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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실록29권, 명종 18년 8월 7일 계축 1번째기사 1563년 명 가정(嘉靖) 42년

조강에서 세법의 문란, 함경도 육진의 육성책 등에 관하여 논의하다

상이 조강에 나아갔다. 지경연사 오겸(吳謙)이 아뢰기를,

"소신이 두 차례 호조 판서가 되어 본 바에 의하면 국고의 저축이 겨우 1년을 지탱할 정도여서 해마다 세입(歲入) 이외에 군자(軍資) 저축을 써 온 지가 이미 오래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모두 아주 오래 전에 저장해 둔 것이어서 장인(匠人)이나 하인이 받는 녹봉은 모두 썩어서 먹지 못할 것들이며, 군자의 저축도 바닥이 나고 있으니 극히 한심스럽습니다.

이것은 실로 세법(稅法)이 《대전》의 본의대로 되지 않은 까닭에서 연유된 것입니다. 중고 시대에는 인심이 조금 순박하여 그 법이 쓰일 수 있었지만 지금은 간리의 농간을 적발할 길이 없습니다. 때문에 언제나 실(實)을 재(災)로 만들고 있습니다. 만약 이렇게 함으로 해서 궁한 백성이 조금의 혜택이라도 입는다면 괜찮지만 이제 실을 재로 만드는 것은 모두가 호족들의 논밭일 뿐 궁한 백성들은 더욱 시달리고 있으니 바라건대 《대전》의 본의에 따라 선처의 방도를 시행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뢴 뜻이 지당하다. 공사가 모두 편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특진관 유강(兪絳) 【성품이 강경했으나 권세 앞에는 나약했고 재간과 능력이 있었으나 가산을 모으는 데만 힘써 나라에는 도움이 없었다.】 이 아뢰기를,

"함경도의 육진이 근래에 피폐함이 극심하여 백성이 시들어가고 있습니다. 진실로 농사를 짓지 못하게 되면 도리어 호지(胡地)를 낙토(樂土)로 여겨 투신해 갈 것이니 참으로 한심한 노릇입니다. 조종조에서 입거(入居)의 법을 세운 것은 변방을 실(實)하게 하자는 계책이었는데 근자에 국법이 해이하여 입거했던 백성들이 거의 다 도망쳐 돌아오고 있습니다. 도내에 도망와 있는 자는 감사가 혹 찾아서 되돌려 보내기도 하지만 타도에 있는 자는 찾아 보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변진이 허술해지고 있으니, 만약 사변이라도 생긴다면 반드시 지탱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바라건대 변방을 실하게 하는 정사를 다시 강구하소서.

전에는 양계(兩界)034) 의 변장을 선전관(宣傳官)이나 육조의 낭관 중에서 차송(差送)했는데 근래에는 왜변 때문에 남방에 치중하여 북방의 첨사와 만호를 모두 무지하고 난잡한 무리들로 주의하고 있습니다. 고령진(高嶺鎭)은 관방(關防)에 중요한 곳이므로 언제나 품질이 높은 사람을 차송하였고 보을하(甫乙下)는 관방이 더욱 중한 곳으로 성저 호인(城底胡人)이 가장 많고 매매의 거래가 번잡하여 장사꾼들이 많이 모이고 있어서 진무(鎭撫)하기가 가장 힘드는 곳인데도 매양 겨우 출신(出身)035) 했거나 아직 출신도 못한 자를 보내고 있습니다. 장래 당상이 될 사람을 택하여 보내고 인하여 육진으로 옮겨 서용하심이 어떻겠습니까? 그리고 육진은 지대가 매우 추운 곳이어서 전부터 가끔 납의(衲衣)를 지어 보냈는데 근래에는 그렇게 한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혹 지의(紙衣)를 만들어 보낸다고 하나 모두에게 미치지는 못하고 있는 실정이니 예송(例送)의 수량을 늘리도록 하소서. 그리고 긴요치 않은 공물은 면제해 주고, 개가죽 옷[狗皮衣]을 만들어 보내주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뢴 말이 지당하다. 내일 회의 때에 아울러 의논할 것을 해조(該曹)에 말하라."

하였다. 특진관 안위(安瑋) 【봉공하기를 성실히 하였고 그 형제간에 우애하였으니 죽은 좌의정 안현(安玹)의 형이다.】 가 아뢰기를,

"예로부터 양계를 중요한 곳으로 여겨왔는데, 지금은 방비만이 해이해졌을 뿐 아니라, 전하는 말을 듣건대 토병(土兵)들에게 양마가 있으면 변장이 값을 깎아 빼앗고 사행(私行)으로 왕래하거나 수령을 영송하는 데도 모두 토병의 말로 수송하고 있으므로 말을 가진 토병은 도리어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 하니, 통렬히 금지할 것을 감사와 병사에게 하유(下諭)하소서. 함경도의 변장들은 대부분 소를 가지고 모물(毛物)을 환매(換買)하고 있으므로 장사꾼들이 소를 사가지고 오는 사람이 많아서 농우(農牛)가 이미 다 없어져 논을 갈 때 사람이 소가 하는 일을 대신한다고 하니 변장에게 엄히 신칙하여 매매를 억제하게 하소서.

또 하삼도(下三道)에 왜변이 있은 후로는 변장들이 모두 일이 없을 것이라고 하여 구차히 세월만 보내고 있는데, 들리는 소문에는 제주 목사 【김우서(金禹瑞).】 가 그의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왜인이 우리 나라 사람 8명을 잡아갔다.’고 했다 합니다. 이 소문은 제주를 통하여 도하(都下)036) 에까지 전해졌는데도 본도의 감사·병사는 모두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소신이 전라 감사가 되었을 당시 우리 나라 사람 2명이 잡혀 가는 것을 뒤쫓아 가서 빼앗아 온 적이 있는데 이로 미루어 볼 때 8명이 잡혀갔다는 말이 헛소리가 아닌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하서하여 자세히 알아보라. 진실로 사람을 잡아갔다면 매우 놀라운 일이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8책 29권 48장 A면【국편영인본】 20책 657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정론(政論) / 외교-왜(倭) / 농업(農業) / 재정-국용(國用) / 군사-부방(赴防) / 호구-이동(移動)

○癸丑/上御朝講。 知經筵事吳謙曰: "小臣兩度爲戶曹判書, 見國儲僅支一年, 每於年年歲入之外, 軍資之儲, 用之已久。 且皆百年前儲積, 故匠人及下人食俸, 皆腐朽不食之物, 而軍資之儲亦竭, 極爲寒心。 良由稅法, 非《大典》本意故也。 中古人心稍淳, 則其法猶可用矣, 今則奸吏舞術, 摘發無路, 故每以實爲災。 若以此而窮民蒙一分惠澤, 則猶之可也, 今以實爲災者, 皆豪右之田, 而窮民益困。 請依《大典》本意, 而行善處之道。" 上曰: "啓意至當。 使公私兩便爲之可也。" 特進官兪絳 【性雖剛克, 而不能行之於權勢, 才雖幹能, 而徒致力於家産, 於國事何補。】 曰: "咸鏡道六鎭, 近來疲弊已極, 人民凋殘。 苟失農作, 則反以地爲樂土而投之, 極爲寒心。 祖宗朝, 立入居之法, 爲實邊之策, 而近者國法解弛, 入居之人, 率皆逃還。 在道內者, 監司或能推還, 他道則不能。 以此列鎭虛疎, 若有事變, 則必難支矣。 請申明實邊之政。 兩界邊將, 前時或以宣傳官, 或以六曹郞官差送矣, 近者以變之故, 歸重南方, 北方僉使、萬戶, 擧皆以無知冗雜之類注擬。 高嶺鎭, 關防重地, 故常以秩高之人差送矣, 甫乙下則關防尤重, 城底胡人最多, 買賣之是煩, 商賈之是聚, 最難鎭撫, 而每以新出身及未出身者差送。 請將爲堂上之人差遣, 因以遷敍六鎭何如? 且六鎭地極寒, 自前或造衲衣入送, 而近來則未聞焉。 雖或造送紙衣, 不能遍及, 請加例送之數。 且除不緊貢物, 而造狗皮衣入送。" 上曰: "啓意皆當。 明日會議時幷議事, 言于該曹。" 特進官安瑋 【奉公頗勤, 友於兄弟。 卒左議政玹之兄也。】 曰: "自古以兩界爲重地, 今者非但防禦解弛, 側聞土兵有良馬, 則邊將減價奪取, 私行往還, 守令迎送, 皆以土兵馬傳輸, 土兵之有馬者, 反以爲苦。 痛加禁戢事, 監司、兵使處下諭。 咸鏡道邊將, 多以牛隻, 貿換毛物, 商(買)〔賈〕 亦多買牛而來, 農牛已盡, 耕田之祭, 人代牛役。 宜嚴勑邊將, 禁抑買賣。 且下三道, 變以後, 邊將皆以爲無事, 苟過歲月, 傳聞濟州牧使 【金禹瑞。】 致友人書, ‘倭人搶去我國人八名’ 云。 此人通於濟州, 傳及都下, 本道監司、兵使, 皆不以聞。 小臣爲全羅監司時, 我國人二名搶去, 而追奪以來。 以此觀之, 今云八名搶去之言, 似不爲虛矣。" 上曰: "下書察之。 實若人物搶去, 則極爲駭愕矣。"


  • 【태백산사고본】 18책 29권 48장 A면【국편영인본】 20책 657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정론(政論) / 외교-왜(倭) / 농업(農業) / 재정-국용(國用) / 군사-부방(赴防) / 호구-이동(移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