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 서엄이 정사에 대해 상소하다
유학(幼學) 서엄(徐崦)이 상소하였는데, 대략은 다음과 같다.
"지금 국가가 태평하고 사방에 근심이 없다고 해서 전하께서는 이를 안정되었다고 여기십니까? 또 조정이 안일하고 공경이 포열(布列)해 있다고 해서 전하께서는 이를 바르게 되었다고 여기십니까? 지금 조정은 마치 엉클어진 실 속에 파묻혀 있는 듯한데 사대부들은 조금도 염려하지 않고 있으며, 국가는 마치 파손된 배 위에 있는 듯한 판국인데 전하께서는 알지 못하고 계십니다. 신이 보건대, 오늘날의 사태는 길게 한숨쉬고 눈물을 흘리며 통곡할 여유조차 없습니다. 아아! 생민의 고통은 극도에 달하였고 공사(公私)의 저축은 모두 고갈되었습니다. 홍수와 가뭄의 재변과 굶주림의 신음소리는 해가 갈수록 더해지고, 재상들의 탐욕과 사치 및 선비들의 음탕 방종은 날이 갈수록 심해집니다. 서로 흩어진 백성은 길가에 양처럼 몰려 다니고 도적의 무리는 산골짜기에서 봉기하니, 이는 모든 상처가 곪아 터지고 토붕 와해되는 듯한 위급한 사태가 조석에 박두한 것입니다. 그런데다가 하늘이 경계를 암시하는 모든 재변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어 곡종(穀種)이 【하늘에서 곡종이 내렸으므로 말한 것이다.】 내리기까지 하니 조야(朝野)의 인심이 흉흉합니다. 또 영남의 가뭄과 호남의 풍재 및 관서의 충재 등은 근고에 없던 일이므로 인심이 크게 두려워합니다. 이뿐만아니라 요즘 또 큰 화재가 있어, 조종조로부터 2백 연간이나 전래된 궁궐이 하루밤 사이에 모두 잿더미로 변한 것은 실로 천고에 없었던 재변입니다. 아아! 국가의 위망은 여기에서 판가름납니다. 신이 비록 지극히 미천하나 대대로 국은을 입어 마음 속에 차마 넘기지 못할 안타까움이 있으므로 감히 망녕된 말을 올려 충언을 널리 구하시는 간절한 전하의 뜻에 부응하고자 하니, 전하께서는 깊이 생각하소서. 그 중에서 가장 중대한 일 몇 조항을 들어 전하를 위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재상을 선택하는 일입니다. 삼공(三公)의 자리는 임금의 팔 다리이며, 국가의 주춧돌이니 진실로 적임자가 아니라면 그 책임을 맡길 수 없습니다. 중종(中宗) 이후로는 대신의 자리에 있는 자들 중에 풍속을 돈독히 하고 조급한 풍조를 진정시키며, 조정을 바로잡고 국가를 안정되게 한 재상이 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공훈이나 문장 혹은 기능으로 녹위(祿位)만을 탐하며 아첨으로 관계(官階)를 승진하였기에, 대간(大奸)이 아니라면 반드시 대우(大愚)들이어서 마침내는 다 임시 미봉책으로 시일이나 넘겼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쌓이고 쌓여 경장(更張)과 건명(建明)을 그르다고 하고 전철을 답습하는 것을 직분으로 삼아 그럭저럭 세월이나 보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고서야 교화가 어떻게 밝아지며 기강이 어떻게 세워지겠습니까.
전하께서는 불세출의 성인으로서 큰일을 할 때를 당해서 진실로 쇠퇴해가는 국가를 일으키고 어지러워진 정사를 부식시킬 뜻이 있으시다면 반드시 도가 높고 덕이 성하며 충후하고 정직한 인재를 선택, 그에게 재상의 임무를 맡겨 교화를 밝히고 기강을 떨치는 일을 책임지우소서. 그리고 선조 때부터 공로가 있는 신하를 임금의 좌우에서 보도하게 하고 때때로 자문하여 서로 유지하도록 하면, 국가가 안정되고 조정이 바로잡히는 것은 불원간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깊이 살피소서.
둘째, 사기(士氣)를 기르는 일입니다. 대체로 선비는 국가의 근원이요, 조정의 뿌리로서 진실로 하루라도 이를 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사림(士林)의 기개가 사라지고 꺾여서, 조정에는 인재가 없고 국가는 날이 갈수록 위태롭게 되었으니, 통탄스러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사기가 꺾인 전말을 모두 말씀드리고자 하니 전하께서는 들어보소서. 무오 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면서부터 사기가 처음 꺾이기 시작, 갑자 사화(甲子士禍)에 이르러서는 모두 제거되어 한사람도 남은 선비가 없어 드디어 사기가 한번 크게 꺾이게 되었습니다. 기묘 연간에는 조광조(趙光祖)가 삼대(三代)149) 의 정치에 뜻을 두어 《소학》의 도를 제창, 장차 예양(禮讓)의 기풍을 일으키려 했으나, 경박한 무리들의 시행 착오로 마침내 사화가 일어나 당시 재능과 덕망있던 선비들이 유배를 당하거나 혹 사형을 당했습니다. 이에 지금은 《소학》을 화를 취하는 학문으로 알고, 기묘 사화 사건을 숨기기까지 하니, 이로 인하여 사기는 또 한번 크게 꺾이게 되었습니다.
김안로(金安老)가 국권을 장악하기에 이르러서는 모든 독소를 뿌려놓고 조금이라도 자기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 있으면 문득 대옥(大獄)을 일으켜 어진 선비를 귀양 보내거나 죽이고 유림을 꼼짝 못하게 하니, 드디어 사기가 또 한번 크게 꺾이게 되었습니다. 안로가 죽은 뒤 조정이 겨우 안정되어 《소학》의 도가 다시 세상을 밝히는가 했더니 갑진·을사 연간에 연소하고 경박한 무리들이 겉으로는 《소학》을 한다는 명분을 빙자하고 안으로는 음흉하고 간사한 뜻을 품고 갑자기 청현직에 올라 엉뚱한 이의를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윤임(尹任)이 또 그 틈을 타서 겉으로는 사림의 소망을 받아들이는 체하면서 속으로는 도리어 흉악한 음모를 성사시키려고 하여 서로 부화 뇌동하다가 마침내 멸족을 당하는 형벌을 받음은 물론, 조정에까지 그 화를 끼쳐서 선류(善類)들까지 함께 죽는 참사를 빚어 내어 사기가 또 한번 크게 꺾였습니다.
아아! 사기가 꺾이면 국가의 위망은 멀지 않습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후로 오도(吾道)에 뜻을 두시어 사기를 다시 일으키려고 하신 것은 훌륭한 처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적과 더불어 동모한 중은 불문에 부치고 경거 망동하다가 연루된 선비는 조옥(詔獄)에 가두었으며, 고의로 적당(賊黨)을 숨겨준 중의 죄는 사면하고 중과 다툰 선비는 곤장을 쳤으며, 사찰의 입구에는 게시판을 세워 출입을 금지하고 선비를 체포하려는 나졸들은 명륜당(明倫堂)까지 난입하게 하였습니다. 사찰에 속한 토지와 노비는 색출하여 모두 돌려주었고 양현고(養賢庫)의 어전(漁箭)은 빼앗아서 공주가(公主家)에 분급하였으며, 인종 때 다시 설치한 현량과(賢良科)는 혁파하고 중종 때 혁파된 양종과(兩宗科)150) 는 다시 부활시켰습니다. 후궁이 살 곳이라고 칭탁하고 성 안에 사찰을 지어 불사(佛事)를 숭배하는데도 시화 세풍(時和歲豊)을 위한 것이라고 권유하고, 여러 달을 항소하다가 울분을 참지 못하고 조정에서 물러나 집에 머물러 있는 선비는 왕명을 거역한다고 협박하였습니다. 중은 이처럼 후하게 대접하고 선비는 이처럼 박하게 대접하니, 사기가 어떻게 쓰러지고 꺾이지 않아 크게 무너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의 계책으로는 다시 《소학》의 가르침을 부흥하여 사기를 신장시키고 효제(孝悌)의 도를 일으키며 예양(禮讓)의 기풍을 조성하는 것만한 것이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몸소 실천하고 마음속으로 체득하시어 《소학》의 가르침을 밝혀 사림들을 도학(道學) 안에서 고무하고 용약하게 하소서. 그러면 요순 시대가 돌아와서 민심이 순후해 질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소학》을 한번 보소서. 《소학》은 국가를 그르치게 하는 글이 아닙니다. 위에서부터 실천함으로써 한 시대를 아름답게 변모시킨다면 사림의 다행은 물론, 오도(吾道)의 영광이 이보다 더 클 수 없을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깊이 살피소서.
세째, 세상에서 숭상하는 것을 바로잡는 것입니다. 사습(士習)의 맑고 흐림과 민속(民俗)의 좋고 나쁨에 치란 흥망이 달려 있는 것이니, 어찌 이를 바로잡을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의 사대부들은 어려서 과거에 합격하고 젊어서 벼슬길에 오르는 것을 영광으로 삼으며, 심지어는 문장의 잔재주로 이학(理學)의 이름을 훔쳐서 겉으로는 단정한 모습을 보이나 속으로는 탐사(貪邪)한 꾀를 써서 헛된 명예를 낚고 있습니다. 아아! 선비의 풍습이 이와 같으니 어리석은 백성들은 어떠한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계책으로는 향약법(鄕約法)을 시행하여 선비의 풍습을 돈독히 하고 민속을 후하게 하여 순후하고 화목한 기풍을 기르는 것만한 것이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향약법을 밝히게 함으로써 민속을 진흥, 온 나라의 백성들로 하여금 향약 조문을 강독하고 향약 규칙을 이행하게 하여, 예의 속에서 연마되고 훈도되게 하소서. 그러면 요순 시대를 회복하여 민심이 순후해질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향약법을 한번 읽어 보소서. 향약은 국가를 그르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위에서부터 이를 믿어서 백성을 새롭게 만든다면 국가의 복은 물론 종묘 사직의 복이 될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깊이 살피소서.
네째, 언로(言路)를 넓히는 것입니다. 신이 듣기에 ‘백성의 입을 막는 것은 흐르는 냇물을 막는 것보다 더 어려우며, 내를 다스리는 자는 막힌 곳을 터서 물을 흐르게 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자는 백성들로 하여금 말을 하게 한다.’고 합니다. 지금 국가가 위태로운 지경에 놓여 있는데도 충간하는 사람을 볼 수 없고, 가끔 국가의 폐단을 진술하는 상소가 있어도 이를 거행하는 것을 보지 못하겠으니, 이는 곧 사림에는 직언하는 기풍이 없고 전하께서 간언을 따르는 실상이 없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초에 헌납(獻納) 백인걸(白仁傑)이 감히 밀계(密啓)의 잘못됨을 논의한 것은 비록 종사(宗社)에 관계되는 일이라 감히 비난할 일이 못된다 하더라도 그의 마음은 곧은 것인데, 그를 붙잡아서 귀양보냈습니다. 전적(典籍) 양응태(梁應台)가 숭불(崇佛)의 잘못을 극언한 것은, 그것이 비록 참람에 가깝다고 하나 그 뜻은 가상한 것인데, 그 내려진 답교(答敎)에 ‘입이 있는 자마다 모두 국사를 말하면 국사는 그릇된다.’고 하시었습니다. 이후로는 충성스럽고 강개한 자도 ‘충언을 올리면 이익은 없고 오히려 해만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감히 생민을 위하여 한마디의 말도 올리지 못하며, 심지어는 간관들조차도 사사로운 원한을 갚기 위하여 논박하는 것을 일삼지 않으면, 반드시 사소한 일에 대해서만 말하면서 책임이나 메꾸고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언로를 넓게 열어 놓고 말이 비록 적중하지 않더라도 죄를 내리지 말며, 장려하고 권면하여 미천한 자들도 모두 마음속에 품고 있는 말을 다 하도록 하여 천하의 사정을 통하게 하소서. 그렇게 한다면 충성된 말이 숨겨지지 않아 조정에 민정이 차단되는 근심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임금이 비록 충간을 좋아한다는 소문이 있더라도 혹 참소와 아첨하는 말을 믿기를 전날의 간신 진복창(陳復昌)에게 대하듯이 하면 직언하는 자들이 자연히 물러갈 뿐만 아니라 간악한 자들이 날마다 일어날 것입니다. 전하께서 한쪽 말만을 믿는 잘못이 없고 양쪽 말을 겸청(兼聽)하는 총명을 가지신다면 소인은 물러가고 언로는 넓어질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깊이 살피소서.
다섯째, 탐오한 풍조를 없애는 것입니다. 신이 듣기에 탐인(貪人)은 국가를 좀먹는 좀벌레요 백성을 해치는 해충이라 하니, 국가를 좀먹고 해치는 독소라 할 수 있습니다. 김안로가 용사(用事)한 뒤로 탐욕의 기풍이 사대부들 사이에 성행하였으며 뒤이어 이기(李芑)가 흉독을 부렸지만 종사에 공로가 있다고 하여 누구 하나 감히 힐책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에 이기가 드디어 끝없는 욕심을 채우고자 갖은 못된 짓을 다하여 출척 여탈(黜陟與奪)을 뇌물의 다소에 따라 하니, 원근의 주군(州郡)에서 수레나 배로 뇌물을 운반하되 남보다 뒤질세라 두려워하였으며, 별좌(別坐)·찰방(察訪)의 벼슬값은 노비가 몇명이고, 첨사(僉使)·만호(萬戶)의 벼슬값은 면포(綿布) 몇 동에 준한다 하였습니다.
또 그 뒤를 이어서는 사악한 진복창이 전갈같은 독과 독사같은 해를 자행하여, 마치 여우가 울고 올빼미가 울듯 못되게 날뛰었습니다. 두 좀벌레가 잇달아 일어나면서 탐풍 또한 크게 일어나 공경 대부들도 버젓이 이를 본받았습니다. 대간 자리에 있으면서 방납(防納)의 권한을 요청하여 한 고을의 이득을 독점하기도 하고, 【허엽(許曄)을 가리킨 것이다.】 시종의 대열에 있으면서 쌀을 청하는 쪽지를 보내어 한 도의 모든 고을을 괴롭히기도 하며, 반인(伴人)151) 을 널리 차지하여 고을마다 각각 한명씩 두기도 하고, 상인들과 서로 결탁 각 고을에 방납을 요청하여 이익을 나누어 먹기도 하였습니다. 또 널리 연해의 각 고을에 관고(官庫)의 곡식을 내게 하여 해택(海澤)152) 을 만들기도 하고, 묵은 땅을 절수받아 각 고을로 하여금 개간 경작케 하기도 하고, 혹은 물고기나 전복(全鰒), 부채·모자 등을 거두어들여 부경통사(赴京通事)에게 주어 중국 물품으로 교환하게도 하며, 혹은 혼인으로 인하여 팔도에 청구 하기도 하고, 혹은 감사(監司)·도사(都事)가 각 고을에 분정(分定)하여 공공연하게 뇌물을 운반, 그의 친척이나 사대부 집에 보내는 자도 있습니다. 또 감사는 시(詩)를 지어 병사(兵使)·수사(水使)에게 청구하고 도사는 각 군현을 돌며 청구하여 그의 애기(愛妓)에게 주기도 하며, 혹은 감군 어사(監軍御史)·재상군적 경차관(災傷軍籍敬差官)의 직책으로 내려간 자가 공공연하게 기생을 싣고 열읍(列邑)을 돌아다니다가 뇌물을 많이 받으면 역리(驛吏)를 시켜 서울로 실어 보내는 자도 있습니다.
대체로 대간·시종에 있는 사람이거나 재상(宰相)· 【정사룡(鄭士龍)·정세호(鄭世虎)가 더욱 심했으므로 당시 사람들은 용호성쌍(龍虎成雙)이라 하였다.】 문사(文士) 【한지원(韓智源)을 가리킨다.】 의 무리가 탐오하고 방종함이 이와 같은데, 하물며 무인(武人)·음관(蔭官)이겠습니까. 자기를 잘 섬기는 자는 왜곡되게 칭찬하면서 추어 주고, 자기를 잘 섬기지 않는 자는 교묘히 헐뜯으면서 탄핵하고 논박합니다. 이 때문에 팔도에는 관고(官庫)가 충실한 고을이 한 곳도 없고, 백성은 한 집도 편안한 집이 없으니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습니까. 지금 탐풍을 방지하려면 탐욕스런 재상 한사람의 머리를 베어서 저자에 효시하여 조정의 위엄을 크게 떨치는 한편, 자질구레하게 청구하는 쪽지를 띄우는 풍습을 엄금하여 일체 못하게 한다면 아마도 탐오한 풍조가 이로 인하여 없어질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깊이 살피소서.
여섯째, 민생을 살리는 것입니다. 하훈(夏訓)153) 에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굳어야 나라가 편안하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재상과 문사들이 백성들에게서 긁어내어 자기를 살찌우는데 결국 전하께서 그 화를 받게 되는 것이니, 어찌 백성들을 살릴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생민이 고통받는 정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재상이나 문사들치고 제택(第宅)을 짓지 않는 자가 없어 수령들이 재목을 베어내어 강 가득히 띄워 보내므로 산골 백성들이 고달프며, 재상이나 문사치고 기름진 짐승 고기를 요구하지 않는 자가 없어 수령들은 날마다 수렵을 일삼으므로 산골의 백성들이 고달프며, 또 재상이나 문사치고 초피(貂皮)를 요구하지 않는 자가 없어 병사·수령·첨사(僉使)·만호(萬戶) 등이 초피 수집에 전념하고 있으므로 양계(兩界)의 백성들이 고달프며, 재상 문사치고 모시와 삼을 구하지 않는 자가 없어 수령들은 관비(官費)로 한되의 곡식을 주고 아전과 백성에게서 의례적으로 거두어들이므로 청홍(淸洪)·전라의 백성들이 고달프며, 재상이나 문사치고 명주를 요구하지 않는 자가 없어 수령들이 관곡미 몇 말을 주고 공공연하게 여염에서 거두어들이므로 황해·평안도의 백성들이 고달픕니다. 그밖에도 감사·도사·경차관·감군 어사 등은 역말에 친구나 중방 노자(中房奴子)154) 를 태우기도 하고 짐바리를 싣기도 하며, 찰방은 또 각종 차비(差備)의 명목으로 거두어들이므로 역졸이 크게 고달프며, 또 병사·수사·첨사·만호 등은 부역을 빼주는 대신 포(布)를 걷어들이고, 빠진 자 대신 배징(倍徵)하므로 수군(水軍)이 크게 고달픕니다. 백성을 괴롭히는 정사는 시행되지 않는 것이 없고 백성을 안정시킬 만한 방법은 조금도 시행되지 않으니, 백성들이 어떻게 고달프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생민이 잘 살고 못 사는 것은 수령이 현명한가의 여부에 달려 있으니, 전하께서는 수령 선택하기를 시종 선택하듯이 하시고, 수령 중히 여기기를 대간 중히 여기듯이 하소서. 음관(蔭官)·무사 중에 장차 수령이 될 사람을 차례로 불러서 활민(活民)의 요체와 치민(治民)의 방법을 물어보시고, 인품의 현부와 재질의 우열을 보아서 기용하시며, 또 2품 이상의 홍문관·양사의 관원에게 각각 수령이 될 만한 사람 3명씩을 추천하도록 하여 이들에게 수령을 제수한 후, 장오(贓汚)를 저지르거나 백성을 학대하는 자가 있으면 천거한 관원이 비록 대신이라도 그 죄로 반좌(反坐)하여 조금도 용서하지 마소서. 또 조정으로 하여금 현명한 감사를 선택케 하여 출척(黜陟)의 법을 엄하게 하소서. 그러면 생민이 혹 다시 살 수 있을 것이니, 전하께서는 깊이 살피소서.
일곱째, 사치를 금하는 것입니다. 신이 듣건대 검소는 덕의 기초이고 사치는 악을 키우는 것이라고 합니다. 선비가 사치하면 그 몸을 망치고 임금이 사치하면 그 나라를 망치니, 임금으로서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사치의 폐단을 역력히 밝히겠으니, 전하께서는 들어보소서.
의복의 사치로 말하면 재상의 의복은 임금보다 더 좋고 노복의 옷은 선비보다 사치스러우며, 서얼이 채단옷을 입는가 하면 상인이 비단옷을 입으며, 양반들은 초피(貂皮)로 만든 이엄(耳掩)이 아니면 쓰지 않고, 9품의 관원은 종립(騣笠)이 아니면 다니지 않습니다. 음식의 사치로 말하면 한 끼의 밥에 반드시 몇 가지 좋은 찬을 곁들이고, 한 상을 차리는 데 아홉 접시의 음식을 진설하며, 상제(喪祭)나 혼인(婚姻)에는 반드시 유밀과(油蜜果)를 쓰고 있습니다. 궁실의 사치로 말하면 재상의 제택이 궁궐보다 웅장하고 【심연원·윤개가 모두 대신의 반열에 있으면서 크고 좋은 저택을 지었는데, 3년 만에 겨우 끝냈고 담장과 벽은 모두 단청을 발랐다.】 장사치의 집이 벼슬아치의 집보다 더 크며, 유생으로서 과거에 마음을 둔 자는 우선 새집을 지을 계획을 하며 문사로서 반품(班品)에 오른 자는 우선 큰 집을 짓습니다. 【한지원(韓智源)이 겨우 6품에 올라 1년 만에 한 동네에 큰 집을 세 채나 지었는데 기와를 보내라는 체자(帖字)가 차고 있는 주머니에 가득하였으므로 사림들이 비루하게 여겼다.】
아아! 지력(地力)과 인력(人力)이 물건을 생성하는 데는 한계가 있는데, 헛되이 쓰는 길이 이와 같이 번잡하고서야 일국의 재력이 어찌 고갈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우선 비빈(妃嬪)·시첩(侍妾)들로 하여금 사치하고 화려한 옷을 입지 못하게 하고 왕자나 부마(駙馬)의 집에서 주옥·비단으로 장식하는 풍조를 엄하게 금하소서. 그리고 조정으로 하여금 의복 제도를 고치게 하여 선비는 관건(冠巾)·단령(團領)을 착용하게 하고 무인은 모립(毛笠)·철릭(帖裏)을 쓰게 하며, 장사치나 노예들은 모모(毛帽)·면의(綿衣)를 착용하게 하고, 농부일 경우 대립(臺笠)·포의(布衣)를 입도록 하여 문란하지 않게 함으로써 중국의 제도와 같이 하소서. 그밖에 제택과 식찬(食饌)의 품목도 상세하게 법조를 세워서 금단을 엄히 하여, 조금이라도 이를 어기는 자가 있을 경우 엄중하게 그 죄를 다스리면 사치스런 풍조가 변화될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깊이 살피소서.
여덟째, 상과 벌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임금이 시행하는 형상(刑賞)을 임금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명하고 하늘이 벌하는 것이니 쉽게 다루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날 명군은 자기 한몸의 사심을 버리고 천하의 공론에 따라 사사로운 공로에 상을 주지 않고 사사로운 원한에 벌을 주지 않았으며, 참으로 죄가 있으면 훈척(勳戚) 대신이라도 사면하지 않았고 참으로 덕행이 있으면 미록 추방된 미천한 사람이라도 버리지 않았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상을 내리는 일을 혹 가볍거나 지나치게 하고, 벌을 시행하는 법을 느슨하게 한 적이 많았으니, 상벌이 제대로 시행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공정한 마음을 가지고 꿋꿋한 덕을 발휘하시어, 큰 상으로써 사기를 용동시키고 큰 벌로써 경계하며, 친척이라 해서 봐주지 않는다면 상벌이 밝아질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깊이 살피소서.
아홉째, 사람을 신중히 쓰는 것입니다. 성주(成周) 때에는 수사(秀士)·선사(選士)·조사(造士)·진사(進士)의 순서가 있었고, 양한(兩漢) 때에는 효렴(孝廉)·현량(賢良)·방정(方正)·직언(直言)·극간(極諫)의 선발이 있었습니다. 옛날에는 인재를 선발하는 도를 그렇게 중히 여겼으므로 정치의 융성함이 그와 같이 두드러졌던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오로지 과거와 문음(門蔭)으로 인재를 뽑는 법식을 삼아서 제술(製述)·강론(講論)의 고하를 등급 매기며, 벌열(閥閱)·문지(門地)의 귀천으로 구별하고 기간(期間)만을 따져 인사 행정하며, 재덕(才德)의 현부는 묻지도 않고 서용합니다. 그러므로 문신은 교만하여 자기 뜻대로 행하고, 음관은 자격지심으로 탐욕이나 자행하니, 조정이 바르지 않음은 오로지 여기에서 말미암습니다. 문신은 그만이나, 문음취재(門蔭取才)할 때에는 청간(請簡)을 당상(堂上)이나 낭청(郞廳)에게 보내므로 단지 부형의 안부만을 물을 뿐, 문의(文義)의 여하는 강론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주의(注擬)할 때에도 오로지 재사의 청탁만을 들으니, 비록 잉첩(媵妾)의 족속이라도 선발에 참여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이 때문에 하찮은 외척의 어린 자제들까지도 조정 반열에 끼어 있고 열읍의 수령으로 나가 있으니, 국사가 날로 글러지는 것이 조금도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의 계책으로는 전의 음보(蔭保)로 취재한 것은 모두 혁파하고 다시 시취(試取)하되, 그 인원수를 정하고, 양사로 하여금 동참하게 해서 엄격하게 고강(考講)하여 통(通)·약(略)·조(粗)155) 로 나누고 주의한다면 공도(公道)가 행해지고 인재의 등용이 난잡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육경 이상 및 양사·홍문관에게 해마다 각각 사람씩 천거하게 하고, 팔도 감사도 해마다 한 사람씩 뽑아 보내게 한 후, 이조·정부·양사로 하여금 함께 선발하여 그중에 지능과 덕행이 있는 자를 채용하게 하고, 거주반좌법(擧主反坐法)156) 을 앞에서 진술한 수령천거법(守令薦擧法)과 같이 해서 항식(恒式)으로 삼는다면 조정이 바르게 되고 국사도 제대로 될 것입니다.
또 국가에서 음관에 대한 대우가 너무 박하기 때문에 음관의 사기가 떨어지고 현우(賢愚)가 뒤섞여 있게 되었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해마다 당하 음관을 소집하여 과거를 설치하고 궐정에서 시험을 치르게 하여 판(判) 한 통과 책(策) 한 통을 물어서, 매번 10인을 선발, 육조 낭관·도사·감사·사헌부·승정원에서 등용하게 하고, 또 좌우통례(左右通禮)의 직을 오로지 음관의 계제(階梯)로 정하여 사기를 권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어찌 격발되고 흥기되어 유속(流俗)에서 벗어나는 자가 없겠습니까.
대체로 입사(入仕)하는 길이 너무 번잡하므로 요행을 틈탈 수 있는 길이 많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지금 처음으로 입사한 관원이 거의 2백여 명에 이르고 있는데, 우리 나라는 몹시 작은데도 서관(庶官)은 너무 많아 일하는 데는 보탬이 없고 오히려 국가에 해만 끼친다고 여겨집니다. 바라건대 지나치게 많은 별좌·찰방은 감원하고 합할 수 있는 찰방은 병합하는 한편, 참봉·잡직도 적절하게 정한다면, 벼슬길이 난잡하지 않고 인재 등용의 길도 정밀해질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유념하소서.
열째, 환관을 억제하는 것입니다. 구양수(歐陽修)가 ‘환관의 화는 여총(女寵)보다 더 심하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조정은 아직 존엄하고 기강은 무너지지 않았으니 어찌 다른 염려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신이 보기에는 그 형세와 조짐이 이미 싹텄기에 낱낱이 말씀드리겠습니다.
밀성군(密城君) 박한종(朴漢宗)은 그의 재간과 권지(權智)를 발휘하여 국가가 위급한 때에 부지하고 보호한 공로는 진실로 전하께서 믿고 총애하실 만합니다. 그러나 교만하고 방종한 재간으로 간교한 술책을 부려서 지위는 육경의 지위에 비할 정도이고 관직은 봉군(封君)에 이르렀으며, 밖으로는 내수사(內需司)를 장악하고 안으로는 승전(承傳)의 자리를 총괄하며, 명성과 세력이 크게 떨쳐 방자함을 서슴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 아부하여 공경 이하로부터 그를 조심스럽게 섬기지 않는 자가 없고, 또 시종들까지도 그와 결탁하여 서로 방문하며 잔치를 벌여 그 세력을 굳힙니다. 그리하여 혹은 헌장(憲長)을 협박하고 【신구(申玖)가 대사헌이 되었을 때였다.】 대간을 업신여기며, 혹은 물선(物膳)을 진배(進排)할 때에 각사(各司)의 관원들을 노복으로 대하여 꾸짖기도 하면서 뇌물을 주는 자는 봐주고 뇌물을 바치지 않는 자는 꾸짖어 물리치며, 가끔 각 능(陵)을 적간(摘奸)하여 시탄(柴炭)을 징수하는 등 못하는 비행이 없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혹 말미를 받아 지방에 내려가게 되면 각 읍을 돌아다니면서 갖가지 물품을 요청하고 있으니, 이것은 교만 방자한 태도와 국권을 휘두르려는 조짐이 이미 싹튼 것이 아니겠습니까.
박한종은 이른바 소매 속에 들어 있는 독사요 팔에 붙어 있는 전갈로서 난을 일으킬 도적이요 나라를 망칠 장본인이니, 이러한 싹은 철저히 제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궁전이 실화(失火)된 것은 실로 한종에게 죄가 있는 것입니다. 대체로 은총을 바라 경솔하게 옛것을 헐고 【경복궁(景福宮)을 수리한 일이다.】 새로 개축한 것은 곧 국권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일 꾸미기를 좋아하는 악이 드러난 것입니다. 심지어는 하인들을 엄책하여 새로 만들어진 온돌방에 매일 불을 잔뜩 때게 하고는, 그 일을 하인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집으로 물러가 있었으니, 그 실화의 원인이 과연 한종의 잘못이 아니라고 하겠습니까. 사람들은 모두 한종의 고기를 씹고자 합니다. 물정이 이와 같고 공론이 이와 같으니 비록 잠깐 관직을 삭탈하는 위엄을 보였으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죄를 속죄시킬 수는 없습니다. 한종의 머리를 베어 조종의 영혼에게 사죄하시고, 생민의 분한 마음을 시원하게 하소서. 모든 환관들이 중외에서 작폐한 일을 법사로 하여금 적발케 하고 그 중에서 더욱 심한 자를 중법으로 엄하게 다스린다면 환관의 세력은 아마도 이로 말미암아 꺾일 것입니다.
아아! 오늘날의 폐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국가의 위란에 관계되는 중요한 것은 이 10조목일 뿐입니다. 재난을 해소하는 도는 여기에 지나지 않으며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건지는 도 또한 여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국가는 어지러워졌고 국고의 고갈도 극도에 달하였는데 또 궁궐이 소실되는 화가 일어났으니, 이를 수리하는 일을 잠깐 논하겠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사대부들의 공사 반인(公私伴人)과 선상 조례(選上皂隷)의 납포(納布)를 모두 거두어들여 궁궐을 수리하는 비용으로 쓰고, 봉은사(奉恩寺)·봉선사(奉先寺) 등 여러 절의 공양미를 모두 거두어들여 수리하는 인부의 식량으로 하며, 의정부·내수사의 차량과 마부를 모두 추려내어 수리에 쓰는 물자를 수송하게 하고, 도성 안의 공경 대부 및 사민(士民)의 집에 쌓아둔 재목과 기와를 모두 수집하여 수리하는 데 사용하며, 내수사에 속한 경외 노비(京外奴婢)의 공포(貢布)와 전답의 미곡을 도감(都監)에 수납하여 수리하는 자본으로 쓰게 하고 대소 각사 관원들은 점심을 각자 준비하게 하고 각사의 노비를 모두 도감에 보내어 수리하는 인부로 쓰며, 각고을로 하여금 승려의 시경 도목(試經都目)157) 을 상고하여 해당되는 인원수에 준하여 압송하게 하여 미포(米布)를 배급하여 이들을 수리하는 인부로 쓰며, 수리 공사가 끝날 때까지 경외의 공사간의 연회와 소소한 영조(營造)를 일체 금지하소서. 그러면 아마도 큰일을 마칠수 있을 것입니다.
또 서얼 허통(庶孽許通)의 일을 논하면, 백년 동안 허통하지 않았던 길을 열어서 온 나라의 오랜 숙원(宿願)을 이루는 일이니 식견이 있는 선비치고 누가 시원한 일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일에는 서두를 일과 천천히 할 일이 있는 것입니다. 급하지 않은 일을 서둘러 거행하여 마침내 선왕의 법을 변개해서 서로 공박하는 논의를 야기시킨다면 인심이 더욱 흔들려 혼란만 초래하고 정하지도 못할 것입니다. 허통하는 것이 불가하다고 주장하는 자는 정사를 알지 못하는 자이고, 극력 허통하자고 하는 자는 시대 상황을 판별하지 못하는 자이니, 둘 다 오늘날 일을 논할 수 있는 자가 아닙니다.
신이 일찍이 서얼 중에서 호걸다운 인재가 있어도 등용되지 못하고 헛되이 늙는 것을 보고 항상 통탄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대변(大變)이 거듭 일어나 인심이 이미 흔들리고 있는데 급하지 않은 정사를 행하다가 헤아리기 어겨운 환난을 부르게 된다면 전하께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전하께서 반드시 이를 행하려 하신다면 우선 인심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인심이 바로잡히면 사족(士族)은 시기하거나 원망하는 생각이 없을 것이요, 서얼도 오만하고 속이는 습관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인심을 바로잡는 도는 《소학》의 가르침을 일으켜서 사습(士習)을 바로잡고 향약법(鄕約法)을 시행하여 풍속을 바로잡는 것만한 것이 없습니다.
아! 《소학》은 삼대(三代)에서 교육하던 법이요, 향약은 선현들이 풍속을 바로잡던 요체이니 옛것에 뜻을 둔 선비라면 누구인들 이 두 가지의 도를 행하려 하지 않겠습니까마는, 임금에게 인정받지 못하여 웅지를 품고 죽은 자가 많습니다. 조광조의 정성으로써 중종과 같은 어질고 성스러운 임금을 만났어도 당시에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오히려 후세에 화를 끼쳤습니다. 아아! 도는 밝히기 어렵고 시대는 만나기 어려움이 이러합니다. 지금 사람들은 모두 광조가 오도(吾道)에 큰 공이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으나, 신은 홀로 광조는 《소학》과 향약의 적이라 생각합니다. 무슨 까닭으로 이렇게 말하겠습니까? 이는 곧 광조가 잘 행동하지 못하고 경거 망동하다가 원망을 얻고 화를 불러서 사림을 몰살시켜 오늘날까지 뜻있는 선비들로 하여금 감히 입을 열지 못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비록 전하께서 다시 이 도를 행하시려 해도 반드시 용렬한 자들이 거부하면서 기묘 사화를 예로 들면서 행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할 것이니, 이 어찌 광조가 경망하게 서두른 죄가 아니겠습니까. 지금 조정에 있는 신하 중에 반드시 광조보다 현명한 자가 있을 것이니, 전하께서 널리 의논하고 두루 찾으셔서 그 일을 맡기고 결단하여 의심없이 행하소서."
사신은 논한다. 서엄(徐崦)은 윤춘년(尹春年)의 문생이다. 시정(時政)을 상소하여 논하여 춘년 등에게 부회(傅會)하였으니, 마음이 이미 벼슬하기 전에 허물어졌다는 말은 바로 엄을 두고 한 말이다. 아직 벼슬을 하기 전인데 조정의 일을 논의하기를 좋아하니, 후일 벼슬에 나아가게 된다면 반드시 옛법을 변란시킬 것이다.
답하기를,
"이 상소의 내용을 보니 조금도 숨기지 않고 시폐(時弊)를 진술하였다. 10조목의 의논은 진실로 옳은 말이라 할 수 있으나, 또한 과격한 말도 없지 않다."
하고, 이어서 정원에 전교하기를,
"지금 인심이 예와 같지 않고 탐풍이 날로 일어나 공도는 거의 무너지고 사정(私情)은 크게 행해진다. 경연에서는 항상 시폐를 바로잡을 일을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한 사람도 바로잡는 사람이 없고, 조정에서는 청렴하고 근실하다는 사람을 발탁하여 쓰는데도 한 사람도 본을 보이는 자가 없으므로 서엄(徐崦)이 상소하여 시폐(時弊)를 모두 들어 말한 것이다. 나는 단지 조정만을 믿는데, 비록 어떤 법을 세운다 해도 봉행하는 사람이 없다면 어떻게 국가를 유지 할 수 있겠는가. 탐오한 풍습이 성행하는 것은 내가 불민하여 교화가 밝지 못한 탓이다. 그러나 조정 또한 한 사람도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치는 자가 없으니,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닌가. 이 상소에서 《소학》의 도와 향약의 시행을 많이 말했는데, 이 일에 대해서는 내가 금지한 것이 아니다. 《소학》의 도는 진실로 백행(百行)이 갖추어진 것이다. 전에 이미 절목을 상세하게 정하였지만 지금 다시 거행할 것을 예조에 이르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1책 15권 44장 A면【국편영인본】 20책 167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과학-천기(天氣) / 변란-정변(政變) / 사상-불교(佛敎) / 풍속(風俗) / 향촌-지방자치(地方自治) / 재정-공물(貢物) / 재정-역(役) / 재정-국용(國用) / 외교-명(明)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신분(身分) / 교통(交通) / 의생활(衣生活) / 주생활(住生活)
- [註 149]삼대(三代) : 하·은·주.
- [註 150]
양종과(兩宗科) : 선종(禪宗)·교종(敎宗) 두 파의 승려를 뽑는 과거.- [註 151]
반인(伴人) : 신역(身役)이 없는 양인(良人)을 당상관(堂上官) 이상에게 주어 근수(跟隨)로 부리게 하는 것을 일컫는 말. 《명종실록(明宗實錄)》 21년 구월(九月) 병진(丙辰) 원주(原註).- [註 152]
해택(海澤) : 간석지.- [註 153]
하훈(夏訓) : 《서경》의 오자지가(五子之歌)를 말함.- [註 154]
중방 노자(中房奴子) : 수령의 시중을 드는 노복.- [註 155]
통(通)·약(略)·조(粗) : 강서(講書) 시험의 성적을 매기는 등급. 통이 첫째, 약이 둘째, 조가 마지막이며 낙제 점수는 불(不)이라 한다. 《경국대전(經國大典)》 예전(禮典) 강서(講書).- [註 156]
거주반좌법(擧主反坐法) : 매년 봄에 동반 3품이상과 서반 2품 이상으로 하여금 각기 수령·만호가 될 만한 사람을 천거하게 하고, 천거된 사람이 장오(贓汚)나 패상(敗常)의 죄를 범하면 거주(擧主:천거한 사람)도 해당 죄로 처벌하던 법. 《경국대전(經國大典)》 이전(吏典) 천거(薦擧).- [註 157]
시경 도목(試經都目) : 중이 된 자는 석 달 안에 선종(禪宗) 또는 교종(敎宗)에 고하여 불경(佛經:《심경(心經)》·《금강경(金剛經)》·《살달타(薩怛陁)》) 암송을 시험, 예조에 통보하면 계문한 다음 정전(丁錢)을 거두고 도첩(度牒)을 준다. 불경 암송 시험을 시경(試經)이라 하는데 시경 도목이란 시경한 문서를 말한다. 《경국대전(經國大典)》 예전(禮典) 도승(度僧).○幼學徐崦上疏。 其略曰:
方今國家晏如, 四境無憂, 殿下以爲安耶? 朝廷安逸, 公卿布列, 殿下以爲正耶? 朝廷如寄亂絲之中, 而士大夫不爲憂; 國家如在破船之上, 而殿下莫之知。 以臣觀之, 今日之事, 不暇爲長太息流涕痛哭者也。 嗚呼! 生民之困苦極矣, 公私之儲蓄竭矣。 水旱之災, 飢饉之嘆, 歲以歲增; 宰相之貪奢, 文士之淫縱, 日以日甚。 流離之氓, 羊奔於道路, 嘯聚之群, 蝟起於山谷, 百孔千瘡, 土崩瓦解, 危亡之勢, 迫在朝夕, 而災變之示譴, 有不可勝言。 種雨 【雨穀種故云。】 之降, 朝野洶洶, 又有嶺南之旱, 湖南之風, 關西之蟲, 近古罕有, 人心大恐。 今又有大火之變, 祖宗朝二百年相傳之宮闕, 一夜盡爲灰燼, 實千古未有之災也。 嗚呼! 國家之危亡, 於此焉決矣。 臣雖至賤, 世蒙國恩, 心有所不忍者, 故敢獻狂瞽之說, 仰答敷求之懇。 伏願殿下, 深思之。 請擧其大者, 爲殿下言之, 一曰, 擇輔相。 三公之任, 人主之股肱, 國家之柱石也。 苟非其人, 則無以當其責。 粤自中宗以後, 居大臣之位者, 不聞有敦風、鎭躁、正朝廷而安國家者。 或以功勳, 或以文章, 或以技能餂之, 或以謟諛陞之, 或非大奸, 則必大愚, 卒皆牽補過時, 架漏度日。 至于今日, 積習已成, 以更張建明爲非, 循途守轍爲職, 靡靡悠悠, 以苟歲月, 敎化將何以明, 紀綱將何以振哉? 殿下以不世出之聖, 當大有爲之時, 誠有興衰扶亂之志, 則必擇道高、德盛、忠厚、正直之人, 委之以宰相之任, 責之以明敎化、振紀綱之效, 而其先朝勳舊之臣, 使之致頣養, 時或咨訪, 以相維持之, 則國家之安, 朝廷之正, 不終日而致矣。 願殿下深察之。 二曰, 養士氣。 夫士者, 國家之元氣, 朝廷之根柢也。 固不可一日無養, 而方今士林之氣, 消鑠摧沮, 使朝廷日孤, 國家日危, 可勝痛哉! 請歷言士氣摧挫之始終, 殿下試垂聽之。 自戊午史局之禍, 而士氣始折矣, 至於甲子, 斬伐芟夷, 靡有孑遺, 而士氣一蕩矣。 己卯年間, 趙光祖有志三代, 倡行《小學》之道, 將興禮讓之風, 間有浮薄輕淺之輩, 妄施誤行, 遂興士林之禍, 一時才望之士, 或多竄死, 至今以《小學》爲怪, 以己卯爲諱, 而士氣又一蕩矣。 至於金安老專擅肆毒, 小有忤觸, 輒起大獄, 竄殺賢士, 箝制儒林, 而士氣又一蕩矣。 自安老之死, 朝廷安和, 庶幾《小學》之道, 復明於世, 甲辰、乙巳之間, 有年少輕薄之輩, 外藉《小學》之名, 內懷陰邪之志, 驟陞通顯, 唱起異議。 尹任又乘其隙, 陽收士林之望, 陰濟兇惡之謀, 而遂相附會, 交結旣自夷滅, 又貽朝廷之禍, 使或有玉石俱焚之嘆, 士氣又一大壞矣。 嗚呼! 士氣大壞, 則國之危亡, 可坐而待也。 自殿下卽位以來, 有志吾道, 欲興士氣者, 可謂盛矣。 然而僧之與逆賊同謀者, 置而不問, 而儒之妄歐巡率者, 繫之詔獄, 僧之藏匿賊黨者, 曲赦其罪, 而儒之與僧相鬪者, 再杖不已。 寺刹之門庭, 則立標以禁人, 捕儒之邏卒, 搶亂於明倫之堂。 寺刹之田民, 則搜括以盡還, 《養賢》之魚箭, 奪給於公主之家。 仁宗所復之賢良科則罷之, 中宗所革之兩宗科則復之。 托居後宮, 創寺城中, 以崇佛事, 而謂將時和歲豐而誘之, 抗疏累月, 士林憤鬱, 各退在家, 則謂之叛命逆旨而䝱之。 待僧之跡, 如彼其厚, 待士之道, 如彼其薄, 士氣安得不消鑠摧沮, 以至於大壞乎? 爲今之計, 莫如興《小學》之敎, 以伸士氣, 以興孝悌之道, 以開禮讓之風。 願殿下, 躬行心得, 推明《小學》之敎, 以倡士林, 使皷舞踊躍於道學之中, 則唐、虞可還, 比屋可封矣。 殿下試觀《小學》之書。 《小學》非誤國之書也。 自上興行於變時雍, 則士林幸甚, 吾道幸甚。 願殿下, 深察之。 三曰, 正俗尙。 士習之淑慝, 民俗之善惡, 治亂存亡係焉, 可不思所以正之乎? 今之士大夫, 以早登科名, 少筮仕版爲榮, 甚者藉文章之技, 竊理學之名, 陽示端莊之貌, 陰縱貪邪之術, 以釣其名。 嗚呼! 儒士之習如此, 愚民之俗可知矣。 爲今之計, 莫若行鄕約之法, 以敦士習, 以厚民俗, 以養惇睦之風。
願殿下, 勑戒有司, 申明鄕約之法, 以倡民俗, 使都城、畿甸、郡縣、閭閻之氓, 講其文而行其規, 使漸磨化成於禮義之中, 則唐、虞可還, 而比屋可封矣。 殿下試觀鄕約之法。 鄕約非誤國之書也。 自上信之, 作新其民, 則國家幸甚, 宗社幸甚。 願殿下, 深察之。 四曰, 廣言路。 臣聞 "防民之口, 甚於防川。" 爲川者, 決之使導; 爲民者, 宜之使言。 方今國有危亂之勢, 而不見敢諫之人, 時有陳弊之疏, 而不見擧行之事, 此士林無直言之風, 殿下無從諫之實也。 殿下卽位之初, 獻納白仁傑敢論密啓之非。 雖事關宗社, 所不敢譏, 其情則直也, 而拿囚之, 竄逐之。 典籍梁應台極言崇佛之失。 雖近僭越, 其意可嘉, 而答敎乃曰: "有口者皆言國事, 則國事非矣。" 自此以後, 忠憤慷慨之人, 以爲無益而有害, 故不敢爲生民伸一喙矣。 雖有臺諫之官, 不以懷私駁擊爲事, 則必區區於細者小者, 以塞責焉。 願殿下, 廣開言路, 言雖不中, 亦不加罪, 推奬之、勸勉之, 使芻蕘匹夫, 皆得以自達, 以通天下之情, 則忠言罔有伏, 而朝廷無壅蔽之患矣。 然人主雖有好諫之名, 而或信讒侫之說, 如前日之於陳復昌, 則非徒直言者自退, 抑亦群邪日進矣。 殿下無偏信之失, 而有兼聽之聰, 則小人去而言路廣矣。 願殿下, 深察之。 五曰, 戢貪風。 臣聞貪人者, 耗國之蠧, 賊民之螣也。 其蠱害國家, 可謂毒矣。 自金安老用事之後, 貪風始盛於縉紳之間, 繼之以李芑之凶毒, 爲有功於宗社, 人莫敢誰何, 遂逞其溪壑之欲, 無所不至, 黜陟與奪, 視其贈賂之豊嗇, 遠近州郡, 車輸舟運, 惟恐或後。 別坐、察訪之價, 定其奴婢之幾口; 僉使、萬戶之直, 準其緜布之幾同。 又繼之以陳復昌之憸邪, 恣蠭䘍之毒, 縱蛇蝎之螫, 狐鳴梟噪, 踢閃跳梁。 二蠧繼起, 貪風大興, 公卿大夫, 靡然效之。 或處臺諫之位, 而請防納之事, 以專一邑之利, 【指許曄。】 或在侍從之列, 而裁乞米之簡, 盡煩一道之邑。 或廣占伴人, 每邑各置一人; 或與商賈私交, 請防納於各官而分其利; 或廣請沿海各官, 出公庫之穀, 以防海澤; 或折受陳地, 使各官開墾佃治; 或徵索魚鰒扇帽, 付之赴京通事, 貿易唐貨; 或因其成婚, 分乞於八道; 或監司都事, 分定各官, 公然輸運, 以贈其親戚, 以送於士大夫之家。 又監司作詩, 乞於兵使、水使; 都事傳丐郡縣, 以贈其愛妓; 或以監軍御史、災傷軍籍敬差官, 公然載妓, 巡遊列邑, 致其多受賂遺, 使驛吏載送。 夫以臺諫、侍從之人, 宰相、 【鄭士龍、鄭世虎尤甚, 故時人以龍虎成雙爲言。】 文士 【韓智源】 之流, 貪縱如此, 況責其武人蔭官乎? 善事己者, 曲譽而吹噓之; 不善事者, 巧毁而彈駁之。 是以八道無完庫之邑, 百姓無一廛之安, 可勝痛哉! 今欲戢貪風, 請斷貪宰相一人頭, 以梟于市, 大振朝廷之威, 痛禁小小求請簡牘之習, 使一切勿爲, 則貪風或由是而戢矣。 願殿下, 深察之。 六曰, 活民生。 夏訓曰: "民惟邦本, 本固邦寧。" 今宰相、文士之剝民肥己, 而殿下實受其禍, 其可不思所以活之哉? 請力言生民困苦之狀。 宰相、文士, 無不造第宅者, 而守令伐取材木, 塞江而下, 方舟而送, 山谷之民困; 宰相、文士, 無不求鱻膏者, 而守令日事田獵, 而山野之民困; 宰相、文士, 無不求貂皮者, 而兵使、守令、僉使、萬戶, 日事徵斂, 而兩界之民困; 宰相、文士, 無不求苧麻者, 而守令官給一升之粟, 例收於吏民, 而淸洪、全羅之民困; 宰相、文士, 無不求紬繭者, 而守令官給數斗之米, 公取於閭閻, 而黃海、平安之民困。 監司、都事、敬差官、監軍御史, 載其朋友, 又載中房奴子, 且各載其卜物; 察訪又有各種差備之徵, 而驛卒大困; 兵使、水使、僉使、萬戶放役徵布, 因闕倍徵, 水軍大困。 虐民之政, 有千徑之巧, 休民之道, 無一分之可, 民安得不困乎? 生民之休戚, 繫守令之賢否。 願殿下, 擇守令, 如擇侍從, 重守令, 如重臺諫, 輪召蔭官、武士, 將爲守令者, 問其活民之要, 詰其治民之術, 察其賢否, 觀其才鄙而試之; 又使二品以上弘文館、兩司之員, 各薦堪爲守令者各三人, 以此差授, 後有贓汚虐民之犯, 則所擧之員, 雖大臣, 反坐其罪, 少無撓屈; 又令朝廷擇賢監司, 大嚴黜陟之典, 則生民或於是而活矣。 願殿下, 深察之。 七曰, 禁奢侈。
臣聞儉, 德之共也; 侈, 惡之大也。 士而奢侈, 則亡其身; 君而奢侈, 則亡其國。 爲人君者, 可不戒哉? 請歷陳奢侈之弊, 殿下試垂聽之。 以衣服之侈言之, 則宰相之衣服, 有加於君上, 僕隷之穿着, 有加於士子。 庶孽而服綵叚之衣, 商賈而被綺紈之服, 兩班之人, 非貂皮耳掩, 則不着, 九品之官, 無騣笠, 則不行。 以飮食之侈言之, 一飯必置數味之鮮, 一案必排九楪之品, 喪祭、婚嫁, 必用油蜜之果。 以宮室之侈言之, 則宰相之第宅, 有壯於宮闕, 【沈連源、尹漑俱在大臣之列, 營造甲第, 役三年而工纔訖, 至於墻壁, 皆施丹雘。】 商賈之家舍, 有大於朝士之屋, 儒生之業科擧者, 先規其營繕, 文士之躋班品者, 先起其大屋。 【韓智源纔至六品, 一年之間, 起三大家於一洞之中, 乞瓦帖字盈於佩囊, 士林鄙之。】 嗚呼! 地力之生物有數, 人力之成物, 有大限也, 而虛費妄用之路, 如是其煩, 則一國之財, 安有不竭之理哉? 願殿下, 先令妃嬪、侍妾, 斥去奢美之服, 痛戒王子、駙馬之家, 使不得用珠玉、綺羅之飾, 仍令朝廷, 更定衣服之制, 如儒士則冠巾、團領, 武夫則毛笠、帖裏, 商買賤隷則毛帽、綿衣, 農夫則臺笠、布衣, 不使混雜, 依中朝之制。 其餘第宅食饌之品, 詳立法條, 痛加禁斷, 少有踰越, 嚴治其罪, 則奢侈之習, 或由是而變矣。 願殿下深察之。 八曰, 明賞罰。 人君之刑賞, 非一己之所擅用, 乃天命天討之不可易者也。 故古之明君, 絀一己之私心, 順天下之公論, 不賞私勞, 不罰私怨, 苟有其罪, 雖勳戚大臣, 不可赦也, 苟有其德, 雖放逐卑賤之人, 不可棄也。 今殿下卽位以來, 賞人之擧, 或有輕僭, 罰人之典, 多有弛緩, 賞罰可謂得其宜乎? 願殿下, 執大中至公之心, 震發剛强毅之德, 聳竦之以大賞, 警恐之以大罰, 勿以親舊戚畹而撓之, 則賞罰或由是而明矣。 願殿下, 深察之。 九曰, 愼用人。 成周之世, 有秀士、選士、造士、進士之次第, 兩漢之時, 有孝廉、賢良、方正、直言、極諫之選擧。 古之取士之道, 如彼其重, 故其致治之隆, 如彼其盛也。 至於我朝, 專以科擧、門蔭爲取人之式, 課其製述、講論之高下, 別其閥閱、門地之貴賤, 考其歲月之久遠, 而陞降之, 不問其才德賢否而用之, 故文臣自矜自高, 而肆行胸臆, 蔭官自畫自卑, 而敢恣貪欲, 朝廷之不正, 職此由也。 文臣則已矣, 凡門蔭、取才之時, 簡請於堂上, 傳囑於郞廳, 先問父兄之安否, 不講文義之如何, 至於注擬之時, 專用宰相之請, 雖媵妾之族, 亦無不與焉。 是以瑣瑣姻婭, 乳臭子弟, 布列朝班, 遍守列邑, 國事之日非, 無足怪也。 爲今之計, 莫如盡破前日蔭保取才, 更爲試取, 定其額數, 使兩司同參, 嚴加考講, 分通、略、粗, 以此注擬, 則公道可行, 而用人不雜矣。 願令六卿以上及兩司、弘文館, 歲各薦一人, 八道監司, 歲各貢一人, 令吏曹、政府、兩司, 同參選擇, 取其才行者而用之, 擧主反坐之法, 如前所陳, 守令薦擧之法, 定爲恒式, 則朝廷正而國事得矣。 且國家待蔭官之道甚薄, 故蔭官者, 無聳勸, 賢愚混淆, 同歸一轍。 臣意以爲, 歲會堂下蔭官, 設爲一科, 試之於闕庭, 問以判一道、策一道, 每取十人, 用之於六曹郞官、都事、監司、司憲府、承政院, 又以左右通禮之職, 專? 宅豕?携?迓 以聳動之, 豈無激發興慕, 自拔於流俗者乎? 大抵入仕之路太繁, 故僥倖之門益開。 臣計今之初入仕之官, 幾將二百餘員。 我國至小, 而庶官至繁, 無益於事, 有害於國。 臣請別坐、察訪之太多者, 汰減之, 察訪之可幷者, 倂合之, 雖參奉、雜職, 亦隨宜酌定, 則仕路不雜, 而用人亦可精矣。 願殿下思之。 十曰, 抑宦官。 (歐陽脩)〔歐陽修〕 曰: "宦官之禍, 甚於女寵。"
方今朝廷尙尊, 紀綱未墜, 安有他憂? 然以臣觀之, 其勢已形, 而其占已萌矣。 臣請歷言之。 密城君 朴漢宗, 負其幹能, 舞其權智, 當國家危疑之際, 有扶翊衛護之功, 固殿下之所信愛也。 而以驕縱之才, 濟奸猾之術, 位竝列卿, 官至封君, 外領內需之司, 內總承傳之位, 聲勢鴟張, 縱恣無忌。 是以一國之人, 靡然趨附, 自公卿以下, 莫不謹事之, 又有侍從之人, 攀附交結, 相過燕飮, 以重其勢。 以此或脅制憲長, 【申玖爲大司憲時也。】 譏侮臺諫, 或於供上物膳進排之時, 各司官員, 必奴虜之, 必叱勑之, 有賂者寬假之, 無賂者責退之, 或摘奸各陵, 則徵乞柴炭, 無所不至。 或受由下鄕, 則橫行列邑, 求請紛紜。 此非驕橫之勢已形, 而專擅之漸已萌耶? 漢宗眞所謂懷袖之蛇蝎, 肘腋之蜂蠆, 基亂之賊, 亡國之手, 不可不芟夷而蘊崇之也。 況大內失火, 實漢宗所有之罪乎? 夫希恩望寵, 輕自撤舊而 【景福宮修理之事。】 改新者, 其專擅喜事之惡著矣。 至於嚴責下人, 多烘新堗, 連日不休, 委之下人, 退居于家, 則其失火之由, 果非漢宗之所爲乎? 人皆欲食漢宗之肉。 物情如此, 公論如此, 雖暫示削奪之威, 無補於擢髮之罪矣。 願斬漢宗之首, 以謝祖宗之靈, 以快生民之憤, 凡諸宦官中外作弊之事, 令法司摘發, 其尤者, 繩以重法, 則宦官之勢, 或由是而抑矣。 嗚呼! 方今之弊, 殆不可勝言。 然危亂所關, 惟此十條而已。 弭災之道, 不過於此, 救世拯民之道, 亦不過於此也。 國家板蕩, 匱竭至矣, 又有宮闕焚燒之禍。 姑以繕修之事論之, 臣意以爲請悉收士大夫公私伴人及選上皂隷之納, 以爲營繕之費焉; 悉收奉恩、奉先諸寺刹供養之米穀, 以爲營繕之供焉; 悉抄議政府、內需司車兩馬夫, 以爲營繕之輸焉; 都中公卿、大夫、士民之家所積材瓦悉收之, 以爲營繕之用焉; 內需司京外奴婢之貢、田畓米穀之出, 悉納之都監, 以爲營繕之資焉; 令大小各司官員私備點心, 而其供億奴婢, 悉歸之都監, 以爲營繕之役焉; 令各官, 考僧人試經都目, 使之準數押送, 量給米布, 以爲營繕之役焉, 限畢役, 京外公私宴會小小營作之事, 一切禁斷, 則庶可以能立大事矣。 又以庶孽許通之事論之, 開百年未通之路, 伸一國久鬱之望, 有識之士, 孰不稱快? 然事有緩急, 而顧擧不急之務, 卒變先王之法, 使議論相擊, 人心益撓, 徒爲亂而未定(乎)〔矣〕 其不可許通者, 不知政者也; 力欲許通者, 不知時者也。 皆不足與論今日之事者也。 臣嘗見庶孽之有豪傑之才者, 虛老而不用, 常自痛焉。 然今日大變荐至, 人心已搖, 行不急之政, 而召難測之禍, 有何補於殿下哉? 然殿下必欲行之, 則莫如先正人心。 人心旣正, 則士族無猜怨、憤嫉之情, 庶孽無傲慢、詐僞之習矣。 然其所以正人心之道, 亦莫如興《小學》之敎, 以正士習, 行鄕約之法, 以正風俗也。 嗚呼! 《小學》者, 三代敎人之法也; 鄕約者, 先賢正俗之要也。 士之有志於古者, 孰不欲行此二者之道也? 不得於君, 齋志而沒者多矣。 以趙光祖之精誠, 遭中廟之仁聖, 不能有成於當日, 而貽禍於後世, 嗚呼, 道之難明, 時之難遇, 有如是夫! 然人皆以爲光祖, 有大功於吾道也, 臣獨以爲光祖, 爲《小學》、鄕約之賊也。 何以言之? 不善俯仰, 輕擧急行, 取怨召禍, 魚肉士林, 至今使有志之士, 莫敢開口。 雖殿下將欲興之, 必有庸鄙苟且之人, 文飾排拒, 擧己卯爲證, 以爲不可行焉。 然則此豈非光祖妄施之罪也? 今在廷之臣, 亦必有賢於光祖者也。 願殿下, 廣議博訪, 委任其事, 斷而行之, 無疑也。
【史臣曰: "崦, 尹春年之門生, 疏論時政, 傅會于春年輩。 爲之心術, 已毁於未仕之前, 崦之謂也。 身爲布衣, 好議論朝廷之事, 他日得志, 必變亂舊章矣。"】
答曰: "觀此疏辭, 盡言不諱, 極陳時弊。 十條之論, 可謂讜矣。 然亦多有過激之言也。" 仍傳于政院曰: "今者人心不古, 貪風日起, 公道板蕩, 私情大行。 經筵之上, 常言矯弊之事, 而無一人矯之者, 朝廷之中, 擢用廉謹之人, 而無一人效之, 故徐崦之疏, 極陳時弊, 無所不言耳。 予但恃朝廷, 而雖立某法, 殊無奉行之人, 將何能維持國家乎? 貪汚之風, 由予不敏、敎化不明故也, 朝廷亦無一人爲國忘身者, 豈不寒心? 此疏多言《小學》、鄕約之事, 此事非予禁而止之也。 《小學》之道, 百行所備也。 前已詳盡節目。 今爲申明擧行事, 言于禮曹。"
- 【태백산사고본】 11책 15권 44장 A면【국편영인본】 20책 167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과학-천기(天氣) / 변란-정변(政變) / 사상-불교(佛敎) / 풍속(風俗) / 향촌-지방자치(地方自治) / 재정-공물(貢物) / 재정-역(役) / 재정-국용(國用) / 외교-명(明)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신분(身分) / 교통(交通) / 의생활(衣生活) / 주생활(住生活)
- [註 1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