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수 이호원이 그의 형 이심원을 《삼강행실속편》에 기록할 것을 상소하다
"삼가 생각하건대 국가의 정치는 교화보다 더 먼저 해야 할 것이 없고 교화하는 방법으로는 권장하는 것보다 적당한 것이 없는데, 문려에 정표하는 것은 한 시대에만 빛날 뿐이고 그림을 그리고 사실을 기록해 놓는 것은 무궁한 후세에 영원히 남는 것입니다. 신의 장형 주계군(朱溪君) 이심원(李深源) 【탁월하고 굳세며 경사(經史)에 널리 통달하였다. 충의(忠義)로 분발하여 우뚝하게 소신껏 행동하였고 선견지명(先見之明)이 뛰어났다.】 은 어렸을 때부터 일심(一心)으로 향학하고 효우(孝友)를 마음에 두었으며 곧고 미덥게 성품을 잘 지켰습니다. 나이 겨우 16세에 여러 책을 널리 섭렵하여 성종조에는 사서 오경(四書五經)에 정통하였으므로 당상의 가자를 특별히 제수받았습니다. 또 시예(試藝)에 응시하여 2품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때 마침 임사홍(任士洪) 부자가 성종의 성덕(盛德)을 좀먹고 있었는데, 유일하게 이심원만은 나라만 생각하고 자기 집은 잊었으며 공사만 생각하고 자기 몸은 잊었습니다. 그리하여 홀로 여염(閭閻)에서 일어나 외쳐 머리를 부딪쳐 피를 흘리며 종사의 안위에 대해서 힘껏 진달하고 사정(邪正)의 진퇴에 대해서 극진히 논하였는데, 천감(天鑑)이 매우 밝아 죄인을 잡았으니, 당시에 사림(士林)의 경사와 국가의 다행함을 이루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폐조(廢朝)에 이르러 소인(小人) 【임사홍을 말한다.】 이 뜻을 얻고 나서 마침내 평소에 품고 있던 원망 때문에 큰 옥사를 일으켜 이심원 세 부자가 연달아 주륙을 당했으니 그 참혹한 화는 차마 말로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과거 중종대왕 때에 대제학 신용개(申用漑) 등이 국조(國朝) 이래 충효와 절의가 있는 사람들을 더 채택하여 《삼강행실속편(三綱行實續編)》을 찬록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보고 느끼게 하였으니, 이는 실로 예로부터 드물게 보는 아름다운 일이었습니다. 간신 김안로는 포의(布衣)로 있을 때부터 이심원에게 용납되지 못하여 한을 품은지가 오래 되었으므로 극력 저지해서 그림을 그리고 사실을 기록하여 이미 책이 만들어졌던 것을 즉시 삭제하게 하였으니, 사림이 울분하고 만세(萬世)가 팔을 걷어 붙이고 분해 한 것을 어떻게 말로 다하겠습니까. 김안로가 핑계대어 말하는 것은 바로 ‘임사홍이 이심원에게는 외숙이 된다. 일가간에는 은혜가 항상 의리를 가리는 것인데, 이심원은 감히 임사홍의 잘못을 힘주어 말하였으니 순수하게 선한 자가 아니다.’ 하는 것이었으니, 이는 정도(正道)를 칭탁하여 부정(不正)을 파는 짓이었습니다.
기묘년간에 홍문관이 그의 탁월한 충절을 극진히 진달하여 숭반(崇班)에 증직(贈職)하고 문려에 정표하였으니 매우 지극한 것이었지만 《속편》의 기록은 이미 끝나서 참록(參錄)되기 어려웠습니다. 한때의 이목(耳目)이야 정표에 의거하여 알 수 있지만 백세 뒤에는 무엇으로 징험하겠습니까. 삼가 들으니 주상께서 치도(治道)가 옛날과 달라진 것을 진념하시고 세속이 퇴폐해진 것을 매우 근심하시어, 특별히 《삼강행실》을 개인(改印)하여 중외에 반포하도록 명하셨다 하니, 이는 지나간 옛 충효인들을 다시 정표하는 것이어서 인심이 맑아지고 교화가 행해질 것을 눈을 씻고 보게 되었습니다. 전하께서 중종 때에 정표한 뜻을 이어받아 충의에 죽은 이심원의 정절을 곡진히 살피셔서 그의 이름을 《속편》의 끝에다 함께 기록하고, 그 형상을 그리고 그 사실을 적어 무궁하게 전하신다면, 어찌 죽은 이심원에게만 다행한 일이겠습니까. 또한 국가가 백성을 깨우치는 일대 계기가 될 것입니다. 신이 감히 천위(天威)를 무 릅쓰고 간절하게 위에 진달하는 것은, 죽은 형에게 사사로이 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풍교(風敎)가 잘못될까 깊이 염려해서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이 상소에 풍교에 관한 것이 있으니 성의가 아름답다. 상소 안의 말을 가지고 삼공과 영부사에게 의논하라."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이심원은 의에 있어서는 친척을 돌아보지 않았으므로 임사홍의 귀역(鬼域) 같은 행실을 극진히 진달하였는데, 그 언사가 정직하였고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과 나라를 걱정하는 충절이 지극하였다. 풍화의 권한을 쥔 사람은 마땅히 그를 포장하고 기록해야 하는데 이제 일가가 올린 소장에 의해 비로소 의논하게 되었으니, 절의를 포장하는 도가 느슨해진 것이 아닌가.
- 【태백산사고본】 16책 26권 42장 B면【국편영인본】 20책 560면
- 【분류】정론(政論) / 윤리(倫理) / 출판(出版) / 역사-사학(史學)
伏以, 國家之治, 莫先於敎化, 敎化之道, 莫切於勸奬, 而旌表門閭, 秪光於一時, 圖形記實, 永垂於無窮。 臣之長兄朱溪君 深源, 【卓犖嚴毅, 博洽經史。 忠義奪發, 特立獨行, 超然有先見之明。】 年甫免齕, 一心向學, 孝友爲心, 貞亮操性。 年纔十六, 博涉諸書, 在成廟朝, 以四書五經俱通, 特授堂上之加, 又赴試藝, 得躋二品之列。 方任士洪父子, 笙蠧成廟之盛德也, 唯一深源, 國耳忘家, 公耳忘身, 獨叫閭閻, 叩頭流血,力陳宗社安危, 極論邪正進退。 天鑑孔昭, 罪人斯得。 當時士林之慶, 國家之幸, 可勝言哉? 逮至廢朝, 纖人 【謂任士洪也。】 得志, 銜怨於平昔, 卒致之大獄, 深源三父子, 連頸就戮。 慘酷之禍, 所不忍言。 往在中宗大王朝, 命大提學申用漑等, 益採國朝以來忠孝節義之人, 錄爲《三綱行實續編》, 使民觀感, 此實曠古之美事也。 姦臣金安老, 自在布衣, 素不爲深源之所取, 而銜恨者久矣, 故極言沮之, 圖形記實, 旣成而旋削, 士林之憤鬱, 萬世之扼腕, 何可盡言? 安老所藉以爲言者, 士洪於深源, 爲舅也。 一家之間, 恩常掩義, 而深源敢力言之, 非純於善者也云爾, 則是托於正, 以售其不正也。 及至己卯年間, 弘文館極陳其忠節之卓異, 贈職崇班, 旌表門閭, 己至矣, 而《續編》之錄, 己矣難及。 一時之耳目, 可憑旌表而知之, 百世之下, 將何所徵焉? 伏聞主上, 軫念治道之不古, 深憫世俗之頹靡, 特命改印《三綱行實》, 頒布中外, 此再旌旣古之忠孝, 而人心之淑, 敎化之行, 將拭目而見矣。 伏願殿下, 遹追中廟旌表之意, 曲察深源死忠之節, 幷記其名於《續編》之末, 圖其形記其實, 傳之無窮, 則豈獨旣死深源之幸? 抑亦國家牖民之一大機也。 臣敢冒天威, 仰陳哀懇者, 非私於亡兄, 爲國家風敎之闕典而深憫焉。
答曰: "觀此疏辭, 有關風敎, 誠意可嘉。 將疏中之辭, 議于三公領府事。"
【史臣曰: 深源, 義不顧親, 極陳士洪鬼蜮之狀, 其辭正直。 愛君之誠, 憂國之忠, 至矣。 握風化之權者, 所當褒之錄之, 而今因一家訴, 乃始議焉, 其於褒節義之道, 不亦緩乎?"】
- 【태백산사고본】 16책 26권 42장 B면【국편영인본】 20책 560면
- 【분류】정론(政論) / 윤리(倫理) / 출판(出版) / 역사-사학(史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