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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실록29권, 명종 18년 9월 8일 계미 1번째기사 1563년 명 가정(嘉靖) 42년

비변사에서 폭풍의 피해를 입은 함경도 종성 등지의 진휼을 청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함경도 관찰사의 장계 【종성(鍾城)에 7월 23일부터 26일까지 폭풍이 크게 불고 비가 쏟아붓듯이 밤낮으로 그치지 않고 내려서 물가의 논과 밭이 모두 침수되어 내가 되었고, 냇가에 거주하는 백성의 가옥이 60여 채나 떠내려가고 사람도 7명이나 떠내려가 죽었다. 부령(富寧)에 7월 23일부터 25일까지 비바람이 몹시 쳐서 홍수가 나서 사람이 7명이나 떠내려가 죽었다. 온성(穩城)에 7월 23일부터 25일까지 큰 비가 내려 강물이 넘쳐서 강가의 논밭이 모두 침수되고 모래로 뒤덮였으며, 피인(彼人)들의 먼 부락은 아직 확실히 알 수 없으나 경내(境內)의 근처로는 중리(中里) 부락의 71가구, 포항(浦項) 부락의 87가구, 하리(下里) 부락의 3가구, 상리(上里) 부락의 7가구, 시탕(時蕩) 부락의 20가구, 이마퇴(尼亇退) 부락의 7가구가 터도 없이 떠내려가 버렸고, 벼와 곡식도 모두 침수되었다. 경원(慶源)에 7월 23일부터 26일까지 비가 내려 모든 강물이 넘쳤는데 아직 물이 빠지지 않아서 사람이 통행을 못하고 있으니 물이 빠진 뒤에 재해를 조사하여 첩보하겠다. 경흥(慶興)에 7월 23일부터 26일까지 동풍이 거세게 불면서 큰 비가 밤낮으로 그치지 않고 퍼붓듯이 쏟아져 강물이 넘쳐서 관내의 아오지(阿吾地)·무이(撫夷)·조산(造山) 등의 들판 논과, 강음(江陰)·능산(陵山) 등 들판의 화곡들도 침수되고 산 아래 위표(圍標)도 급우가 내를 이룬 바람에 떨어져 나갔는데 평상시에도 물이 넘쳐 자세히 살피지 못했으며, 호지(胡地)의 강가에 있는 13개 부락도 집과 세간이 다 떠내려가 버렸다고 하였다.】 를 보니 육진의 이 비상한 수재는 전고에 없던 변입니다. 형세로 보아 우리 백성들과 성저 호인(城底胡人)들이 장차 이산하게 될 것이니 마땅히 서둘러 구휼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때에는 방비도 또한 엄하게 해야 하고 심상하게 조치해서는 안될 것이니 진휼 경차관(賑恤敬差官)을 가려 보내서 명년 올곡식이 익을 때까지를 한도로 하여 진휼케 하고, 방비 등의 일도 살펴 조치토록 하심이 어떻겠습니까? 대신들과 같이 의논해서 아뢰는 바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뜻이 합당하다. 그대로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8책 29권 65장 A면【국편영인본】 20책 666면
  • 【분류】
    군사-군정(軍政) / 구휼(救恤)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癸未/備邊司啓曰: "臣等伏覩咸鏡道觀察使狀啓, 【鍾城自七月二十三日至二十六日, 暴風大作, 下雨如注, 晝夜不息, 水邊田地, 盡爲川反, 沿水居民六十餘家漂流, 人民七名漂死。 富寧自七月二十三日至二十五日, 風雨交作, 大水橫流, 人民七名漂死。 穩城自七月二十三日至二十五日大雨, 江水漲溢, 沿江田地, 盡數沈水覆沙。 彼人遠部落, 則時未的知, 境內近處, 中里部落七十一家, 浦項部落八十七家, 下里部落三家, 上里部落七家, 時蕩部落二十家, 尼亇退部落七家, 無基漂流, 禾穀亦盡沈沒。 慶源自七月二十三日至二十六日下雨, 衆流漲溢, 禾穀盡沒, 時未水退, 人不通行, 水退後, 摘奸牒報。 慶興自七月二十三日至二十六日, 東風急吹, 大雨注下, 晝夜不息, 江水漲溢, 所管阿吾地、撫夷、造山等坪田及江陰、陵山坪禾穀沈沒, 山底圍標, 因其急雨, 或成川浦落, 常時水漲, 不能審定, 胡地沿江十三部落, 家舍財産, 盡數漂流云。】 六鎭水災非常, 前古所無之變也。 我民與城底胡人, 勢將離散。 所當汲汲賑救, 而如此之時, 防備亦宜嚴謹, 不可尋常措置。 擇遣賑恤敬差官, 限明年早穀成熟間, 賑救及防備等事, 檢擧措置何如? 與大臣同議以啓。" 傳曰: "啓意當矣。 如啓。"


    • 【태백산사고본】 18책 29권 65장 A면【국편영인본】 20책 666면
    • 【분류】
      군사-군정(軍政) / 구휼(救恤)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