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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실록 11권, 명종 6년 1월 12일 경자 5번째기사 1551년 명 가정(嘉靖) 30년

충훈부 도사 정현이 올린 정업원의 역사와 도승법을 정지하라는 상소

충훈부 도사(忠勳府都事) 정현(鄭礥)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해마다 재이(災異)가 계속되어 장마가 아니면 가뭄이 들고 가뭄이 아니면 황충(蝗蟲)이 생겨서 백성들이 날로 곤궁한 실정인데, 정업원(淨業院)의 토목 공사는 겨울이 지나도 정지하지 않고 있으니 얼고 굶주린 역졸(役卒)들이 구렁에 쓰러지지 않은 자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또다시 도감(都監)을 설치하여 양정(良丁)을 찾아내고 있으니 그 환난(患難)에 대비하고 먼 앞날을 염려함이 지극하다 할 수 있으나, 집집마다 조사 적발할 즈음에 아전들이 그것을 구실로 온갖 간사한 행위를 다할 것이므로 한정(閑丁) 하나를 얻어 내자는 일로 인하여 온 족속과 온 이웃이 도망하고 흩어지는 사례를 이루 다 기록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온 나라의 민심(民心)을 소요시켜 국가의 혼란을 부르는 것입니다.

군정(軍丁)의 수효가 줄어드는 것은 오로지 중들이 많아졌기 때문이지 양정들은 한 사람도 한가롭게 노는 자가 없습니다. 가반당(假伴倘)006) ·고공(雇工)이라는 이름으로 재상(宰相)과 품관(品官)에게 의탁해 있는 자도 있고, 서리(書吏)라는 이름으로 의정부(議政府)나 이조(吏曹)에 과람하게 속해 있는 자도 있고, 공장(工匠)·조례(皂隷)라는 이름으로 제사(諸司)에 의탁해 있는 자도 있고, 봉족(奉足)007) ·솔정(率丁)008) 이라는 이름으로 외람되게 이전(吏典)009) 에 소속된 자도 있습니다. 이들이 비록 공가(公家)에는 도움이 없으나 그 한 개인에 있어서는 모두 사역(使役)되는 바가 있고 또 문적(文籍)도 있으니, 해사(該司)와 주읍(州邑)으로 하여금 그 문안(文案)에 의거하여 정군(正軍)을 옮겨 정하게 한다면 가만히 앉아서 수만(數萬)의 무리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인데, 어찌 굳이 이를 전담하는 국(局)을 설치해야만 양정을 찾아낼 수 있겠습니까. 만약 부득이하다면 모름지기 한정을 찾아내기 위해 설치한 국을 중들을 찾아내는 국으로 삼아서 놀고 먹는 무리들을 모두 찾아내어 환속(還俗)하게 한다면 민심이 안정되고 군액(軍額)도 증대될 것이니, 균역(均役)의 본의도 여기에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를 빙자하여 선교 양종(禪敎兩宗)의 법을 다시 세워서 사방의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으며, 시종·대간과 태학생(太學生)들이 번갈아 글을 올려 그 부당함을 고집하는데도 전하께서는 들은 척도 하지 않으십니다. 전하께서 이 나라를 함께 지켜갈 사람은 오직 대간·시종과 사림(士林)들 뿐인데 대간이 안된다 하고 시종이 안된다 하고 사림도 또한 안된다고 한다면 이는 곧 온 나라의 공의(公議)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여러 사람의 뜻을 거부하고 올바르지 못한 법을 강행하시니, 실망하지 않는 신민(臣民)이 없습니다. 도승(度僧)의 조항이 비록 조종조에서 세운 것이라고 하나 《경국대전(經國大典)》의 법은 마침 불교를 떠받들고 믿던 때에 만든 것이므로 우연히 한 조항이 실린 것이지 조종조에서 경상(經常)으로 여겨 물려 준 법은 아닙니다.

옛날의 제왕(帝王)이 불교를 숭상하다가 혼란을 빚거나 패망하게 된 사례가 옛 기록에 소상하게 실려 있습니다. 당(唐)나라 신하 한유(韓愈)의 불골표(佛骨表)를 굳이 이제 다시 거론할 필요 없이 우리 나라의 일만 가지고 아뢰겠습니다. 세종(世宗) 만년(晩年)에 처음으로 내불당(內佛堂)을 지었으나 몇 해 안되어 세종이 승하하셨고 이어 비운(否運)에 걸려 종묘 사직(宗廟社稷)이 거의 기울어질 뻔하였습니다. 세조(世祖)께서 중흥(中興)하시어 영준(英俊)들을 총망라하고서 남은 여가를 즐기기 위하여 서울 안에 큰 절[伽藍]을 창건하고 여러 산의 절들도 휘황하게 중수(重修)하였으나 누리신 복조(福祚)가 길지 아니하였으며, 덕종(德宗)은 일찍 동궁(東宮)을 떠나셨고 예종(睿宗)은 왕위(王位)에 계신 것이 1년이 못되었으니, 불공(佛供)의 효험이 없음을 이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성종(成宗)께서는 문(文)을 소중히 여기고 학교를 일으키셨으며 이교(異敎)의 폐단을 없애고자 하셨으나 정희 왕후(貞熹王后)010) 께서 자전(慈殿)에 계셨기 때문에 감히 세조의 제도를 갑자기 폐지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종 공희 대왕(中宗恭僖大王)께서는 일찍이 불교를 숭상하지 않았으나 40년 동안이나 몸소 태평지치(太平之治)를 이룩하셨으니, 이는 전하께서 환하게 아시는 바입니다. 지금 크고 작은 사찰(寺刹)에 모두 푯말을 세워 사람들을 출입하지 못하게 하는데도 향화(香火)를 바치고 복을 비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고 무지한 중들은 날로 교만 방자하여 말마다 내지(內旨)라고 일컫고 일마다 반드시 본궁(本宮)을 내세우고 있으니, 그것이 무슨 정책입니까? 아, 이륜(彝倫)을 지키는 풍속을 몰아다가 무부 무군(無父無君)의 지경에 빠뜨리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신들이 밤낮으로 눈물을 삼키며 전하를 위해 깊이 애석해하는 것입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성렬 인명 대왕 대비 전하(聖烈仁明大王大妃殿下)011) 께서 새 정사(政事)를 보양(輔養)하심이 광명 정대(光明正大)하였으며 누차 윤음(綸音)을 내리시되 그 말씀의 뜻이 간곡하므로 대소(大小)의 신하들이 감격하여 추대하지 않는 자가 없으니, 그 ‘여중(女中)의 요순(堯舜)’이란 칭호를 송(宋)의 선인후(宣仁后)012) 만이 독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불교를 숭상하는 한 가지 일에 만은 현혹됨을 면하지 못하시니 성덕에 큰 흠이 될까 두렵습니다. 구언(求言)하는 전교가 비록 내려지기는 하였으나 봉장(封章)을 올려 바른 말로 과감하게 논하는 자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그것이 어찌 전하의 성의가 미덥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이 지난날 상중(喪中)에 있을 적에 들은 일입니다만, 어떤 조신(朝臣)이 상소하여 논했는데 【연전(年前)에 성균관 박사(成均館博士) 양응태(梁應鮐)가 정업원(淨業院)의 일로 상소하였으므로 이 말을 한 것이다.】 전하께서는 ‘입이 있다고 사람마다 모두 나랏일을 말한다면 나랏일이 그르쳐질 것이다.’라고 하셨다 합니다. 간쟁(諫諍)하는 말을 듣기 싫어하고 거부하신 자취가 현저하게 밖으로 나타났으니, 그 한 마디가 충분히 천하의 입을 막을 만합니다. 옛날에는 간관(諫官)이 따로 없어 공인(工人)·상인(商人)·천례(賤隷)들도 모두 말할 수가 있었는데, 이는 아랫사람들의 심정을 통하게 하여 중론(衆論)을 채택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말한 것이 이치에 합당하다면 어찌 그 직임이 아니라 하여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구수담(具壽聃)·진복창(陳復昌)은 근래에 언책(言責)을 맡은 자였습니다. 각각 대간의 장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악한 일을 서로 도와서 마침내는 은총(恩寵)을 저버렸으니 어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요즈음 태양이 빛을 발하지 못하고 지도(地道)도 안정되지 못하여 흙비와 눈이 내리는가 하면 북풍이 거세게 불고 흰 무지개가 달을 꿰뚫는 등의 일을 보니 이것은 별로 들어보지 못한 것이라 음모(陰謀)의 변(變)이 기회를 타서 발생하지나 않을까 두려워 남모르는 근심이 가슴에 쌓여서 밤에 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이처럼 지극히 위태롭고 급박한 사세는 생각하지 않으시고 바야흐로 불교를 숭상하여 사림(士林)의 노여움을 격동시키고 수괄(搜括)하는 부서를 설치하여 백성의 원망을 불러 일으키고 토목 공사를 일으켜서 내수사(內需司)의 재물을 고갈시키고 대간의 진언을 거부하여 신하의 입을 막으셨으니, 이것은 인심을 진정시키는 것이 못됩니다.

신도 역시 전하께서 듣기 싫어하심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이 아뢰지 않는다면 누가 아뢰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속히 자책(自責)하는 전교를 내려서 정업원의 역사를 정지시켜 그 목재와 기와는 동궁(東宮)에 운용토록 하고 도승법(度僧法)을 중지시켜 그 위전(位田)은 태학에 이속(移屬)케 하며, 균역(均役)을 맡은 국(局)을 혁파하여 주리고 떠는 자로 하여금 소생할 수 있도록 하시어, 이로써 하늘의 견책(譴責)에 응답하고 종사(宗社)를 보전하며 신민(臣民)을 위로하시면 더없이 다행이겠습니다. 신은 의리로 보아 기쁨과 근심을 함께 해야 할 처지이므로, 종사가 위태롭게 되는 것을 차마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백번 죽음을 무릅쓰고 이렇게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나의 실정(失政)에 대하여 조정의 상하에서 논하는 자가 많았는데, 어찌 한 사람의 상소로 인하여 고치겠는가? 인수궁(仁壽宮)과 양종에 관한 일은 현재 논쟁하고 있는 자만 하더라도 부족하지 않다.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9책 11권 2장 B면【국편영인본】 20책 1면
  • 【분류】
    사법-법제(法制) / 과학-천기(天氣) / 정론-정론(政論) / 재정-역(役) / 군사(軍事) / 행정(行政) / 사상-불교(佛敎)

  • [註 006]
    가반당(假伴倘) : 반당(伴倘)은 서울의 각 관아(官衙)에서 부리는 사환(使喚). 처음에는 왕자(王子)·공신(功臣) 및 당상관을 우대(優待)하기 위하여 개인별로 차급(差給)하였음. 여기에서 가반당이라고 한 것은 정수 외에 임시로 있는 반당을 말하는 듯하다.
  • [註 007]
    봉족(奉足) : 공역(公役)에 종사(從事)하는 사람을 돕기 위하여 금품이나 노동을 제공 하는 것. 또는 그 일을 담당하도록 배정된 사람이다. 여기서는 배정된 사람을 말한다.
  • [註 008]
    솔정(率丁) : 자기집에 거느리고 있는 장정(壯丁)이나 또는 보인(保人:군보〈軍保〉로 보미〈保米〉나 보포〈保布〉를 상납〈上納〉할 의무가 있는 사람)으로 받은 장정을 말한다.
  • [註 009]
    이전(吏典) : 아전.
  • [註 010]
    정희 왕후(貞熹王后) : 세조비(世祖妃) 윤씨(尹氏)를 말함. 판중추원사 증 영의정부사(判中樞院事贈領議政府事) 파평 부원군(坡平府院君) 정정공(貞靖公) 번(璠)의 딸이다.
  • [註 011]
    성렬 인명 대왕 대비 전하(聖烈仁明大王大妃殿下) : 중종 계비(中宗繼妃)이며 명종(明宗)의 모후(母后)인 문정 왕후(文定王后) 윤씨(尹氏)를 말한다.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파산 부원군(坡山府院君) 정평공(靖平公) 지임(之任)의 딸이다.
  • [註 012]
    송(宋)의 선인후(宣仁后) : 영종(英宗)의 후(后)로서 철종(哲宗)이 즉위(卽位)하고 태황태후(太皇太后)로 있으면서 섭정(攝政)할 적에 신당(新黨)을 물리치고 사마 광(司馬光) 등을 등용하여 소위 원우(元祐)의 선정(善政)을 이루었다. 《송사(宋史)》 권242.

○忠勳府都事鄭礥,上疏。 略曰

比歲災異連綿, 非水則旱, 非旱則蝗, 蒼生日以困悴, 而凈業院土木之役, 經冬未休, 凍餒之卒, 幾何其不至於塡壑也? 今又設都監, 搜括良丁。 其備患慮遠則至矣, 然家探戶索之際, 吏緣爲姦, 無所不至, 得一閑丁, 而一族一隣之逃散者, 不可勝紀。 是騷一國之人心, 速國之亂也。 軍額之縮, 專在於緇流之盛, 而良丁之無一人閑遊者, 號爲假伴倘、雇工, 而投托於宰相、品官者; 號爲書吏, 而濫屬於政府吏曹者; 號爲工匠、皂隷, 而冒依於諸司者; 號爲奉足、率丁, 猥占於吏典者。 雖無補於公家, 以其一身則皆有所役, 而又有文籍。 令該司及州邑, 據其案移定正軍, 則坐可以得數萬之衆, 何必設局然後可括哉? 如不得已, 須以閑丁搜括之局, 爲僧人搜括之局, 盡刷遊食之徒, 勒令還俗, 則民心安定而軍額大增。 均役之意, 莫踰於此矣。 今乃憑此, 復禪敎兩宗之法, 駭人聽於四方, 侍從、臺諫、大學諸生交章論執, 而天聽邈然。 殿下之所與維持邦國, 唯臺諫、侍從與士林而已。 臺諫非之, 侍從非之, 士林亦非之, 斯乃一國之公議也。 殿下拂群情, 强行非道之法, 臣民莫不失望。 度僧之條, 雖曰祖宗之立, 《經國大典》之法, 適當崇信之時, 故偶載於一端, 非祖宗經常垂後之法也。 古昔帝王崇此敎而亂亡者, 昭昭往牒。 (以及) 韓愈佛骨之表, 今不必更煩, 卽以本朝之事言之, 世宗晩年, 始創內佛堂, 曾未數歲, 晏駕英陵, 仍罹否運, 廟社幾傾。 世廟中興, 網羅英俊, 餘事爲戲, 開創大伽藍於京城之內, 諸山佛宇, 煥然重修, 而享祚不永, 德宗早捐震闈, 睿宗在位未朞。 供佛之無效, 至於此而可明。 成宗右文興學, 思革異敎之弊, 以貞熹王后, 尙御慈壼, 故不敢遽止世廟之制矣。 惟我中考 恭僖大王未嘗崇奉, 而身致太平垂四十年。 此殿下所明鑑也。 今於大小寺刹, 皆立標限, 使人不得出入, 香火祝釐之使, 絡繹於道, 頑僧日益驕縱, 言必稱內旨, 事必曰本宮, 此何等政也? 嗚呼, 驅彝倫之俗, 陷無父無君之域。 此臣日夜飮泣, 而爲殿下深惜者也。 恭惟我聖烈仁明大王大妃殿下輔養新政, 光明正大, 屢降綸音, 辭旨懇惻, 大小臣隣, 罔不感戴。 彼女中之稱, 宣仁不得專美於有, 而唯崇釋一事, 未能免惑, 恐爲聖德之大玷也。 求言之敎雖下, 而未聞有抗封章直言敢論者, 豈殿下誠意之未孚也? 臣曩在草土, 聞一朝臣上疏論事, 【年前成均館博士梁應鮐以凈業院事上疏, 故有是言也。】 殿下以爲: "有口者皆言國事, 則國事非矣。" 厭聞拒諫之跡, 顯於外。 由此一言, 足以杜天下之口也。 古者諫無官, 雖工商賤隷, 皆得以言之。 此通下情而採衆論也。 所言當, 則豈可以越職而忽之? 具壽聃陳復昌, 近日之任言責者也。 各據臺諫之長, 同惡相濟, 竟負恩寵, 其可恃耶? 臣又見近日大陽奪輝, 地道不靜, 氣霾雨雪, 北風其涼, 白虹貫月, 亦所罕聞。 恐有陰謀之變, 乘機而發, 隱憂積胸, 夜不能寐。 殿下不念至危至急之勢, 方且崇瞿曇之敎, 激士林之怒, 設搜括之局, 招百姓之怨, 興土木之役, 竭內需之財, 拒臺諫之言, 塞臣下之口, 非所以鎭安人心也。 臣亦知殿下之厭聞也, 然臣而不言, 尙誰言哉? 伏願殿下, 亟降自責之敎, 停淨業之役, 以其材瓦, 運用於東宮, 止度僧之法, 以其位田, 移屬於大學, 革均役之局, 使飢寒得以蘇息, 于以答天譴, 于以保宗社, 于以慰臣民幸甚。 臣義同休戚, 不忍見宗社之將危, 冒百死以聞。

答曰: "予之失政, 朝廷上下論之者多, 何待一人之疏而改之乎? 仁壽宮兩宗事, 今方論執者, 亦非不足也。 不允。"


  • 【태백산사고본】 9책 11권 2장 B면【국편영인본】 20책 1면
  • 【분류】
    사법-법제(法制) / 과학-천기(天氣) / 정론-정론(政論) / 재정-역(役) / 군사(軍事) / 행정(行政) / 사상-불교(佛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