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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실록8권, 명종 3년 9월 2일 갑술 2번째기사 1548년 명 가정(嘉靖) 27년

평안도 병사 양윤의가 올린 변방의 야인 상황에 대한 보고

평안도 병사 【양윤의(梁允義).】 의 장계 【*】 를 정원에 내리며 일렀다.

"호인(胡人)들이 방자하니 군위(軍威)를 보이지 않을 수 없으나 변장이 만일 공을 세우려고 잘못 살인을 하면 변방의 흔단이 생길 염려가 없지 않다. 진서(陣書)에 ‘오는 자를 막지 말며 가는 자를 좇지 말라.’ 하였으니 신중하라는 뜻이다. 비변사를 시켜 변진(邊鎭)에 하유하라."

【*장계는 다음과 같다."상토진(上土鎭)의 군관 조적(趙績)과 별시위 안팽연(安彭連) 등을 장수로 삼아 금년 8월 9일에 보내어 직접 탐색하게 하였더니 21일 돌아와서 진고(進告)한 내용에 ‘상토진에서 1식(息) 정도의 거리에 있는 대령(大嶺) 아래 멈추어 야영을 하고 다음날 아침에 행군을 하는데 갑자기 시끄럽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바라보니 나무숲 사이에 움막을 짓고 산삼을 캐는 호인(胡人) 5명이 우리 군사를 먼저 발견하고 칼을 뽑아 몽둥이를 자르면서 깔보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안팽연 등이 두 명을 사살하니, 그 나머지 세 명은 산으로 올라가 북쪽으로 달아났다.’ 하였고, 추자구자(楸子口子) 만호(萬戶) 민사안(閔思顔)의 첩정(牒呈)에는 ‘겸사복(兼司僕) 최인(崔仁) 등을 장수로 삼아 금년 8월 20일에 들여보냈는데 돌아와 진고한 내용에 「21일 아침에 군사를 출발시켰는데 우현(牛峴) 등에 호인의 흔적이 많이 있었다. 진(鎭)에서 2식 정도의 거리인 상봉포(上峯浦)와 시번(時番)의 위아래에 움막을 짓고 있는 호인 10여 명이 시번평(時番坪)에서부터 우리 군사의 뒤를 따라왔는데 활과 화살을 가진 자도 있었고 몽둥이를 가지고 용맹을 뽐내는 자도 있었다. 별시위 이세무(李世茂)가 먼저 한 명을 쏘았더니 나머지 무리는 산을 올라 북쪽으로 달아났다.」고 하였다.’ 했고, 만포진(滿浦鎭)의 첩정에는 ‘금년 8월 11일 호인 김구구(金仇仇) 등이 진고한 내용에 「매부 김다롱가(金多弄可)와 건주위(建州衛)123) 사돈 동자나로(童者羅老)가 서로 만날 일로 7월 그믐께 주고받은 말에, 건주위의 호인 심아상가(沈阿尙可)·심다구(沈多仇)·심보호(沈甫好) 등이 무리를 모아 병기를 마련하고 말을 먹이며 만포(滿浦) 등에서 풀 베는 사람을 사로잡아 갈 것을 약속하였다고 했다.」 하였다.’ 하였습니다."】


  • 【태백산사고본】 6책 8권 41장 A면【국편영인본】 19책 613면
  • 【분류】
    군사(軍事) / 외교-야(野)

  • [註 123]
    건주위(建州衛) : 명 성조(明成祖) 때에 남만주(南滿州)의 여진족(女眞族)을 다스리기 위하여 건주 즉 지금의 길림성(吉林省) 부근에 둔 위(衛).

○下平安道兵使 【梁允義。】 狀啓【上土鎭軍官趙績、別侍衛安彭連等定將, 今八月初九日起送體(採) 〔探〕, 二十一日還來進告內: "距上土一息許大嶺底止宿, 翌日平明行軍, 猝有呼噪之聲。 望見, 則林藪間結幕採蔘胡人五名, 先見我軍, 拔刀斫杖, 多有輕侮之狀。 安彭連等, 射殺二名, 其餘三人, 登山北走。" 楸子口子萬戶閔思顔牒呈內: "兼司僕崔仁等定將, 今八月二十日入送, 還來進告內: ‘二十一日平明發軍, 牛峴等處, 多有胡人蹤跡。 距鎭二息許上峯浦時番上下端結幕, 胡人十餘名, 自時番坪, 尋蹤我軍而來, 咸持弓箭, 或持杖賈勇。 別侍衛李世茂, 先射一名, 餘黨登山北走。’" 滿浦鎭牒呈: "今八月十一日, 胡人 金仇仇等進告內: ‘妹夫金多弄可, 建州衛査頓童者羅老相見事, 七月晦時往還言內, 同衛胡人 沈阿尙可沈多仇沈甫好等聚黨, 礪兵秣馬, 滿浦等處, 刈草人擄去事, 結約。’ 云云。"】 于政院曰: "胡人恣行, 不可不示軍威, 而邊將若要功枉殺, 則不無邊釁之生矣。 陣書曰: ‘來者不拒, 去者不追。’ 愼重之意。 其令備邊司, 諭于邊鎭。"


  • 【태백산사고본】 6책 8권 41장 A면【국편영인본】 19책 613면
  • 【분류】
    군사(軍事) / 외교-야(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