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강에서 송세형 등이 유감 등의 치죄를 논하지 못한 대간의 파직을 아뢰다
상이 조강에 나아갔다. 대사헌 송세형이 아뢰기를,
"대간이 죄인의 치죄를 논함에 있어 엄명하고 소상하게 해야 마땅합니다. 유감과 이원록은 흉패한 말을 드러내놓고 하였으나 대간으로서는 당연히 그들이 한 말을 가지고 죄를 논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뜻은……럴 것’ 이라고 예측하여 죄명(罪名)을 지목하였으니 이는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전 대간들을 파직시켜 직무를 제대로 수행치 못한 죄를 징계하소서."
하고, 대사간 경혼(慶渾)은 아뢰기를,
"죄인의 치죄를 논함에 있어서는 분명하고 엄정하게 해야 하는데 지난번에 죄인 유감과 이원록을 논계할 때 그 계사(啓辭)가 예사로와서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의혹을 갖게 하였으니, 전 대간의 잘못이 매우 큽니다. 파직시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시강관 윤인서(尹仁恕)는 아뢰기를,
"죄인을 논계할 때 그가 말한 것을 들어 논했다면 지적할 만한 말이 반드시 있었을 터인데 다만 ‘달갑지 않은 얼굴빛을 하였다.’ 【이원록이 역당(逆黨)들에게 가죄(加罪)할 때 달갑지 않은 얼굴빛을 하였다고 했다.】 라는 말과 ‘그의 생각은 이러할 것이다.’ 【유감(柳堪)은 《무정보감(武定寶鑑)》은 볼 만한 것이 못 된다고 하였으니 ‘그의 뜻은……럴것’이라고 하였다.】 라는 두 가지 말로써 그들의 죄목을 정했습니다. 이는 말이 분명하지 못하여 보고 듣는 자로 하여금 의심하게 만든 것은 물론 뒷폐단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때문에 차자의 내용에 대략만을 들어 논한 것입니다."
하고, 지경연사 윤원형(尹元衡)은 아뢰기를,
"을사년의 일이 4∼5년이나 지났으므로 안정이 될 것 같은데 그 잔당들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대역죄는 천지에 용납할 수 없는 것으로 아무리 하찮은 무리들일지라도 엄하게 다스리지 않을 수 없는데 하물며 역류(逆類)에 관계된 자이겠습니까. 법에 의해 다스린다면 어찌 수종(首從)의 구분이 있겠습니까? 고사(古史)를 상고하건대, 조금이라도 위에 관계되면 모두 법으로 처단하여 족류(族類)를 남겨 두지 않았습니다. 을사년 사람들은 택현설(澤賢說)을 말하여 임금을 폐치(廢置)하려는 음모를 꾸몄으니 고금에 없는 막대한 변입니다. 그런데 그 무리들을 정죄(定罪)한 뒤에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기기를 마치 군자가 소인에게 패배당한 듯이 여기는 까닭은 그 잔당이 아직도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국가가 《무정보감》을 인출하는 것은 중외(中外)에 널리 반포하여 역류들의 정상(情狀)을 소상히 알리기 위해서인데, 유감은 동료가 그 책을 인출하려 하자 상을 찌푸리면서 달갑잖은 얼굴빛으로 ‘어디 볼 만한 책이 없어서 이런 책을 인출하는가?’ 하면서 마음에 불평을 품었습니다. 옛 사적(事跡)들도 반드시 구해 보려 하는데 하물며 우리 나라의 사적이겠습니까! 자기 집에서 종이를 내어 인출하는 것이라면 달갑지 않게 여겨도 가하거니와, 인출하는 종이가 공비(公備)에 의한 것인데 자기에게 무슨 해로움이 있기에 달갑지 않게 여간단 말입니까? 그 흉패한 정상은 마음에 이미 쌓여 있는 것이 있기 때문에 말에 나타난것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그의 생각은 반드시 국가가 역류들에게 가죄(加罪)한 것을 옳지 않게 여긴 것이니, 그의 뜻을 추심하여 벌한다면 윤임(尹任)보다 죄가 더 큽니다.【《무정보감》을 인출하게 된 시초는 안현(安玹)이 위에 아첨한 데에서 연유된 것이다. 윤원형(尹元衡)이 이조 판서로 있을 때 친한 사람에게 ‘ 유랑(柳郞)026) 과 이랑(李郞)027) 이 주의(注擬)028) 가 있을 적마다 붓을 던지고 물러앉아 눈을 부릅뜨고 대답도 하지 않았으며, 지영(祇迎)하기 위해 출입할 때도 눈을 흘기거나 언짢은 눈을 하였다. 이는 필시 내가 외척(外戚)으로 이조 판서를 하고 있다고 여긴 때문일 것이다.’ 하였는데 말투가 매우 거칠었다. 한지원(韓智源)이 그 말을 듣고 즉시 유감이 ‘《무정보감》을 인출할 필요가 없다.’고 한 말을 윤원형과 윤춘년(尹春年)에게 편지를 보내어 알려서 중상하였으니 실로 음험한 사람이다. 안현은 풍수설(風水說)로 동대문(東大門) 밖의 이미 오래 전부터 살아오는 3백여 세대의 집을 헐어 버릴 것을 청하였는데, 권간(權奸)과 결탁하고 아첨하여 식록(食祿)을 보존하기 위한 계책에는 잘 되었다고 할지 모르겠으나 이고 지고 머물데 없이 떠돌아야 할 백성들에게는 어떠하겠는가? 윤원형이 크게 기용할 만한 사람이라고 안현(安玹)을 위에 추천한 데는 까닭이 있는 것이다.】 이원록이 역류들에게 가죄할 때 틀림없이 그들을 구호해 준 일이 있었을 것인데, 대간은 단지 ‘달갑지 않은 얼굴빛이었다.’는 것으로 계사(啓辭)를 올렸습니다. 얼굴빛으로 사람을 죄주면 반드시 뒷폐단이 있게 됩니다. 또 이원록은 자기의 숙부 이기(李芑)를 지목해서 멸족의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만약 원훈(元勳)이 화를 입는다면 그 화가 어찌 일문(一門)의 화에만 그치겠습니까. 반드시 나라도 뒤따라 패망할 것입니다. 조종조(祖宗朝)로부터 패역(悖逆)을 저지른 사람은 조금도 용서없이 모두 법으로 통렬하게 다스렸습니다. 대저 임금의 위엄이 반드시 엄중해야만 법을 제대로 적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무릇 역류를 다스리는 법이 조금만 완만해도 나라의 위엄과 기강은 유지되기 어려운 것입니다. 당초 국가에서 법에 의거해 죄를 다스릴 적에 모두 구차스럽게 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인심이 전혀 법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니, 이를 통렬히 혁신해야 합니다. 오륜(五倫) 가운데 군신(君臣)과 부자(父子)가 크고 붕우(朋友)가 그 아래입니다. 신하가 위를 범하는 말을 들었다면 깜짝 놀라 급히 달려가서 고하는 것이 마땅한 일인데 어찌 친척이나 친구에게 물어본단 말입니까? 지금 사람들이 임금을 잊고 친구를 두호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이는 다름이 아니라 바로 잘못된 습속(習俗)에 물든 탓입니다.
또 신은 들으니 중종 조(中宗朝) 때 김공저(金公著)와 박경(朴耕)이 사설(邪說)을 주창하여 천재(天災)와 시변(時變)이 원훈들 때문에 생긴 화(禍)라고 지목하였는데, 그때 남곤(南袞)과 김극성(金克成)이 이를 듣자마자 즉시 아뢰어 법에 의해 조처하였습니다. 남곤과 김극성은 다 당시에 이름 있는 사람들이었는데 어찌 은혜나 공로를 바라고 고하였겠습니까? 다만 신하된 마음에 듣고 편치 않았기 때문에 아뢴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기묘년 무리들은 도리어 남곤과 김극성을 그르다고 하여 그들의 관작을 삭탈당하게까지 했습니다. 또 이과(李顆)의 난(亂)에 하원수(河源守)가 【이름은 찬(纘)이다.】 역모(逆謀)하자 그 동류(同類)가 ‘만약 일이 발각되면 화가 클 것이다.’라고 하자 하원수는 ‘지금 대간이 박경과 김공저의 일을 고한 남곤과 김극성을 잘못이라 하여 논박하고 있다. 내가 비록 이런 일을 하더라도 감히 고할 자가 없을 것이다.’ 했다 합니다. 한때의 잘못된 습속이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게 하니 매우 두려운 일입니다. 지금의 시습(時習)이 이런 일에 대해 전혀 괴이하게 여길 줄 모르니, 신의 생각에는 이러한 습속이 점차 자라면 큰 역모 사건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끝내 한 사람도 달려와서 고할 사람이 없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신은 젊었을 때부터 대간과 시종을 거쳤습니다만, 국가의 대사를 논의할 때 모두들 눈치만 보고 감히 한마디도 하지 못했습니다. 신하가 되어 임금의 녹(祿)을 먹으면서 국가의 대사를 듣고서도 입을 봉한 채 한마디 말도 없다면 장차 이런 사람을 어디에 쓰겠습니까? 이런 습속을 통렬히 고치지 않는다면 국가를 더이상 지탱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을사년 역류들의 일에 대해서 사관(史官)으로 있던 안명세(安名世)가 모를 리가 없었는데, 이덕응(李德應)의 초사(招辭) 밑에 ‘사람을 죽이는 데 몽둥이로 죽이는 것과 칼로 죽이는 것이 다른가?’라고 썼습니다. 이는 이덕응의 승복을 그르다고 여긴 것입니다. 이런 점으로 본다면 국가에서 《무정보감》을 인출한다 하여도 아무런 보탬이 없을 것입니다. 그 뒤 윤결(尹潔)이 또 안명세를 옳다고 여겼습니다. 이렇게 흉패한 무리들이 잇달아 나오는 것은 위에서 너무 너그럽게 다스리기 때문입니다.
신의 뜻은 가죄(加罪)하자는 것도 아니요 또한 누구라고 분명하게 지적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시습이 이미 잘못되었으므로 통렬히 고치지 않을 수 없겠기에 감히 아뢰는 것입니다."
하였다. 송세형(宋世珩)이 또 아뢰기를,
"시습은 국가에 관계되는 바가 매우 중하므로 잘못된 것은 바로 잡아야 합니다. 을사년 역적에 관한 일은 그때 소신(小臣)이 추국(推鞫)하였으므로 그 정상을 소상하게 알고 있는데, 어찌 이렇듯 극심한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근래 조정이 안정되어 다른 뜻을 품은 자가 없으므로 신은 스스로 다행한 일이라고 여겼는데, 다시 사림(士林)들 사이에 이와 같이 흉패한 사람이 있게 될 줄이야 어찌 알았겠습니까? 마땅히 그 죄를 엄히 다스려 그 정상을 물었어야 하는데 전 대간은 예사롭게 논계하였으니, 잘못이 또한 큽니다."
하고, 경혼(慶渾)이 또 아뢰기를,
"사습(士習)이 이미 잘못되었으므로 학술(學術)이 바르지 못하여 그들의 학문은 과거(科擧)만을 위한 것일뿐 삼강 오상(三綱五常)과 정심 성의(正心誠意)의 일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사론에 빠져들어가는 것을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심지어 군부(君父)도 망각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으니, 시습을 일변시키는 것이 오늘에 당면한 급선무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뜻은 모두 지당하다. 그러나 이를 이유로 하여 모두 파직한다면 일이 매우 시끄럽게 될 것이므로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7책 9권 9장 A면【국편영인본】 19책 626면
- 【분류】정론(政論) / 인사(人事) / 사법(司法) / 변란(變亂) / 사상-유학(儒學) / 출판(出版)
- [註 026]유랑(柳郞) : 이조 정랑 유감.
- [註 027]
이랑(李郞) : 병조 정랑 이원록.- [註 028]
주의(注擬) : 관원을 임명할 때 문관(文官)은 이조(李曹), 무관(武官)은 병조(兵曹)에서 후보자 세 사람을 정하여 임금에게 상주하는 일.○丁卯/上御朝講。 大司憲宋世珩啓曰: "臺諫論治罪人, 所當嚴明詳盡。 柳堪、李元祿, 顯發凶悖之言, 爲臺諫者, 當以其所言, 罪之可也。 乃以其意, 以爲之辭, 目其罪名, 至爲非矣。 請罷前臺諫等, 以懲失職之罪。" 大司諫慶渾啓曰: "論治罪人, 當分明嚴正, 而頃者, 論啓罪人柳堪、李元祿之時, 其啓辭循常, 使人聽疑惑, 前臺諫所失甚大。 不可不罷。" 侍講官尹仁恕曰: "罪人論啓時, 據其言論之, 則必有可指之辭, 而只擧 ‘不平之色’、 【李元祿於逆黨加罪之時, 有不平之色云。】 ‘其意以爲’ 【柳堪以《武定寶鑑》爲不足觀, 其意以爲云云。】 二語而名其罪。 辭不分明, 使觀聽疑怪, 不無後弊。 故箚辭, 只擧大槪論之耳。" 知經筵事尹元衡曰: "乙巳之事, 今至四五年, 似可定矣, 而餘孽尙未殄。 大逆之罪, 天地所不容, 雖尋常小人之黨, 治之不可不嚴, 況干於逆類者? 以法治之, 則豈有首從之別乎? 考諸古史, 少涉觸上, 皆斷以典刑, 無遺類矣。 乙巳之人, 發擇賢之言, 爲廢置之謀, 古今莫大之變。 但其類定罪之後, 人皆惜之, 如君子見敗於小人者, 其餘類尙存故也。 國家印出《武定寶鑑》者, 欲廣布中外, 使昭知逆類情狀, 而柳堪當同僚之欲印, 蹙頞不肯曰: ‘豈無他書可觀, 乃印此書乎?’ 其心若不平常。 則古之事跡, 必欲求見, 況我國事跡乎? 出自家之紙而印出, 則其不肯猶可也, 所印之紙, 出於公備, 何害於己而不肯耶? 其凶悖之狀, 已畜於心, 故其發於言者如此。 其意必以國家加罪逆類, 爲不可也, 探其意誅之, 尤大於尹任也。 【《武定寶鑑》印出之時, 初因安玹媚上而發也。 元衡判吏曹, 語其所親曰: "柳郞、李郞, 每當注擬, 閣筆退坐, 張目不答, 祗迎出入, 亦且瞪目睨視。 必以我爲外戚而判吏部也。" 談鋒甚厲。 韓智源得聞其言, 卽以《寶鑑》不須印見之語, 通書於元衡、春年處, 而奇中傷之, 險哉人也。 安玹以風水之說, 請撤毁東大門外久遠居住三百餘家, 其締結權奸, 諂媚保祿之計得矣, 奈抱負携持之氓, 流離播遷, 無住着何? 向者元衡以大用薦玹於上者, 有由然矣。】 李元祿於逆類加罪之時, 必有救護之事, 臺諫只以有不平之色爲辭以啓。 以氣色罪人, 則必有後弊。 元祿, 指其叔父李芑曰, 當有赤族之禍, 若元勳被禍, 則其患豈止於門禍哉? 必以爲國隨而敗也。 自祖宗朝, 罪涉悖逆之人, 皆痛治以法, 無少容貸。 大抵人君之威, 必嚴重然後可以用法。 凡治逆之法, 少有寬假, 則國之威綱, 難以持維矣。 國家當初用法治罪, 皆出於苟且, 故至今人心, 恬不畏法, 所當痛革也。 五倫之中, 君臣父子爲大, 而朋友爲下。 爲人臣者, 苟聞犯上之言, 當驚動奔告可也, 豈問其親戚朋友哉? 今之人, 則忘君上護朋友, 甚至於此, 此非他, 拘於習俗所誤而然也。 且臣聞之, 中宗朝, 金公著、朴耕唱爲邪說, 以天災時變, 指爲元勳之禍, 其時南袞、金克成聞而卽啓, 置之典刑。 袞與克成, 皆一時名重之人, 豈是希恩覬功者哉? 第以臣子之心, 聞之未安, 故啓之耳。 至於己卯之類, 反以袞與克成爲非, 至奪官爵。 及李顆之亂, 河源副守 【名纉。】 謀逆, 其同類謂: ‘事覺則禍大。’ 河源守曰: ‘臺諫方以袞與克成, 告朴耕、金公著之事, 爲非而駁之。 我雖如此, 無有敢告者。’ 一時誤習, 馴致於此, 可畏之甚也。 今之時習, 於如此等事, 恬不知怪, 臣恐此習漸長, 雖有大逆之謀, 終無一人奔告者矣。 臣自少爲臺諫、侍從, 當論國家大事之時, 皆相視不敢出一言。 臣子食君之祿, 而聞國大事, 噤無一語, 將焉用之? 此習若不痛革, 則國家不復支持矣。 乙巳逆類之事, 安名世以其時史官, 非不知也, 而於李德應招辭之下書曰: ‘殺人以梃與刃, 有異乎?’ 此以德應之承服爲非也。 以此觀之, 國家雖印出《武定寶鑑》, 亦無益矣。 其後尹潔, 又以名世爲是。 如此凶悖之類, 連綿而出, 自上多用寬典, 故如此。 臣意非欲加罪也, 亦非的指爲某人也。 但時習已訛, 不可不痛革, 故敢啓。" 宋世珩又啓曰: "時習於國家, 所關甚重, 當矯其訛。 乙巳年逆賊之事, 小臣於推鞫時, 昭知情狀, 安有如此痛甚之事乎? 近來朝廷安靜, 人無異志, 臣私自喜幸, 豈意士林之間, 復有如此凶悖之人乎? 當嚴治其罪, 問其情狀, 而前臺諫循常論啓, 所失亦大。" 慶渾又啓曰: "士習已非, 學術不正, 其爲學, 只爲科擧, 而三綱五常正心誠意之事, 不知爲何事。 故不自知入於邪, 而甚至於忘君父, 變易時習, 乃當今急務也。" 答曰: "啓意至當。 然以此盡罷, 則事甚騷擾, 故不允。"
- 【태백산사고본】 7책 9권 9장 A면【국편영인본】 19책 626면
- 【분류】정론(政論) / 인사(人事) / 사법(司法) / 변란(變亂) / 사상-유학(儒學) / 출판(出版)
- [註 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