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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실록28권, 명종 17년 2월 25일 기묘 1번째기사 1562년 명 가정(嘉靖) 41년

홍천민·윤의중·박계현 등에게 정일 집중 등에 대해 논란하게 하다

상이 충순당(忠順堂)에 나아갔다. 【대제학 정유길(鄭惟吉)과 제학 이양(李樑)이 함께 입시했다.】

사신은 논한다. 정유길이양과 교결하여 이렇듯 불시에 나아가 뵙게 된 것이다. 그런데도 조금도 옳은 것을 진언하여 잘못을 바로잡지는 않고 아첨하여 총애를 구하는 데만 힘썼으니, 정말 위로는 선조께 부끄럽고 아래로는 후세에 부끄러운 자라고 할 만하다.

정유길이양에게 전교하기를,

"평소 과차(科次)할 때 혹 특별한 일로 인하여 과차하는 것이 제대로 안 되는 경우가 있었다. 저번에 옥당과 서당 인원들이 제술한 것이 대내에 많이 들어와 있기에 오늘 특별히 경들을 부른 것이다."

하였다. 【상이 큰 소리로 읊조리며 과차하게 했다.】 이어서 단자(單子)를 내리면서 이르기를,

"이 당상들은 문장력이 뛰어난 자들이다. 【홍천민(洪天民)·이홍남(李洪男)·윤의중(尹毅中)·박계현(朴啓賢)·유순선(柳順善)·허엽(許曄)·이언충(李彦忠)·이중경(李重慶).】 그러니 불의에 명소(命召)해서 제술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고, 또 어서(御書)를 정유길이양에게 내리면서 이르기를,

"지금 홍천민윤의중박계현을 앞으로 나오게 해서 논란하게 하라."

하였다.【그 어서(御書)의 내용은 ‘요(堯)와 순(舜)의 정일집중(精一執中)하는 학문, 하(夏)나라 우(禹) 임금의 홍수 다스린 일, 성탕(成湯)이 그물을 풀고 짐승을 놓아준 일, 문왕(文王)이 정사를 하여 인(仁)을 베풀되 반드시 홀아비나 과부 등을 우선적으로 돌보아 천하의 3분의 2를 소유하게 된 일, 무왕(武王)이 주(紂)를 쳐부수고 기자(箕子)를 방문하여 홍범(洪範)을 물은 일, 한(漢)나라 문제(文帝)와 경제(景帝) 때 백성들이 잘 살게 된 일, 당(唐)나라 건성(建成)의 난010) , 송(宋)나라 휘종(徽宗)흠종(欽宗)이 북쪽 오랑캐에게 포로가 된 일011) , 어느 시대에 임금과 신하가 서로 잘 조화되었던가 하는 문제, 선조(先朝) 때의 중국 사신들의 시문(詩文)의 우열, 우리 나라 옛사람 중에서 시(詩)에 가장 능했던 사람, 선조 때 나세찬(羅世纘)이 제술을 했다가 김안로에게 해를 받은 일012) , 난정(蘭亭)에서 수계(修禊)한 일013) ’이었다.】 정유길이 묻기를,

"정일집중(精一執中)하는 학문은 누구에게서부터 시작되었는가? 예로부터 제왕들이 서로 심법(心法)을 전수하는 데는 고작 이 몇 마디뿐이었는데, 이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하는가?"

하니, 윤의중(尹毅中)이 답하기를,

"윤집궐중(允執厥中)은 요 임금순 임금에게 명한 말이고, 유정유일 윤집궐중(惟精惟一允執厥中)은 순 임금우 임금에게 명한 말입니다."

하고, 박계현(朴啓賢)이 답하기를,

"무극(無極)이 태극(太極)이라는 것이 심학(心學)의 근원인데, 그것을 발로시켜서 말로 표현한 것은 요순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고, 홍천민(洪天民)이 답하기를,

"공자가 이른바 극기복례(克己復禮)라고 한 것이 곧 정일집중의 뜻입니다."

하였다. 정유길이 묻기를,

"삼대(三代) 이하로 이 심학을 잘 전수한 제왕이 있었는가?"

하니, 박계현이 답하기를,

"삼대 이하로는 없었습니다."

하였다. 정유길이 묻기를,

"상이 이 학문을 하고자 한다면 장차 어떠한 공력을 들여야 하겠는가?"

하니, 박계현이 답하기를,

"정일(精一)의 학문은 당초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대학》에서 왕도(王道)를 논할 때에 신독(愼獨)으로 으뜸을 삼았으니, 진실로 신독만 잘 할 수 있게 되면 그것이 곧 정일집중하는 경지가 될 것입니다."

하였다. 정유길이 묻기를,

"곤(鯀)이 9년 동안 홍수를 다스렸으나 성공하지 못하자, 우(禹)에게 명하여 다스리게 했는데, 마침내 물길을 잡고 토지를 건지게 되었다. 무슨 방법을 쓴 것인가?"

하니, 박계현이 답하기를,

"은 물길을 막았기 때문에 성공하지 못했고 는 물의 성질대로 터놓았기 때문에 다스릴 수 있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비단 치수(治水)하는 것만 그런 것이 아니요 나라를 다스리는 것도 마찬가지라 하겠습니다. 이치에 순응하면 만사가 쉽게 풀리고 거스르면 어렵게 되는 것입니다."

하였다. 정유길이 묻기를,

"성탕(成湯)이 그물을 풀고 짐승을 놓아 준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박계현이 답하기를,

"제왕은 물건을 남김없이 다 취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역경(易經)》에서 말하기를, ‘짐승을 쫓되 세 방향에서 몰이를 하고 한 쪽은 틔워준다.[王用三驅]’고 했으며, 공자도 활을 쏘되 잠들어 있는 생명은 건드리지 않았습니다.[弋不射宿] 그리고 《춘추(春秋)》에서 ‘사냥하려고 함구(咸丘)를 몽땅 불태웠다.’고 쓴 것은 그것을 기롱한 것입니다."

하였다. 정유길이 묻기를,

"문왕이 정사를 하여 인(仁)을 베풀되 반드시 홀아비나 과부 등을 우선적으로 돌본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윤의중이 답하기를,

"임금이 백성을 다스림에 진실로 모두에게 똑같이 인을 베풀어야 하겠지만, 선후(先後)와 완급(緩急)의 순서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한 것입니다."

하였다. 이양이 묻기를,

"천하의 3분의 2를 차지했으니 천자가 될 수 있었는데 무왕 때에 와서야 그 일을 성취했으니, 문왕무왕보다 못해서 그랬던 것인가?"

하니, 박계현이 답하기를,

"천명이 아직 바뀔 때가 아니라면 신하의 절개를 지키는 것이 타당합니다. 문왕이 천자가 되지 않았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하였다. 정유길이 묻기를,

"무왕기자(箕子)를 보고 무엇을 물었는가?"

하니, 박계현이 답하기를,

"홍범 구주(洪範九疇)에 대해서였습니다."

하였다. 이양이 묻기를,

"비간(比干)은 죽고 미자(微子)는 도망갔는데, 기자가 도(道)를 무왕에게 전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는가?"

하니, 윤의중이 답하기를,

"만약 무왕에게 전하지 않는다면 역대 제왕들이 서로 전해 왔던 도가 끊어지게 될 것입니다. 비록 신하로서 그를 섬기지는 않는다 해도, 만세(萬歲)의 공도(公道)를 이 때문에 끊어지게 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하였다. 정유길이 묻기를,

"주(周)의 대(代)에서는 성왕(成王)·강왕(康王)의 치세를 칭하고 한(漢)나라 때에는 문제(文帝)경제(景帝) 때가 좋았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은 무슨 연유에서인가?"

하니, 홍천민이 답하기를,

"문제는 덕(德)의 측면에서 보면 공검(恭儉)했고 공효(功效)의 측면에서 보면 국민 생활이 넉넉해졌습니다. 그런데 경제는 성품이 각박해서 비록 문제와 같이 일컬어지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문제보다 뒤떨어진다고 하겠습니다."

하였다. 정유길이 묻기를,

"당(唐)나라 건성(建成)의 난(亂) 때 금문(禁門)이 피바다를 이루었는데, 처리를 잘했더라면 이런 일이 없을 수 있었겠는가?"

하니, 박계현이 답하기를,

"시대가 평온할 때는 적장자(嫡長子)를 세우고, 세상이 혼란할 때는 공이 있는 자를 우선으로 하는 법입니다. 고조(高祖)가 난을 평정한 것은 모두 태종의 공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거꾸로 건성을 황태자로 세웠으니, 이것이 태종이 승복할 수 없었던 까닭입니다. 만약 태종자장(子臧)014) 과 같고 건성태백(泰伯)015) 과 같았더라면, 난이 어떻게 일어났겠습니까."

하였다. 정유길이 묻기를,

"송 나라 때에 무략(武略)이 비록 떨쳐지지는 못했다고 해도 완전히 형편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런데도 휘종(徽宗)흠종(欽宗)이 북쪽 오랑캐인 금(金)나라의 포로가 되고 말았는데, 조정의 신하들이 끝내 회복할 수 없었던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때에 어떤 사람들이 일을 주관했기에 그렇게 된 것인가?"

하니, 홍천민이 답하기를,

"이강(李綱)조정(趙鼎)016) 의 계책을 썼더라면 그 지경에까지는 이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황잠선(黃潛善)왕백언(汪伯彦)·진회(秦檜)017) 등이 주화(主和)를 부르짖으면서 권력을 제멋대로 휘둘렀던 까닭에 나랏일이 이미 그르쳐졌으니, 비록 지자(智者)가 있었더라도 잘 수습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고, 윤의중이 답하기를,

"당시에 군자들이 조정에 가득하였고 이강이 들어오면서 군정(軍政)이 그런대로 닦여졌으니, 성(城)을 뒤로 하고 한번 싸워볼 만하였습니다. 그런데 주화론(主和論)에 빠져 오랑캐의 군영으로 같이 따라가고 말았으니, 악비(岳飛)종택(宗澤)018) 이 비록 충성을 다해 힘썼다고 한들 어떻게 회복시킬 수 있었겠습니까."

하였다. 정유길이 묻기를,

"훌륭한 임금과 훌륭한 신하가 서로 만나 아주 친밀한 관계를 맺었던 것은 삼대 이하로 누가 있었는가?"

하니, 박계현이 답하기를,

"삼대 이하에서는 한 고조(漢高祖)장량(張良)을 대우한 것이나 소열 황제(昭烈皇帝)공명(孔明)을 대우한 것 등이 거기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하였다. 정유길이 묻기를,

"우리 조종조에 이르러서는 어느 시대에 이런 일이 있었는가?"

하니, 박계현이 답하기를,

"성묘(成廟)손순효(孫舜孝)를 대우함에 있어 그 뜻이 지극했습니다."

하고, 홍천민이 답하기를,

"성묘의 경우는 비단 손순효만 우대했던 것이 아니라, 유호인(兪好仁)·조위(曺偉) 같은 사람들도 총애를 입었습니다."

하였다. 정유길이 말하기를,

"그들은 다만 문장을 잘 짓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이처럼 총애를 받았던 것일 뿐이나, 세종(世宗)황희(黃喜)·허조(許稠)의 관계는 극진했다 할 만하다."

하고, 또 묻기를,

"조종조 이래로 조사(詔使)들의 시문(詩文)의 우열이 어떠한가?"

하니, 홍천민이 답하기를,

"가장 우수한 자로는 옛날에는 장영(張寧)기순(祈順)이 있었고, 근래에는 당고(唐庫)사도(史道)가 있었습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우리 나라에서 조종조 이래로 시를 잘 지었던 사람은 누구인가?"

하니, 홍천민이 답하기를,

"김종직(金宗直)입니다."

하였다. 정유길이 말하기를,

"김종직은 학문이 정미하고 시문도 모두 잘 하였다. 김종직의 뒤로는 이행(李荇)의 시가 훌륭하였다. 박은(朴誾)의 시와 김일손(金馹孫)의 문(文)도 그 짝을 찾기가 힘들다."

하고, 또 묻기를,

"선조(先朝) 때에 나세찬이 책문(策文)을 제술했다가 김안로에게 해침을 당했던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홍천민이 답하기를,

"그 책문의 내용은 중화(中和)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김안로는 그것이 자기를 비난한 것이라고 의심했습니다. 그 때문에 죄주었던 것입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난정(蘭亭)에서 수계(修禊)한 것은 어떤 일이었으며, 모인 사람들은 어떤 자들이었는가?"

하니, 홍천민이 답하기를,

"3월 상사일(上巳日)에 신에게 빌어 상서롭지 못한 재액을 떨어버리는 것은 하나의 풍속이었습니다. 거기에 모인 자들은 왕희지(王羲之)·사안(謝安) 등 17인이었습니다."

하였다. 이양이 묻기를,

"수계의 일이 치도(治道)와 관계되는가?"

하니, 윤의중이 답하기를,

"그때는 오랑캐가 중국을 함락했으니, 안일하게 잔치나 베풀 때가 아니었는데, 해오던 습속을 면치 못했기 때문에 이와 같았던 것입니다."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편전(便殿)으로 불러 강론하게 하면서 정일(精一)에 대한 물음을 우선적으로 하였으니, 상의 바른 취향과 독실한 구도 정신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물음을 받은 자는 당연히 정미한 이 말을 끝까지 논하여 성덕(聖德)을 보좌했어야 하는 것인데 배움을 받은 것이 없고 마음에 깨달은 바가 없어 아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그 대답한 것이 장구(章句)를 훈고하는 정도에 그치고 말았다. 어떻게 성심(聖心)을 깨우치고 성덕을 보좌할 수 있겠는가. 평소에 성명(性命)에 관한 책을 읽어 그 덕을 길러두지 못하고, 창졸간에 자기의 보잘것없는 문견(聞見)으로 성상의 물음에 답변하는 책임을 메우려 하였으니, 너무 소홀하지 아니한가?.


  • 【태백산사고본】 17책 28권 12장 A면【국편영인본】 20책 616면
  • 【분류】
    인사(人事) / 역사-사학(史學) / 역사-고사(故事)

  • [註 010]
    건성(建成)의 난 : 이건성(李建成)은 당 고조(唐高祖)의 장자로서 고조가 개국하여 제위에 오르자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그때에 그의 동생 이세민(李世民)의 명성에 불안을 느껴 중제(仲弟)인 제왕(齊王) 이원길(李元吉)과 모의하여 이세민을 제거하려 했는데, 이세민의 부리(府吏) 방현령(房玄齡)과 울지경덕(蔚遲敬德) 등이 권하여 이세민이 먼저 이들을 쳤다. 이것이 건성의 난이다. 이세민은 이후 세자에 책봉되었는데, 이 사람이 당 태종(唐太宗)이다.
  • [註 011]
    송(宋)나라 휘종(徽宗)과 흠종(欽宗)이 북쪽 오랑캐에게 포로가 된 일 : 휘종(徽宗)은 북송(北宋) 제8대 임금으로 철종(哲宗)을 이어 신종(神宗)의 제11번째 아들로서 제위(帝位)에 올랐는데, 도교(道敎)를 무척 숭봉하여 자칭 교주도군 황제(敎主道君皇帝)라 했다. 그의 장자인 흠종(欽宗)이 즉위한 이듬해, 금(金)나라의 군대가 송도(宋都) 변경(汴京)을 함락시키자 그들의 포로가 되는 치욕을 겪었다. 흠종의 연호인 정강(靖康)을 빗대어 이를 정강의 변[靖康之變]이라 한다.
  • [註 012]
    나세찬(羅世纘)이 제술을 했다가 김안로에게 해를 받은 일 : 김안로는 이조 중종 때의 권신으로 처음 남곤(南袞)에게 쫓겨나 유배되었으나, 뒤에 다시 그 일파를 죽이고 정권을 장악,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고, 누차 옥사(獄事)를 일으켜 이언적(李彦迪)·이행(李荇)·정광필(鄭光弼) 등을 귀양보냈다. 그러나 문정 왕후(文定王后)를 폐하려다 실각, 중종 32년(1537) 허항(許沆)·채무택(蔡無擇)과 함께 사사(賜死)되니 이를 정유삼흉(丁酉三凶)이라 한다.
  • [註 013]
    난정(蘭亭)에서 수계(修禊)한 일 : 진(晉)나라 목제(穆帝) 영화(永和) 9년 3월 3일에 당시의 명사들이 난정에 모여서 곡수(曲水)에 잔을 띄워 계연(禊宴)을 베풀며 시를 지어 읊은 모임. 난정은 절강성(浙江省) 소흥현(紹興縣) 서남쪽에 있다.
  • [註 014]
    자장(子臧) : 춘추 시대에 제후들이 조성공(曹成公)을 쳐서 그를 잡아 경사(京師)로 돌아온 뒤, 그의 후계자로 자장(子臧)을 지목하여 세우려 하였다. 이때 자장은 이를 거부하고 마침내 송(宋)나라로 망명했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성공(成公) 15년.
  • [註 015]
    태백(泰伯) : 주 태왕(周太王)의 장자로 계력(季歷)의 형. 동생 계력이 현인인 데다 그 아들 창(昌)이 훌륭하자 계력을 후사로 세우고자 하는 아버지의 의도를 미리 알고 동생 중옹(仲雍)과 형만(荊彎) 땅으로 도망쳤다. 창은 곧 뒤의 문왕(文王)이다 《논어(論語)》 태백(泰伯).
  • [註 016]
    이강(李綱)과 조정(趙鼎) : 이강은 정강(靖康) 초에 병부 시랑(兵部侍郞)이 되었는데 금군(金軍)이 내침하자 주전론을 강력히 주장하다 유배되었다. 그 뒤 고종(高宗)이 즉위하면서 정승이 되어 설분치욕할 것을 꾀했으나 황잠선(黃潛善) 등에 의해 저지되어 70여 일 만에 파직되고 말았다. 조정은 이강과 동시대인으로 진회(秦檜)와 주화·주전을 놓고 다투다 파직되어 영남(嶺南)으로 유배되었는데 길양군(吉陽軍)으로 옮겨진 뒤 식음을 전폐하고 죽었다.
  • [註 017]
    황잠선(黃潛善)과 왕백언(汪伯彦)·진회(秦檜) : 모두 송(宋) 흠종(欽宗)·고종(高宗) 때의 권신들. 황잠선은 당시의 명사인 진동(陳東)과 구양철(歐陽澈)이 자신과 시사(時事)를 비판하자 모두 죽이기까지 하였다. 왕백언은 우복야(右僕射)로 있으면서 제멋대로 권세를 휘두르다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으나 뒤에 다시 검교소부(檢校少傅)와 보신군 절도사(保信軍節度使)에 임명되었다. 진회는 정강의 변 때 어사중승(御史中丞)으로 휘·흠 2제를 따라 금(金)에 갔다가 고종 때 돌아와 정승이 되었는데 금의 세력을 배경으로 천권하며 화의를 강력히 주장했다. 그는 악비(岳飛)를 무고하여 죽이는 등 충신들을 헤아릴 수 없이 죽였으며 집정(執政) 28인을 갈아 치우기도 하였다.
  • [註 018]
    악비(岳飛)와 종택(宗澤) : 악비는 종택의 부하였다. 누차 금군을 파하니 고종이 ‘정충악비(精忠岳飛)’ 4자를 내리기도 했다. 다시 이성(李成)을 격파하고 유·예주(劉豫州)를 평정했으며, 그 뒤 주선진(朱仙鎭)에서 금병(金兵)을 크게 깨뜨린 뒤 다시 도하(渡河)하려 하다가 진회의 모략에 걸려 잡혀와 옥사했는데, 당시 나이 39세였다. 종택은 문무를 겸전한 송의 명장. 싸우는 대로 이겨 북방의 금군들도 ‘종야야(宗爺爺)’라 부르며 감히 그에게 도전하지 못했다. 전후 20여 차례에 걸쳐 황제가 경사에 돌아오도록 청했으나 간사한 무리들에 의해 뜻이 이루어지지 않자 분한 마음에 병이 들어 죽었다.

○己卯/上御忠順堂, 【大提學鄭惟吉、提學李樑竝入侍。】 傳于鄭惟吉

【史臣曰: "惟吉交結李樑, 不時進見。 如此而少無獻可替否, 而徒務依阿取寵, 可謂上愧乃祖, 俯愧後世者歟!"】

李樑曰: "常時科次, 或因事殊爲之, 未從容。 頃者玉堂、書堂製述, 多入于內, 今日別招卿等耳。" 【上使高聲吟詠科次。】 仍下單子曰: "此堂上有詞華者也。 【洪天民、李洪男、尹毅中、朴啓賢、柳順善、許曄、李彦忠、李重慶。】 不意命召, 使之製述可也。" 又下御書于惟吉曰: "今洪天民尹毅中朴啓賢進前, 論難。" 【其書曰:"堯、舜精一執中之學; 夏禹治洪水; 成湯解網放獸; 文王發政施仁, 必先鰥寡, 三分天下有其二; 武王伐紂, 訪洪範; 漢 文帝、景帝, 致富庶; 唐 建成之亂; 宋 徽、欽被北虜之禍; 古之君臣相得者何代; 先朝華使詩家能否; 我國古人詩家最能者何人; 先朝羅世纉製述, 被金安老之害; 蘭亭修褉事。】

惟吉問曰: "精一執中之學, 始於何人, 而自古帝王傳授心法, 止此數語而足耶?" 毅中曰: "允執厥中, 之辭, 惟精惟一, 允執厥中, 之辭也。" 啓賢曰: "無極、太極, 心學之原。 發而言之, 則自始也。" 天民曰: "孔子所謂克(正)〔己〕 復禮, 卽精一執中之意也。" 惟吉曰: "三代以下, 有能傳心學之帝王乎?" 啓賢曰: "三代以下, 則無矣。" 惟吉曰: "自上欲爲此學, 則將何用功乎?" 啓賢曰: "精一之學, 初無難事。 《大學》之論王道, 以謹獨爲首。 誠能謹獨, 則卽精一執中也。" 惟吉曰: "治洪水九載弗績, 命治之, 卒平水土。 用何道歟?" 啓賢曰: "則堙塞, 故不成, 乃順水之性, 故能治。 以此觀之, 非徒治水, 理國亦然。 順之則易, 逆之則難。" 惟吉曰: "成湯之解網放獸, 何也?" 啓賢曰: "帝王不可盡物取之, 故《易》曰: ‘王用三驅。’ 孔子弋不射宿。 《春秋》書 ‘焚咸丘’, 譏之也。" 惟吉曰: "文王發政施仁, 必先鰥寡, 何耶?" 毅中曰: "君之理民, 固所同仁, 必有先後緩急之序, 故如是。" 曰: "三分天下有其二, 可爲天子, 而至武王乃爲之, 乃劣於武王而然耶?" 啓賢曰: "天命未改, 當守臣節。 文王之不爲天子, 以此也。" 惟吉曰: "武王箕子, 問何事耶?" 啓賢曰: "《洪範》九疇, 是也。" 曰: "比干死, 微子逃, 箕子傳道於武王, 何耶?" 毅中曰: "不傳之武王, 則相傳之道絶矣。 雖不臣事, 萬世公道, 不可以此而絶之。" 惟吉曰: ", , 何耶?" 天民曰: "文帝, 德則恭儉, 效則富庶。 景帝性刻, 雖或竝稱, 實劣於文帝也。" 惟吉曰: " 建成之亂, 蹀血禁門。 若善處, 則可無此耶?" 啓賢曰: "時平則立嫡長, 世亂則先有功。 高祖之撥亂, 皆以太宗之功, 而反立建成, 此太宗所以不能平也。 使太宗子臧, 建成泰伯, 則亂何由生?" 惟吉曰: "時武略, 雖曰不競, 不至於極, 而北狩, 在朝群臣, 終不能回者, 何也? 其時何人用事而然耶?" 天民曰: "用李綱趙鼎之謀, 則不至如此, 而黃潜善汪伯彦秦檜主和擅權, 國事已誤, 雖有智者, 不能善其後矣。" 毅中曰: "當時君子滿朝, 李綱入來, 軍政稍修, 背城一戰可也, 陷於和議, 陪往虜營, 岳飛宗澤, 雖竭忠力, 何能恢復耶?" 惟吉曰: "君臣相得, 魚水一堂者, 在三代以下誰耶?" 啓賢曰: "三代以下, 如 之遇張良, 昭烈之待孔明, 可謂近矣。" 惟吉曰: "至我祖宗朝, 則何代相得乎?" 啓賢曰: "成廟之待孫舜孝, 其意至矣。" 天民曰: "成廟則非特優待孫舜孝, 至如兪好仁曺偉, 亦被寵遇。" 惟吉曰: "只以文翰而如此耳。 若世宗之於黃喜許稠, 可謂盡矣。" 又曰: "自祖宗朝以來, 詔使之詩文優劣如何?" 天民曰: "最優者, 古則張寧祈順, 近則唐皋史道是已。" 又問曰: "我國祖宗朝以來, 能詩者何人耶?" 天民曰: "金宗直是也。" 惟吉曰: "宗直學問精微, 詩文皆善。 宗直之後, 李荇之詩善矣。 朴誾之詩、金馹孫之文, 亦罕有其比也。" 又問曰: "先朝羅世纉製策, 被金安老之害, 何耶?" 天民曰: "其策以中和爲主, 安老疑其譏已, 故罪之矣。" 又問曰: "蘭亭修稧者何事, 而所會者何人耶?" 天民曰: "三月上巳, 祓除不祥, 俗也。 所會者, 王羲之謝安等十七人也。" 曰: "修稧之事, 關於治道耶?" 毅中曰: "其時夷狄陷, 非偸安遊宴之時, 而不免時習, 故如此耳。"

【史臣曰: "召見便殿, 使之講論, 而首以精一爲問, 可見上趨向之正, 求道之篤。 承問者所當極論精微之言, 以補聖德可也, 而學無所受, 心無所得, 空空如也, 故其所對, 不過訓誥章句而已。 何能啓沃聖心, 而裨補聖德乎? 平日不讀性命之書, 以養其德, 倉卒欲以所聞見, 仰塞聖問, 不已踈乎?"】


  • 【태백산사고본】 17책 28권 12장 A면【국편영인본】 20책 616면
  • 【분류】
    인사(人事) / 역사-사학(史學) / 역사-고사(故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