 下嫁延城尉金禧】 早失所(時)〔恃〕 , 至於公主子弟, 【公主只有一女, 文定王妃, 以其兄元老之子百源妻之。】 凡事一依公主之禮。 庚寅夏, 貞顯王妃未寧, 適於其時, 方娠敬顯公主, 【下嫁靈川尉 申檥。】 而晝夜侍側, 暫不懈弛。 及貞顯王妃疾亟, 文定王妃以誕生公主七日之內, 不得行步, 安坐於袱上, 使內人擧之入侍, 則貞顯王妃敎曰: "中宮忘身如此, 吾疾似愈矣。" 及其昇遐, 哀痛罔極, 行素三年。 內間凡事及祭祀, 克盡禮規。 壬辰年間, 中廟偶得大腫, 累朔辛苦之時, 不離侍疾, 動靜得宜。 在坤位二十八年, 少無怠於國母之道。 敬事中廟, 如君臣禮。 一日兩殿御便殿, 仁廟侍側, 妾 【王大妃自稱。】 亦忝殿末, 而中廟論難歷代治亂興亡之迹、我朝政治之事。 文定王妃曰: "賞罰不當, 則雖十皇帝, 不能治也。 願自上須光明正大, 進君子、退小人, 此治亂之大關也。" 中廟喜答曰: "此言至當。" 常時如是論難, 內助政治, 無所不用其極。 撫恤後宮, 情若昆弟。 逮於甲辰仲冬, 中廟賓天, 攀號莫及。 非進香名日, 則例爲躬行別祭。 每年中廟誕辰, 則別造衣襨, 亦躬行祭, 而後宮王子王孫, 均養益厚, 終始如一, 故內外莫不感荷天恩, 常祝萬壽。 不意昇遐, 人皆傷慟罔極。 常時天性儉素, 不喜奢華, 動遵禮法, 常爲先王守陵官及中廟朝元勳之家, 不廢賜送, 厚待不弛。 每念國家無疆之壽, 黎民得所安樂, 焚香祝天, 雖寒暑不廢。 祝曰: "天鑑孔昭, 必得所欲。" 爲國誠意, 極盡如此。 平日敎曰: "釋敎乃是異端, 所當拒絶。 但自祖宗朝以來, 不能頓絶, 吾何獨廢乎? 吾以此事, 有愧於主上, 而是亦予爲國誠意之一端。" 云。
- 【태백산사고본】 19책 31권 27장 B면【국편영인본】 21책 14면
- 【분류】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註 0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