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경 안수가 소수 서원에 서책을 하사하도록 청하다
상이 주강에 나아갔다. 설경(說經) 안수(安璲)가 아뢰었다.
"경상도 풍기군(豊基郡)에 소수 서원(紹修書院)이 있는데, 이는 고려 사람 안유(安裕)가 【안유(安裕)의 초명은 향(珦)이며 죽계인(竹溪人)으로 학행(學行)이 있었다. 죽계는 지금 풍기군에 속해 있다. 동지사(同知事) 주세붕(周世鵬)이 그 고을 군수로 있을 때 그곳에 사당을 세우고 또 그 곁에 서원을 지어 유생들로 하여금 모여서 학문을 닦게 하였다.】 살던 고장입니다. 도내의 유생들이 모두 모여들어 마치 주문공(朱文公)019) 의 백록동(白鹿洞)과 같습니다. 그런데 뜻 있는 선비들이 제반 서책을 박람하고자 하나 궁벽한 시골이라 서책이 귀하여 선비들에게 아쉬움을 주고 있습니다. 서책을 간행할 때 한 질씩 반사(頒賜)하소서."
사신은 논한다. 서원의 명칭이 옛날에는 없었다. 남당(南唐) 때 이발(李渤)이 은거했던 여산(慮山) 백록동에다가 학궁(學宮)을 창건하고 스승과 생도를 두어 가르쳤는데, 송조(宋朝)에서도 그대로 답습하였다. 그러나 중엽까지는 아직 성하지 못하여 천하에 오직 네 군데의 서원020) 이 있을 뿐이었다. 도강(渡江) 후부터는 전쟁으로 몹시 어수선한 때를 당하고 있었어도 민(閩)·절(浙)·호(湖)·상(湘) 사이에 사문(斯文)이 크게 흥기하고 사학(士學)이 날로 번창하였으므로 전해가며 서로 본받아 곳곳에 서원을 설치하게 되었다. 호원(胡元)이 찬탈하고 나서도 오히려 여기에 먼저 힘써야 할 것을 알아 더욱 많이 수거(修擧)하였다. 대개 은거하여 지조를 지키는 선비와, 도를 강론하고 학업을 닦는 무리와, 번잡한 곳을 피하고 성시(城市)를 멀리하는 자와, 한가함을 생각하여 조용한 곳으로 가는 자와, 성현을 배워 그 도를 구하는 자와, 의리를 궁구하여 덕행을 쌓는 자가 모두 서원에서 득력(得力)하여 현재(賢才)가 배출, 성대하게 쓰여지고 있으니, 인재를 양성하는 도리에 있어 어찌 도움이 적다고 할 수 있겠는가. 우리 나라의 교육 방법은 한결같이 중국의 제도를 따라 서울에는 성균(成均)·사학(四學)을 두었고 외방에는 향교를 두었으니 참으로 아름답다 하겠다. 그러나 유독 서원의 설치에 대해서는 전에 들어보지 못하였었으니, 이는 실로 커다란 흠전(欠典)이 아닐 수 없다. 지난번 군수 주세붕이 개연히 여기에 뜻을 두어 사람들의 조소와 비방을 무릅쓰고 선현이 은거하던 옛땅에 처음으로 서원을 세웠으니, 옛날 학문을 일으키던 의의에도 부합됨은 물론 옛 군자에 조금도 뒤질 것이 없다. 뒤에 군수 이황(李滉)이 더욱 심력을 다하면서 ‘일이 왕명(王命)을 거치지 않고 이름이 국승(國乘)에 기재되지 않으면 사방의 관청(觀聽)을 용동시키고 대중의 의혹을 풀어 일국의 모범이 되게 할 수 없고 끝내는 쇠퇴하게 될 것이다.’고 여겨 곧 방백(方伯)에게 알리고 조정에 상문(上聞)함으로써 광채를 더욱 빛나게 하고 규모를 더욱 원대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위로는 백록(白鹿)·고정(考亭)을 짝하고 아래로는 남계(藍溪)·경현(景賢)의 축조가 있어, 선정(先正)이 있던 청수(淸修)한 땅을 다투어 흠모하게 함으로써 학자들이 의귀하게 하였으니, 문(文)을 높이는 성조(聖朝)의 교화를 천양한 것이 어찌 적겠는가. 그러나 교화를 높이고 인재를 기르는 그 근본은 오직 임금에게 달려 있다. 진실로 어진이를 좋아하고 착한 일을 즐기는 정성이 있지 않거나, 또 몸소 실천하고 마음속으로 체득하여 미루어 나가지 않는다면, 서적의 반사나 편액(扁額)의 하사는 하나의 형식일 뿐이다. 그러므로 나태한 데 이르지 않기가 어려운 것이다.
- 【태백산사고본】 10책 13권 24장 B면【국편영인본】 20책 79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역사-전사(前史) / 역사-사학(史學) / 역사-고사(故事) / 출판(出版)
○庚戌/上御晝講。 說經安璲曰: "慶尙道 豐基郡, 有紹修書院, 高麗人 安裕之故居也。【裕, 初名珦, 竹溪人, 有學行。 竹溪, 今屬豐基郡。 同知事周世鵬爲郡守(日) 〔時〕, 立祠其地, 又起書院於其側, 令儒生聚學焉。】 一道儒生濟濟相聚, 如朱文公之白鹿洞。 有志之士欲博覽諸書, 而窮鄕下邑, 簡策稀罕, 必貽有志之嘆。 請於印冊之時, 各頒一件。"
【史臣曰: "書院之名, 古未有也。 南唐之世, 就李渤舊隱廬山 白鹿洞, 創立學宮, 置師生以敎之, 宋朝因之。 其在中葉, 猶未盛, 天下只有四書院。 渡江而來, 雖當百戰搶攘之日, 而閩、浙、湖、湘之間, 斯文大興, 士學日盛, 轉相效慕, 處處增置。 胡元竊據, 猶知先務, 益有修擧。 蓋隱居求志之士, 講道肄業之儔, 厭煩囂而遠城市, 思寬閑而就寂寞, 學聖賢而求其道, 閱義理而蓄其德者, 率皆得力於書院, 賢才輩出, 蔚爲世用, 其於作成之道, 豈少補哉? 我東方敎學之規, 一遵華制, 內有成均、四學, 別有鄕校, 可謂美矣, 而獨書院之設, 前未有聞, 此實大欠典也。 頃者郡守周世鵬, 慨然有意於此, 冒衆笑排群謗, 卽先賢舊居而首建焉, 其副古興學之意, 無讓於古君子, 而後郡守李滉, 尤眷眷焉盡其心, 以爲事不經宣命, 名不載國乘, 則無以聳四方之觀聽, 定衆人之疑怪, 爲一國之效法, 而終必至於衰墜, 乃白諸方伯, 聞諸朝廷, 賁飾其光彩, 悠遠其規模。 上有以儷白鹿、考亭之美, 下有以啓藍溪、(敬賢)〔景賢〕 之作, 使先正淸修之地, 爭相欣慕, 學者有歸, 其所以闡揚聖朝右文之化者, 豈淺淺乎? 然崇敎化育人材, 其本在於一人。 苟非有好賢樂善之誠, 而又有躬行心得以推之, 書籍之頒, 扁額之賜, 特爲一文具而已。 其不至於怠忽而陵替也難矣。"】
- 【태백산사고본】 10책 13권 24장 B면【국편영인본】 20책 79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역사-전사(前史) / 역사-사학(史學) / 역사-고사(故事) / 출판(出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