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순찰사 이준경이 복명하다
전라도 순찰사 이준경(李浚慶)이 복명(復命)하였는데, 전교하기를,
"근년 이래 나라에 액운(厄運)이 들어 해마다 흉년이 들었다. 태평한 지가 오래여서 백성들이 병화(兵火)를 모르고 군령(軍令)의 해이해진 것이 지금보다 더 심한 때가 없었는데. 갑자기 호남의 참혹한 왜변을 만났으니 통탄스러움을 견딜수 있겠는가. 6월에 군사를 동원하여 무더위에 노고가 극심하였다. 곧 인견(引見)하려 하였으나 마침 정조(停朝)102) 하는 중이어서 【흥원군(興原君)이 졸(卒)했기 때문이다.】 하지 못하였다. 모든 일을 자세히 서계(書啓)하라."
하니, 준경이 아뢰기를,
"김경석(金景錫) 등의 일에 대해서는, 직접 계달하려 하였습니다만, 대체적인 것을 서계하겠습니다.
신이 5월 22일 나주(羅州)에 도착하여 들으니, 병영(兵營)은 18일에 이미 무너졌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김경석·남치근(南致勤)이 모두 영암(靈巖)으로 들어갔는데, 신의 생각에 두 장수가 한 성(城)에 있으면 서로 응원하는 성세(聲勢)가 없어 온당치 못하겠기에 23일 치근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나오게 하였습니다만, 마침 적이 장흥(長興)으로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곧 장흥으로 가서 구원하게 하였습니다. 24일 치근이 영암에서 나와 면대하여 의논할 일이 있다고 하면서 장흥으로 가지 않고 먼저 나주로 왔습니다. 신은 명령대로 따르지 않은 것 때문에 화가 나서 입견(入見)을 허락하지 않고 엄중 힐책하였습니다. 그래도 치근이 면대하여 의논할 것을 굳이 청하므로 입견하였더니, 병력이 적고 약하다는 것을 말하였습니다. 곧 병력을 더 주고 주야로 치보(馳報)하게 하였습니다. 치근이 남평(南平)을 향하여 출발하였는데, 25일 새벽에 적이 영암성 아래에 크게 모였다는 말을 듣고는 곧 치근에게 장흥으로 가지 말고 남평으로부터 영암으로 가서 구원하라고 하였습니다.
조안국(趙安國)은 23일 나주에 도착하였는데, 24일 병력을 더 주어 영암으로 나아가게 하였으나 도착하지 못하고 되돌아왔습니다. 그래서 병력과 장비를 더 주어 나주로부터 들어가 구원하게 하였습니다만, 영암의 접전(接戰)에 대한 일은, 처음부터 서로 통하지 못하였던 까닭에 두 장수가 모두 몰랐었습니다. 치근은 영원(嶺院)에서 적을 만나 10여 급(級)을 베어가지고 돌아오다가 창흘원(昌訖院)에서 유숙했고, 안국은 중로(中路)에서 모산리(毛山里)에 적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수색하느라 날이 저물어서 영암에서 20리 지점에서 진을 치고 유숙했습니다. 26일 두 장수가 비로소 영암에서 승전하였고 적의 무리가 패주하였다는 말을 듣고 강진(康津)의 뒷산 고개까지 추격하였으나 적이 이미 배에 올랐으므로 미처 추격하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후 녹도(鹿島)의 치보에 의해 적선이 본보(本堡)의 건너편에 나타났다는 사실을 알고 즉시 남치근과 조안국에게 달려가 지원하게 하였으며, 신도 보성(寶成)으로 가서 지원하려 하였었습니다. 그런데 또 적선이 나뉘어 우도(右道)로 향한다는 소문이 들어왔으므로 그대로 나주에 머문 채 중간에 위치하여 응원하였습니다. 그리고 김경석에게는 그대로 영암에 머물러서 우도를 방비하게 하였습니다. 적이 녹도에서 패배한 뒤에 또 적선이 백량(白梁)·보길(甫吉) 등에 많이 정박해 있다는 말을 듣고 즉시 병선(兵船)을 모아 최호(崔豪)로 하여금 진격하게 하고 조안국으로 하여금 이어서 지원하게 하였으나 적은 이미 도망간 뒤였습니다. 적선의 수는 대개 50척에 불과하였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3책 19권 15장 B면【국편영인본】 20책 293면
- 【분류】군사-군정(軍政) / 인사-임면(任免) / 사법(司法) / 외교-왜(倭)
- [註 102]정조(停朝) : 조회(朝會)를 정지하는 것. 종성(宗姓)으로서 임금을 기준으로 소공친(小功親) 이상 및 정2품 이상의 관직에 있는 사람, 또는 문무관 정2품 이상이 상장(喪葬)이 있을 때에는 일정 기간 정조하는 규정이 있다.
○丁丑/全羅道巡察使李浚慶復命。 傳曰: "近年以來, 國値厄運, 歲連凶荒。 昇平日久, 民不知兵, 軍令懈弛, 莫此爲甚。 卒遇湖南慘酷之變, 可勝歎哉? 六月興師, 觸冒霾熱, 勞苦極矣。 卽欲引見, 而適値停朝, 【以興原君卒故也。】 故未爲也。 凡所爲之事, 詳悉書啓。" 浚慶啓曰: "金景錫等事, 親欲啓達矣, 大槪書啓。 臣於五月二十二日, 到羅州聞之, 則十八日, 兵營已潰矣。 金景錫、南致勤皆入靈巖, 臣以兩將, 同在一城, 無聲勢相援之形, 爲未便, 故二十三日, 令致勤, 領兵出來, 適聞賊入長興, 卽令直到長興救之。 二十四日, 致勤自靈巖出來, 稱有面議事, 故不往長興, 而先來羅州。 臣怒其不依所令, 不許入見, 嚴加詰責。 致勤强請面議, 始許入見, 則以兵少且弱爲辭。 卽益兵督令馳報日夕, 致勤發向南平。 二十五日曉, 聞賊衆大集靈巖城下, 旋令致勤, 勿往長興, 自南平救靈巖。 趙安國於二十三日, 到羅州, 二十四日, 給兵令赴靈巖, 未到而還, 故益其兵仗, 自羅州入救, 而靈巖接戰之事, 初不相通, 故兩將皆不得知。 致勤則遇賊于嶺院, 捕斬十餘級而還, 宿昌訖院, 安國則中路聞毛山里有賊, 馳往搜探, 以致日晩, 距靈巖二十里, 結陣止宿。 二十六日, 兩將始聞靈巖戰勝, 賊徒敗走, 追至康津後嶺, 賊已登船, 未及尾擊云。 其後鹿島馳報, 賊船現形于本堡越邊, 卽令南致勤、趙安國馳援, 臣亦將往寶城策應, 而又聞賊船, 分運向右道, 故仍留羅州, 居中應援。 且令金景錫, 仍留靈巖, 隄備右道。 鹿島逐北之後, 又聞賊船, 多留泊白梁、甫吉等處, 卽聚兵船, 令崔豪進擊, 趙安國繼援, 賊已遁去矣。 賊船之數, 大槪不過五十隻矣。"
- 【태백산사고본】 13책 19권 15장 B면【국편영인본】 20책 293면
- 【분류】군사-군정(軍政) / 인사-임면(任免) / 사법(司法) / 외교-왜(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