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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실록14권, 명종 8년 4월 16일 신묘 2번째기사 1553년 명 가정(嘉靖) 32년

윤계령 등이 남소문을 열기를 청하는 상언을 올렸으나 받아들이지 않다

정원이 아뢰기를,

"전번에 운계령(雲溪令) 등이 남소문(南小門) 열기를 청하는 일로 상언(上言) 【그 상언에 ‘도적이 폐문(閉門)을 이용하여 성 밖에 은닉하였다가 밤이 되면 성을 넘어와서 도적질을 하니 남소문을 여소서.’ 하였다.】 하였으므로 지금 일기(日記)를 상고하였더니 이렇습니다. 예종(睿宗) 원년(1469)에 경연(經筵)에서 진강(進講)한 후에 상이 새 남소문을 폐쇄하는 것이 온편한지의 여부를 물으니, 임원준(任元濬)이 ‘도읍(都邑)을 정할 당시 모든 규모(規模)를 정하는데 어찌 자세히 헤아리지 않았겠습니까마는 역시 이 문을 설치하지 않았고, 또 음양가(陰陽家)들도 손방(巽方)을 매우 꺼립니다. 처음 이 문을 세워 연 뒤에 의경 세자(懿敬世子)가 훙서(薨逝)하였으니, 음양가의 설이 비록 믿을 만한 것은 못되지만 이 문은 폐쇄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폐쇄하라고 명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조종조(祖宗朝)에서 어찌 우연하게 상량(商量)하여 폐쇄하였겠는가. 그 상언은 받아들이지 말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0책 14권 46장 B면【국편영인본】 20책 130면
  • 【분류】
    정론(政論) / 왕실-종사(宗社) / 사상(思想)

    ○政院啓曰: "前者雲溪令等, 以南小門請開事, 上言矣。 【其上言曰: "盜賊利其閉門, 隱匿城外, 夜則踰城作賊。 請開南小門。】 今考《日記》, 則睿宗元年經筵進講後, 上問新南小門閉塞便否, 任元濬啓曰: ‘定都之初, 豈不經營審度, 而亦不設此門。 且陰陽家深忌巽方。 初開此門之後, 懿敬世子薨逝。 陰陽之說, 雖不足信, 然此門可塞。’ 於是上命塞之。 今考《日記》則如此。" 傳曰: "祖宗朝豈偶然商量而閉塞乎? 其上言, 勿用之。"


    • 【태백산사고본】 10책 14권 46장 B면【국편영인본】 20책 130면
    • 【분류】
      정론(政論) / 왕실-종사(宗社) / 사상(思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