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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실록 17권, 명종 9년 9월 27일 을축 1번째기사 1554년 명 가정(嘉靖) 33년

총부를 폐출시키지 말고 봉사하게 해줄 것을 헌부가 아뢰다

헌부가 아리기를,

"우리 나라는 멀리 처해 있고 땅도 달라 풍기(風氣)가 같지 않기 때문에, 삼강 오상은 비록 중국과 다름이 없지만 그 사이의 제도와 문물은 중국과 다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이러므로 사족 제도는 중국에는 없는데 우리 나라에는 있고, 노비에 관한 법도 중국에는 없지만 우리 나라에는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족을 폐할 수 있고 노비를 없앨 수 있겠습니까? 지어미가 지아비의 집으로 가는 것이 순례(順禮)인데 우리 나라에서는 지아비가 지어미의 집으로 갑니다. 무덤을 지키며 여묘(廬墓)사는 것은 옛적부터 하던 것이 아닌데 우리 나라에서는 3년을 여묘삽니다. 그렇다면 친영(親迎)을 복구할 수 있고 여묘를 폐할 수 있겠습니까? 이 같은 일들이 한 가지 뿐만이 아닌데 어떻게 한결같이 중국의 제도를 따를 수 있겠습니까?

신들이 예문(禮文)을 고찰해 보니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을 주인이라 하고 주인의 아내를 주부라고 했는데, 주부는 곧 총부(冢婦)입니다. 이로 본다면 지아비가 죽었는데 아들이 없으면 그 아내를 총부라고 이를 수 없음이 분명하니, 예관(禮官)들이 경(經)에 의거하여 의정한 것이 합당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중국과 같지 않습니다. 중국에는 대종법(大宗法)이란 것이 있기 때문에 지아비가 죽고 아들이 없는 지어미는 제사를 주관할 수가 없지마는, 우리 나라에서는 대종법이 오래전부터 세상에 행해지지 않았습니다. 장자(長子)의 아내로서 지아비가 죽고 아들이 없는 사람도 봉사(奉祀)할 집에 들어가서 살며 그 선대의 제사를 주관해 온 지가 오래이기 때문에 그의 직분이 또한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조종조 이래로 성군과 현상(賢相)이 적지 않았지만 총부가 제사 주관하는 것에 일찍이 이의(異議)가 없었습니다.

근년에 와서는 더러는 옳다 하고 더러는 옳지 않다 하다가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예전의 예를 고치기 시작하여, 아들이 없는 형의 아내가 하루아침에 내침을 당하여 들판에서 울부짖게 되고, 그의 아우는 자기 형의 죽음을 다행으로 여기고 또 형이 아들 없는 것도 다행으로 여겨 형의 집을 빼앗고 형의 아내를 내치고서 희희낙락하며 도리어 즐겁게 여기고 있으니, 인정으로 헤아려 보건대 지극히 패려한 일입니다. 지금 논자들의 말이 ‘형의 아내는 진실로 내쳐서는 안 되고 아우가 마땅히 형의 아내와 한집에서 같이 살며 봉사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 말이 비록 이치에 가까운 듯하기는 하지만, 중국에서는 그렇게 할 수가 있어도 우리 나라에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중국의 집 짓는 제도는 각각 일조(一照)로 하기 때문에 단지 형제간뿐 아니라 8∼9대까지도 함께 사는 사람이 있지만 우리 나라는 비록 큰 집이라 하더라도 모두 일조로 하기 때문에 비록 형제간이라 하더라도 함께 살 수 없는 형편입니다. 더구나 노비들도 각각 스스로 편을 갈라서 서로들 말을 만들어 끊임없이 싸우기 때문에 비록 형제간에 함께 살려고 해도 그 형제의 아내들이 서로 화목하지 못하여 재산을 나누게 되는데, 더구나 숙질(叔姪) 사이이겠습니까?

지금 논자들의 말이 ‘비록 총부가 제사를 주관할 수 있다 하지만, 신주(神主) 한쪽에 총부의 이름을 쓸 수는 없으니, 이미 총부의 이름을 쓸 수 없고 보면 부득이 응당 봉사해야 할 유자(猶子)181) 의 이름을 써야 한다. 이미 유자의 이름으로 봉사하면서 그의 숙부의 아내로 제사를 주관하게 한다면 명칭이 올바르지 못하니 총부를 폐하지 않을 수 없다.’ 합니다. 이 말도 비록 근리한 듯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신들이 《주자대전(朱子大典)》을 고찰해 보건대 진명중(陳明中)의 물음에 답한 말에 ‘무릇 아내의 상사에는 지아비가 으레 상주가 되는 법이니, 지금 아들로 상주를 삼는 것은 미안한 듯하다. 또 봉사하는 사람의 이름은 쓰지 않아도 된다.’고 했습니다. 이로 본다면 총부가 제사를 주관할 때는 우선 봉사하는 사람의 이름을 빼놓아도 안 될 것이 없겠습니다.

대저 우리 나라의 과부 대접하는 법은 엄격하고도 세밀하다 하겠습니다. 성인(聖人)들이 출모(出母)182) ·가모(嫁母)183) 의 법을 세워 놓았기 때문에 선현의 어머니 중에도 딴 사람에게 재가한 이가 있었는데, 우리 나라는 재가의 금법을 세워 놓았기 때문에 종신토록 수절하느라 비록 나이 20이 못되고 기한(飢寒)이 절박해도 감히 마음을 바꾸지 못합니다. 천하에 호소할 데 없이 가련한 사람으로는 과부보다 더한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지아비가 죽어 버려 이미 불행하게 되고 아들도 없어 더 불행한데 조금 위로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봉사할 가사(家舍)가 있어 자신의 몸을 의지하고 봉사할 전민(田民)이 있어 자신의 목숨을 살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또 폐출(廢黜)하는 법을 만들어 놓아 고생길 속에서 굶어 죽게 되었으니, 길을 가는 사람도 오히려 마음이 움직일텐데 하물며 그의 아우와 조카로 하여금 버젓이 그의 집에 들어가 핍박하여 내쫓게 할 일이겠습니까. 신들은 이 법이 과연 인정과 천리에 맞는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지금 거가대족(巨家大族) 중에 총부가 제사를 주관하며 봉사하는 집에 들어가 편하게 살고 있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닌데 하루아침에 법을 세워 갑자기 내치게 한다면 장차 울부짖는 소리가 잇달아 일어날 것이고, 야박한 풍조와 잔인한 습속이 반드시 날로 성해지고 달로 더해갈 것이니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조종조에는 인심이 순후하고 사습(士習)이 겸양하여, 비록 국가에서 법을 세운 일이라 하더라도 혹시라도 경쟁하는 일에 관계되거나 경박한 짓에 가까우면 사람들이 하지 않았기 때문에, 풍습이 맑고 세속이 아름다와 조야(朝野)가 안정되었습니다. 근년 이래로 흉년이 거듭되어 몸에 기한이 절박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노릴 만한 길이 있으면 곧 차지하려는 계책을 마련하여, 아우로서 형을 모해하고 조카가 숙부를 간범하니 혼란스럽고 야박함이 이미 극도에 달했는데, 이번에 또 이런 법을 세워 악을 권장하는 것은 지못 경쟁을 없애고 풍속을 순후하게 만드는 일이 아닙니다.

또 해조는 장자가 제사를 받들게 되지 못하고 죽었다면 그의 아내를 총부라 할 수 없다고 했는데, 옛 예문을 고찰해 보면 과연 합당합니다. 다만 우리 나라 풍속은 장자의 아내를 총부로 삼아온 지 오래인데, 이제 와서 구별할 수 있겠습니까? 총부가 혹시 기한(飢寒)을 핑계로 봉사하는 물건을 방매(放賣)하여 신주(神主)를 의탁할 데 없게 만든다면 해조가 진달한 말이 지극히 합당합니다. 그러나 이는 《대전(大典)》의 ‘봉사하는 가사(家舍)는 제사를 주관하는 자손에게 전한다.’는 조항을 신명하여 금하면 됩니다. 어찌 이 때문에 총부에 관한 법까지 아울러 폐지할 수 있겠습니까.

공자가 ‘마면(麻冕)이 예인데 지금은 생사(生絲)로 하니 검소하다. 나는 대중이 하는 대로 따르겠다.’ 했는데, 정이(程頤)의 주해에 ‘의리에 해로울 것이 없는 일은 세속대로 하는 것이 가하다.’고 했습니다. 지금 이 총부에 관한 법도 의리에 해롭지 않으니 세속대로 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그러나 의논이 같지 않아서 귀일시켜야 하니 2품 이상 및 육조의 당상과 홍문관의 장관과 의논하여 분분한 의논이 정해지도록 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2책 17권 44장 A면【국편영인본】 20책 235면
  • 【분류】
    풍속-예속(禮俗) / 사법-법제(法制) / 가족(家族) / 외교-명(明)

  • [註 181]
    유자(猶子) : 조카.
  • [註 182]
    출모(出母) : 아버지와 이혼한 생모.
  • [註 183]
    가모(嫁母) : 개가한 어머니.

○乙丑/憲府啓曰: "竊觀我國邈處, 土地旣異, 風氣不同, 故三綱五常, 雖無異於中國, 而其間制度文爲, 則有不得不異於中國者矣。 是以士族之制, 中國則無之, 而我國則有焉; 奴婢之法, 中國則無之, 而我國則有焉。 然則士族可廢, 而奴婢可無乎? 婦歸夫家, 順禮也, 而我國則夫歸婦家; 守墳居廬, 非古也, 而我國則居廬三年。 然則親迎可復, 而居廬可廢乎? 如此之事, 不一而足, 則豈能一從中國之制乎? 臣等考禮文, 則主祭者謂之主人, 主人之妻, 謂之主婦, 主婦卽冢婦也。 以此見之, 夫亡而無子, 則其妻不可謂之冢婦也明矣。 禮官之據經議定, 可謂當矣。 然我國則與中國不同, 中國則有大宗之法, 故夫亡無子之婦, 不得主祭矣, 我國則大宗之法, 不行於世久矣。 長子之妻, 夫死無子者, 入居奉祀之家, 主其先世之祭, 其來已久, 故其分亦定。 自祖宗朝以來, 聖君賢相, 不爲不多, 而冢婦主祭, 未嘗有異議。 至于近年, 或可或否, 至于今日, 創改舊例, 使無子兄妻, 一朝見黜, 號泣于野, 而爲其弟者, 幸其兄之死, 又幸兄之無子, 奪兄之家, 黜兄之妻, 談笑嬉娛, 而反自樂焉。 揆之人情, 極爲悖戾。 今之議者曰: ‘兄妻固不可黜, 則弟當與兄妻同居一家, 以奉祭祀’ 云。 此言雖似近理, 然用之中國則可也, 用之於我國則不可也。 夫中國, 造家之制, 各爲一照, 故非徒兄弟, 至於八九代同居者有之, 我國則雖大家, 皆爲一照, 故雖兄弟, 不得同居, 其勢然也。 況有奴婢之輩, 各自分邊, 互相造言, 鬪狠不已, 故兄弟雖欲同居, 而兄第之妻, 不能相和, 必至於分産。 況叔姪之間乎? 今之議者曰: ‘冢婦雖曰可以主祭, 然神主之傍, 不可書冢婦之名, 旣不可書冢婦之名, 則不得不以猶子之應奉祀者, 書其名矣。 旣以猶子之名, 書奉祀, 而使其叔妻主祭, 則其名不正, 不可不廢冢婦’ 云。 此言雖似近理, 然臣等考《朱子大全》陳明仲之問曰: ‘凡妻之喪也, 夫自爲主, 今以子爲喪主, 似未安。 且不須題奉祀之名, 亦得’ 云。 以此見之, 冢婦主祭之時, 姑闕奉祀之名, 未爲不可矣。 大抵我國之法, 待寡婦可謂嚴且密矣。 聖人立出母、嫁母之制, 故先賢之母, 亦有再適於人者, 而我國則立再嫁之禁, 故守一終身, 雖年未二十, 饑寒切身, 不敢改志。 天下之無告而可憐者, 孰有過於寡婦者乎? 夫亡旣不幸, 無子又不幸, 所可小慰者, 祗有奉祀家舍, 以庇其身, 奉祀田民, 以活其命, 而今者又爲廢黜之法, 而窮蹙之路, 有餓莩, 行者尙爲之動心。 況使其弟其姪, 偃然入室而迫黜之乎? 臣等未知此法, 果合於人情、天理也。 今之巨家大族, 冢婦主祭, 安然入居奉祀之家者, 非止一二, 而一朝立法, 遽令迫黜, 將見哭泣之聲, 相繼而起。 淆薄之風, 殘忍之俗, 必日盛而月增矣, 豈不寒心? 在祖宗朝, 人心淳厚, 士習謙讓, 雖國家立法之事, 而苟或涉於爭競, 近於偸薄, 則人不爲之, 故風淸俗美, 朝野安靜矣。 自近年以來, 饑饉荐臻, 飢寒切身, 故小有可窺之路, 便生欲得之計, 弟而謀兄, 姪而干叔, 淆漓薄惡, 已(去)〔云〕 極矣。 而今者又立此法, 以勸其惡, 殊非所以去爭競厚風俗也。 且該曹以爲, 爲長子者不得奉祀而死, 則其妻不可謂之冢婦云。 考之古禮, 果爲當然, 但我國之俗, 以長子之妻爲冢婦者久矣, 今可區而別之乎? 至於冢妻, 或有托稱飢寒, 放賣奉祀之物, 使其神主, 無所依托, 則該曹所陳, 極爲切當, 然此則可以申明《大典》, 奉祀家舍, 傳於主祭子孫之條, 而禁之矣。 安可以此而竝與冢婦之法而廢之乎? 孔子曰: ‘麻冕, 禮也, 今也純, 儉, 吾從衆。’ 程頤註之曰: ‘事之無害於義者, 從俗可也’ 云。 今此冡婦之法, 不害於義, 則從俗似當。 然議論不同, 不可不歸一, 請議于二品以上及六曹堂上、弘文館長官, 以定紛紜之議。" 答曰: "如啓。"


  • 【태백산사고본】 12책 17권 44장 A면【국편영인본】 20책 235면
  • 【분류】
    풍속-예속(禮俗) / 사법-법제(法制) / 가족(家族) / 외교-명(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