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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실록 11권, 명종 6년 2월 25일 계미 2번째기사 1551년 명 가정(嘉靖) 30년

대신을 불러 양계에 감군의 파견, 숙의의 선발 등을 의논케 하다

좌의정 심연원(沈連源), 우의정 상진(尙震), 이조 판서 윤개(尹漑), 공조 판서 윤사익(尹思翼), 병조 판서 안현(安玹), 좌참찬 박수량(朴守良), 판윤 이명규(李名珪), 호조 판서 송세형(宋世珩)이 부름을 받고 빈청(賓廳)에 나아가니 전교하기를,

"양계에 감군 어사(監軍御史)를 보내는 일은 전일에 대신들이 모두 사체에 해로움이 있다고 했기 때문에 보내지 않았다. 이번에 첨사와 만호 등이 군졸을 학대함이 너무 심하다 하니 다시 의논하도록 하라."

하고, 자전(慈殿)이 대신들에게 전교하기를,

"두 숙의(淑儀) 【정 숙의(鄭淑儀)와 신 숙의(申淑儀)이다.】 가 입궁(入宮)한 지 벌써 3년이 되었으나 아직도 왕의 자녀(子女)가 없다. 전례(前例)에도 숙의를 셋씩 둔 때가 있었으니 숙의를 한 명 더 선발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였다. 심연원 등이 회계하기를,

"숙의의 일은 《법전(法典)》에 실려 있으니, 전교가 지당하십니다. 그리고 감군 어사에 대한 일은 의논하여 아뢰겠습니다."

하고, 심연원·상진·윤개·이명규가 의논드리기를,

"헌부에서 아뢴 것을 보니, 바로 현재의 병폐에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양계의 사정은 다른 도와 같지 아니하여 각 고을과 각 역(驛)이 모두 잔폐(殘弊)해 있으며 더구나 각 진보(鎭堡)가 깊은 산골에 설치되어 서로의 거리가 동떨어져 있고 한 고을에 진보가 많은 데는 6∼7개소이고 적은 데에도 4∼5개소 이상입니다. 심지어 강계(江界)출참(出站)045) 은 지공(支供)하는 곳이 20여 군데나 되는데, 만약 어사가 두루 돌아다니면서 단속하기 위하여 계속 순환한다면 각 고을이나 역에서 그 폐단을 견디어내기가 어려울 것이니 양계에는 결코 어사를 보낼 수가 없습니다. 평사(評事)는 시종(侍從)이나 대간(臺諫)을 역임했던 사람으로 선택하여 파견하고, 부사(府使)와 판관(判官)도 이따금 명망(名望)이 있는 문관(文官)을 선택해 보내서 변장(邊將)으로 하여금 두려워하는 바가 있게 하고 본받게 한다면 비록 어사를 보내지 않더라도 크게 유익함이 있을 것입니다."

사신은 논한다. 상진(尙震)은 무능하고 연약한 사람이다. 그가 평생 한 일 중에 취할 만한 학식이나 쓰일 만한 재능은 없었고, 오직 시세(時勢)에 동조하여 구차하게 세상과 합류하는 것으로 한평생 용공(用功)하는 기반을 삼았다. 그래서 정유년046)을사년047) 간에 비록 사림(士林)의 화(禍)가 있었으나 상진의 공명(功名)은 변함이 없었다. 그래서 상진을 모르는 자는 모두들 ‘관후(寬厚)한 장자(長者)로서 대체(大體)를 지키려고 힘쓰는 사람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른바 관후하다는 것은 곧 무능함을 말함이요, 이른바 대체라는 것은 시비(是非)의 결단과 선택이 없음을 말함이다. 이와 같았기 때문에 오래도록 정승 자리에 있었으나 한가지도 건의하여 밝힌 일이 없었고 오직 임금의 뜻을 어기지 않고 남의 노여움을 사지 않는 것만을 제 한 몸의 훌륭한 덕(德)으로 삼아 녹봉만 먹으면서 부귀(富貴)를 독차지하였다. 그리하여 한때의 용렬한 사람과 속된 선비로서 녹(祿)을 지키고 몸이나 보전하려는 자들은 모두 그를 본받아 덕이 있는 재상이라고 일컬으면서 감탄해 마지않았다. 그러고 보면 상진은 한때에만 쓸모가 없는 것이 아니라 실상 나라의 풍습도 그르쳤으니 그와 같은 자를 어디에 쓴단 말인가? 진실로 공자(孔子)가 말한 향원(鄕原)같은 자이다.

하니, 전교하기를,

"좌의정과 우의정의 의논에 따라 명망 있는 문관을 육진(六鎭)에 교체해 보내어 이웃 고을로 하여금 두려워하는 바가 있게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9책 11권 25장 B면【국편영인본】 20책 13면
  • 【분류】
    정론(政論)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군사(軍事) / 왕실-비빈(妃嬪) / 역사-사학(史學) / 인물(人物)

  • [註 045]
    출참(出站) : 사신(使臣)·감사(監司) 등을 영접하고 전곡(錢穀)·역마(驛馬) 등을 지공하기 위하여 그들이 숙박하는 가까운 역(驛)에서 사람을 보내던 일을 말한다.
  • [註 046]
    정유년 : 1537 중종 32년.
  • [註 047]
    을사년 : 1545 인종 1년.

○左議政沈連源、右議政尙震、吏曹判書尹漑、工曹判書尹思翼、兵曹判書安玹、左參贊朴守良、判尹李名珪、戶曹判書宋世珩, 承召詣賓廳。 傳曰: "兩界遣監軍御史事, 前日大臣, 皆以爲有妨於事體云, 故不得遣矣。 今者僉使、萬戶等, 侵虐軍卒已甚, 其更議之。" 慈殿傳于大臣等曰: "二淑儀 【鄭淑儀、申淑儀也。】 入宮, 今已三年, 迄無王子女。 前例亦有三淑儀之時。 加選一淑(議)〔儀〕 何如?" 連源等回啓曰: "淑(議)〔儀〕 事, 載在法典, 傳敎至當。 監軍御史等事, 當議而啓之。" 連源名珪議: "觀憲府所啓, 正中時病。 然兩界事勢, 與他道不同, 各官各驛, 擧皆殘弊。 況各鎭堡設於幽深山谷, 相距窵絶, 且一邑之地, 鎭堡多者六七, 少不下四五。 至於江界出站, 支供之地, 二十餘處。 若御史遍歷紏檢, 循環不已, 則各官各驛, 其弊難支。 兩界御史, 決不可遣也。 評事以侍從、臺諫出入之人差遣, 府使、判官, 亦間間擇有名望文官差送, 使邊將, 有所畏戢, 亦以矜式, 雖未遣御史, 亦大有益。"

【史臣曰: ", 一無能罷軟之人也。 其平生所爲, 無學識可取, 無才華可用, 唯以隨時俯仰, 苟合於世, 爲一生用功之地。 丁酉、乙巳之間, 雖有士林之禍, 之功名自若也。 不知者皆曰: ‘寬厚長者, 務持大體。’ 所謂寬厚者, 此乃所謂無能也; 所謂大體者, 此乃所謂模稜也。 夫如是, 故作相之久, 無一建明之事, 唯以不忤主意, 不犯人怒, 爲一己之賢德, 徒爲伴食, 以專富貴。 一世之庸人、俗士, 持祿保身者, 咸祖述之, 稱爲有德宰相, 嗟嘆不已。 然則, 非但無用於一時, 實誤國家之習尙, 如者將焉用之? 誠孔子所謂鄕原者乎!"】

傳曰: "依左右相議, 以有名望文官, 交差六鎭, 使隣官有所畏戢。"


  • 【태백산사고본】 9책 11권 25장 B면【국편영인본】 20책 13면
  • 【분류】
    정론(政論)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군사(軍事) / 왕실-비빈(妃嬪) / 역사-사학(史學) / 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