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사가 박한종의 관작 삭탈 등 화재에 관한 일을 아뢰다
양사(兩司)가 아뢰기를,
"불길이 궁금(宮禁)에서 일어나 전우(殿宇)까지 태워서 열성(列聖)들이 거처하시며 말씀하시던 곳이 하룻밤 사이에 거의 없어졌으니, 온 나라의 신민치고 누가 눈물을 흘리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만든 자를 붙잡아 그 죄를 정하고 싶은 것이 신자(臣子)들의 마음입니다. 불이 일어난 것은 하늘에서 내린 것도 아니며, 땅에서 솟아난 것도 아니니, 불을 낸 죄를 받아야 할 자가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하옥하여 추국(推鞫)하여도 끝내 그 사람을 잡지 못한다면 국가에 기강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총감독했던 자를 중죄로 다스리어, 한편으로는 그 일을 중대하게 여기는 뜻을 나타내고, 한편으로는 불을 낸 자를 적발하여 스스로 밝히게 하고, 한편으로는 소홀히 감독한 죄를 바로잡아야 하니, 법에 있어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들이 중외의 공론을 가지고 박한종이 그 죄책을 회피할 수 없다는 뜻으로 아뢴 것입니다. 그런데 상교(上敎)는 한종이 나랏일에 마음을 다하였는데, 남의 모함을 받고 있다고 하면서, 그 말을 꺼낸 사람과 대질하게 하시고 또 사대부를 협박한다는 말을 모두 거짓으로 돌려 버리시니, 신들이 비록 형편없으나 어찌 떠돌아 다니는 말을 믿고서 나랏일에 마음을 다하는 자를 잘못 모함해서 성명(聖明)을 저버리겠습니까. 지금 이 재변은 중대한 일인데도, 불을 낸 자를 끝내 잡지 못하겠으므로 총감독했던 자를 엄중히 다스려 국법을 바로잡자는 것이지, 다른 뜻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신들이 상교를 살펴 보니 대간의 말을 믿지 않고 한종을 비호하시려는 뜻이 있으니, 신들은 답답한 심정을 억제하지 못하겠습니다. 또 한종이 권세를 빙자해 위세를 부리고 사대부들을 협박한 일은, 한 가지 사실만 들더라도 나머지 사실은 다 알 수 있습니다. 한종은 일찍이 덕원 부사(德源府使)에게 재목을 요청하였다가 어사(御史)에게 적발되어 사헌부에서 추문당하게 되자, 당시 대사헌 신영(申瑛)에게 사알(司謁) 【궁금(宮禁)에서 말을 전하는 간원이다.】 을 보내어 ‘적발된 건기(件記)는 인신(印信)도 없고 관서(官署)127) 도 없으니, 이 같은 일은 일찍이 논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아무쪼록 분간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대사헌은 한 나라의 기강을 담당하는 장관인데, 기탄없이 공공연히 사람을 시켜 부탁하여 오직 자기 말만을 따르게 하려고 하였으니, 이로 본다면 그 밖에 선비들에게 기염을 부린 것은 이를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망설이지 말고 관작을 삭탈하소서.
사신은 논한다. 예로부터 임금이 환관을 총애하고 신임하여 그의 말만을 따라주면서 권병(權柄)이 아래로 옮겨짐을 알지 못하게 되면, 심지어는 임금을 폐위하고 국가를 망하게까지 하였다. 귀감이 분명하여 징계삼을 수 있는데도, 두려워하고 꺼리지 않으니, 통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박한종이 교만 방자하고 악독하여 못하는 짓이 없는데 상은 한종이 을사년에 공로가 있다고 하여 총애하고 신임하기를 대신과 다름이 없이 하니 한종은 더욱 교만하고 방자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대사헌은 조정의 기강을 총괄하고 있어 아무리 공경(公卿)과 진신(搢紳)들이라도 외경하고 꺼려서 감히 말하지 못하는데, 한종은 하찮은 내시로서 공공연히 부탁을 하되 조금도 꺼리지 않았다. 신영은 이름은 비록 재상이라고 하나 풍도와 절의를 찾아볼 수 없어 날마다 자신의 몸만을 보호하고 집안을 부유하게 하기를 일삼았다. 한종의 말을 듣고도 즉시 탄핵하지 않았으니 장차 저런 헌장(憲長)을 어디에 쓰겠는가. 한종이 말을 하면서도 꺼리지 않았던 것도 신영의 사람됨을 알고서 한 것이다. 사람을 가리지 않고 대관(臺官)의 장관에 앉혔으니 나라의 기강이 어떻게 세워지겠는가. 환관들이 교만하고 방자한 것은 조종조 이래로 오늘날보다 심한 적이 없었으며, 조정에 기강이 없음도 오늘날보다 심한 적이 없었다. 이와 같고서 나라가 망하지 않는 것을 아직 보지 못하였다.
예로부터 국가의 흥망이 모두 사습(士習)의 탐욕·청렴 여부에 달려있습니다. 전조(前朝)의 일을 가지고 말하여도 알 수 있습니다. 조종조에서는 지난날의 병통을 깊이 징계하여 후일의 화를 막고자 해서 모든 시행하는 정사가 사습에 대하여 급선무로 여기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세종(世宗)께서는 내관(內官)을 재상 집에 보내서 그 재상이 사치스러운가 검소한가를 살펴보시기도 하고, 사대문(四大門)에서 적간하기도 하였는데, 만일 물품등을 요구하는 서찰이 나오면 엄하게 죄를 다스렸습니다. 그렇다면 조종조에서 후일을 멀리 염려함이 지극하다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백여 년동안 탐욕스러운 풍습이 다소 누그러져서 선비들은 염치를 알게 되었고, 백성들은 생업에 편히 종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수십 년 이래로 탐욕스러운 풍습이 다시 성해지기 시작하여 날로 더욱 심해져서 관작(官爵)을 제수하는 데에도 모두 그 값이 있게 되었습니다. 이기(李芑)가 권력을 남용하기 시작한 뒤로부터 공로를 믿고 교만 방자하여 탐욕을 부리는 짓을 일삼아, 안으로는 관직을 제수해 주는 데 대한 뇌물을 받았으며, 밖으로는 방납(防納)의 이익까지 관장하여 그 탐욕스러움이 끝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온 나라 사람들이 통분해 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목숨을 부지한 것만도 다행이라 하겠습니다. 진복창(陳復昌)은 밖으로는 정직한 말을 빙자하고 안으로는 더러운 탐욕을 채워서, 여러 군현(郡縣)에서는 그의 요구에 응하여 바치는 물건이 궁중에 올리는 것과 다름이 없었으며, 조금이라도 만족스럽지 못한 점이 있으면 반드시 음해를 가하여 탐욕스러운 풍습을 양성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사대부 중에 탐욕스러운 무리들은 이를 다투어 서로 본받아서 부끄러워 할 줄을 모릅니다.
이제 그중에 특히 심한 것만을 거론해 보겠습니다. 전 부사(府使) 한지원(韓智源)은 본래 흉악한 사람으로써 탐욕을 부려 이웃 사람의 집을 빼앗으려고 하였는데, 그 주인이 허락하지 않자, 지평(持平)으로 있을 때에 그가 공조 판서 이명규(李名珪)의 첩을 간음하였다고 무함하여 장살(杖殺)하였습니다. 또 이웃 사람의 집터를 빼앗으려 하였으나 그가 주지 않자, 예조 판서 정사룡(鄭士龍)이 그와 가까운 친척이란 말을 듣고, 정사룡을 협박해서 결국 빼앗고 말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첨사(僉使)나 만호(萬戶)를 제수하여 주면서 공공연히 뇌물을 받았으며, 각사(各司)의 서리(胥吏)들을 위협하였으므로 그가 요구하는 것이 있으면 따르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또한 여러 고을에서 강요하여 받아냈으므로, 수령과 변장(邊將)들은 물건을 배에 싣고 말에 실어다가 바치며 혹시라도 남보다 뒤질까 두려워하였는데, 조금이라도 마음에 차지 않으면 논박하곤 하였습니다. 김세한(金世澣)이 전라 수사(全羅水使)가 되었을 때에 논박을 받은 것이 바로 한 예입니다. 몇 년 사이에 집 3채를 지었고 거리낌없이 방자하였으며 첩을 많이 두었는데, 이미 시집간 자라 할 지라도 그 용모가 아름답고 부유하다는 말을 들으면 또한 빼앗았으니, 수성수(秀城守) 검(儉)의 첩을 빼앗은 것이 그 한 예입니다.
장령(掌令) 허엽(許曄)은 성품이 본래 어두워 시비를 분변하지 못하며 마음 내키는 대로 제멋대로 행동합니다. 자기 집을 지으려고 평소 알지도 못하던 황해도 만호를 자기 집에 불러다가 재목을 수송해 오도록 요구하였습니다. 그 만호는 변통하여 마련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자신의 답답함을 어떤 재상집에 하소연하기도 하였습니다. 또 간의대 사령(簡儀臺使令)을 뽑아다가 그 집에 사역을 시키기도 했습니다. 사인(舍人)이 되었을 때는 예빈시(禮賓寺)의 하인으로서 북평관(北平館)의 고직(庫直)으로 있는 이를 불러다가 모직물을 무역하게 했는데, 자기 뜻에 맞지 않으면 즉시 구금하곤 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여러 고을에서 물건을 징수했던 탐역스러운 일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이감(李戡)은 허엽이 이조 좌랑이 되었을 때에 자기를 천거해 주지 않은 것에 대해서 원망을 품었다. 그때 마침 허엽의 종가(宗家)가 불에 타서 다시 집을 짓게 되었는데, 이감은 의심스러운 흔적을 찾아내 허엽을 몰아붙였다. 대사헌 윤춘년(尹春年)이 그 말을 믿고 허엽을 탄핵하려 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윤춘년에게 ‘허엽이 짓는 것은 종가이다. 의심스러운 흔적을 가지고 논박한다면, 한지원(韓智源)과 심전(沈銓)은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하니, 윤춘년은 ‘한지원과 심전은 참으로 죄가 있다 하겠거니와, 허엽은 사림의 명망을 받고 있으니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사람이 또 ‘그렇다면 명망이 있는 자만을 다스리고, 사람 축에 끼지도 못할 자들은 그대로 내버려 둔단 말인가?’라고 하니, 윤춘년은 대답을 못하고 말았다. 그 후 허엽을 논박할 때에 한지원을 함께 논박하였으나 심전은 논박하지 않았다. 하는 일이 이와 같고서야 어떻게 사람들의 마음을 만족하게 할 수 있겠는가.】
근래 조정에서는 바야흐로 역적을 【을사 사화 때에 죄를 받은 사람을 가리킨 것이다.】 토벌하는 법을 엄히 하느라 미처 탐욕스러운 풍조를 바로잡을 계획을 하지 못하였으므로 탐욕스러운 무리들이 부정하게 축재하는 것을 으레 보통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몸에 비교한다면 역적은 악성 종기와 같아서 곪아 터뜨린다면 살 수 있으나, 탐욕스러운 풍습은 원기(元氣)가 손상되는 것과 같아서 날마다 점점 허약해져 장차 구제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지금 만약 탐욕스러운 풍습을 통렬히 개혁하고자 한다면 그 현저하게 드러난 자부터 통렬히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지원은 관작을 삭탈하여 문외 출송하고 허엽은 파직시켜서 일벌 백계하소서.
대내(大內)의 화재는 심상한 재변이 아닙니다. 오늘날 해마다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다 유리(流離)하고 있는데다가 사대부들이 한없이 긁어 들여서 나라의 근본인 백성들이 흔들려 지탱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다시 백성들을 부려 대궐을 짓는다면, 백성들의 폐단을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제 삼공과 육경이 의논드린 대궐의 수리 절목(修理節目)은 상세하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신들의 소견 역시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섬시(司贍寺)에 보관되어 있는 면포(綿布)가 많기는 하나 어찌 유명 무실한 폐단이 없겠습니까. 각사의 선상(選上)128) 으로 인해 3개월마다 관원에게 지급해주는 대포(代布)는 【근수인(跟隨人)이 신역(身役) 대신 바치는 포(布)이다.】 그 수량이 4백 40여 동(同)에 이르는데, 금년 겨울부터 내년까지 지급할 것을 모두 계산하면 1천 7백 60여 동이니, 이것을 만일 반으로 줄인다면 8백여 동이 됩니다. 친구 중에 초상을 당한 자가 있으면 부의(賻儀)하고, 친척 중에 곤궁한 자가 있으면 구원해 주는데, 하물며 국가가 곤궁한 경우이겠습니까. 나라에 큰 재변이 있는데도 백성을 동원할 형편이 못되는 경우라면 그 지급을 절반으로 줄여서 국가를 돕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이는 본래 국가의 물건이니 신자(臣子)의 물건을 빼앗는 것은 아닙니다. 신자의 마음에 있어서도 또한 스스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보병(步兵)과 조례(皂隷)도 또한 선상의 예를 따라서 반으로 줄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배와 수레의 이익은 마땅히 국가가 주관해야 하는데, 의정부에서 점유하여 사사로운 물건을 삼고 있으니 이미 온당하지 못합니다. 하물며 나라에 큰일이 있는데도 사용할 수 없다면 더욱 온당치 못합니다. 선상은 형조에서, 조례와 보병은 병조에서 자세히 살펴서 시행하게 하시고, 배와 수레는 공조와 한성부(漢城府)에 소속시키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박한종을 삭탈 관직하는 것은 너무 무거우니 파직만 시키도록 하라. 한지원과 허엽에 대한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한지원은 이기와 윤원형에게 종처럼 아첨하여 여러 차례 큰 옥사를 일으켜 사림(士林)을 해쳤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눈을 흘겼다. 안명세(安名世)의 죽음이나 유감(柳堪)의 귀양은 모두 한지원이 모함한 것이다. 이때에 이르러 윤춘년은 사림이 통분하고 있음을 알고, 우선 탐욕을 부린다고 탄핵한 것이다.】 다만 문외 출송하는 것은 조종조의 법이 아니므로 윤허하지 않는다.
선상의 일에 대해 말하겠다. 금년에는 봄부터 재변을 만나 이미 조관(朝官)의 녹봉을 감하였는데, 하늘이 또 큰 재해를 내려 전우(殿宇)가 모두 불타버렸으니 어찌 이와 같이 부끄럽고 두려운 일이 있겠는가. 가난한 조관들은 아직도 그 선상을 바라고 있을 터인데, 또 이것을 감하게 한다면 더욱 미안한 일이다. 마땅히 대신과 의논하여 처리하겠다. 배와 수레에 대한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영의정 심연원이 의논드리기를,
"전우가 모두 불타버려 지금 중수를 해야 되는데, 비용은 많이 들고 나라의 저축은 많지 않아서 제대로 조치할 수 없을까 염려됩니다. 대소(大小) 조관들에게 분아(分兒)129) 하는 선상(選上)을 반으로 감하여 국용을 보충하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다만 품계가 낮은 관리들은 녹봉이 본래 박하고 근수(跟隨) 또한 없앨 수 없습니다. 3품(品) 이상에게만 반으로 줄이는 것이 옳겠습니다. 다만 《대전(大典)》에 실려 있는 각사의 근수노(跟隨奴)는 그 수의 많고 적음이 같지 않으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참작해서 감하게 하소서. 보병을 나누어 배정할 관사는 그리 많지 않으나 선상의 예를 따라 시행하시고, 조예는 《대전》에서 예우(禮遇)의 등급에 따라 나누어 배정하였으니, 다시 감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11책 15권 27장 B면【국편영인본】 20책 159면
- 【분류】정론(政論) / 왕실-종사(宗社) / 왕실-궁관(宮官) / 군사-금화(禁火) / 사법(司法) / 역사-사학(史學) / 윤리(倫理) / 신분(身分)
- [註 127]관서(官署) : 관원의 서명.
- [註 128]
선상(選上) : 각 고을에서 노비 등을 뽑아 올리는 것.- [註 129]
분아(分兒) : 관원에게 연례에 따라 물품 등을 나누어 주던 일. 분하(分下).○辛酉/兩司啓曰: "火出宮禁, 延燒殿宇, 列聖居處笑語之所, 一夜殆盡, 一國臣民, 孰不隕淚? 欲得致此之人, 以定其罪, 臣子之心, 所不得自已者也。 火之始燃, 非天所降, 非地所出, 則其所以致之, 而當受其罪者, 必有其人矣。 下獄推鞫, 竟不得其人, 則可謂國有紀綱乎? 不得不重罪都檢擧之人, 一以示重大其事之意, 一以使之摘發出火之人而自明, 一以正總治無狀之罪, 於法不得不爾, 故臣等將中外公論以啓。 漢宗不得辭其罪責之意, 而上敎以爲, 漢宗盡心國事, 而爲人所欲害, 使面質發言之人, 又以劫䝱搢紳之語, 皆歸不實之地。 臣等雖無狀, 豈信往來行言, 而使盡心國事者, 枉被構陷, 以負聖明乎? 今玆之變, 旣爲非常, 而竟不得出火之人, 則欲重治都檢擧之人, 以正國法, 非有他意也。 伏覩上敎, 有不信臺諫之言, 庇護漢宗之意, 臣等不勝悶鬱。 且漢宗之招權作威, 刦䝱搢紳之事, 只擧一隅, 可反三隅。 求請林木於德源府使, 及其見捉御史, 被推於憲府也。 乃遣司謁 【宮禁傳語之官。】 於其時大司憲申瑛曰: ‘其被捉件記, 無印信無官署。 如此之類, 曾有勿論之時。 乞須分揀’ 云。 大司憲, 一國紀綱之長官, 而無所忌憚, 公然使人請囑, 乃欲惟其言之是從, 則其他使其氣焰於搢紳, 擧此可推矣。 請勿留難, 削奪官爵。"
【史臣曰: "自古人主, 寵任宦寺, 惟言是從, 不知權柄之下移, 至於廢立人主, 亡其國家, 龜鑑昭昭, 可以懲戒, 而猶不之畏憚, (宜)不痛心? 漢宗之驕橫逞惡, 無所不至, 上以漢宗, 有乙巳之功, 寵任無異大臣, 漢宗尤肆驕恣之心。 大司憲總朝廷綱紀之任, 雖公卿、搢紳之間, 尙有敬憚不敢言者。 漢宗以閹寺之微者, 公然請囑, 略不畏戢。 申瑛名雖宰相, 風節掃如, 日以謀身富家爲事, 雖聽漢宗之言, 不卽擧劾, 將焉用彼憲長哉? 漢宗之發言而不忌者, 亦知瑛之爲人而發也。 不擇人而置諸臺官之長, 綱紀何由而立乎? 宦寺驕肆之患, 自祖宗以來, 未有甚於今日, 朝廷之無紀綱, 亦未有甚於今日。 如是而國不亡者, 臣未之見也。"】
自古以來, 國家興亡, 皆由於士習之貪廉。 以前朝之事言之, 亦可知矣。 祖宗朝深懲前日之患, 欲防後日之禍, 凡所施爲, 莫不於此焉是急, 世宗或遣內官于宰相家, 察其豐約, 或摘姦于四大門, 若獲徵索書簡, 則治罪焉。 然則祖宗之遠慮, 可謂極矣。 百餘年間, 貪風少戢, 士知廉恥, 民得安業, 自數十年以來, 貪風復熾, 日以益甚, 除官拜爵, 皆有其價。 自李芑專權之後, 恃功驕恣, 貪黷爲事, 內納除官之賂, 外管防納之利, 無有紀極, 一國之人, 莫不痛憤。 得保首領, 可謂幸矣。 陳復昌外藉正直之言, 內濟貪濁之慾, 列郡應求, 無異上供, 少有不愜, 必行陰害, 釀成貪習, 士大夫貪濁之輩, 爭相慕效, 莫之知愧。 今特擧其已甚者而論之, 前府使韓智源, 本以兇悖之人, 濟以貪黷之心, 欲奪隣人之家, 其主不許, 爲持平時, 誣以奸工曹判書李名珪之妾, 杖殺之。 又欲奪隣人之家基, 而不給, 聞(禮書)〔禮曹〕 判書鄭士龍爲其切親, 恐動士龍, 亦奪之。 除拜僉使、萬戶, 公然受賂, 㤼制各司吏胥, 凡有所求, 莫不影從。 徵索列郡, 守令、邊將船輸駄載, 猶恐居後, 少不如意, 駁擊隨之。 金世澣爲全羅水使時被駁, 卽其一也。 數年卽造三家, 縱恣無忌, 多占姬妾, 雖已嫁夫者, 聞其容貌之美、家産之富, 則亦奪之。 奪秀城守 儉之妾, 亦其一也。 掌令許曄, 性本昏暗, 不辨是非, 徑情直行, 惟意所欲, 欲造其家, 招黃海道萬戶, 平生不知者於其家, 責輸材木。 其萬戶恐不能辦, 訴悶於有一宰相之家。 簡儀臺使令, 私役于家。 爲舍人時, 招禮賓寺下人之爲北平館庫直者, 使貿毛物, 不稱其意, 輒爲囚禁。 其他徵索列郡, 貪黷之事, 不可勝言。 【李戡以許曄爲吏曹佐郞時, 不薦已銜之。 適曄之宗家失火改營, 因摘其疑似之迹以搖嘩。 大司憲尹春年信其言, 而將彈之, 有人謂春年曰: "曄之所營者, 宗家也。 因疑似之迹而論之, 則如韓智源、沈銓置之於何處?" 春年曰: "韓、沈固有罪, 曄負士林之名, 不宜爾也。" 其人曰: "然則只治有名者, 而不齒於人者, 縱其所爲耶?" 春年不能答。 其後竟論曄, 附以智源, 而銓則不論。 所爲若此, 其何以厭人之心也?】 近來朝廷, 方嚴討賊 【指乙巳被罪人。】 之法, 未暇戢貪之計, 故貪濁之輩, 例以爲常。 比之於人, 則逆賊猶毒腫也。 決而潰之, 則可生, 貪風猶元氣之傷也。 日漸羸弱, 將不可救。 会若欲痛革貪風, 則不可不隨其現著者而痛治之。 請韓智源削奪官爵, 門外黜送, 許曄罷職, 懲一勵百。 大內之火, 旣非尋常之災。 今者連年飢饉, 民盡流離, 加之以士大夫徵索無藝, 邦本已搖, 將不能支。 今若更用民力, 以之造成, 則生民之弊, 不可勝言。 昨日三公、六卿所議修理之節目, 可謂盡矣。 然臣等所見, 亦不可不陳。 司贍寺所儲綿布之數雖多, 豈無有名無實之弊乎? 各司選上三朔所給代布之數, 【根隨人納布, 以代其役。】 至於四百四十餘同, 自今冬至明年幷計之, 則一千七百六十餘同, 若減半則八百餘同也。 朋友有喪則賻之, 親戚有窮則救之。 況國有大災, 而民力不可用, 則豈可不減其半而助之乎? 此本是國家之物, 非奪臣子之物也。 其於臣子之情, 亦有所不能自已者也。 況步兵、皂隷, 亦不可不依選上例而減半也。 且舟車之利, 國家當主之, 而議政府占爲私物, 已爲未便。 況國有大事, 亦不得役, 尤爲未便。 請選上則刑曹, 皂隷、步兵則兵曹商確施行, 舟車則屬之於工曹、漢城府。" 答曰: "朴漢宗削職過重, 只罷。 韓智源、許曄事, 如啓。【智源奴 〔事〕 李芑、尹元衡, 屢起大獄, 傷害士林, 人皆側目。 如安名世之死, 柳堪之竄, 皆智源陷之也。 至是尹春年知士林之憤, 姑以貪婪劾去之。】 但門外黜送, 非祖宗朝法, 故不允。 選上事, 今年自春遇災, 已減朝官祿俸, 而天又降大戾, 殿宇焚蕩, 安有如此慙懼之事乎? 貧寒朝官則猶望其選上, 而又使減之, 尤爲未安。 當議于大臣而處之。 舟車事如啓。" 領議政沈連源議: "殿宇焚蕩, 今當修繕, 爲費甚鉅。 國儲不敷, 恐不能措辦。 大小朝官分兒、選上減半, 以補其用, 在所當然, 但秩卑者祿俸本薄, 根隨亦不可闕。 自三品以上, 令減其半爲當。 但《大典》所載各司根隨奴, 多寡不同, 令該曹, 參酌裁減。 步兵分定之司不多, 然亦依選上例施行, 皂隷則《大典》, 以儀章數分定, 更不可減。" 從之。
- 【태백산사고본】 11책 15권 27장 B면【국편영인본】 20책 159면
- 【분류】정론(政論) / 왕실-종사(宗社) / 왕실-궁관(宮官) / 군사-금화(禁火) / 사법(司法) / 역사-사학(史學) / 윤리(倫理) / 신분(身分)
- [註 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