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헌부가 서얼의 명칭을 역사에서 살펴 고하다
헌부가 아뢰기를,
"신들이 서얼이라는 명칭을 널리 고찰해 보니, 소위 서(庶)라고 하는 것은 양첩(良妾)의 자식이고, 얼(孽)이라 하는 것은 천첩(賤妾)의 자식입니다. 중국 사람들은 다만 적첩의 구분만을 엄하게 하고, 일찍이 벼슬길을 막고 쓰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고려조에서도 그러했습니다. 한두 사람 예를 들어 말하겠습니다.
정문(鄭文)은 얼자(孽子) 【정배걸(鄭倍傑)의 얼자이다.】 로서 벼슬이 예부 상서(禮部尙書)에 이르렀고, 김승인(金承印)도 또한 얼자 【김구(金坵)의 얼자이다.】 인데 벼슬이 대사성(大司成)에 이르렀으며, 다만 대간(臺諫)만 되지 못하였을 뿐이었습니다. 또 이준창(李俊昌)은 얼자로서 벼슬이 추밀원 사(樞密院使)에 이르렀는데, 그의 본전(本傳)145) 에 의하면 ‘이준창은 궁인의 소출이다. 궁인은 본래 천례(賤隷)로 구례(舊例)에 의하면, 궁인의 자손은 벼슬이 7품에 그치고 오직 등과(登科)한 자만이 5품에 이를 수 있었는데, 준창이 3품에 제수되었으나 대간이 위축되어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로 보면 양첩의 자식은 대간만 못 되었고 천첩의 자식이라도 등과한 자는 5품으로 한정했음이 분명합니다. 또 권중화(權仲和)도 얼자 【권한공(權漢功)의 얼자이다.】 로서 고려조에 지신사(知申事)·정당 문학(政堂文學)이 되고 아조에 들어와서는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가 되었습니다.
태종 15년 을미에 이르러 대언(代言) 서선(徐選) 등의 말을 받아들여 서얼 자손을 현관(顯官)에 제수하지 않는다는 법을 세웠고, 세종 15년 계축에 황희(黃喜) 등이 《경제육전(經濟六典)》을 편찬할 때 또한 이 법을 기재하였습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본다면 세종조 이전에는 서얼에게 벼슬길을 열어준 것이 명백합니다.
세조 말년에 최항(崔恒) 등이 《경국대전(經國大典)》을 편찬하여 성종 2년에 비로소 반포하였는데 이를 《신묘대전(辛卯大典)》이라 합니다. 그 예전(禮典) 제과조(諸科條)에 ‘실행한 부녀의 자식과 서얼 자손은 과거 응시를 허락하지 않는다.[失行婦女之子庶孽子孫勿許赴]’ 하였고, 4년 후에 《대전》을 개찬하였는데 이를 《갑오대전(甲午大典)》이라 합니다. 그 제과의 조항도 이와 같습니다. 위의 ‘자(子)’로써 본다면 밑의 ‘자손(子孫)’은 다만 ‘자’와 ‘손’만을 가리키는 것이요 증손(曾孫)부터는 허통한다는 뜻이 명백합니다.
12년 후에 또 개찬한 《대전》을 《을사대전(乙巳大典)》이라 하는데 곧 지금 쓰고 있는 법전입니다. 이 법전의 제과조에 ‘재가하거나 실행한 부녀의 자식 및 손자와 서얼의 자손은 응시를 허락하지 말라.[再嫁失行婦女之子及孫庶孽子孫勿許赴]’고 되어 있는데, 위의 자식 및 손자[子及孫]라고 한 것으로 본다면 아래의 ‘자손(子孫)’이라 한 것은 곧 자손대대를 가리키는 것이 명백합니다. 그렇다면 자와 손만을 응시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은 세조조에 있었던 일이요 자손 대대로 응시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은 성종조의 갑오년 후부터 을사년 전까지 있었던 일이니, 그때 이렇게 입법한 것은 반드시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니 승정원으로 하여금 《일기(日記)》를 상고하게 하소서. 그리고 전교에 ‘양첩의 자식은 손자에, 천첩의 자식은 증손에 이르면 허통한다.’고 하였으므로 의자(議者)들은 혹 ‘첩자(妾子)로부터 계산하여 그 손자나 증손에 이르는 것이다.’고 하기도 하여 귀일되지 않으니 전지를 분명히 받들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양첩자는 손자에 이르러, 천첩자는 증손에 이르러’라고 한 말은 전일 승전에서 밝혔으니 다시 받들 필요가 없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1책 15권 42장 A면【국편영인본】 20책 166면
- 【분류】정론(政論) / 가족-가족(家族) / 신분(身分) / 인사(人事) / 사법-법제(法制)
- [註 145]본전(本傳) : 《고려사》 열전을 말함.
○戊子/憲府啓曰: "臣等博考庶孽之名, 所謂庶者, 良妾子也, 所謂孽者, 賤妾子也。 中國之人, 只嚴其嫡妾之分, 未嘗廢錮而不用矣。 其在前朝, 亦不廢錮。 若擧其一二而言之, 鄭文, 以孽子, 【倍傑之孽子。】 官至禮部尙書, 金承印, 亦以孽子, 【坵孽子。】 官至大司成, 但不得爲臺諫而已。 李俊昌, 以孽子, 官至樞密院使, 其本傳曰: ‘俊昌, 宮人出也。 宮人本賤隷。 舊例宮人子孫, 限七品, 唯登科者, 至五品。 俊昌拜三品, 臺諫畏縮無敢言者。’ 云。 以此見之, 則良妾子, 只不得爲臺諫, 賤妾子, 登科者限五品也, 明矣。 且權仲和以孽子, 【漢功之孽子。】 在前朝, 爲知申事、政堂文學, 入朝爲都評議(司使)[使司] 。 至於太宗十五年乙未, 用代言徐選等言, 立庶孽子孫, 不任顯官之法, 世宗十五年癸丑, 黃喜等撰《經濟六典》, 亦載此法。 以此見之, 則世宗朝以前, 許通仕路也, 明矣。 世祖末年, 崔恒等撰《經國大典》, 成宗二年始頒降, 是曰《辛卯大典》也。 其《禮典》諸科條曰: ‘失行婦女之子、庶孽子孫, 勿許赴’ 云, 越年改撰《大典》, 是曰《甲午大典》也。 其諸科之條, 亦如此矣。 以上子見之, 則下所謂子孫, 只指子及孫, 而曾孫則許通也, 明矣。 越十二年, 又改撰《大典》, 是曰《乙巳大典》, 卽今之行用者也。 其諸科條曰: ‘再嫁失行婦女之子及孫、庶孽子孫, 勿許赴’ 云。 以上子及孫見之, 則下所謂子孫, 乃指子子孫孫也, 明矣。 然則子孫不許赴擧, 在於世祖朝, 子子孫孫不許赴擧, 在於成宗朝甲午之後, 乙巳之前, 其時立法, 必有其由。 請令承政院, 詳考《日記》。 且傳敎內: ‘良妾子, 則至其孫, 賤妾子, 則至其曾孫, 許通’ 云, 議者或以爲自妾子之身而計之, 至其孫至其曾孫, 不能歸一。 請分明捧承傳旨。" 答曰: 良妾子, 則至其孫, 賤妾子, 則至其曾孫’ 云, 已著於前日之承傳, 不須改捧也。"
- 【태백산사고본】 11책 15권 42장 A면【국편영인본】 20책 166면
- 【분류】정론(政論) / 가족-가족(家族) / 신분(身分) / 인사(人事) / 사법-법제(法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