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신과 비변사가 왜를 대우하는 일을 의논하여 아뢰다
대신과 비변사가 함께 의논하여 아뢰었다.
"신들이 사간원이 아뢴 말을 보니 국가를 위한 원대한 생각이 지극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신들의 망령된 소견으로는, 이른바 ‘거절하고 접대하지 않으면서 그들이 죄를 뉘우치고 동정을 애걸한 뒤에 천천히 다시 화친을 의논하는 것이 옳은데, 이를 고려하지는 않고 형식적인 교린(交隣)만 하여 평소와 다름없이 세미(歲米)만 허비한다.’고 한 것은, 경오년086) 이전의 일만 익히 듣고 오늘날의 사세는 살피지 않고서 하는 말입니다.
경오년의 변087) 은 곧 삼포(三浦)에 와서 살던 왜놈들이 그 때의 변장이 침해하고 포악하는 고통에 분개하여, 국가에서 돌보아 키워 준 은덕도 생각하지 않고 온 무리가 반란을 일으켜 대마도와 군사를 연합하여 변장들을 죽이거나 사로잡고 강토를 분할 점령하였던 것이니 그 죄악이 컸습니다. 그들이 패하여 물러간 뒤에는 삼포에 살던 왜인을 모두 철수시키고 아울러 대마도와의 교제도 단절했지만, 명분이 올바르고 말이 사리에 맞았으므로 그들이 감히 우리를 탓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몇 해가 되지 않아, 일본이 두 차례나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므로 조정에서 지난 감정을 버리고 새로 화친하기를 허락하여 다시 약조(約條)를 정하였습니다. 비록 은수(恩數)를 감하기는 했지만 대우를 옛날과 같게 한 것은 당초에 간섭하지 않던 일본이 교린(交隣)의 의리를 지켜 성실하고 은근하게 요청해 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을묘년에 남쪽 지방을 침범한 적왜088) 들은, 곧 본국(本國)의 서계(書契)에 이른바 ‘서해의 적도들이 해마다 명(明)나라에서 도적질을 하는데 국왕(國王)이 금지해도 듣지 않는다.’고 한 자들입니다. 우리도 본시 접대하지 않았거니와 그들 역시 오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죄를 뉘우치고 동정을 애걸한 뒤에 서서히 다시 화친을 의논하겠습니까.
만일 대마도를 가리켜 말한다면 대마도는 사체(事體)가 적왜들과는 다릅니다. 호남(湖南)을 침범해 왔을 적에도 어떤 사람은 대마도의 왜인도 그 속에 끼어 있을 것으로 의심하였지만 확실하게 알 수도 없고, 또한 두 차례나 사자(使者)를 보내어 도적을 신고하는 성의도 있었는데, 어찌 의심스럽다 하여 갑자기 단절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오늘날의 사세가 경오년과 크게 다른 이유입니다.
이른바 ‘바다에 표류해 온 배를 기화(奇貨)로 여겨서 변장들의 공을 세우려는 마음을 멋대로 버려 두고, 장수를 죽인 수치를 씻게 하는 것이라 하기도 하고 명(明)나라의 도둑을 잡게 하는 것이라 하기도 하면서 멋대로 머리를 베는 짓을 하게 한다. 3년이 지난 지금은 날로 더해 가고 달로 심해져, 지나가는 외로운 선박까지 끝까지 추격하여 안으로는 물건을 빼앗아 사욕을 채우고 밖으로는 군공(軍功)을 차지하는 짓을 하여, 저들로 하여금 잔인한 독기가 날로 심해지게 하고, 변흔(邊釁)의 화근이 날로 쌓이게 하고 있는데도, 조정에서는 또한 상을 주어 권면하고 있다.’고 한것은 또한 오늘날 조정이 한 바가 아닙니다.
조정이 어찌 표류해 온 배를 기화로 여겨서 공을 세우려는 마음을 멋대로 버려 둘리가 있겠습니까? 장수를 죽인 수치를 씻는다거나 명나라의 도둑을 잡는다는 두 설(說)에 대해서는 혹 말을 하는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또한 오늘날 조정이 조치한 본뜻은 아닙니다. 유사(有司)가 군정을 닦고자 하는 것이나 변장이 계획을 마련하여 방어하는 것은 그 요점이 우리의 영토에 침입하는 도적을 막으려는 데에 있을 뿐인데, 어찌 두 설과 같은 것이 있겠습니까?
또 변장들이 안으로는 물건을 빼앗아 사욕을 채우고 밖으로는 군공을 차지하려는 마음이 반드시 없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렇다고 반드시 있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바다를 지나가는 배를 끝까지 쫓아가지 못하도록 한 금령(禁令)이 이미 세워졌지만, 바람이 잔잔한 철에는 변방에 가까운 섬들을 돌아다니며 수색하여 적선(賊船)이 정박할 수 없게 하는 것은 곧 변장들의 직책으로서 이제 시작된 것이 아니라 그전부터 그러했습니다. 수색할 즈음에 혹시라도 정박한 적선을 발견하면 변장인 자가 어찌 보고도 못 본 체하고 잡거나 베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비록 온 배의 것을 노획한다 하더라도 대부분이 타고 부서진 것일텐데 타고 남은것 중에 사욕을 채울 만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비록 간혹 그러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반드시 탐심이 많고 염치가 없는 자일 것입니다. 어찌 사람마다 그렇겠습니까? 비록 잡아다 바치는 것이 많다 하더라도 조정이 변방에서 공 세우는 것을 달가와하지 않아 경솔하게 상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밖으로 군공을 차지하려는 마음을 가진 자가 있다면 이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면 망령된 사람일 것입니다.
전일에 김경석(金景錫)과 김세명(金世鳴)이 흑산도(黑山島)에서 온 배의 왜인들을 모두 잡아 베었을 적에는 모두 현상(顯賞)을 받았는데, 지난해에는 힘써 싸워 왜적을 잡아 벤 사람이 없지 않았는데도 끝내 상가(賞加)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한번은 상을 주고 한번은 주지 않아 전후가 서로 달랐는데도 오히려 계청(啓請)하지 않았으니 어찌 조정이 상을 주며 권면하는 것이겠습니까?
그 계사에 ‘요사이 잡은 적이 있어서 실정으로 멀리 헤아려 보건대, 행군(行軍)하여 접전하였다면 잠깐 사이에 벌어진 싸움에서 중국인인지 왜적인지를 어느 겨를에 분별할 수 있었겠는가. 상상해 보건대, 필시 파선(破船)하고 맨몸이 되어 손을 쓸 수가 없게 되었기 때문에 용이하게 잡아 베게 되었을 것인데 교전한 상황을 과장하여 자기의 공으로 삼은 사람이 반드시 대부분일 것이다.’ 했는데, 이도 역시 전후의 계본(啓本)을 살펴 보지 않고서 한 말입니다.
만일 접전하지도 않고 잡은 것이라면, 우리 군사 중에 상처를 입은 사람도 있고 죽은 사람도 있는데 어찌 스스로 그렇게 한 것이겠습니까? 잠깐 사이에 벌어진 싸움에서 중국인인지 왜적인지를 분별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교전할 때에 중국인들이 혹 배에서 내리어 피신하였다가 싸움이 끝난 다음에 군사들 앞에서 머리를 조아렸는데, 거개가 모두 아이들인데다가 이미 행색이 달랐고, 또 혹 노략질당한 연유를 써서 보였기 때문에 이로써 중국인인 것을 알아차리고 해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교전할 때에 왜적들에 섞여 죽은 사람이 또한 많이 있었으니, 어찌 한두 척의 파선된 배의 적이 육지로 올라온 것을 가지고 싸우지도 않고 잡은 것이라고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
그 계사에 ‘올해에 적(賊)의 아비를 1백 명 죽이고 내년에 적의 아들을 1백 명 죽여 해마다 이렇게 죽여 간다면 그들의 아비된 자와 아들된 자가 원수를 갚으려는 마음이 어찌 잠시인들 그치겠는가.’ 했는데, 이는 진실로 천성(天性)을 따져 보고 한 말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적들이 근년(近年)에 중국에서 소란을 일으키어 살해한 것이 몇천 몇백 명인지를 알 수 없고, 재물을 약탈하고 집을 불태워 없애고 부형을 죽이고 자녀들을 포로로 하였으니, 이들의 참혹함을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으며 그 아비나 아들된 사람들의 원통함이 또한 어찌 1백 명의 적을 죽이는 것에 그칠 뿐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죽인 것은 적이고 적이 죽인 것은 양민(良民)입니다. 인자하게 아래 백성들을 덮어주는 하늘의 마음으로 미루어 본다면, 우리가 적을 죽인 것과 적이 양민을 죽인 것과는 반드시 기뻐하고 노여워할 소지의 구분이 분명하게 있을 것입니다.
적들의 행위가 비록 그와 같더라도 우리가 만일 중로(中路)로 유인하여 죽였거나 혹은 군사를 출동하여 쳤다면, 비록 그처럼 말을 하더라도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들이 그만한 죄가 있으므로 하늘이 바람으로 표류시켜 손을 빌려 죽일 자리에 보내어서 우리의 영토를 지나가게 한 것인데, 어찌 뒷날에 악독 부릴 것을 두려워하여 참고 죽이지 않겠습니까?
만일 놓아주어 돌아가게 한다면 천리(天理)를 어김이 되고 명나라에 잡아 바친다면 공을 바라는 혐의가 있을 뿐 아니라 길을 오가는 동안에는 또한 염려스러운 일이 많을 것이니 기필코 죽이는 것 밖에는 다시 좋은 계책이 없습니다. 더구나 풍파 만났던 배를 남김없이 섬멸(殲滅)하여 한 사람도 본토(本土)로 돌아가는 자가 없게 해서 우리가 죽인 것을 알 길이 없게 한다면, 적들의 배가 바닷길에서 파선하여 없어지는 수가 진실로 많이 있는 일인데 저들 아비나 자식이 어찌 우리에게 허물을 두고 보복하려고 하겠습니까?
적을 죽이지 말아야 한다는 논의는 적들을 비호(庇護)하고 도둑에게 아첨을 떠는 것에 가까운 짓이 아니겠습니까? 고금 천하에 어찌 적을 비호하고 도둑에게 아첨을 하여 태평한 복을 누리고 종묘와 사직이 또한 도움을 받아 위태롭지 않았던 일이 있었겠습니까? 하나의 의리 아닌 짓을 하는 것이나 하나의 죄없는 사람 죽이는 것은 왕정(王政)을 하는 데 있어서 마땅히 삼가야 하는 바이기는 하지만, 특히 도둑을 죽이는 일에다 인용하여 논할 수는 없습니다. 곡직(曲直)을 피아(彼我)에 분간하는 것은 또한 신들이 알 바가 아닙니다.
대저 인정으로 논한다면, 위험을 무릅쓰고 싸워서 상(賞)을 노리는 마음과 모험하다 죽을까 두려워하는 심정이 누구는 가볍고 누구는 무겁겠습니까? 험악한 파도(波濤)를 헤치고 시석(矢石) 속에 버티면서 요행히 살아남았는데 뒤따라 허물로 여긴다면, 누가 직책을 생각하여 위태한 데라도 들어가고 생명을 내던지고서 의리를 취하겠습니까? 신들은 적을 죽이지 않아야 한다는 논의가 한번 일어나서 장수나 군사가 모두 도적을 구경만 하고 제 몸 보호하는 계책만을 상습(常習)으로 여겨 도적을 보고도 못본 체하게 된다면 비록 큰 도적이 있더라도 창졸간에 책려(策勵)하여 쓰기는 또한 어려울까 두렵습니다.
을묘년의 변에 남정(南征)했던 제장(諸將)들이 모두 머뭇거리고 있다가 기회를 놓친 일로 죄를 입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버려져 국가에 쓰이지 못하고 있으니 이런 지경에 이르게 된 것 역시 상습으로 인해 그런 것입니다. 이는 또한 하나의 감계(鑑戒)가 될 만한 이전의 일입니다.
신들이 사간원이 한 말을 옳지 않다고 여겨 이런 논설(論說)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을 논하고 계획을 세워 놓고 그름을 서로 협조해 가야 하는 것이 곧 재상(宰相)과 대간의 할 일입니다. 그런데 각기 생각하는 바가 있는 것이기에 의리상 입을 다물고만 있기 어려웠고 또 장수나 사졸들이 사간원에서 아뢴 말과 비변사의 의견이 같지 않음을 본다면 따를 바를 알지 못하여 결단해 갈 수 없을 것이기에 감히 이렇게 논계(論啓)하는 것입니다."
- 【태백산사고본】 15책 24권 42장 A면【국편영인본】 20책 475면
- 【분류】외교-왜(倭) / 군사(軍事)
- [註 086]경오년 : 1510 중종 5년.
- [註 087]
경오년의 변 : 중종 5년 여름에 동래(東萊)의 부산포(釜山浦)·웅천(熊川)의 제포(薺浦)·울산(蔚山)의 염포(鹽浦)에 와서 살던 왜인들이 대마도(對馬島)와 호응하여 반란을 일으켜 부산 첨사(釜山僉使)를 죽이고 웅천을 점령했다가 곧 평정되어 대마도로 쫓겨간 사건.- [註 088]
을묘년에 남쪽 지방을 침범한 적왜 : 명종 10년(1555) 5월에, 경오년의 변으로 인해 세견선(歲遣船)이 감해져 곤란을 받아오던 왜인들이 전라도에 침입하여 영암(靈巖)·달량(達梁)을 점령하고 장흥(長興)·강진(康津)·진도(珍島)에서 갖은 만행을 저지른 사건.○丁未/大臣、備邊司同議啓曰: "臣等竊見司諫院所啓之辭, 其爲國家遠慮至矣。 然以臣等妄見, 則所謂絶而不接, 待其悔罪乞憐, 然後徐議復和可也, 而不此之顧, 陽爲交隣, 歲費如常者, 乃習聞庚午前事, 而不察今日事勢之言也。 庚午之變, 則三浦來居倭奴, 憤一時邊將侵暴之苦, 不念國家卵育之恩, 擧衆叛亂, 與對馬島連兵, 殺擄邊將, 割土分占, 罪惡貫盈, 及其敗退之後, 盡撤三浦之居, 竝絶馬島之交, 名正言順, 彼不敢有一毫咎我之心也。 不數年, 因日本再遣使請和, 而朝廷許其舍舊圖新, 更定約條, 雖減其恩數, 而猶待之如舊者, 以日本, 初不干涉, 而執交隣之義, 致誠勤之請故也。 乙卯南寇之賊, 則乃本國書契所謂, 西海賊徒, 年年作賊于大明, 國王禁止而不聽者。 我本不接, 彼亦不來, 何待其悔罪乞憐, 然後徐議復和乎? 若指馬島而爲言, 則馬島事體, 與賊倭有異。 湖南之寇, 人或疑其馬島之倭, 亦在其中, 而未能的知, 又有再遣使告賊之勤。 豈可因其疑而遽絶之乎? 此今日事勢, 大與庚午不同者也。 所謂陰利海島漂泊之船, 任恣邊將要功之心, 或諉以雪戮將之羞, 或諉以擒天朝之賊, 橫加斬馘, 越今三年, 日滋月甚, 至於過去孤舶, 窮其追討, 內私物貨, 外占軍功, 使彼狠愎之毒日熾, 釁禍之根日積, 而朝廷又爲行賞而勸之者, 亦非今日朝廷之所爲也。 朝廷豈有陰利漂泊之船, 任恣要功之心之理, 而雪㦻將之羞, 擒天朝之賊? 二說雖或有言之者, 亦非今日朝廷措置之本意也。 有司之欲修軍政, 邊將之設畫禦侮, 要在於防門庭之寇而已, 豈有如二說之謂乎? 且邊將, 內私物貨, 外占軍功之心, 則不可謂其必無, 亦不可謂其必有也。 然海洋過去之船, 勿令窮追, 已有禁令, 而風和時月, 近邊海島, 巡環搜討, 不使賊船容泊者, 乃邊將之職, 而非今爲始, 自古而然。 其於搜討之際, 倘見賊船之來泊者, 則爲邊將者, 豈容視而不見, 不爲之捕斬乎? 雖有全船之獲, 而類皆燒破, 煨燼之餘, 何物可私? 雖或有其人, 必貪婪無恥之甚者。 豈人人如是乎? 雖有擒獻之多, 朝廷不喜邊功, 不輕施賞之意, 人皆知之。 有外占軍功之心者, 非愚則妄也。 前者金景錫、金世鳴, 捕斬黑山一船之倭, 俱蒙顯賞, 去年間亦不無力戰捕斬之人, 而終不蒙賞加。 一賞一否, 前後有異。 此而猶不啓請, 豈朝廷行賞而勸之乎? 其曰: ‘近來捕獲之賊, 以情遙度, 若是行軍接戰, 則唐人、倭賊, 奚暇分辨於頃刻搶攘之際乎? 想必破船赤立, 束手無爲, 故容易擒斬, 虛張交戰之狀, 認爲己功者, 必居多矣。’ 此亦不審見前後啓本而言也。若不接戰而獲, 則我軍被傷, 或有致死者, 何自而然也? 唐人、倭賊, 非能分辨於頃刻槍攘之際也, 交戰之時, 唐人或下船而避, 戰畢之後, 叩頭軍前, 類皆兒童, 而旣以物色之異, 又或寫示其被搶之由, 以此知其爲唐人而不害。 然於交戰之時, 與倭混死者, 亦多有之。 豈可以一二破船登陸之賊, 疑其不戰而獲乎? 其曰: ‘今年殺百賊之父, 明年殺百賊之子, 年年殺之, 其爲父、其爲子報怨之心, 寧容斯須已哉?’ 此固推原天性之言也, 然此賊近年作耗於上國, 其所殺者, 不知其幾千百也, 而掠奪其財貨, 焚蕩其室廬, 剽殺其父兄, 係虜其子女, 其爲慘酷, 何可勝言? 其爲父子之冤痛, 又豈止於百賊而已乎? 然則我之所殺者, 賊也, 賊之所殺者, 良民也。 以上天仁覆下民之心, 推之, 我之殺賊與賊之殺良民, 必有喜怒之攸在也。 此賊所爲, 雖至於如此, 而我固要殺於中路, 或擧兵而攻討, 則雖如彼言之, 猶之可也, 彼有如此之罪, 而爲天風漂蕩, 送死於假手之地, 過我之門庭, 則豈可畏後日之毒, 忍而不殺乎? 若縱之使歸, 則違天逆理, 擒獻天朝, 則嫌於要功, 道途之間, 亦多可虞, 必殺之外, 更無善策。 況遭敗之船, 勦殲無遺, 未有一口返土, 罔由知我之殺, 則賊船之敗沒於海道者, 固多有之, 彼之父子,豈得(二)〔以〕 咎我而欲報之哉? 勿殺賊之論, 不幾於護賊媚盜乎? 古今天下, 安有護賊媚盜, 而能享其太平之福, 宗廟、社稷, 亦賴而不危者乎? 行一不義, 殺一不辜, 雖王政所當愼, 而尤不可論於殺賊之事也。 曲眞之分於彼我者, 亦臣等所未知也, 大抵以人情論之, 乘危幸賞之心, 與冒險畏死之情, 孰輕孰重? 履風濤之險, 衝矢石之間, 幸而得全, 從而尤之, 則誰肯顧職而蹈危, 舍命而取義乎? 臣等恐不殺賊之論一起, 而將卒皆懷玩寇自保之計, 習以爲常, 見賊而若不視, 則雖有大賊, 倉卒之際, 亦難策勵以爲用也。 乙卯之變, 南征諸將, 皆以逗遛失機被罪, 至今棄斥, 而不爲國家之用, 其所以致此者, 亦因常習而然也。 此亦前事之一鑑也。 臣等非以諫院之言爲不可, 而有此論說也。 論事規畫, 可否相濟, 乃宰相、臺諫之事, 而各有所懷, 義難容默, 且將士見諫院啓辭與備邊司之意不同, 則莫知適從, 無所取決, 故敢如是論啓。"
- 【태백산사고본】 15책 24권 42장 A면【국편영인본】 20책 475면
- 【분류】외교-왜(倭) / 군사(軍事)
- [註 0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