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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실록18권, 명종 10년 5월 19일 임자 3번째기사 1555년 명 가정(嘉靖) 34년

삼공을 불러 왜구에 대한 대책을 의논하여 세우도록 전교하다

삼공 및 육경과 비변사(備邊司)를 명소(命召)하여 빈청(賓廳)에 모이게 했다. 전교하기를,

"요사이 변장들이 무어(撫禦)를 합당하게 하지 못하여 북쪽 변방의 변을 가져왔고, 조정은 오랑캐 대우를 너무 경솔하게 하다가 또한 남쪽 지방의 환란을 가져왔다. 지금 계본(啓本) 【김주의 계본에 ‘왜인(倭人)들이 이덕견(李德堅)에게 하는 말이 「너희 나라가 우리들과 교분이 매우 두터웠는데 요사이 3∼4년 동안에 우리 나라의 죄도 없는 사람들을 많이 죽였으니 이제는 원수가 되었다.」고 했다.’ 하였다.】 을 보건대, 왜구(倭寇)들이 원한을 맺은지 이미 오래되어 복수(復讎)하고자 하여 대거 출동하여 오게 된 것이다. 심지어 ‘서울까지 올라가겠다.’는 말을 하여 우리 나라를 공갈, 위협하기까지 하였으니, 국가의 치욕이 이보다 더 클 수가 없다. 다시 더 널리 의논하여 정병(精兵)을 많이 내보내어 기어코 섬멸하라.

서울은 근본이 되는 곳인데 당상 무신(堂上武臣)으로 쓸 만한 사람이 없으니 또한 염려된다. 어제 홍문관이 조목조목 진달한 말과 간원이 아뢴 승군(僧軍)을 뽑자고 한 일을 시급히 조치하라. 국가가 액운(厄運)을 만나 오늘과 같은 환란이 있으므로 위에서도 근심과 염려가 한이 없으니, 이 뒤부터는 경들이 일찍 사진(仕進)하고 늦게 파하여 항시 대궐 안에 있으면서 대책을 세워야 한다.

이덕견은 의리상 치욕을 받아서는 안 되므로 사수하고 굴하지 않았어야 올바른데, 끝내 구차하게 살아서 돌아왔으니, 이는 반드시 왜구들이 이덕견을 시켜 군량을 구하고자 한 것이다. 근년(近年) 이래로 바다를 지나가는 왜선(倭船)들을 모두 공격하여 살해하였으므로 그들의 원망이 깊어진 것이다. 이것을 평상시의 예대로 여겨 조처해서는 안 될 것이다. 또한 대마도주의 서계로 보면 대마도 또한 꼭 알지 못한 것이 아니다."

하였다. 심연원(沈連源) 등이 아뢰기를,

"상의 분부가 지당하십니다. 이번의 서계를 보건대 어떻게 이와 같은 치욕스러운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 중에는 우리 나라 말을 조금 아는 자가 있었다니, 이는 반드시 우리 나라에 왕래하던 왜인일 것이고, 또한 대마도가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이덕견이 살아서 돌아온 것은 비록 애걸했기 때문일 것이지만 왜인들이 저희들이 말을 통하고자 하여 내보냈을 것입니다.

또 그들의 서계에 ‘서울의 관가(官家)에까지 가겠다.’는 등의 말이 있는데 이 말은 모두 중국에서 사용하는 말이니, 이번에 침범해 온 자들 중에 또한 반드시 중국 사람이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이번 왜인은 필시 중국에도 익숙하게 다니는 자들일 것입니다. 또한 왜인들은 ‘가정(嘉靖)’이란 연호(年號)를 쓰지 않는데 이번에는 ‘가정 34년’이라고 했으니 더욱 의심스럽습니다.

또 홍문관이 조목조목 진달한 방책은 모두 지당합니다. 승군(僧軍)을 뽑는 일은 비변사에서도 일찍이 아뢰려고 했었습니다. 전조(前朝)의 말년에도 대군(大軍)을 조발(調發)할 적에 또한 중들로 하여금 큰 도끼와 몽둥이를 가지고 전장에 나가도록 했었습니다. 승군들이 비록 활 쏘기와 말 달리는 무재가 없기는 하지만 그 중에 건장한 사람을 가려 낸다면 어찌 쓸 만한 사람이 없겠습니까? 다만 양종(兩宗)에게 뽑게 하지 말고 수령들로 하여금 뽑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또 신민(臣民)들로 하여금 계책을 진달하게 하여 각기 생각하고 있는 것을 다 말하도록 하고, 백관(百官)들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을 추천하게 하여 버려진 인재가 없도록 한다는 것 또한 지당한 의논입니다.

또 경상좌도 방어사 김세한이 오늘 이미 길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좌도에는 섬이 없어 왜구(倭寇)들이 접하기가 어렵고, 또한 아무 급보도 없으니 방어의 위급함이 다른 도에 비하면 덜합니다. 왜선들이 침범하기로는 전라도에서 청홍도(淸洪道)까지가 매우 용이하게 되어 있고, 청홍도에서 경기(京畿)로 들어오기는 길이 멀지 않으니, 김세한으로 하여금 경상도로 가지 말고 청홍하도(淸洪下道)로 내려가서 서천포(舒川浦)에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전라도의 위급을 구원하고 한편으로는 하도의 도적을 방비하게 하소서. 또 장세호(張世豪)는 청홍상도(淸洪上道)에 있으면서 서울의 위급에 대비하게 함이 어떻겠습니까?

이덕견의 일은 정해진 군법(軍法)이 있으니 마땅히 그 율(律)대로 해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잠시 왜적들의 마음을 달래며 구원할 군사가 모두 모이기를 기다려야 한다면, 마땅히 순찰사(巡察使)에게 비밀히 유시(諭示)하여 아직은 이덕견을 가두어 두게 해야 합니다."

하니, 다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2책 18권 42장 A면【국편영인본】 20책 272면
  • 【분류】
    정론(政論) / 군사-군정(軍政) / 외교-왜(倭) / 사상-불교(佛敎)

    ○命召三公及六卿、備邊司, 會于賓廳。 傳曰: "近來邊將, 撫禦失宜, 以致北鄙之變; 朝廷待夷頗輕, 又貽南方之患。 今觀啓本, 【金澍啓本云: "倭人謂李德堅曰: ‘汝國與我等相交甚厚, 近來三四年間, 多殺我國無罪之人, 今爲仇讎’ 云。"】倭寇結怨已久, 欲爲復讎, 大擧而來。 至發要到京城之語, 恐動我國。 國家之辱, 莫大於此。 更加廣議, 多發精兵, 期於勦滅也。 京師, 根本之地, 而堂上武臣, 無可用之人, 亦爲可慮。 昨日弘文館條陳及諫院所啓僧軍抄出事, 速爲措置。 國値厄運, 致有今日之患, 自上憂慮罔極。 自今以後, 卿等早仕晩罷, 常在闕中, 以畫籌策可也。 且李德堅, 義不可辱, 守死不屈, 爲正也, 而竟偸生以還, 此必倭寇, 以德堅爲使, 而欲得其軍糧耳。 近年以來, 船過海者, 輒擊而殺之, 其怨深矣, 故邊警至此。 此不可以常例處之。 且以對馬島主書契觀之, 馬島亦未必不知也。" 沈連源等啓曰: "上敎至當。 觀此書契, 則安有如是之辱乎? 其中有稍解我國言語者云, 此必往來我國之, 亦非馬島之所不知也。 德堅之生還, 雖由於哀乞, 而倭人亦欲通其言語, 故使之出送耳。 且其書契, 要到京師官家等語, 皆中原所用語也。 今之來寇者, 亦必有中國之人也。 不然則此, 必慣行中國者也。 且倭人不奉嘉靖年號, 而今稱嘉靖三十四年, 尤可疑也。 且弘文館條陳之策, 皆爲至當。 僧軍抄發事, 備邊司曾欲啓之矣。 前朝之季, 調發大軍, 亦令僧人, 持長斧大挺, 以赴戰場。 僧軍雖無弓馬之才, 而擇其壯建者, 則豈無可用者乎? 但勿令兩宗抄發, 使守令抄發何如? 且使臣民, 陳達謀策, 各盡所懷, 百僚擧爾所知, 使無遺材, 亦至當之論也。 且慶尙左道防禦使金世澣, 今日已就道矣。 然左道無島嶼, 倭寇難接, 而又無聲息, 防禦之急, 比他道爲歇, 而船之來, 自全羅淸洪, 其勢甚易, 自淸洪入畿甸, 其路不遠。 請令世澣, 毋往慶尙道, 歸淸洪下道, 鎭于舒川浦, 一以救全羅之急, 一以備下道之寇。 且令張世豪, 在淸洪上道, 以備京師之緩急何如? 且李德堅事, 自有軍法, 當依其律, 然若姑緩倭賊之心, 以待援兵之盡赴, 則宜密諭巡察使, 姑囚德堅也。" 答曰: "皆如啓。"


    • 【태백산사고본】 12책 18권 42장 A면【국편영인본】 20책 272면
    • 【분류】
      정론(政論) / 군사-군정(軍政) / 외교-왜(倭) / 사상-불교(佛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