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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실록 16권, 명종 9년 5월 19일 무오 1번째기사 1554년 명 가정(嘉靖) 33년

조강에 나아가 영경연사 윤개 등과 정사에 관하여 논의하다

상이 조강에 나아갔다. 영경연사(領經筵事) 윤개(尹漑)가 아뢰기를,

"태자(太子)가 태어나면 예(禮)로써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유사(有司)가 단면(端冕)을 입고 남교(南郊)에서 뵙고 궁궐 앞을 지날 때는 말에서 내리며 종묘(宗廟) 앞을 지날 적에 추창(趨蹌)해 가는 것은 예양(預養)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나라 조정에 있어서 신이 직접 본 바로 이야기하자면 인종 대왕(仁宗大王)이 4살 때 중종께서는 노성(老成)한 재상 3∼4인을 특별히 가려 때때로 그 노는 모양을 관찰해서 그에 대한 소견을 보고하게 하셨습니다. 당시에 저는 사관(史官)으로 있었기 때문에 그 일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습니다. 인종이 동궁(東宮)에 계실 때 인효(仁孝)하신 덕은 상하(上下)에 소문이 났었고 즉위하신 뒤에도 세월이 오래되지는 않았으나 일동 일정에 인심이 흡족하게 여겨 복종하였는데 이것이 비록 성질(聖質)이 생지(生知)에 가깝기 때문이기도 하겠으나 어찌 보양(保養)한 공이 없이 그러했겠습니까.

지금 원자(元子)가 4살입니다. 들으니 지금 말을 배운다고 하는데 조호(調護)하고 교도(敎導)하는 일에 있어서는 상께서 이르지 않는 것이 없이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유년하셔서 그 때에 맞게 하시면 다행이겠습니다. 그리고 보양하는 방법은 멀리 고사(故事)를 인용할 필요도 없이 중종께서 인종을 보양하시던 가법(家法)을 본받으면 되겠습니다.

이러한 일은 반드시 신의 말을 기다리지 않아도 궁안에서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이미 오래되고 옛사람들이 모두 죽었으므로 아는 것이 자세하지 못할까 염려되고 외정(外廷)의 신료(臣僚)들은 옛일을 알지 못하며 또한 이 일을 위해 말씀드리는 사람이 없기에 감히 여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뢴 뜻이 지당하다. 원자를 일찍 교육하는 일에 대해 어찌 생각하지 않겠는가. 서서히 살펴서 할 것이다."

사신은 논한다. 《주역(周易)》에 ‘어릴 적에 정심(正心)을 기르는 것이 성인이 되는 일이다.’ 하였다. 세자(世子)는 나라의 근본이니 올바로 기르지 않으면 안 된다. 반드시 어릴 때에 정심을 기른 다음에야 성공(聖功)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당시 이와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윤개만이 이 말을 하였으니 그 또한 근본되는 바를 안 것이다.

하였다. 대사간(大司諫) 정유(鄭裕)가 아뢰기를,

"요즘 가장 낭비가 심한 것은 내원당(內願堂)입니다. 내원당의 수효가 3∼4백에 이른다고 합니다. 한번 원당(願堂)의 이름이 붙여지면 그 위세를 빙자하여 민폐를 일으키는 것에 대해서는 이루 기록할 수 없을 지경입니다.

그래서 인심은 분울해 하고 외간에서는 대간의 책임이라고 하면서 ‘그 해를 전부 제거하지는 못할지라도 상께 아뢰어 점차로 줄일 수는 있을 것이다.’라고 합니다. 대간에서 이를 간하게 되면 어떤 것은 혁파하고 어떤 것은 혁파하지 않을 수 없어 부득이 사찰을 모두 헐고 아울러 양종(兩宗)065) 을 혁파하는 일까지를 아뢴 연후에야 사체(事體)가 명정(明正)하여 사의(事宜)를 얻을 것입니다. 이러한 터에 상께서 홀로 결단하지 못하시고 견제되는 바가 있어 흔쾌히 따르지 않으신다면 소신(小臣)은 간하지 않았다는 책망은 면할 것이나, 간언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름이 도리어 상께 돌아갈 것이니, 책임을 면하고 상께 누를 돌리는 것은 신은 차마 하지 못하겠습니다. 이 때문에 매양 천청(天聽)을 어지럽힐 생각을 하다가 끝내 감히 하지 못하니 참으로 입으로 말하려다 어물거리기만 한다는 격입니다.

이미 헐렸던 사찰 중에 다시 세운 것들을 예전대로 철저하게 혁파하면 매우 좋겠습니다. 현재 있는 것이 3∼4백 여나 되는데 이를 장차 어디에 쓸 것입니까. 신들이 생각하기엔 모두 혁파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아래에서 아뢰기를 기다리지 말고 성단(聖斷)을 내려 10군데 중 한두 군데만 남겨 놓으면 될 것 같습니다. 10군데 중에 한 군데만 남겨놓아도 원당이 40여 개입니다. 이제 시비를 잘 헤아려서 적절히 처리하시면 위로는 자전의 뜻을 어기지 않고 아래로는 신민(臣民)의 마음을 통쾌하게 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상께서 이와 반대로 하시기 때문에 근일 내원당은 제맘먹은 대로 행하고 위복(威福)의 일을 서슴없이 하므로 범람한 폐가 많이 있습니다. 성영(成英)의 사건에 대해 신은 그 시말을 알지 못하나 여러 사람들의 의논이 모두 상께서 이류(異類)066) 를 비호하고 계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비록 이류라 해도 함부로 형을 가해서는 안 된다.’고 전교하셨으니, 이것은 참으로 호생(好生)하는 훌륭한 마음입니다. 그러나 외간의 말이 이 지경이니 성명(聖明)한 시대에 어찌 아래에 있는 자로 하여금 불신(不信)하는 마음을 갖게 할 수 있겠습니까. 내원당을 알맞게 줄이시면 백성들은 모두 성상께서 점차로 깨닫는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원당은 이단(異端)을 숭상하여 믿으려는 것이 아니라 그 유래가 오래된 것이다. 당초에 양종을 설치할 때 정한 수가 있었으니 그 수는 의당 많을 것이나 따로 낭비가 있는지는 알지 못하겠다.

성영의 일은 아래에서는 내가 중들을 잘못 비호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나 가령 감사에게 보고하여 법에 의해 죄를 다스렸더라도 반드시 죽음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인데 불법으로 곤장을 쓴 까닭에 그 폐를 바로잡으려 한 것이다."

하였다. 윤개가 아뢰기를,

"전일 호조(戶曹)의 비모 공사(費耗公事)에 대해서 신은 자세히 보지 못하였습니다마는 환자(還上)를 거두어들이고 나누어주는 것은 온 나라에 실시되고 있는 법입니다. 비모가 비록 회계(會計)에는 들어 있지 않으나 이는 바로 백성의 재물이요 나라의 물건인데, 수령이 이를 사사로이 자기 것으로 여겨 남에게 주기도 하고 제 주머니에 넣기도 하는 것은 매우 잘못입니다. 그러므로 경연 석상에서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호조가 이것으로 인하여 공사를 만들고 10분의 1로 회계하여 다른 창고에 옮겨 놓고는 만약 수령이 절용(節用)하여 쌀 1만 석을 채워놓으면 논상(論賞)한다는 일로 외방(外方)에 행이(行移)하였다 합니다. 무릇 비모의 율(率)은 한 말에 한 되이기 때문에 10석(石)의 비모는 1석이 되는데, 이 한 되의 쌀이 얼마 안 되는 것이기는 하나 이것을 백성들에게서 더 거두게 한다면 피해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만약 수령들에게 비모를 쓰지 못하게 하고 10분의 1을 회계하여 다른 창고에 옮겨놓게 하고 그 수를 채운 사람에게 차례로 논상한다면 법도를 잘 지켜서 청간(淸簡)하다고 불릴 수령이 몇 명이나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고을을 일일이 모두 가릴 수도 없으니 이 징렴(徵斂)으로 인하여 반드시 외람한 폐가 많을 것입니다. 또한 수령의 용도(用度)는 비모에만 있는데 이를 자용(自用)할 수 없게 한다면 비록 둔전(屯田)이 있다고는 하나 사객(使客) 하나를 접대하는 데 드는 비용도 못됩니다. 그리고 전에는 거두지 않았으나 다시 회계(會計), 논상하는 까닭에 힘써 저축하려면 부득이 많이 거두어들여야 하므로 어떤 사람은 명목(名目)을 교묘하게 만들어서 부과하여 거두어들이기도 할 것이니, 신은 국가에는 보탬이 되지 않고 백성들에게 폐만 끼치게 될까 걱정스럽습니다.

옛사람의 말에 ‘세금을 가볍게 해주려는 목적으로 법을 만들어도 그 폐해는 오히려 탐하는 데로 흐른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만약 이와 같이 한다면 수령은 이미 자뢰할 바가 없는데 또한 논상을 요하여 공적과 재능을 자랑하려고 횡렴(橫斂)을 무겁게 가할 것이니 백성들이 받는 폐해가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상께서 새로운 예를 만들어 지방에 전해 시행하게 하시니, 이는 관리에게 후렴(厚斂)하도록 가르치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청명한 세상에 이와 같은 일을 하여 후세에 취법(取法)할 바가 없게 해서는 안 됩니다.

현명한 수령은 그 비용을 절약하고 낭비하지 않아서 저축이 풍부하므로 손모(損耗)를 채우고 남은 수로는 백성들의 지난해 환자에 충당하여 백성들이 실질적인 은혜를 입는다고 합니다. 궁한 백성이 부조(父祖)의 포흠(逋欠)067) 을 면제받는 것이 어찌 우연이겠습니까. 이러한 수령이 논의에 오르게 될 때 상께서 이를 아름답게 여기신다면 비록 논상하지 않더라도 사람마다 모두 기꺼이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낭비하여 남에게 주기도 하고 제 창고에 넣기도 하는 자는 저절로 그 죄가 있는 것인데 따로 논상하는 법을 만들어 축적하게 만드는 것은 매우 구차스럽습니다."

하고, 특진관(特進官) 성세장(成世章)이 아뢰기를,

"전일 본조(本曹)가 공사를 만들 때 전라·경상 두 도는 본래 풍요한 지방으로 이제 한 해의 흉년을 당하고도 굶주린 백성을 살릴 만한 저축이 없다고 하니, 의논하는 사람들은 ‘모두 수령이 사용(私用)으로 낭비하여 이와 같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논의가 일어난 것인데, 대체로 뒷폐단을 막으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호조 판서(戶曹判書) 조사수(趙士秀)가 경연 석상에서 아뢴 것입니다. 신도 그 공사를 만들 적에 참판(參判)으로 참여하였는데 그 일이 옳지 않은 줄 알면서 부득이한 것이었습니다.

지금 열읍(列邑)에는 창고에 남아 있는 곡식이 없고 민간에 흩어져 있는 것은 많습니다. 흩어져 있는 것은 세력 있는 집들뿐만 아니라 가난하고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에게까지 있습니다. 그들은 곡식을 나누어 줄 때에는 앞다투어 환곡을 받아 먹고는 그것을 도로 거두어들일 때가 되면 이웃 고을로 도망하여 호수(戶數)를 없애고 갚지 않아 일족(一族)과 이웃들이 모두 피해를 받습니다. 그리고 수령은 해유(解由)하는 것을 선무로 삼으니 누가 힘써 거두어들이지 않겠습니까. 1만 석의 비모는 1천 석뿐인데 어찌 10만 석을 출납하는 고을이 있겠습니까. 10분의 1이라고는 하나 결국은 실속없는 일이 될 것이니, 국가엔 무익하면서 무거운 부렴(賦斂)을 멋대로 거두는 단서가 이로 인해 불어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모에 대해서는 논의가 매우 많다. 현재 우리 나라는 고식적인 계책으로 입법한 것이 또한 많다. 해마다 흉년이 들었는데 경상·전라 두 도는 더욱 심하여 백성들은 생활의 터전을 잃고 떠돌아다니고 있다. 그런데 수령들은 국고의 비축을 사사로이 낭비하며 이들을 구제하지 않고 있으니, 경연 석상에서의 논의가 잘못된 것이 아니며 호조(戶曹)가 이 때문에 공사(公事)를 만든 것이다. 위에서 다시 생각해보니 이법을 만들더라도 지금처럼 공(公)을 빙자해서 사(私)를 경영하는 때에 만약 비모를 회계한다면 백성이 폐를 많이 받을 것이다. 나라에는 보탬이 없고 백성에게는 해가 될 것이니 실시해서는 안 될 듯하다."

사신은 논한다. 비모를 회계하고 논상한다는 것에 대해 성세장이 이와 같이 의논했으니 그 폐단을 깊이 알았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이미 그 불가함을 알았다면 마땅히 조사수가 입법할 때 반대했어야 했는데 힘써 따르고만 았다가 윤개가 발언한 뒤에 이르러서야 말을 같이 하여 바로잡았으니 과연 자기 주장을 세워 남의 말에 흔들리지 않는 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니, 전교하기를,

"비모에 관한 일은 우상이 이미 경석(經席)에서 말하였으나 영상과 좌상의 뜻을 알 수 없으니, 사관(史官)을 보내어 의논하게 하라."

하였다. 영의정 심연원이 의논드리기를.

"이 몇 해 동안 오곡이 여물지 않고 창고에 저축해 놓은 곡식이 적어 흉년을 만나 진구(賑救)할 때가 되면 매양 곡식이 적어 고루 나누어주지 못하는 것을 걱정해 왔습니다. 이 때문에 호조에서 비모를 저축하기 위하여 회계에 가록(加錄)하자는 의논을 내었으니 이는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이 법을 한번 세우고 나면 백성들이 그 폐를 받는다는 것이 반드시 경석에서 아뢴 뜻과 같을 것입니다. 만약 법이 세워지면 폐가 생긴다는 것을 안다면 법을 세우지 않는 것이 더 낫습니다. 간혹 현명한 수령이 있어 절용(節用)하고 쓸데없이 낭비하지 않아 저절로 여축이 있게 한다면 입법하지 않아도 능히 지난해의 결손을 충당하여 백성들이 실질적인 혜택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회계에 가록하여 논상하는 등의 일에 대해서 신은 실행하기 어려운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였다. 좌의정 상진(尙震)의 의견도 대략 같았는데, 전교하기를,

"이제 삼공(三公)의 의논을 보니 대체로 모두 같다. 앞서의 공사는 쓰지 않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1책 16권 42장 B면【국편영인본】 20책 198면
  • 【분류】
    구휼(救恤)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관리(管理) / 왕실-경연(經筵) / 왕실-종사(宗社) / 역사-사학(史學) / 정론(政論) / 사상-불교(佛敎) / 사법(司法) / 재정-국용(國用) / 재정-창고(倉庫)

  • [註 065]
    양종(兩宗) : 선종(禪宗)·교종(敎宗).
  • [註 066]
    이류(異類) : 여기서는 중을 말함.
  • [註 067]
    포흠(逋欠) : 조세를 바치지 않는 것.

○戊午/上御朝講。 領經筵事尹漑曰: "太子初生, 不可不敎之以禮也。 故有司端冕, 見之南郊, 過闕則下, 過廟則趨, 所以預養也。 以國朝之聞見所及者言之, 則仁宗大王, 自四歲時, 中廟別選老成宰相三四人, 使之時時觀其戲嬉之事, 必俱以所見來啓。 當時臣爲史官, 故備詳其事。 仁宗在東宮時, 仁孝之德, 著聞于上下, 卽位之後, 月日未久, 而一靜一動, 人心翕服。 是雖聖質, 近於生知, 豈無保養之功乎? 今元子四歲矣。 聞之, 時方學語云。 調護敎導之事, 自上宜無所不至, 然常常留念, 以及其時幸甚。 且保養之道, 不必遠引故事, 宜以中廟保養仁宗之家法, 爲法也。 如此之事, 宮殿之中, 必不待臣言而知之。 然歲月已深, 舊人皆逝, 恐知之未及其詳也。 外廷臣僚, 未知故事, 亦無有爲此言者, 故敢啓。" 上曰: "啓意當矣。 早養元子, 予豈不念? 徐當察而爲之。"

【史臣曰: "《易》稱 ‘蒙以養正, 聖功也。’ 夫世子, 國本, 不可不養也。 必養正於蒙, 然後聖功可期。 當時未有爲此言者, 而獨言之, 其亦知所本哉!"】

大司諫鄭裕曰: "今之浮費之事, 其中最甚者, 內願堂也。 願堂之數, 至於三四百云。 一加願臺之名, 則憑恃威勢, 作爲民弊者, 不可選記。 以此人心憤鬱, 外間以爲臺諫之責, 而曰: ‘雖不盡祛其害, 亦可陳啓而漸省也。’ 若臺諫諫之, 則不可使之或革或否, 不得已以盡毁寺刹, 竝革兩宗事啓之, 然後事體明正而得宜矣。 如是而自上若不能獨斷, 有所牽制, 而不爲快從, 則小臣免不諫之責, 而拒諫之名, 反歸於上矣。 免責而歸累於上, 臣不忍爲也。 以此每懷上瀆天聽, 而終莫之敢, 眞所謂口將言而囁嚅者也。 凡寺刹已毁而復立者, 如古痛革, 則大善矣。 今之存者, 至於三四百餘之多, 此將何所用乎? 臣等以爲, 雖不盡革, 不待群下之啓, 而發〔自〕 聖斷, 十存一二可也。 十存其一, 猶爲四十餘願堂矣。 今宜酌量是非, 處得其道, 則上不違慈旨, 下足以快臣民之心矣。 自上所爲如彼, 故近日內願堂, 行胸臆作威福, 多有汎濫之弊。 而成英之事, 臣不知首末, 衆議皆以爲自上庇護異類, 而敎之曰: ‘雖異類, 不可濫刑。’ 是誠好生之盛心也, 然外間之言, 至於如此, 聖明之時, 豈可使在下者, 有不信之心乎? 請內願堂, 隨宜減革, 則人皆知聖上漸有覺悟之心也。" 上曰: "內願堂, 非崇信異端, 其來已久。 當初設兩宗有定數, 其數宜多。 別有浮費, 則未可知也。 成英事, 自下以爲曲護緇流也, 假曰報監司, 若依法治罪, 則必不至死, 非法用杖, 故欲矯其弊。" 尹漑曰: "前日戶曹費耗公事, 臣不得細見之, 然還上斂散, 通國之法也。 費耗雖不付會計, 乃民之財、國之物, 而守令私之, 以爲己物, 與人入已, 至爲非矣。 故有啓於經席之上矣。 戶曹仍此爲公事, 十分之一, 會計施行, 移置別倉, 若守令能節用而充米一萬石以上, 則論賞事, 行移外方云。 凡費耗率一斗納一升, 故十石費耗爲一石矣。 一升雖少, 若令加徵於民, 則有害矣。 今若使之不得用費耗, 而十分之一施會計, 移置別倉, 能充其數者, 以次論賞, 則守令之謹守法度, 號爲淸簡者, 未知其幾人, 而許多列邑, 不可一一盡擇, 則因此徵斂, 必多猥濫之弊。 且守令用度, 只在費耗, 而不得自用, 雖有屯田, 亦不如一使客支供費用之數。 不徵於前, 而又以會計論賞之故, 而務爲儲峙, 則不得已必爲重徵, 或巧作名色, 科斂矣。 臣恐不補國家, 而流弊於百姓也。 古人有言: ‘作法於涼, 其弊猶貪。’ 今若如此, 則守令旣無所資, 又要論賞, 矜衒功能, 重加橫斂, 則民之受弊, 曷有窮哉? 自上作爲新例, 轉行外方, 是何異敎官吏爲之厚斂也? 淸明之世, 不可爲如此事, 而後世無所取法矣。 賢守令則能節其用, 不爲濫費, 而儲蓄豐富, 故以備耗餘數, 充百姓往年還上, 而民受實惠云。 窮民得免父祖之逋欠, 豈偶然哉? 如此守令, 出於論議, 自上嘉美之, 則雖不論賞, 而人皆樂爲矣。 若濫費而與人入己者, 自有其罪矣。 別立論賞之法, 使之蓄積, 甚爲苟且。" 特進官成世章曰: "前日本曹爲公事時, 以爲全羅慶尙二道, 本以富饒之地, 今値一年之凶荒, 無蓄積可活飢民, 議者皆謂: ‘守令私用濫費, 故至於如此。’ 此論遂起, 蓋欲防後日之弊, 故戶曹判書趙士秀, 於經席啓之。 而爲公事時, 臣以參判隨參, 亦知其未可, 而不得已爲之爾。 今列邑無留庫之穀, 而散在民間者多, 散在者, 非徒豪勢頑悍之家, 至於貧殘流亡之人, 當其散給之時, 則爭糶而食之, 及其還斂之日, 逃移隣邑, 或絶其戶而不糴, 一族隣保, 皆受其害。 且守令皆以解由爲急, 孰不盡力而斂之乎? 一萬石費耗一千石而已, 則安有十萬石斂散之邑乎? 雖曰十分之一, 終爲無實之事。 於國無益, 而重斂橫取之端, 由此而滋矣。" 上曰: "費耗之事, 論議甚多。 今我國以姑息之計, 立法者亦多, 連年凶荒, 慶尙全羅二道尤甚, 民生失所流離, 而守令等, 私自濫用國儲, 不爲賑救, 經席之論, 未爲非也, 戶曹以此爲公事矣。 自上更慮之, 雖爲是法, 而今乃憑公營私之時, 若以費耗會計, 則民之受弊多矣。 無補於國, 而有害於民, 恐未可行也。"

【史臣曰: "費耗會計論賞之事, 世章論之。 若是則可謂深知其弊矣。 旣知其不可, 則當爭於士秀立法之日, 而顧乃僶勉從之, 至於尹漑發言之後, 同辭以直, 果可謂能樹立不奪於他人之說者乎?"】

傳曰: "費耗事, 右相已啓於經席, 而未知領、左相之意, 遣史官議之。" 領議政沈連源議: "近歲以來, 年穀不登, 倉儲不敷, 若値凶歉賑救之時, 每患於穀少難遍, 故戶曹爲儲蓄費耗, 加錄會計之議, 此出於不得已也。 然此法一立, 民必受弊, 誠如經席啓達之意。 若知法立而弊生, 不若不立之爲愈也。 若間有賢守令, 能節用, 不爲妄費, 而自有餘儲, 則雖不立法, 可能充往年逋欠, 而使民受實惠矣。 加錄會計論賞等事, 臣意恐難行也。" 左議政尙震議略同。 傳曰: "今觀三公之議, 大抵皆同。 不用前公事可也。"


  • 【태백산사고본】 11책 16권 42장 B면【국편영인본】 20책 19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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