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포한 왜적의 배에 있던 중국인들을 해송하는 일에 관해 예조가 아뢰다
예조가 아뢰기를,
"황해도에서 나포(拿捕)한 왜적의 배에 사로잡혀 있던 중국 사람들로서 해송(解送)해야 할 자가 전후에 걸쳐 2백 50명이나 됩니다. 동지사가 가는 길에 그들을 대동하고 가게 하여 원래 대동하는 사람과 짐바리 외에 중국 사람을 더하게 되면, 마련해야 할 수레가 50여 대가 넘을 것인데, 중국 연로(沿路)에 있는 관포(館鋪)의 사람이나 말들이 모조리 달자(㺚子)에게 살해당했고 또한 흉년에 굶주려 뿔뿔이 흩어져 역로가 조잔(凋殘)하여 눈에 띄는 것이 모두 쓸쓸하니, 제때에 수레를 마련하지 못할 것이 걱정스러울 뿐만이 아닙니다. 사로잡힌 사람 중에는 중국의 반민으로서 틀림없이 사형당할 것을 스스로 알고서 날마다 도망갈 것을 도모하는 자도 있을 것인데, 관문(關門)을 통과한 이후에 감금(監禁)을 엄하게 하지 아니하면 도망가다 죽거나 도중에서 탈출하는 자가 꼭 없으리라고 보장하기 어렵습니다. 그들을 중도에 버려 두고서 먼저 갈 수도 없고 동지절일(冬至節日)에 도착하지 못해서도 안되니, 간원이 아뢴 것이 역시 신들의 오랜 생각과 같습니다.
중국 민(閩)·절(浙) 등처의 변방 백성들이 왜적들과 서로 통하여 중국을 배반하고 왜국(倭國)으로 들어가 촌락(村落)을 널리 점유하여, 심지어는 왕호(王號)를 참칭하고 도이(島夷)를 인도하여 도리어 중국을 침범해서 불사르고 노략질하니, 오래도록 중국 내부의 걱정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금번에 그런 중국 사람이 마침 우리 나라의 포로가 되어 그 수효가 수백 명이 넘고 반민도 퍽 많으니, 그들을 해송하여 주문하면 어찌 중국의 상하(上下)에서 증오하는 감정만 조금 풀릴 뿐이겠습니다. 그 반민은 바로 우리의 반민인 셈이니, 그를 증오하는 심정이야 중국이나 우리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전에 일찍이 문견 사건(聞見事件)을 보니, 중국 조정의 한 선비가, 조선(朝鮮)으로 하여금 일본(日本)에 통유하여 중국을 침범하는 것을 금지시키도록 하자고 주청한 적이 있었는데, 그 일은 시행되지 못하였습니다.
금번에 해송 주문하여 중국으로 하여금 우리 나라가 왜놈을 쉽게 잡을 수 있는 것으로 여기게 한다면, 뜻밖의 걱정거리가 없지 아니할 터이니, 이것 역시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부득이 주문해야 한다면 의거하여 시행할 만한 한 가지 전례가 있습니다. 을사년에 사로잡힌 중국 사람 안용(安容) 등 6백 명을 그해 9월에 역관(譯官)을 시켜 먼저 송환하여 탕참(湯站)에 넘겨 주도록 하고, 그 해 11월에 진하 겸 사은사(進賀兼謝恩使)가 들어갔을 때 주문하였습니다. 금번에도 역시 마땅히, 압송하는 수효가 너무나 많아 일시에 데리고 오면 중도에서 지체됨을 면치 못할 뿐더러, 혹시 절일(節日)에 당도하지 못할까도 염려스러운 까닭에 전후에 걸쳐 사로잡힌 사람 중에서 일을 아는 자와 말을 아는 자, 또 사로잡힌 전말(顚末)을 아는 자 각 1명씩을 선택하여 먼저 데리고 왔으며, 그 나머지는 요동에 넘겨 주고 왔다고 말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하면 수레를 많이 마련해야 하는 폐단과 절일에 당도하지 못할까 하는 염려와 반민들이 도중에서 도망갈 걱정 등은 모두 신경쓸 것이 없습니다. 이것을 삼공 및 영부사에게 의논해 보니, 모두들 타당하다고 하였습니다. 다만 일이 사대(事大)에 관계된 까닭에 감히 여쭙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뜻이 타당하니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6책 25권 53장 A면【국편영인본】 20책 522면
- 【분류】외교-왜(倭) / 외교-명(明)
○辛未/禮曹啓曰: "黃海道所捕, 賊倭船被擄唐人, 應解送者, 前後二百五十餘名。 冬至使之行, 使帶率而去, 原帶人物卜駄外, 加以唐人, 則抄發車子, 當不下五十餘輛。 中原沿路館鋪人馬, 盡爲㺚子搶殺, 又因飢餓流散, 驛路凋殘, 滿目蕭然。 非但不得趁時發車之爲可憂, 被擄人中, 中原叛民, 自知必死, 日謀逃躱者有之。 過關以後, 監禁不嚴, 逃死路逸, 難保其必無。 旣不可棄之中路而先去, 冬至節日, 亦不可不及。 諫院所啓, 亦如臣等之宿料。 中原閩、浙等處邊氓, 交通賊倭, 叛入倭國, 廣占聚落, 至竊王號, 嚮道島夷, 反噬中國, 焚蕩槍掠, 久爲天朝腹心之虞。 今者唐人, 適爲我國之擒, 數過累百, 叛民頗衆。 解送奏聞, 豈惟中朝上下疾怒之情, 得以少洩? 其叛民, 卽吾叛民, 疾惡之心, 彼我何異? 前者曾見聞見事件, 有一朝士, 請令朝鮮, 通諭日本, 禁侵上國, 而事不果行。 今者解送奏聞, 使中朝以爲我國, 易於擒倭, 則不無意外之患, 此亦不可不慮。 然若不得已奏聞, 則有一前例可據而行之者。 乙巳年被擄唐人 安容等六百名, 其年九月, 令譯官先送, 交割於湯站, 其年十一月, 進賀兼謝恩使入送時奏聞。 今亦當以押解之數極多, 一時率來, 未免遲滯中路, 恐或未及節日, 故前後被擄人中, 擇解事解語, 且知被擄首末者各一名, 先率來, 其餘則交付遼東而來云云。 如此則多發車輛之弊, 不及節日之慮, 叛民路逸之患, 皆非所虞。 以此議諸三公及領府事, 皆以爲便當, 但事關事大, 敢稟。" 傳曰: "啓意當矣。 如啓。"
- 【태백산사고본】 16책 25권 53장 A면【국편영인본】 20책 522면
- 【분류】외교-왜(倭) / 외교-명(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