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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실록 31권, 명종 20년 4월 6일 임신 2번째기사 1565년 명 가정(嘉靖) 44년

대왕 대비가 승하하다

사시(巳時)에 대왕 대비가 창덕궁(昌德宮) 소덕당(昭德堂)에서 승하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윤씨는 천성이 강한(剛狠)하고 문자(文字)를 알았다. 인종(仁宗)이 동궁(東宮)으로 있을 적에 윤씨가 그를 꺼리자, 그 아우 윤원로(尹元老)·윤원형(尹元衡)의 무리가 장경 왕후(章敬王后)의 아우 윤임(尹任)과 틈이 벌어져, 윤씨와 세자의 양쪽 사이를 얽어 모함하여 드디어 대윤(大尹)·소윤(小尹)의 설이 있게 되었다. 이때 사람들이 모두 인종의 고위(孤危)를 근심하였는데 중종이 승하하자 인종은 효도를 극진히 하여 윤씨를 섬겼다. 그러나 삼조(三朝)038) 할 즈음에 빈번히 원망하는 말을 하고 심지어 ‘원컨대 관가(官家)039) 는 우리 가문을 살려달라.’고 말하기까지 하였다. 인종이 이 말을 듣고 답답해 하고 또 상중에 과도히 슬퍼한 나머지 이어서 우상(憂傷)이 되어 승하하게 되었다. 주상이 즉위하게 되어서는, 당시 제공(諸公)들이 그의 강한(剛狠)함이 반드시 나라를 해칠 것을 근심하여 임조(臨朝)하지 못하게 하려 하였으니, 대개 그 시세가 부득이함을 헤아리지 못하고 곧 화를 부를 뿐이었다. 얼마 못 가서 문득 큰 옥사를 일으켜 전에 인종을 부호한 사람을 모두 역적으로 지목하였다. 슬프다! 윤임(尹任) 같은 사람은 소윤에게 미움을 당한 지 오래되었으므로 무지한 무부(武夫)로서 혹 스스로 불안한 마음을 품었지만 반역한 형적(形迹)이 또한 나타나지 않았고, 유관(柳灌) 같은 사람에 이르러서는 본디 청직(淸直)하여 왕실(王室)에 마음을 다한 것으로 일컬어졌는데 또한 무슨 죄인가? 대개 윤 왕후(尹王后)가 전에 감정이 쌓이었고 뒤에 화를 얽어 만들었는데, 이기(李芑)의 무리가 또 따라서 이를 도와 이룩하였다. 그래서 그 화가 길게 뻗치어 10여 년이 되도록 그치지 않았고 마침내 사림(士林)을 짓밟고 으깨어 거의 다 쳐죽이기에 이르렀으니, 이를 말하자니 슬퍼할 만한 일이다. 그 뒤에 불사(佛事)를 숭봉함이 한도가 없어서 내외의 창고가 남김없이 다 고갈되고 뇌물을 공공연히 주고받고 백성의 전지를 마구 빼앗으며 내수사(內需司)의 노비(奴婢)가 제도(諸道)에서 방자히 굴고 주인을 배반한 노비들이 못에 고기가 모이듯 숲에 짐승이 우글거리듯 절에 모여들었다. 그의 아우 윤원형(尹元衡)과 중외에서 권력을 전천(專擅)하매 20년 사이에 조정의 정사가 탁란(濁亂)하고 염치가 땅을 쓸어낸 듯 없어지며 생민(生民)이 곤궁하고 국맥(國脈)이 끊어졌으니, 종사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일 뿐이다. 더구나 정릉(靖陵)은 안장(安葬)한 지 거의 20년이나 되었는데, 장경 왕후와 같은 무덤인 것을 미워하여 마침내 옮기기에 이르렀으니, 어찌 차마 그렇게 했단 말인가. 또 스스로 명종(明宗)을 부립(扶立)한 공이 있다 하여 때로 주상에게 ‘너는 내가 아니면 어떻게 이 자리를 소유할 수 있었으랴.’ 하고, 조금만 여의치 않으면 곧 꾸짖고 호통을 쳐서 마치 민가의 어머니가 어린 아들을 대하듯 함이 있었다. 상의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어김없이 받들었으나 때로 후원(後苑)의 외진 곳에서 눈물을 흘리었고 더욱 목놓아 울기까지 하였으니, 상이 심열증(心熱症)을 얻은 것이 또한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윤비(尹妃)는 사직의 죄인이라고 할 만하다. 《서경(書經)》 목서(牧誓)에 ‘암탉이 새벽에 우는 것은 집안의 다함이다.’ 하였으니, 윤씨(尹氏)를 이르는 말이라 하겠다.

사신은 논한다. 윤비(尹妃)는 천성이 엄의(嚴毅)하여 비록 상을 대하는 때라도 말과 얼굴을 부드럽게 하지 않았고 수렴 청정(垂簾聽政)한 이래로 무릇 설시(設施)하는 것도 모두 상이 마음대로 하지 못하였다. 불교에 마음이 고혹(蠱惑)되고 환관을 신임하여 나라의 창고를 다 기울여 승도(僧徒)들을 봉양하고 남의 전지와 노복을 빼앗아 내수(內需)를 부유하게 하며 상벌(賞罰)이 참람하여 사람들이 권계(權戒)되지 않았다. 게다가 권세가 외척으로 돌아가 정사가 사문(私門)에서 나오고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지며 기강이 문란하고 국세(國勢)가 무너져서 장차 구원하지 못하게 되었다. 다행히 명종 대왕이 전의 잘못을 깨달음에 힘입어 장차 크게 바로잡으려는 뜻이 있었는데, 정령(政令)을 베푼지 오래지 않아서 문득 승하하니, 아, 슬픈 일이다.


  • 【태백산사고본】 19책 31권 22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11면
  • 【분류】
    왕실-비빈(妃嬪) / 역사-사학(史學) / 변란-정변(政變) / 사상-불교(佛敎)

  • [註 038]
    삼조(三朝) : 세자가 왕에게 하루 세 번 조회하는 일. 《예기(禮記)》 문왕세자(文王世子)에 "문왕(文王)이 세자로 있을 적에 하루 세 번 왕계(王季)에게 조회하였다." 하였다. 즉 아침·한낮·저녁 세 차례 조회함을 말한다. 여기서는 인종이 대비(大妃)인 문정 왕후에게 하루 세 번 문안드림을 말한다.
  • [註 039]
    관가(官家) : 왕실. 즉 인종을 말함.

○巳時, 大王大妃薨于昌德宮 昭德堂

【史臣曰: "尹氏性剛狠, 能解文字。 仁廟在東宮, 尹氏忌之。 其弟元老 元衡輩, 與章敬之弟尹任有隙, 交構兩間, 遂有大小之說。 是時, 人皆以 仁廟之孤危爲憂。 中廟賓天, 仁廟尹氏, 極其孝, 而三朝之際, 每發怨言。 至曰願官家活我門’ 仁廟聞之, 悶鬱柴瘠之餘, 仍致憂傷, 以至大漸。 及上卽位, 當時諸公, 虞其剛狠, 必害于國, 至不欲使臨朝。 蓋不量其時勢之不得已, 而適以速禍。 未幾遽起大獄, 向之扶護仁廟者, 皆指爲逆賊。 噫! 如尹任者, 見怒於小久矣。 無知武夫, 或懷不自安之心, 而反形亦未著。 至如柳灌, 素稱淸直, 心乎王室, 亦何罪也? 蓋后積憾於前, 搆禍於後, 李芑輩又從而贊成之。 其禍連延, 迄十餘年, 而未已。 終至血肉士林, 斬伐殆盡。 言之, 可爲於悒。 厥後崇奉佛事, 靡有紀極, 內外帑廩, 空竭無餘。 公行賄賂, 橫奪民田, 內需奴婢; 橫肆諸道, 叛主臧獲; 如萃淵藪。 與其弟元衡, 專擅於中外。 二十年間, 朝政濁亂, 廉恥掃地, 生民困悴, 國脈斲喪, 宗社之不亡幸爾。 況靖陵安厝幾二十年, 而惡其與章敬同兆, 遂至遷動, 獨何忍哉? 且自謂有扶立之功, 時或謂上曰: ‘汝, 非我, 何以有此。’ 少不如意, 輒肆叱咤, 有同民家壯母之待小子。 上性至孝, 奉承無違。 然時於後苑僻處, 爲之涕泣, 或至失聲。 上之得患心熱, 亦以此夫! 然則妃可謂社稷之罪人也。 《書》曰: ‘牝雞之晨, 惟家之索’ 尹氏之謂也。"】

【史臣曰: 妃性嚴毅, 雖於待主上之時, 不暇辭色。 垂簾以來, 凡所施設, 皆非主上所自由也。 蠱心佛敎, 信任宦寺, 竭國帑庫, 以奉僧徒。 奪人田獲, 以富內需。 賞罰僭濫, 人不勸戒。 加之以權歸外戚, 政出私門, 賄賂公行, 紀綱板蕩, 國勢頹靡, 將不可救。 幸賴明宗大王覺悟前非, 將有大正之志, 發政未久, 弓劍遽遺。 嗚呼, 痛哉!"】


  • 【태백산사고본】 19책 31권 22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11면
  • 【분류】
    왕실-비빈(妃嬪) / 역사-사학(史學) / 변란-정변(政變) / 사상-불교(佛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