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사 성수침의 졸기
징사(徵士) 성수침(成守琛)이 졸(卒)하였다.
자(字)는 중옥(仲玉)으로 창녕인(昌寧人)이다. 아름다운 자질을 갖고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마치 어른처럼 의젓하였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사람들은 그를 ‘효아(孝兒)’라고 불렀다. 글을 읽을 줄 알면서부터는 과정을 정하여 뜻을 독실히 하고 밤낮으로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부친의 상을 당하여서는 아우 성수종(成守琮)과 함께 애훼(哀毁)하기를 예절에 지나게 하였고 죽을 마시며 삼년상을 마쳤다. 어떤 나그네가 그 여막(廬幕)을 지나다가 효성에 감동하여 시(詩)를 지어 던져주고 갔는데, 이 시에는 이르기를,
성씨 집안 두 아들이
갸륵한 그 효행 가군을 이었네
미음만 마시는 그 정성 해를 가로지르고
분향 뒤의 곡성이 구름을 뚫었다네.
아침 저녁으로 신주에 상식(上食)을 올리고
새벽되고 황혼되면 분묘를 알현하여
한결같이 주자(朱子) 법제 따르다니
오늘날 이에서 처음 들어 보았네.
라고 했는데, 끝내 그가 누구인지 알 길이 없었다. 삼년복을 다 마치고 난 뒤에도 언제나 기일(忌日)을 당하면 열흘 전부터 재계(齋戒)하였으며 초상 때처럼 애통해 하였다. 아침 저녁으로 사당에 배알하였으며, 출입할 때도 반드시 고하였다. 그의 형제가 조광조 문하에서 배워 모두 명성이 대단했는데, 수종은 청결 영특하였으나 악한 것을 지나치게 미워한 데 반해 수침은 혼후(渾厚) 독실하며 침중(沈重) 강의(剛毅)하면서도 온화하고 순실(純實)하였다. 태학의 생도가 그의 효행을 상소하여 조정에 알리려 하자, 영의정 상진이 그들 형제와 같이 공부했던 벗으로 그때 당시에 상서(上序)에 있었는데 이를 저지하면서,
"아무 형제는 학문에 힘쓰는 선비다. 앞으로 원대한 경지에 이를 것인데 한 가지 선행(善行)을 가지고 너무 일찍 세상에 알려지게 해서는 안된다."
하여 올리지 못하고 말았다. 기묘년111) 간에 조정에서 지치(至治)를 일으킬 무렵 상종하던 선비 중에 명성이 너무 큰 자가 있어 수침이 유독 그를 먼저 우려하였었다. 명류(名流)들의 화가 발생하자 그는 세상과 더불어 같이 살아갈 수 없음을 스스로 헤아리고 드디어 과업(科業)을 버리고 백악산(白嶽山) 아래 집 뒤에 두어 칸 집을 짓고 ‘청송당(聽松堂)’이란 현판을 달고는 문을 닫고 출입도 하지 않고 혼자 그 속에 앉아서 날마다 성인(聖人)의 교훈을 외우며 태극도(太極圖)에서부터 정주서(程朱書)에 이르기까지 손수 다 베껴가면서 의리를 탐구하되 속(俗)된 생각으로 마음을 쓰지 않았다. 중종 신축년에 유일(遺逸)에 천거되어 후릉(厚陵)112) 참봉에 제수되었지만 사은만 하고 사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리고는 파평산 아래 우계(牛溪) 부근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돌아갔는데, 식량이 떨어지는 등 극히 가난하였으나 모친 봉양에는 갖추지 않은 것이 없었다. 금상(今上) 임자년113) 에 조식(曺植)·이희안(李希顔)·성제원(成悌元)·조욱(趙昱)과 함께 다시 불러 특별히 6품 벼슬을 주어 모두 지방 고을에 보직(補職)되었는데, 수침이 실상 천수(薦首)114) 에 올랐다. 조정에서는 그가 관직에 나오기를 바라서 세 번이나 고을을 바꾸어 가며 임명했지만 끝내 모친 병환을 이유로 나아가지 않았는데, 그 해에 모친이 세상을 떠나니 당시 수침의 나이 60이었다. 애훼(哀毁)하여 병을 얻은 그는 발병만 하면 기절하곤 하였지만 그래도 3년의 여묘살이를 마쳤다. 그리고 ‘우리 나라의 풍습 중에 묘제(墓祭)의 규례는 사당 종법(祠堂宗法)의 제도만도 못하여 절기 때 자손들이 돌려가며 마련하는 전구(奠具)가 간혹 정결하지 못하며 세대(世代)가 점점 멀어지면 그 제사는 그냥 폐지하게 된다.’ 하고는 그 선영(先塋)에 토지와 사람을 넉넉히 두게 하고 묘소 아래에 집을 지어 그릇 두는 방과 곡식 두는 창고와 음식 마련하는 청(廳)을 설치하고 또 재계하는 방을 마련하는 등 모든 기용을 몸소 계획하여 묘제의 법식을 세웠다. 어떤 사람이 너무 후하게 하여 앞으로 해이해져서 폐지되지나 않을까 염려된다고 하니, 답하기를,
"나로부터 하는 일이라 마땅히 이와 같이 해야 한다."
하였다. 경신년115) 에 상의 특명으로 사지(司紙)에 제수되었다. 당시 수상(首相)이었던 상진이 그에게 나와서 사은하도록 권하며,
"은명(恩命)이 상의 충심에서 나온 것이니 나오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하였으나, 당시 수침은 이미 늙고 병들어 있었다. 답서에,
"정경(程瓊)이 문입(文立)을 천거하지 않은 것은, 그가 성품이 겸손한데다 나이가 80이나 되어 당세의 기대가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대는 나를 모르는 사람이 아니지 않은가."
하고, 끝내 나오지 않았다. 이에 이르러 병이 위독해지자 그의 아들에게 훈계해 타이르고 또 염습 치상(斂襲治喪)에 대한 예절을 일러주고 나서는,
"죽고 사는 것은 하나의 상리(常理)이다. 한번 돌아감을 만난다는 것은 실상 쉬운 일이다."
하고, 드디어 옷을 갈아입고 잠자리에 들더니 그대로 졸(卒)하였다. 집이 가난하여 장사를 치를 수 없었는데 때마침 간원이 아뢰기를,
"성수침에게 처음에 유일로 관직을 제수했으나 병을 핑계하여 사양하였고, 끝까지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는 문을 닫고 평소 자신이 지켜온 도(道)를 찾으며 옛 도를 힘써 행하다가 72세의 나이로 끝내 곤궁과 검약 속에 죽었으니 이는 한 나라의 훌륭한 선비이며 당대의 일민(逸民)이라고 하겠습니다. 마땅히 휼전(恤典)을 베풀어 국가의 어진이를 높이고 노인을 존경하는 뜻을 보여야 합니다."
하니, 상이 그 말을 가상하게 받아들여 곧바로 곽(槨) 1부(部)를 하사하고 이어서 본도에 명하여 쌀과 콩도 필요한 만큼 지급하게 하고 역꾼도 내어서 장례 제구를 갖추어 돕게 하였다. 병인년116) 에 상이 경륜에 밝고 품행을 잘 닦은 선비를 불러들이려고 할 때 수침을 생각하고 특별히 추장(追奬)케 하여 중직 대부(中直大夫) 사헌부 집의를 증직하니 모두 근세에 없었던 은전(恩典)이었다. 그는 사람 됨됨이가 타고난 재질이 매우 높았으며 성실하고 중후하고 너그러운데다 헌칠한 키에 풍골(風骨)이 빼어나고 풍격 또한 우뚝하여 보기에도 충만한 데가 있어 누구라도 덕성 있는 군자임을 알 수 있었다. 그의 뜻은 충담(沖澹)함을 숭상하고 기호(嗜好)하는 것이 없었으며, 그의 학문은 자기 몸을 돌이켜 가장 절실한 것을 구하는 것으로서 급무를 삼았다. 일찍이 학자들에게 이르기를 ‘도(道)란 큰 길과 같다는 성인의 가르침이 분명한데 어찌 알기 어렵다 하겠는가. 가장 고귀한 것은 힘써 배워 그 지식을 실행하는 것이다. 언어만의 학문은 일을 이룰 수 없다. 공자(孔子)의 문하에 총명하고 영특한 사람이 많았지만 끝내 그 도를 전한 자는 노둔한 증자뿐이었다.’ 하고, 또 항상 《소학(小學)》을 사람들에게 권하며,
"수신(修身)의 대요가 모두 이 책에 있다. 이 글을 읽지 않으면 집에서 어떻게 어버이를 섬기며 조정에 나아가서는 어떻게 임금을 섬기겠는가?"
하였다. 평상시 일용 사물에는 담박한 풍모로 자신을 지키고 비단옷 같은 것은 몸에 걸치지도 않았으며, 보통 사람의 심정으로는 견디기 어려운 것도 그는 또한 낙으로 삼았다. 친척 중에 곤궁한 자가 있으면 재산을 기울여서 구원해 주었고 벗과 형제들에게 노비까지 나누어 주면서도 조금도 어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남의 한 가지 선(善)한 일을 들으면 언제나 감탄하고 사모하며 잊지 않았고, 남의 과실을 보면 곧바로 배척하지 않고 은미한 뜻만을 보여 자신이 스스로 깨닫게 하였다. 언어나 처사에 있어서 규각(圭角)이 드러나게 하지 않았지만 의리(義理)로 결단하는 데 이르러서는 극히 엄격한 바가 있어서 누구도 범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어떤 서생(書生)이 자기 선조의 묘갈을 써달라고 청하자 수침은 잠자코 훑어 보더니 얼마 후에,
"이것은 이계전(李季甸)이 지은 것이다."
하였다. 그가 ‘계전은 어떤 사람입니까?’ 하고 물으니, 수침이 답하기를,
"허후(許詡)의 전기[傳]117) 에 있는 사람이다."
하니, 그 서생이 비로소 깨닫고, 감히 다시 청하지 못했으니 그가 남을 미워하지 않으면서도 엄격함이 이와 같았다. 그의 미간(眉間)만 바라보면 비린(鄙吝)한 마음이 자연히 사라지는지라 어진이나 불초한 사람이나간에 그를 공경하고 사모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도서(圖書)가 가득한 방에 우뚝하게 혼자 거처하면서 세상일에는 아무 뜻이 없는 것 같았지만 시사에 대한 격분과 나라에 대한 걱정은 모두가 그의 진정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성격상 술을 좋아하지는 않았으나 약간 취하면 언제나 높이 읊조렸는데 맑음 음운(音韻)이 집안에 가득하여 화기가 감돌았다. 문장을 경시하고 뜻을 두지 않았으나 산중 생활을 읊조려 묘사하면 그 시의 뜻이 유원(幽遠)하여 조전(彫篆)118) 이나 일삼는 자들의 미칠 바가 아니었다. 평소에 도 정절(陶靖節)119) 의 사람됨을 열모(悅慕)하여 그의 시를 즐겨 보았으니, 시대를 초월하여 뭔가 서로 느끼는 뜻이 있는 듯하였다. 일찍이 자찬(自贊)하기를,
야윈 그 얼굴에
풍모 또한 고고(高古)하다
마흔이 넘도록
아직 한 포의
순순한 그 본심
평생 어김 없어라.
하였다. 김안국(金安國)이 어떤 사람과 수침의 사람됨을 논할 때였다. 그 사람이,
"목숨을 걸고 바른 도를 지킨다[守死善道]는 말에 해당할 것이다."
하니, 안국이
"그뿐이겠는가."
하였고, 상진은 항상 사람들에게
"중옥(仲玉)은 덕을 갖춘 선비다."
하였다. 명나라 급사중(給事中) 위시량(魏時亮)이 본국의 조서(詔書)를 가지고 왔을 때 우리 나라 인물에 대하여 듣고 싶어하자, 수침의 행의(行義)를 조목조목 써 주었다. 이렇듯 그는 일세에 추중(推重)을 받았고 아무도 이에 이의가 없었음을 알 수 있으니, 일민이라 일컬어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일이다. 그는 젊었을 때 조식(曺植)과 벗이었는데, 그가 올린 사직소(辭職疏)의 말씨가 너무 격렬한 것을 보고,
"오랫동안 건중(建仲)120) 을 만나지 못하였는데 이미 원활해졌는가 했더니 지금 이 소에 가시가 너무 드러난 것을 보니 아직도 그 공부가 원숙하지 못한 듯하니 실천의 진도를 알 것 같다."
하였다. 파평(坡平) 땅에 살았기 때문에 호를 파산청은(坡山淸隱)이라고 했다가 그 뒤 우계한민(牛溪閑民)이라고 고치고서,
"나를 청은(淸隱)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였는데, 사림에서 그래도 청송 선생(聽松先生)이라고 불렀다. 그의 필적 또한 고아(古雅)하여 세상에서 진귀하게 여겼다. 아들 성혼(成渾)은 가훈을 받아 선친의 뜻을 잘 이었고 학문에 힘써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리고 효행도 있어 지금 행의(行義)로 이름이 알려져 있다.
- 【태백산사고본】 18책 29권 97장 A면【국편영인본】 20책 682면
- 【분류】인물(人物)
- [註 111]기묘년 : 1519 중종 14년.
- [註 112]
후릉(厚陵) : 정종(定宗)의 능(陵).- [註 113]
임자년 : 1552 명종 7년.- [註 114]
천수(薦首) : 첫번째로 추천된 자.- [註 115]
경신년 : 1560 명종 15년.- [註 116]
병인년 : 1566 명종 21년.- [註 117]
허후(許詡)의 전기[傳] : 허후전은 추강 남효온이 지은 전기로, 허후는 계유정난 이후 수양대군의 처사에 반발하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허후전에 따르면 이계전은 허후를 귀양보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고 한다.- [註 118]
조전(彫篆) : 자구의 수식.- [註 119]
도 정절(陶靖節) : 정절(靖節)은 도잠(陶潛)의 시호(諡號). 그는 지취(志趣)가 고결하고 영리(榮利)를 사모하지 않았다. 그의 시는 뜻이 깊고 맑았으며 문장 또한 고고하였다. 《진서(晉書)》 권94 열전(列傳) 제60.- [註 120]
건중(建仲) : 조식의 자.○徵士成守琛卒。 字仲玉, 昌寧人。 生而質美, 自在孩幼, 儼若成人, 天性至孝, 人以孝兒稱。 及知讀書, 程課篤志, 晝夜不懈, 遭父憂, 與弟守琮, 哀毁踰禮, 啜粥終喪。 有客過其廬, 感其誠孝, 投詩而去, 其詩曰: "成門有二子, 孝行繼家君。 啜粥誠橫日, 焚香哭徹雲。 禮神朝與夕, 謁墓曉兼曛。 一法朱門制, 當今此始聞。" 竟不知其爲誰也。 服闋之後, 每値忌日, 猶先旬致戒, 慟若初喪, 朝夕謁廟, 出入必告。 兄弟同遊趙光祖門下, 俱有重名, 而守琮淸潔英特, 疾惡太過, 至於渾厚敦實, 沈毅和粹, 則守琛有焉。 太學生將疏其孝行於朝, 領議政尙震, 兄弟同榻之友也, 時居上序止之曰: "某兄弟, 力學之士也。 將致遠, 不可使一善之名, 早聞於世。" 事不果上。 己卯年間, 朝廷將興至治, 相從之士, 亦有聲聞大盛者, 守琛獨先憂之。 及名流禍作, 自度不能與世俯仰, 遂棄科業, 結屋數間於白嶽山下家園之後, 扁堂曰聽松, 杜戶不出, 獨處其中, 日誦聖人之訓, 自《太極圖》, 以至程、朱之書, 咸手寫, 玩索義理, 而未嘗以俗念經心。 中廟辛丑, 擧遺逸, 授厚陵參奉, 謝恩而不赴職, 侍母歸坡平山下牛溪之側, 雖屢空而奉養備至。 及今上壬子, 復與曹植、李希顔、成悌元、趙昱同徵, 特授六品官, 皆補外縣, 而守琛實膺薦首。 朝廷冀其赴官, 至易三縣, 竟以母病不赴。 是歲母卒, 守琛時年六十。 哀毁致疾, 發必氣絶, 而猶居墓三年。 且謂 "國俗墓祭之規, 不若祠堂宗法之制。 節時, 子孫輪辦奠具, 或不精潔, 至於(浸)〔寖〕 遠, 則馴致廢祀。" 乃於先塋, 優置田民, 構屋墓下, 藏器有室, 收穀有庫, 設廳具饌, 立房致齋, 凡百器用, 親加規畫, 以立墓祭之法。 或言其過厚, 恐將廢弛, 答曰: "爲之自我者, 當如是。" 庚申, 上特命授司紙。 時尙震爲首相, 勸使來謝曰: "恩命出於上衷, 不可不來。" 守琛時已老病。 其復書曰: "程瓊不薦文立, 知其素性謙退, 年垂八十, 無復當世之望故也。 予非不知我者耶?" 竟不起。 至是病革, 戒諭其子, 且授以斂襲治喪之禮, 乃曰: "死生常理。 一遭歸盡, 良是易事。" 遂更衣就寢而卒。 家貧, 將不克葬, 會, 諫院啓曰: "成某初以遺逸授職, 謝以身病, 終不之官, 杜門求志, 力行古道, 行年七十有二, 卒以窮約而死, 斯可謂一國之善士, 當代之逸民。 宜加恤典, 俾示國家尊賢敬老之意。" 上嘉納之, 卽賜槨一部, 仍命本道, 量支米豆, 調出役夫, 備助襄事之具。 丙寅, 上將徵經明行修之士, 乃思(守除)〔守琛〕 , 特命追奬, 超贈中直大夫司憲府執義, 皆近世未有之典也。 爲人天分甚高, 忠信篤實, 厚重寬弘, 長身秀骨, 風度偉然, 望之充盈, 知其爲德性君子也。 志尙沖澹, 無所嗜好, 其學以反躬切己爲務。 嘗謂學者: "道若大路, 聖訓昭然, 夫豈難知? 貴在力學, 以實其知。 言語之學, 都不濟事。 聖人之門, 聰明英邁, 不爲不多, 而卒傳其道, 乃魯鈍曾氏子耳。" 每以《小學》勸人曰: "修身大要, 盡在於此。 不讀是書, 則居家何以事親, 立朝何以事君乎?" 平居日用, 以淡泊自守, 絹紬之屬, 不以掛體, 雖常情所不堪, 而方且自以爲樂。 親戚貧窮, 必傾財周急, 至以臧獲, 分與朋友兄弟, 略無難意。 聞人一善, 輒嘆慕不置, 見人有過, 未嘗直斥, 惟示微意, 使知自化。 言語處事, 不露圭角, 而至於斷以義理, 則有澟乎不可犯者。 有一生, 請書其先祖墓碣, 守琛默閱良久曰: "這是李季甸所撰也。" 生曰: "季甸何如人也?" 曰: "許詡傳, 有此人。" 其生乃悟, 不敢復請。 其不惡而嚴如此。 觀其眉宇, 鄙吝自消, 人無賢不肖, 莫不敬而慕之。 圖書一室, 塊然獨處, 若無意當世, 而感時憂國, 出於至情。 性雖不飮, 微醺, 輒高吟, 音韻滿室, 和氣可掬。 不屑意文藻, 而吟詠山居, 詩意幽遠, 有非彫篆者所及。 平生, 悅陶靖節之爲人, 喜觀其詩, 每有曠世相感之意。 嘗自贊曰: "其容枯槁, 其貌亦古。 行年四十, 猶一布衣, 初心不駁, 終始無違。" 金安國嘗與人論守琛, 其人曰: "可當守死善道。" 安國曰: "如斯而已乎?" 尙震每謂人曰: "仲玉, 成德之士也。" 大明給事中魏時亮奉詔本國, 求聞我國人物, 乃疏守琛行義以應之。 其取重一世, 人無異辭可知, 而逸民稱之, 誠不愧矣。 少與曺植友, 見其辭職疏, 言甚激發, 乃曰: "久不見建仲, 謂已圓滑, 今見此疏, 鋒鋩太露, 做功猶未盡熟也, 則踐履所到, 孰可知矣?" 自居坡平, 因號坡山淸隱, 後改爲牛溪閑民曰: "吾得謂之淸隱乎?" 士林猶稱聽松先生。 其筆跡古雅, 亦爲世珍玩。 子渾承訓家庭, 克紹先志, 力學不怠。 有孝行, 方以行義知名。
- 【태백산사고본】 18책 29권 97장 A면【국편영인본】 20책 682면
- 【분류】인물(人物)
- [註 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