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응두·김억령·이인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정응두(丁應斗)를 병조 판서로, 【정응두는 이양(李樑)에게 빌붙어 상의 총애를 얻었다. 상이 정응두를 병조 판서로 제수하고자 하여 이조로 하여금 1품의 경력이 있는 자를 의망(擬望)케하였으니, 이는 바로 정응두를 지목한 것이었다.】 김억령(金億齡)을 사간원 헌납으로, 이식(李拭)을 시강원 문학으로, 이인(李訒) 【어둡고 나약하였다.】 을 홍문관 수찬으로, 이선(李選) 【형 이인(李遴)과 함께 이양에게 빌붙었다.】 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이준경(李浚慶)을 산릉 총호사(山陵摠護使)로 삼고 정응두·권철(權轍)·정유길(鄭惟吉)을 제조(提調)로 삼았다. 【대왕 대비가 정권을 차지한 뒤로 한 나라의 정사가 그의 하고 싶은 대로만 되어 한번 먹은 마음은 돌릴 수가 없었다. 스스로 생각하기를, 중종이 이미 장경 왕후와 같은 능에 있으니 자기가 죽은 뒤 중종과 같은 곳에 묻힐 수 없을 것이라 여기고 산릉(山陵)이 길지(吉地)가 아니라는 설을 제창(提唱)하여 마침내 천장(遷葬)을 거행하였다. 이에 앞서 상이 모화관에 갔을 때 정릉(靖陵)이 불길하다는 것을 익명(匿名)으로 진소(陳疏)한 자가 있었는데, 그 말이 괴상망칙하여 뒤따라 잡으려 했으나 잡지 못했었다. 사람들이 모두 의심을 품고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 일을 주도한 자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요승 보우(普雨)도 또한 정릉을 선릉(宣陵)의 산택(山宅)으로 옮기면 봉은사(奉恩寺)가 더욱 중해지고 그 기세가 더욱 성할 것이라 여기고는 궁궐과 교통하고 윤원형과 결탁해서 서로 꾀를 합하여 일을 성사시켰다. 그리하여 마침내 18년 동안이나 편히 묻혀 있던 능(陵)을 옮기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어찌 신자(臣子)로서 차마 편안히 여길 수 있는 일이겠는가. 그런데도 대소 신료들은 입을 다물고 한마디 말도 없었고 이준경과 같은 자들은 태평스레 해야 할 바를 알지 못하고 명령대로만 일을 해나가 나랏일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참으로 통곡할 만하다.】
- 【태백산사고본】 17책 28권 1장 A면【국편영인본】 20책 611면
- 【분류】인사-임면(任免)
○以丁應斗爲兵曹判書, 【應斗因附李樑, 得幸於上。 上欲除應斗爲兵曹判書, 故使吏曹以一品曾經者擬之, 蓋指應斗也。】 金億齡爲司諫院獻納, 李拭爲侍講院文學, 李訒 【昏暗懦弱。】 爲弘文館修撰, 李選 【與兄遴俱附李樑。】 爲副修撰。 以李浚慶爲山陵摠護使, 丁應斗、權轍、鄭惟吉爲提調。 【大王大妃專政之後, 一國之事, 惟其所欲, 牢不可回。 自念中廟旣與章敬同陵, 恐已萬世之後, 不得歸于一處, 乃倡爲山陵不吉之說, 遂有遷安之擧。 先是上幸慕華館, 有人以靖陵不吉之事, 匿名踈者, 其說怪妄, 跟捕不獲。 人咸疑之, 至是始知有主之者也。 妖僧普雨, 亦以靖陵遷於宣陵之山, 則奉恩寺益重, 而其氣勢愈盛, 故交通宮禁, 連結尹元衡, 合謀而成之, 遂遷十八年久庴之堂。 此豈臣子所忍安? 而大小臣僚噤無一辭, 至如浚慶輩, 恬然莫知所爲, 而聞命治事。 國事至此, 良可痛哭也。】
- 【태백산사고본】 17책 28권 1장 A면【국편영인본】 20책 611면
- 【분류】인사-임면(任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