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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실록 27권, 명종 16년 5월 28일 정해 1번째기사 1561년 명 가정(嘉靖) 40년

양제를 먼저 정하는 영을 거두기를 청하는 이중경의 차자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 이중경(李重慶) 등이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삼가 생각건대 문정(文定)과 찬녀(纘女)로 청궁(靑宮)의 배필을 정하는 것은 실로 만복(萬福)의 근원인 것입니다. 책명(冊命)을 이미 거행하여 명위가 정하여졌으니 명호(名號)를 낮추는 일이 진실로 중난한 줄은 압니다만, 병이 침중(沈重)하여 부득이한 데서 나온 조처임은 물론 종묘 사직의 대계(大計)를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빈(嬪)의 호칭을 제거하고 나서 잉장(媵嬙)의 반열에 그대로 두는 것은 명호가 전도될 뿐만이 아니라 사체를 헤아려 보아도 구애되는 점이 많습니다. 이것을 분수를 엄히 하고 먼 장래를 걱정하는 도리에 합당한 조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삼국(三國)이 잉장을 보내온 것은 백희(伯姬)가 시집온 뒤의 일이었습니다. 아직 빈도 간택하지 않고서 먼저 양제(良娣)를 정하는 것이 어찌 예(禮)에 맞는 처사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옛날 한번에 9인의 여자를 맞아들였던 것은 후사(後嗣)를 넓히기 위해서였는데, 이미 병이 있는 사람을 억지로 삼귀(三歸)052) 에 채우려 하니, 이것이 본지(本支)의 자손을 백세토록 번창하게 한다는 뜻에 비추어 어떠합니까? 이는 한 가지 일에서 세 가지 잘못을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삼가 전하께서는 다시 세 번 생각하시어 만세의 기본을 든든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 차자에서 논한 것을 보니 대의(大義)에 합당한 말이다. 그러나 무단히 양제를 먼저 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옛날에도 이와 같이 부득이한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이는 바로 권도(權道)에 의한 것이다."

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전 사간(司諫) 최우(崔㙖) 【최우는 처음 권찬(權纘)과 친밀한 교분을 맺어 권찬의 추천에 의해 비로소 현직(顯職)에 벼슬하게 되었다. 뒤에는 김여부(金汝孚) 등과 붕결(朋結)하였다가 일이 발각되어 파직, 문외 출송(門外黜送)당했다. 이때에 와서 최우가 서울에 출입하면서 조정의 사정을 탐지하였기 때문에 간원이 탄핵하는 것이다.】무오년053) 의 괴수(魁首)인데도 특별히 가벼운 법을 적용하여 서울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전교하였으니 당연히 감격하여 스스로 징계하고 반성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를 받은 뒤에도 서울을 출입하며 편안히 집에 있으면서 빈객을 접대하기도 하고 조보(朝報)054) 를 빌려보기도 하였으니, 그의 소위를 살펴보면 조정의 사정을 탐지하는 것 같습니다. 그가 법을 무시하고 나라를 업신여긴 정상이 매우 경악스러우니 외방으로 귀양 보내어 뒤에 이를 본받는 자를 경계시키소서.

양제 황씨(黃氏)는 빈(嬪)에서 강호(降號)된 것인데 아직 빈도 간택하지 않고 먼저 양제를 정하는 것은 선후의 순서에 매우 어긋나는 것이요 정시(正始)의 도리에도 맞지 않는 것이니, 양제로 정한다는 명을 거두소서."

하니, 답하기를,

"최우의 일은 아뢴 대로 하라. 양제에 대한 일은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세 번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 【태백산사고본】 17책 27권 35장 B면【국편영인본】 20책 593면
  • 【분류】
    정론-간쟁(諫諍) / 왕실-비빈(妃嬪) / 사법-탄핵(彈劾)

  • [註 052]
    삼귀(三歸) : 성(姓)이 다른 세 여자를 맞아들이는 것. 《논어(論語)》 팔일(八佾) 집해(集解)에 포씨(包氏)가 "삼귀는 세 성의 여인을 맞는 것이다." 했다.
  • [註 053]
    무오년 : 1558 명종 13년.
  • [註 054]
    조보(朝報) : 승정원(承政院)에서 처리한 사항을 매일 아침 기록하여 반포하는 관보(官報)로서, 조칙을 비롯하여 장주(章奏)와 묘당(廟堂)의 결의 사항, 서임(敍任) 사령, 지방관의 장계 등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기별(奇別)·난보(爛報)·조지(朝紙) 등의 별칭이 있음.

○丁亥/弘文館副提學李重慶等上箚曰:

伏以, 文定、纉女, 作配靑宮, 實乃萬福之源也。 冊命旣行, 名位已定, 則廢降之擧, 固知重難, 而病成沈痼, 事出於不得已, 亦所以爲宗社大計也。 然而旣去嬪號, 猶在媵嬙之列, 非但名號顚倒, 揆之事體, 亦多有礙。 是合於嚴分慮遠之道乎? 且三國來媵, 在伯姬旣歸之後, 則時未擇嬪, 先定良娣, 亦豈得禮者乎? 況古者一娶九女, 所以廣繼嗣也。 身旣抱病, 强備三歸, 其於本支百世之義, 何居? 一事而三失備焉。 伏願殿下, 更加三思, 以重萬世之基。

答曰: "觀此箚論, 大義則果當, 但非無端先定良娣矣。 未知古者, 亦有如此不得已之事乎? 是乃權宜之道也。" 諫院啓曰: "前司諫崔堣, 【堣初與權纉密交,纉推薦, 故始爲顯仕。後又與金汝孚輩朋結, 事發, 罷黜門外。至是堣出入都下,探試朝廷淺深,故諫院彈劾。】 以戊午年罪魁, 特用輕典, 只敎以使不得接迹於都下。 所當感激, 以自懲艾, 自被罪之後, 出入都下, 偃然在家, 或接待賓客, 或借見朝報。 觀其所爲, 以若探試朝廷之淺深。 其蔑法侮國之狀, 極爲驚愕。 請竄于外, 以警後之效此者。 良娣黃氏, 以嬪降號, 時未擇嬪, 先定良娣, 殊失先後之序, 有乖正始之道。 請收良娣之命。" 答曰: "崔堣事, 如啓。 良娣事, 不允。" 三啓不允。


  • 【태백산사고본】 17책 27권 35장 B면【국편영인본】 20책 593면
  • 【분류】
    정론-간쟁(諫諍) / 왕실-비빈(妃嬪) / 사법-탄핵(彈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