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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실록 21권, 명종 11년 10월 8일 계사 2번째기사 1556년 명 가정(嘉靖) 35년

한리 학관 임기가 네 가지 일을 상소하다

한리 학관(漢吏學官) 임기(林芑)가 상소를 올렸다.

"신이 들으니 《서경》 하서(夏書)에 ‘백공(百工)이 그가 종사하는 일로 간언(諫言)을 함에, 혹 바르게 간언하지 못하면 나라의 떳떳한 형벌이 있다.’ 하였습니다. 신이 한리 학관으로 봉직한 지 근 20년 동안 헛되이 국비(國費)를 소비하여 처자(妻子)를 부양하기만 하고 티끌만큼의 보답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밤낮으로 생각하고 계획하는 것은 오직 이 종계(宗系)와 고명(誥命) 등에 관한 일입니다. 미신(微臣)의 직분으로 마땅히 아뢰어야 할 일은 아래와 같은 네 조목뿐입니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유념하여 주소서.

첫째는 종계 개정(宗系改正)에 관한 일입니다. 태조(太祖) 강헌 대왕(康獻大王)의 계보(系譜)는 완산(完山)으로 신라 말엽부터 도참(圖讖)에 나타난 것145) 을 삼한의 신민들치고서 분명하게 알지 못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데 홍무(洪武)146) 초에 간민(奸民) 윤이(尹彝) 등이 나라를 배반하고 중국에 들어가 종계를 거짓으로 꾸미고 또 악명(惡名)을 덧붙였으므로, 중국 사관(史官)의 일대(一代)의 잘못일 뿐 아니라 또한 우리 나라 신자들의 만대(萬代)의 수치가 되었습니다.

영락(永樂)147) 2년148) 에 우리 공정 대왕(恭定大王)149) 이 개정을 주청하여 특별히 태종 황제(太宗皇帝)의 허락을 얻었으니 사관(史官)이 된 자가 바로 잡아 후세에 분명히 전해야 했는데, 성화(成化)150) 때에 《대명회전(大明會典)》을 처음 만들면서 여전히 그릇된 역사를 따르고 고치지를 않았습니다. 정덕(正德)151) 13년152) 에 우리 공희 대왕(恭僖大王)153)남곤(南袞) 등을 보내어 개정해 줄 것을 주청하여 다시 무종 황제(武宗皇帝)의 허락을 받았고, 이어 가정(嘉靖)154) 18년155)권벌(權橃) 등을 보내 개정해 줄 것을 주청하여 지금 황제의 허락을 받았습니다.

중종께서 개정을 허락한다는 명을 여러번 받았으면서도 고친 책을 보지 못하고 갑자기 승하하셨으니, 하늘에 계신 혼령께서 다시 이 일에 간절하셔서 잠시도 잊지 못하실 줄 신이 어찌 알겠습니까마는 신의 어리석은 뜻으로는 종계에 관한 요청은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여겨집니다. 논자(論者) 가운데 간혹 전하가 왕위를 이으신 지 거의 10년이나 되는데, 10년 이내에 주청하지 않았던 일을 이제 와서 주청한다면 너무 늦은 감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은 그 의견에 대해 의혹이 있습니다. 만약 10년이나 늦었다는 것에 구애되어 올해도 청하지 않고 내년에도 청하지 않아 20년 30년이 지나간다면, 지금 이후에는 종계를 개정하는 일은 끝내 청할 기약이 없을 것입니다.

또 논자 가운데는 경술년156) 에 중국에서 《대명회전》을 중수하면서 우리 나라 종계를 이미 고쳤으니, 우선은 그 책을 반포할 날을 기다리자고 하나, 신은 그것 역시 의혹스럽습니다. 중수하면서 개정했다는 말은 모두 역관들의 소문에서 나온 것이고 믿을 만한 문안(文案)이 없는데, 무엇을 근거로 그것을 고쳤다는 사실을 증험할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역관들 중 말을 전하는 자들은 모두 황제의 어람(御覽)이 끝나지 않았다고 하는데, 경술년부터 지금까지 이미 7년이 되었는데 아직도 다 보지 못했다는 것을 보면, 중수했다는 소문만 의심스러운 것이 아니라 황제가 보고 있다는 소문은 더욱 믿을 수 없습니다.

신은 《회전》을 고치기 전에 중국에 혹 변고라도 있게 되면, 지금 황제의 허락과 영락·정덕 연간의 허락이 모두 빈말이 되어 시행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종계의 잘못은 어느 때나 밝혀지고 신자들의 부끄러움은 어느 때나 씻을 수 있겠습니까?

논자들은 또 황제가 이미 개정할 것을 허락했는데 다시 주청한다면, 비단 일이 번거롭게 될 뿐만 아니라 말을 만들기도 어렵다고 하는데, 신은 그것도 의혹스럽습니다. 《회전》은 중국의 비전(秘典)으로 그 중수 여부는 외국에서 감히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중종조에 허락을 받은 뜻을 들어서 주사(奏辭)를 만들기를 ‘선신(先臣)157) 이 종계를 고쳐줄 것을 청하여 이미 허락을 받았으므로 고쳐서 반포해 줄 것을 수십 년 동안 기다리다가 불행히 세상을 떠났다. 만약 중국의 《회전》을 이미 고쳤다면 예부에 명하여 본국의 종계에 관한 부분을 한 장 등사(謄寫)하여 배신(陪臣)에게 주어 돌려보내, 선신의 혼령을 위로하고 국조(國祖)의 원통함을 펴도록 해달라.’ 한다면, 우리의 요청을 허락하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신이 세 차례 북경(北京)에 갔었는데 주객사(主客司)158)이목(吏目)159) 이 거처하는 곳의 벽에 조공하는 외국을 죽 기록했는데, 조선의 서열이 제일위(第一位)에 있었으니 우대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회전》의 주석(註釋)에 쓰여 있는 ‘성(姓)은 이씨(李氏)요, 인임(仁任)의 후손이다.’ 하는 구절에 눈이 갈 적마다 신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팔을 걷어붙이고 분격하여 나라에 인재가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니 이제 만약 인재가 있다면 어찌 거짓된 악명(惡名)이 국조(國祖)에게 가하여진 채 후세에 전하여 지게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의 뜻으로는, 마땅히 온 나라의 군신이 정성과 지혜를 다해 반드시 변명(辨明)을 한 뒤에야 그만둘 것이요, 10년이나 지체되었다는 데 구애되어서는 안 되고 《회전》을 반포할 날까지 기다려서도 안 되며, 또한 상대를 번거롭게 하고 말을 만들기가 어렵다는 것 때문에 스스로 꺼려서 중지해서도 안 됩니다. 앞의 이 한 가지 일은 마땅히 왕세자(王世子)의 책봉(冊封)을 청하기 전에 미리 주청해야 할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잘 결단하소서.

둘째는 고명(誥命)을 다시 받는 일입니다. 신이 보건대, 고명이란 천자(天子)의 총장(寵章)이요 열국(列國)의 대보(大寶)입니다. 옛날의 제후(諸侯)와 군부인(君夫人)160) 은 살아서 천자에게 명을 받지 못하면 죽은 뒤에 추사(追賜)받더라도 영예로 삼았으니, 고명이 어찌 열국의 큰 보배가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군부인에 있어서 고명을 살아서 받으면 한 나라의 국모(國母)가 되고 죽어서는 오묘(五廟)161) 의 위의(威儀)에 들게 되는 것이니, 이 어찌 관계되는 바가 더욱 중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혹 불행히 유실되거나 화재에 타버리면, 다시 청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생각건대 성렬 인명 대왕 대비(聖烈仁明大王大妃) 전하와 공의 왕대비(恭懿王大妃) 전하는 각기 고명이 있었는데, 지난번 대궐의 화재로 모두 불에 타서 없어져 국모의 보배를 후세에 전할 수 없게 되었으니, 온 나라의 신민치고 누가 비통해 하지 않겠습니까? 신이 상고해 보니 《대명회전》 고칙(誥勅)에 관한 사례(事例) 안에 ‘거듭 고칙을 준다[重授誥勅]’는 것이 있으니, 거듭 고칙을 주는 것은 구례(舊例)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중국 사신을 영접할 때의 폐단 때문에 양궁(兩宮)에게 평생의 한을 남겨 드릴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중국 사신이 올지 안 올지는 미리 헤아릴 수 없습니다. 대왕 대비 전하가 처음 고명을 받으실 때에 중국에서 본국의 배신(陪臣)에게 주어 보냈으니, 이번에 다시 보내는 고명도 이와 같이 하지 않을 줄 어찌 알고 중국이 사신을 보내오는 것을 걱정하는 것입니까? 이제 이 고명을 끝내 다시 청하지 않는다면 이는 스스로 《대명회전》의 거듭 주는 예를 없애고 또 세실(世室)에 길이 보존할 보배는 없애는 것이니, 어찌 신자된 자의 마음에 편안할 수 있겠습니까. 이 일도 역시 왕세자의 책봉을 청하기 전에 미리 의논하여 주청해야 할 일입니다. 전하께서는 결단을 내리소서.

세째는 문묘(文廟)162) 의 신주(神主)의 글을 고치는 일입니다. 신이 살펴보건대, 선사(先師)에게 석채(釋菜)하는 글은 예경(禮經)에서 비롯된 것이요, 이른바 선사라는 것은 선농(先農)·선잠(先蠶)과 같은 것으로 그 위에 다른 명호(名號)를 덧붙일 수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한 명제(漢明帝)가 예경의 말을 따서 처음 공사를 선사로 높여 제사했으니, 그 예(禮)가 높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문 주씨(宇文周氏)163) 가 이 뜻을 모르고서 망령되게 문선왕(文宣王)의 호를 덧붙였으니, 매우 정당하지 못한 일입니다. 만약 그것이 주(周)나라 천자에 비긴 것이라면 이 어찌 참람으로 공자를 더럽힌 것이 아니겠으며, 만약 왕(王)도 역시 작질(爵秩) 가운데 하나로 여긴 것이라면 이는 신자(臣子)로 공자를 대하는 것이니, 이 어찌 의리에 옳은 일이겠습니까. 그 뒤로 당(唐)·송(宋)·원(元)나라에서 대대로 존호를 더해서 정당하지 못한 것을 계속 이어 답습했던 것은 더욱 말할 것이 없습니다. 송 나라의 이상세(李常世)는 이른바 명유(名儒)인데 공자에게 제호(帝號)를 덧붙이기를 청했으니, 이것은 무당이나 점장이 등이 신(神)에게 아첨하여 황제라고 부르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만물 가운데 가장 신령한 것이 사람인데, 그런 사람으로서 성인의 경지에 이르면 그 존귀함이 상대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꼭 황제라고 불러야 그를 높이는 것이 되겠습니까?

가정(嘉靖)갑진년164) 에 성절사(聖節使)가 표문을 가지고 중국에 갔을 때 선지(宣旨)에 ‘중국 문묘(文廟)의 신주의 글을 바꾼 일을 등사해 와서 아뢰라.’ 하였으므로 의제사(儀制司)에 가서 물었으나, 조회(朝會)가 끝나 낭관(郞官)이 집에 있어서 등사해 오지 못하였습니다. 그 뒤에 천추사(千秋使)가 신주(神主)를 고친 내용과 제본(題本)의 사유를 갖추어 와서 아뢰었으나, 마침 중종께서 편찮으시고 이어 승하하셨으며 잇달아 국가에 상사(喪事)가 있어, 그 의논이 끝내 시행되지 못하였습니다.

신이 일찍이 요동(遼東)과 산해위(山海衛)의 문묘에 배알하여 보니 다 이미 고쳐 적었었으니, 이로 미루어 보면 천하의 제주(諸州)들이 모두 그렇게 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무릇 의례(議禮)와 고문(考文)은 천자가 하는 일인데, 이제 천자가 지성 선사(至聖先師)라는 명칭을 붙인 것은 예경(禮經)에 합당하고 예를 의논하는 근본을 얻은 것으로, 비록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고 해도 참으로 마땅하다고 할 것입니다. 우리 중종 대왕께서 ‘등서해 와서 아뢰라.’고 하신 까닭도 역시 그 바르지 못한 명호(名號)를 제거하고 지금 천자의 제도를 따르려고 하신 것인데, 그 일이 끝내 이루어 지지 않았습니다. 전하께서는 어찌 그 뜻을 따라서 그 예(禮)를 회복하시지 않으십니까? 이 일은 마땅히 중국 사신이 오기 전에 의논하여 개제(改題)해야 할 것이니, 전하께서는 잘 결단하소서.

네째는 바다에 나가는 배에 대해 증빙할 만한 문기(文記)를 주는 일입니다. 신이 보건대, 우리 나라 관청의 문자(文字)에는 방언(方言)을 섞어 쓰므로 저속하여 상고할 수가 없습니다. 이 때문에 바닷가에 사는 백성들이 중국 지방에 표류하면, 비록 공문서가 있는 경우라도 문자 때문에 의심을 받아 해적으로 몰려서 갖가지 고문을 받습니다. 또 그 상부에 올리는 글에도 ‘갖고 있는 신표의 문자에 이어(夷語)가 많으니 간세(奸細)165) 가 아닌가 여겨진다.’ 하니 이로써 보면 우리 나라의 문자가 알기 어려운 것 때문에 중국 변장들에게 살해당하는 자도 혹 있을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해양에 나가는 배의 증명서를 한결같이 중국의 노인(路引)166) 과 같은 격식(格式)을 따라 명백히 국호(國號)를 밝히고 나서 중국의 연호를 갖추어 화란표첩(花闌票帖)에 써서 바닷가의 관사(官司)에 내려주어 판자에 그것을 새겨서 배를 타는 사람들이 의례적으로 관사에 신고하면 곧바로 인쇄한 서전(書塡)에 배에 탄 사람과 실은 물건을 써주도록 하면, 혹 중국 땅에 표류하는 일이 있어도 그 변경의 관리들이 이것을 신표로 보고 해적이라고 의심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일도 역시 국가의 동문(同文)167) 하는 정치에 관계되고 표류한 백성들을 죽음에서 구해주는 데 보탬이 되는 것이니, 전하께서는 의논하여 처리하소서."


  • 【태백산사고본】 14책 21권 36장 B면【국편영인본】 20책 365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외교-명(明) / 왕실(王室) / 교통-수운(水運)

  • [註 145]
    도참(圖讖)에 나타난 것 : 신라 말기의 승려인 도선(道詵)의 비기(秘記)에 나오는 "목자(木子)가 나라를 얻는다." 라는 말과 "한양(漢陽)에 도읍한다."는 말을 가리킴.
  • [註 146]
    홍무(洪武) : 명 태조(明太祖)의 연호.
  • [註 147]
    영락(永樂) : 명 성조(明成祖)의 연호.
  • [註 148]
    2년 : 1404 태종 4년.
  • [註 149]
    공정 대왕(恭定大王) : 태종(太宗).
  • [註 150]
    성화(成化) : 명 헌종(明憲宗)의 연호.
  • [註 151]
    정덕(正德) : 명 무종(明武宗)의 연호.
  • [註 152]
    13년 : 1518 중종 13년.
  • [註 153]
    공희 대왕(恭僖大王) : 중종(中宗).
  • [註 154]
    가정(嘉靖) :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 [註 155]
    18년 : 1539 중종 34년.
  • [註 156]
    경술년 : 1550 명종 5년.
  • [註 157]
    선신(先臣) : 중종을 가리킴.
  • [註 158]
    주객사(主客司) : 외국 사신을 담당하는 관청.
  • [註 159]
    이목(吏目) : 서무(庶務)를 담당하는 하급의 관원(官員).
  • [註 160]
    군부인(君夫人) : 제후의 왕비(王妃).
  • [註 161]
    오묘(五廟) : 제후가 조상을 모시는 사당. 천자의 경우는 태조(太祖)와 천자의 6대(代)까지, 제후는 태조와 4대(代)까지 다섯 신주를 모신다.
  • [註 162]
    문묘(文廟) : 대성전(大成殿).
  • [註 163]
    우문 주씨(宇文周氏) : 북주(北周)의 우문 각(宇文覺)을 가리킴.
  • [註 164]
    갑진년 : 1544 중종 39년.
  • [註 165]
    간세(奸細) : 간첩.
  • [註 166]
    노인(路引) : 여행증(旅行證).
  • [註 167]
    동문(同文) : 중국과 같은 문화권이라는 뜻. 《중종(中庸)》 28장에 "지금 천하가 수레의 궤도가 같고 글을 쓸 때 문자가 같고 행동의 윤리가 같다." 하였다.

○漢吏學官林芑上疏曰:

臣聞《夏書》曰: "工執藝事以諫, 其或不恭, 邦有常刑。" 臣待罪漢吏學官, 幾二十年, 徒費公廩, 以養妻孥, 而未効涓埃之報, 日夜思慮, 謀畫唯是。 宗系、誥命等事, 微臣之職, 所當陳列者, 謹條四件于左, 伏乞聖慈留神焉。 一件, 宗系改正事。 我太祖康獻大王, 系牒完山, 自新羅季世, 見於圖讖, 三韓臣庶, 罔不洞知, 而洪武初, 奸民尹彛等叛入皇朝, 旣誣宗系, 又加惡名, 不惟朝史官一代之失, 抑亦東土臣子萬世之羞。 永樂二年, 我恭定大王奏請改正, 特蒙太宗皇帝欽依。 爲史官者, 固當釐爲傳信, 而及成化 《會典之》肇纂也, 猶遵誣史, 不爲更改。 逮至正德十三年, 我恭僖大王南袞等, 奏請改正, 又蒙武宗皇帝欽依, 續於嘉靖十八年, 遣權橃等, 奉請改正, 又蒙今皇帝欽依。 中廟屢蒙許改之命, 而未見改纂之典, 遽爾昇遐。 臣安知在天之靈, 猶復惓惓於斯, 而未嘗須臾忘也? 臣之愚意, 宗系之請, 不可不爲也, 而論者或以爲, 殿下嗣位以來, 殆將十年, 而十年之內, 不曾奏請, 及此而始爲之請, 則於事太緩。 臣竊惑焉。 若拘於十年之緩, 今年不請, 明年不請, 漸而至於二十年、三十年之外, 則繼自今以往, 宗系改正之事, 卒無有復請之期矣。 論者又以爲, 庚戌年間, 朝重修《會典》, 而本國宗系, 已爲改正, 姑待頒降之日。 臣又惑焉。 重修改正之說, 皆出於譯士之傳聞, 而未有文案之可信, 何從而驗其改纂之實乎? 況譯士之傳者皆云, 皇帝御覽未畢。 自庚戌至今年, 已及七載, 而尙未覽畢, 則重脩之說, 固已可發, 而御覽之說, 尤爲不信。 臣恐《會典》未修, 而皇朝脫有變故, 則今之聖旨, 倂與永樂正德之旨, 而徒爲空言無施也。 然則宗系之誣, 何時可明, 而臣子之羞, 何時可雪也? 論者又以爲, 皇帝旣已許改, 而復爲之奏請, 則非但事涉煩瀆, 措辭爲難。 臣又惑焉。 《會典》一書, 朝之秘典也, 其重修與否, 非外國所敢知也。 但擧中廟欽蒙勑旨之意, 爲之奏辭曰: "先臣乞改宗系, 旣蒙欽準, 懸望改頒者, 垂數十年, 而無祿卽世。 所有《會典》, 若已改纂, 乞勑禮部, 謄寫本國宗系一張, 給付陪臣領回, 以慰先臣之靈, 以伸國祖之冤。" 如此則蔑無準請矣。 臣三赴京師, 見主客司吏目所居壁上, 列書朝貢外國, 而朝鮮班在第一, 可謂優待矣。 至於《會典》內註脚書云: "姓李氏, 仁人之後。" 臣每及寓目, 不覺扼腕張膽, 以爲國無人焉故至此。 若固有人焉, 則豈可使惡人之名, 誣加於國祖之先, 而流傳於百年之後乎? 臣意宜一國君臣, 盡誠竭智, 期於獲辨而後已者。 不可拘於十年之緩, 不可待於頒降之日, 亦不可自憚於煩瀆措辭之難而止耳。 右一件, 當議於王世子未請封之先, 而爲之奏請者也。 伏望殿下, 聖斷焉。 一件, 誥命重授事。 臣謹按, 誥命, 天子之寵章, 而列國之大寶。 古之諸候及君夫人, 生不受命於天王, 則死而追錫爲榮。 誥命豈非列國之太寶乎? 況君夫人之誥命, 生受爲一國之母, 死藏爲五廟之儀, 豈不尤爲關重乎? 設或不幸而有遺失焚燒之故, 則其勢不得不爲之復請。 仰惟聖烈仁明大王大妃殿下及恭懿王大妃殿下各誥命, 頃緣宮闈之火, 俱被焚()〔熱〕 , 至使國母之寶, 不得傳於後世。 擧國臣民, 孰不悲痛? 臣夷考《大明會典》, 誥勑事例內, 有云重授誥勑者, 重授誥勑, 自有舊例。 不可以欽使迎接之弊, 遽貽兩宮沒世之恨。 況欽使之遣與不遣, 未可逆料。 當大王大妃殿下始受誥命也, 皇朝順付本國陪臣齎還, 則安知今日再受之誥命, 不如是, 而遽患欽使之遣也? 今此誥命, 若卒不爲復請, 則是自廢《會典》重授之例, 又缺世室永藏之寶。 豈安於臣子之心乎? 右一件, 亦當議於王世子未請封之先, 而爲之奏請者也。 伏望殿下, 聖斷焉。 一件, 文廟神版改題事。 臣謹按, 先師釋菜之文, 昉於(經禮)〔《禮經》〕, 所謂先師云者, 如先農、先蠶之類, 而不可加名號於其上明矣。 明帝《禮經》之語, 始尊孔子爲先師而祀之, 其禮崇矣。 宇文周氏不知此義, 妄加文宣王之號, 不經甚矣。 若擬之天王也, 則豈以僭亂汚孔子也? 若以爲王亦爵秩也, 則是以臣子待孔子也, 於義其可乎? 自此以後, 曰, 世加尊號, 其沿襲不經, 尤爲無謂也。 李常世, 所謂名儒, 而請加帝號於孔子, 則無異於淫巫、瞽史, 媚神稱帝者也。 萬物之中, 唯人最靈。 人而至於聖, 則其尊無對。 何必稱帝然後爲之尊乎? 嘉靖甲辰年, 聖節使如京師奉表之日, 宣旨云: "朝文廟神版改題事, 謄寫來啓", 故往儀制司而問焉, 則緣輟朝, 郞官在家, 未及(騰)〔謄〕 寫。 千秋使將改版位目幷題本之由入啓, 而適中廟不豫, 因而上賓, 國家連遭大慼, 其議不克施行。 臣嘗謁遼東山海衛文廟, 則皆已改題, 天下諸州, 擧隅可知。 凡議禮、考文, 天子之事也。 今皇上稱至聖先師之號, 允合於禮經, 而得議禮之本。 雖孔聖復起, 必謂之固當然者矣。 我中廟所以命謄書來啓者, 亦欲去其不經之號, 遵其時王之制, 而事竟不果。 殿下何不遹追其志而復其禮乎? 右一件, 當議于詔使未至之前, 爲之改題者也。 伏望殿下, 聖斷焉。 一件, 海洋船隻給文憑事。 臣謹按, 我國官吏文字, 雜用方言, 鄙俚無稽。 以故沿船居民, 漂到中國地方, 雖有公幹, 以文字爲疑, 必諉之於海寇, 而拷問備至。 且於奏內, 亦云: "其所帶印信文字, 多用夷語, 恐係奸細。" 用是觀之, 以本國文字之難曉, 爲朝邊將之殺害者, 亦或有之。 臣意海洋船隻文憑, 一依朝路引式例, 明白備開國號, 又具大明年號, 寫於花闌票帖, 頒給沿海官司, 刊刻板面, 仍令船戶人等, 例告官司, 卽與印刷書塡, 在船人口姓名及所在物件, 則脫有漂泊於中國之地, 其邊官, 必以此爲信, 而不致疑於海寇。 右一件, 亦係國家同文之治, 而漂民救死之一助也。 伏望殿下, 議處焉。


  • 【태백산사고본】 14책 21권 36장 B면【국편영인본】 20책 365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외교-명(明) / 왕실(王室) / 교통-수운(水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