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명종실록 10권, 명종 5년 12월 15일 갑술 2번째기사 1550년 명 가정(嘉靖) 29년

선교 양종의 복립을 명하다

선교 양종(禪敎兩宗)의 복립(復立)을 명하였다. 자전이 상진(尙震)에게 내린 비망기(備忘記)에 이르기를,

"양민(良民)의 수가 날로 줄어들어 군졸의 고통스러움이 지금보다 더한 때가 없다. 이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라 백성들이 4∼5명의 아들이 있을 경우에는 군역(軍役)의 괴로움을 꺼려서 모두 도망하여 중이 되는데 이 때문에 승도(僧徒)는 날로 많아지고 군액(軍額)은 날로 줄어들니 매우 한심스럽다. 대체로 승도들 중에 통솔하는 이가 없으면 잡승(雜僧)을 금단하기가 어렵다. 조종조의 《대전(大典)》에 선종과 교종을 설립해 놓은 것은 불교를 숭상해서가 아니라 중이 되는 길을 막고자 함이었는데, 근래에 혁파했기 때문에 폐단을 막기가 어렵게 되었다. 봉은사(奉恩寺)봉선사(奉先寺)를 선종과 교종의 본산으로 삼아서 《대전》에 따라 대선취재조(大禪取才條) 및 중이 될 수 있는 조건을 신명하여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상진이 회계하기를,

"민정(民丁)으로서 군역을 도피하는 자들은 거의가 중이 됩니다. 오늘날 군액이 줄어드는 것이 모두가 이 때문이며 심지어 도둑으로 잡히는 자들 가운데 중이 그 반을 차지합니다. 만일 이들을 통제하지 않는다면 나중에는 막기 어려운 걱정거리가 있게 될 것입니다. 우매한 백성들이 봉은사 등의 중들이 특별한 은혜와 보호를 받는다는 소문을 듣고는 망령되이 위에서 불교를 숭상하는 것으로 지레 짐작하고 중이 되는 자가 점점 더 많아진다고 합니다. 성상의 학문이 고명하니 어찌 이단(異端)을 숭신(崇信)하실 염려가 있겠습니까마는 어리석은 백성들의 망동(妄動)은 이렇게까지 되었습니다. 제왕의 덕에 누가 됨은 이교를 숭신하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신들이 만약 발론(發論)하여 《대전》에 따라 시행한다면 해가 될까 염려되었기 때문에 애당초 감히 계청(啓請)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상의 본성이 총민(聰敏)하여 학문이 날로 진보하는데 자전이 이단으로 인도하여 유생(儒生)이 절에 가는 것을 금하고 재올리는 절이라는 푯말을 세웠다. 인수궁(仁壽宮)의 역사가 바야흐로 한창인데 양종(兩宗)에 관한 명을 또 내리니 사람들마다 나중에 가서는 어떻게 될 것인지를 걱정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어린 임금을 보필하여 청정(聽政)하면서 위로는 중묘(中廟)의 척사(斥邪)한 뜻을 어기고, 아래로는 부모로서 정치를 보필하는 도리를 잃었으니 통탄스러움을 금할 수 없다.


  • 【태백산사고본】 8책 10권 94장 B면【국편영인본】 19책 726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인사(人事) / 군사(軍事) / 사상-불교(佛敎) / 역사-사학(史學)

○命復立禪敎兩宗。 慈殿以備忘記下于尙震曰: "良民日漸減縮, 軍卒困苦之狀, 莫甚於此時。 此非有他故, 民有四五子, 則厭憚軍役之苦, 盡逃爲僧, 以此僧徒日繁, 軍額日縮, 至爲寒心。 大抵僧徒之中, 無所統領, 則難禁雜僧。 祖宗朝《大典》, 設立禪敎宗, 非崇佛之事, 乃所以禁防爲僧之路, 近來革廢, 故弊將難救。 以奉恩奉先寺爲禪、敎宗, 依《大典》大禪取才條及爲僧條件, 申明擧行可也。" 尙震回啓曰: "民丁避役者, 率多爲僧。 方今軍額之縮, 未必不由於此, 至於盜賊被捉, 僧居其半。 若無摠制, 終必有難救之患。 愚氓等聞奉恩等寺僧輩特蒙恩護, 妄度自上崇佛, 爲僧者漸多云。 聖學高明, 豈有崇信異端之慮乎? 愚氓妄動, 乃至於此, 帝王累德, 莫大於崇信異敎。 臣等若發爲議論, 依《大典》施行, 則恐或有害, 故初不敢啓請。"

【史臣曰: "上性聰敏, 學問日就, 而慈殿導之以異端之事, 禁儒上寺, 立標齋刹。 仁壽之役方興, 而兩宗之命又降, 人人莫不憂其厥終之何如也。 聽國政輔幼主, 而上違中廟斥邪之志, 下失父母輔治之道, 可勝痛哉。"】


  • 【태백산사고본】 8책 10권 94장 B면【국편영인본】 19책 726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인사(人事) / 군사(軍事) / 사상-불교(佛敎) / 역사-사학(史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