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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실록18권, 명종 10년 5월 29일 임술 1번째기사 1555년 명 가정(嘉靖) 34년

전주 부윤 이윤경과 우도 방어사 김경석이 함께 왜적 1백여 명의 목을 베다

전주 부윤(全州府尹) 이윤경(李潤慶)이 우도 방어사(右道防禦使) 김경석(金景錫)과 함께 왜적(倭賊)을 쳐부수어 1백여 명의 수급(首級)을 베었다.

당초에 관찰사 김주(金澍)이윤경을 가장(假將)으로 삼아 영암(靈巖)을 지키게 하자, 이윤경이 사수하려는 계책을 하여 군졸들을 무마하고 병기(兵器)를 갖추기에 힘과 마음을 다하여, 막아낼 방법을 지극하게 하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성 안의 사람들이 의지하며 믿게 되었다.

그런데 김경석이 내려 와서는 적이 매우 번성한 것을 보고서 사체(四體)가 힘이 없어지며 어찌할 계책을 내지 못했었다. 5월 24일에 왜적들이 동서로 나뉘어 진(陣)을 짜고 몰려와 성을 포위하였다. 25일에 전주(全州) 군사 약간 명이 나가 싸우기를 청해도 김경석이 허락하지 않다가 굳이 청하자 그제야 허락했었다. 김경석이 성의 동쪽 문루(門樓) 위에 앉아 날래고 용맹스러운 군사를 뽑아내어 나가 싸우게 한 지 한참만에 왜적들이 북쪽으로 도망하여 사방으로 흩어지며 더러는 향교(鄕校) 안으로 들어가자, 우리 군사들이 승세를 타고 공격하여 향교 안으로 들어가 적의 머리 1백 4급(級)을 베고, 또 북쪽으로 도망하는 왜적을 추격하여 6급을 베었는데 나머지는 모두 도망가 버렸다.

이때 남치근(南致勤)남평현(南平縣)에 있다가 영암이 포위된 것을 듣고 구원하러 가다가 길에서 왜적을 만나 11급을 베었다. 그 이튿날 조안국(趙安國)남치근영암에 이르렀고, 또 그 다음날 왜적들을 추격했지만 미치지 못했다.

사신은 논한다. 왜구들이 감히 멋대로 돌격하게 된 것은 장사(將士)들이 두려워하여 물러나 움츠렸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왜구들은 공격하면 무너지고 쫓아가면 도망하여 조금만 군사의 위엄을 보여도 도망하여 숨기에 바빴다. 이러므로 영암에서의 승전도 또한 효용군(驍勇軍) 10여 명이 먼저 싸운 데에서 얻어진 것이다. 이때 조안국영산진(靈山津)에 있었고 남치근남평현에 있었으니 진실로 김경석과 안팎에서 서로 호응하였다면 그 하찮은 도적들을 거의 하나도 남김없이 섬멸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번에 모든 장수들이 모두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져 김경석은 성 안에서 떨고만 있고 감히 머리를 내놓지 못하였고 남치근조안국은 모두 먼 지경에 군사를 주둔하고 나아가 치려고 하지 않았다. 비록 왜적이 이미 패한 뒤에 쫓아가기는 했지만 또 때에 맞추어 추격하지 않아 왜적들이 무사하게 배에 오르게 했으니 통분함을 견딜 수 있겠는가?


  • 【태백산사고본】 12책 18권 52장 B면【국편영인본】 20책 277면
  • 【분류】
    군사-군정(軍政) / 외교-왜(倭) / 역사-사학(史學)

    ○壬戌/全州府尹李潤慶, 與右道防禦使金景鍚, 擊倭賊, 斬首百餘級。 初觀察使金澍, 以李潤慶爲假將, 使守靈巖潤慶欲爲死守之計, 撫其軍卒, 備其器械, 殫力盡心, 其所捍禦之方, 無所不至, 城中之人, 賴而爲恃。 及金景錫來到, 見賊甚盛, 四體無骨, 計無所出。 五月二十四日, 倭賊分東西作陣, 來圍其城。 二十五日, 全州軍士若干人, 請出戰, 景鍚不許, 固請乃許之。 景錫坐城東門樓上, 抄發驍勇軍出戰。 良久, 倭賊北走四散, 或入鄕校中, 我軍乘勝擊之, 就鄕校中, 斬首一百四級, 又追擊奔北之, 斬六級, 其餘皆遁去。 時南致勤南平縣, 聞靈巖被圍將往救之, 路逢倭賊, 亦斬首十一級。 翌日, 趙安國南致勤靈巖, 又明日追倭賊不及。

    【史臣曰: "倭寇之敢肆衝突者, 以將士之畏㤼而退縮也。 攻之則潰, 追之則走, 稍示兵威, 逃竄不暇, 故靈巖之捷, 亦出於驍勇軍十餘人之先戰。 時趙安國靈山津, 南致勤南平縣, 苟能與景錫, 內外相應, 則彼蕞爾之盜, 庶可勦滅無遺類矣。 今也諸將, 皆懷畏怯之心, 景鍚懾慴於城中, 而莫敢出頭, 致勤安國, 皆駐兵遠地, 不肯進擊。 雖赴賊旣敗之後, 而又不乘時追擊, 使倭賊, 從容就船, 可勝痛哉?"】


    • 【태백산사고본】 12책 18권 52장 B면【국편영인본】 20책 277면
    • 【분류】
      군사-군정(軍政) / 외교-왜(倭) / 역사-사학(史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