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병오년의 시정기를 쓴 사관 안명세·손홍적이 자복한 공사
추관(推官)들이 사관 및 찬집청 낭청(撰集廳郞廳)을 시켜 찬집청에 가서 시정기 6권 【을사년 8월 보름 전후의 것 3권, 9월 보름 전후의 것 2권, 병오년 9월 보름 전의 것 1권.】 을 가져오게 하였다. 추관들이 근정전(勤政殿) 동쪽 옛 서연청(書筵廳)에 모여 병오년 9월의 시정기를 가지고 같은 때의 사관에게 보이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바로 사슴 꼬리에 관한 기사이다.】 누가 쓴 것인가?"
하니, 답하기를,
"그 필적(筆迹)을 보건대 아마 손홍적(孫弘績)의 필적 같습니다. 그러나 꼭 그의 필적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추관이 사관을 시켜 춘추관(春秋館)에서 일기(日記) 【병오년 9월 보름 전의 것 1권, 을사년 8월 보름 뒤의 것 1권, 9월 보름 전의 것 1권.】 를 내다가 상고해보니 그 사실 【바로 사슴 꼬리에 관한 일이다.】 이 없으므로, 또 방상일기(房上日記)를 상고해 보니 손홍적이 상번(上番)했을 때 쓴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자 모두 의금부로 잡아왔다. 두 사람044) 이 잡혀오자 추관이 그들을 앞으로 가까이 오게 하여 추문하니, 모두 스스로 기록한 것임을 자복하였다.
안명세(安名世)의 공사(供辭)는 다음과 같다.
"역적 윤임(尹任)의 정상은 고금의 반신(叛臣) 가운데 가장 흉악한 것으로, 이덕응(李德應)의 초사에 역력히 드러나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시정기 가운데서 이덕응의 초사 밑에 쓰기를 ‘몽둥이에 때려 죽거나 칼에 죽거나 죽는 것에는 비록 다를 것은 없지만, 그러나 형장 아래서 죽는 것이 오히려 참혹한 극형을 받아죽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 그런데도 이에 형장을 면하려 하였단 말인가. 이는 바로 형장만 받지 않으면 죽게 되지 않으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 말이 참측하고 그 뜻이 애처로와 보고 듣는 자가 모두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하고, 또 이덕응이 형신(刑訊)을 받았다는 조항 밑에 쓰기를 ‘이덕응의 공사가 이미 작성되자 추관들이 대부분 그에게 형신을 하지 않으려고 하였으나, 이기(李芑)와 허자(許磁)가 억지로 형신을 하도록 했다.’고 하였으며, 또 이덕응이 지만취초(遲晩取招)했다는 조항 밑에 쓰기를 ‘이덕응은 말 한마디 없이 착서(着署)하고 물러갔다. 대체로 이때에 그는 자신이 오히려 살아날 방도가 있다고 생각했고 극형에 처해질 줄을 몰랐다. 그러므로 금부가 결안(決案)할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크게 놀랐다.’고 하였습니다. 이것들이 전주(塡註)의 내용입니다.
소신(小臣)은 갑진년045) 에 요행히 등제(登第)하였는데, 그때 나이는 27세였습니다. 어리석고 망령된 신진(新進)으로서 이해 12월에 승문원에 간택(揀擇)되었고, 을사년046) 8월에 한림(翰林)에 제수되었으니, 출신(出身)한 지 겨우 10여개월 만에 청요직(淸要職)에 발탁되어 제수된 것입니다. 상은(上恩)이 그와 같이 망극했기에 추호의 사심(邪心)도 없이 밤낮으로 상은의 만분의 일이나마 보답하려고 노력해왔습니다. 더구나 소신은 한 번도 윤임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지내오다가 을사년 4∼5월 사이에 모화관(慕華館)에서 배표(拜表)하고 사대(査對)047) 할 때에 처음으로 그를 바라보았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덕응은 장의동(藏義洞)에서 나서 자랐고, 소신은 명례방(明禮坊)에서 나서 자랐기에 남과 북으로 거리가 서로 동떨어져서 이덕응의 문명(文名)만을 들었을 뿐이고 얼굴은 일찍이 서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계묘년 어느 달에 소신이 독서(讀書)하기 위하여 삼각산(三角山) 승가사(僧伽寺)에 갔더니, 이덕응 역시 그의 동생들과 더불어 소신보다 3∼4개월 앞서부터 와서 글을 읽고 있었으므로, 소신이 그때야 겨우 그의 얼굴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그후 소신이 집으로 돌아온 지 3일 만에 이덕응 역시 그곳을 내려왔는데, 서로의 교정(交情)으로 말하면 전혀 친한 사이가 아니었습니다. 그후로 관학(館學)의 장중(場中)에서 서로 만나면 가벼운 읍(揖)으로 인사를 하는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마침 갑진년에 소신이 그와 함께 등제(登第)했었는데, 이덕응은 패기가 만만하고 익살스럽고 교만하였으며, 소신은 성질이 거칠고 옹졸하여 평상시 사람을 대해서도 말을 통쾌하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덕응과는 기도(氣度)가 서로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덕응은 늘 소신을 잔망(殘亡)한 사람으로 지목하고 전혀 허여하지 않았습니다. 소신 역시 전에 이미 덕응의 심술(心術)을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윤임이 그를 사위로 삼으려 할 때에 그가 글을 잘하는가 시험하기 위해 책문제(策問題) 2수(首)를 얻어다가 덕응을 불러놓고 제술(製述)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덕응이 윤임의 집에 앉아 하루종일 그 글을 지었는데, 윤임이 이 글을 홍문관에 보내어 과차(課次)한 결과 1편은 삼상(三上)으로, 1편은 삼중(三中)으로 두 편이 다 입격(入格)되었으므로 윤임이 그를 재주가 있다고 여겨 곧 정혼(定婚)하였습니다.
이 한가지 일은 진실로 사군자(士君子)가 차마 할 일이 아니었으므로 소신은 항상 그의 위인(爲人)을 천박하게 여겼고 또한 그와 사귀어 상종(相從)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덕응의 신은(新恩)048) 때에 소신은 동년(同年)으로 더불어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그의 집에 한 번 갔다 왔을 뿐이고, 덕응은 일찍이 소신의 집에 온 적도 없습니다. 덕응은 승문원에서 면신(免新)도 하기 전에 벌써 한림에 비천(秘薦)되었고, 면신한 후에는 즉시 한림에 제수되었습니다. 소신은 그때 아직 승문원에 있었으므로, 한가하고 바쁜 것이 서로 달라서 서로 만난 일이 매우 드물었습니다. 그러다가 8월에 이르러 소신이 한림에 제수되고 보니 그때는 윤임의 사건이 발생한 뒤인데 덕응은 벌써 정병(呈病)하고 출사하지 않았습니다. 소신의 덕응과의 교분은 여기에 불과합니다. 윤임과 덕응의 집에 사정(私情)이 있을 리는 만무하거니와 이 사건이 발생했을 때를 당해서 소신만 어리석고 무식하여 동서남북을 헤아리지 못했을 뿐 아니라, 윤임 등의 반역(反逆)에 대한 정상을 조정의 재집(宰執)도 혹 모르고 있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소신이 어찌 감히 그 사건의 전말을 헤아리겠습니까. 소신의 망령된 생각에, 듣고 본 것이 있으면 쓰고 심지(心志)가 있으면 기록해서, 뒷날의 의정(議定)을 기다린다면 뒷날에 의당 취사(取舍)할 자가 있으리라고 여겼기에, 듣고 본 것과 심지를 감히 기록하지 않을 수 없어 애오라지 이것으로 책임을 메꾸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 보니, 그 중의 서사(書辭)들이 소신의 입장에서 보아도 경악스러운 것이 많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그때 그 정상을 헤아리지 않고 보는 경우로 말하면, 하문(下問)하신 말씀 가운데 약간 조(若干條)에 대해서는, 이와 같이 의심하는 것이 또한 당연합니다. 그러나 소신은 어리석고 무식하여 사실을 잘 알지 못하고 뜻 없이 쓴 것이요, 별다른 마음은 없었습니다.
덕응의 초사 아래 기록한 사유로 말하자면, 덕응이 공초하기 전이라면 진실로 그의 정상을 몰랐다고 하겠지만 이미 공초한 다음에는 역적의 정상이 밝게 드러났고, 그 정상이 각인(各人)의 초사와도 여합부절(如合符節)하여 다시 의심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덕응이 반역의 정상을 남김없이 고백한 다음에, 평소 자신이 궁박(窮迫)했기 때문에 부득이 윤임의 집에 붙어 지냈던 사실과 윤임이 자신을 매우 야박하게 대했던 사실을 쭉 진술하고, 평소 자신의 간고(艱苦)했던 정상을 애절한 말로 역력하게 호소하였는데, 심지어는 ‘소신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은 춥고 배고픈 것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고까지 하였습니다. 그는 또 말하기를 ‘이렇게 남김없이 자백을 하였는데도 형장을 계속하라고 명한다면 죽음 밖에 무슨 말을 더하겠느냐.’고 하였습니다. 그가 반역의 정상을 공초한 다음, 진정(陳情)하는 말은 모두가 우선 형장이나 면해 보려는 계책이었고, 자신이 역모에 참여한 죄가 하늘에 닿아서 이미 그 죄를 도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소신은 실상 그의 정상을 어리석게 여긴 나머지, 그가 형장을 면하려고 하는 계책을 드러내서 그를 기롱하고 풍자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른바 ‘형장을 면하려고 했다.’는 것은 다만 그가 진정을 하여 형장을 면하려고 한 것을 기롱한 말일 뿐입니다. 어찌 감히 반역의 정상을 남김없이 자백한 말을 가지고 형장을 면하기 위해 거짓 자백했다는 뜻으로 쓴 것이겠습니까.
또 그 눈물을 흘렸다는 말에 대해서는, 그의 악(惡)은 비록 가증스럽지만 그의 말은 실로 비참하고 애절하여, 곁에서 그의 정상을 보고 들은 자는 비록 관계가 없는 사람이라고 매우 슬퍼하는 자가 있었고, 덕응이 주서(注書)로 있을 때 정원(政院)에서 데리고 있던 사령(使令)들은 모두가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것은 소신이 직접 목도한 일이기 때문에 사실대로 기록한 것이요, 감히 덕응을 애매하게 여겨 눈물을 흘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제2조(條)의, 덕응을 형신했다는 말 아래 기록한 것으로 말하자면, 소신의 어리석은 생각에 사관(史官)의 직책이란 전교(傳敎)나 계사(啓辭)만 기록할 뿐 아니라, 그 당시에 본 사색(辭色)도 반드시 본 대로 기록하는 것이 옳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때 다른 추관(推官)들을 보니 서로 돌아보며 말이 없어 그 기색이 마치 꼭 형장을 하려 하지는 않을 듯하였으나, 좌상(左相) 【위에 나타났다.】 과 허자(許磁)는 형장을 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으므로 ‘억지로 형장을 가하도록 했다.’고 쓴 것입니다.
제3조의 초사 아래 기록한 사유로 말하자면, 소신이 그때에 이미 덕응이 말 한마디 없이 착서(着署)하고 나간 것을 보았는데, 그후 덕응이 금부의 결안(決案)을 보고 크게 놀랐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그가 착서할 때에는 오히려 자신이 살 방도가 있다고 여겼다가 결안할 때에 이르러 비로소 크게 놀랐다.’고 기록한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이 또한 이덕응의 죄악이 저렇듯 하늘에 닿았는데도 의당 주벌(誅罰)될 것을 그리도 스스로 깨닫지 못했음을 어리석게 여겨서였습니다.
나식(羅湜)·성자택(成子澤)·곽순(郭珣)의 초사를 생략하고 다 기록하지 않은 일과 다른 죄인의 초사도 많이 기록하지 않은 일의 사유로 말하자면, 경회루(慶會樓) 남문(南門)에서 죄인을 추국할 때 사관은 추국청(推鞫廳)에 있지 않고 으레 차비문(差備門) 앞 판장(板墻) 뒤에 퇴피(退避)해 있다가 그 초사들을 모두 써서 입계(入啓)할 때에 이르러 승전색(承傳色)이 내려온 다음에야 얻어 보게 되므로, 너무 총망한 사이에 자상하게 기록할 수 없어 그 대단하지 않은 곳은 생략하고 관계가 중대한 말에 대해서만 기록한 것이니, 생략하고 자세히 기록하지 않은 것은 형편이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금부에서 추국하는 죄인에 대해서는, 형방 승지(刑房承旨)가 추국청을 왕래하면서 위관(委官)이 받아놓은 초사를 인수하여 다시 열어보지 않고 그대로 입계(入啓)합니다. 그러므로 사관은 초사 이외의 별도로 아뢴 말을 얻어 듣고 기록할 뿐, 그 초사는 얻어 보지 못합니다. 색승지(色承旨)에게서 들은 것만을 기록할 뿐이니, 그 사이에 어찌 빠졌거나 생략된 말이 없겠습니까. 소신 역시 빠뜨린 것이 미안한 줄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마는, 전례(前例)를 듣건대 일체의 초사는 으레 대내(大內)로 들여가서 내려오지 않고 금부 역시 타본(他本)이 없다고 하기 때문에 그 초사를 가져다 기록하지 못한 것이니, 빠뜨린 것은 역시 형편이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덕응의 초사를 자상하게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덕응이 공초할 때에 소리를 크게 질렀기 때문에 소신이 판장 뒤에서 말을 듣는 대로 다 기록하였으므로 자상하게 기록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 또한 그의 초사를 보고 기록한 것은 아닙니다.
8월 28일, 신하들을 인견(引見)했다는 조항 아래에 ‘이날 상(上)은 끝내 말 한 마디 하지 않았고, 자전(慈殿)은, 윤임(尹任) 등의 죄가 깊고도 무거워서 죄주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을 반복하여 말하였다. 이때 홍언필(洪彦弼) 등은 평소 상을 향하는 정성과 윤임 등의 소행을 모르고 있었음을 서로 다투어 스스로 진소(陳訴)하여 화를 면하고 총애를 굳히려고 기도하였는데, 서로 혹시라도 미처 말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이 사람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저 사람이 벌써 말을 시작하곤 하여 어눌(語訥)한 사람은 말 잘하는 사람에게 자주 말 차례를 빼앗기었다. 이때 이기(李芑)만 유독 말이 적었는데, 그것은 그 수의(首議)가 별로 말할 만한 것이 없었고 대의(大意)는 허자(許磁)와 같았기 때문이었다. 허자는 자주 정죄(定罪)된 사람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말로 자전의 비위를 맞추었다. 임백령(林百齡)은 자신의 영구(營救)를 해명하였으니 오히려 옳은 선비라 할 수 있었으나 그의 말은 역시 자신을 구제하는 것 같았다.’고 기록한 사실로 말하자면, 그날 상께서 아무 말 한 마디 하지 않았다는 것과 자전의 전교와 제상(諸相)의 말은 모두 사실대로 기록한 것입니다. 다만 ‘별로 말할 만한 것이 없었다.’는 것과 ‘자신을 구제하는 것 같았다.’는 등의 말에 대해서는 소신이 그 실정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어리석고 망령된 생각으로, 사관(史官)이란, 말이나 일만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을 본받는답시고 그렇게 기록한 것인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과연 해괴하고 경악스럽습니다.
그리고 윤임·유관(柳灌)·유인숙(柳仁淑)을 사사(賜死)하고, 이임(李霖)을 극변에 안치하고, 권벌(權橃)의 본직(本職)을 체직했다는 조항 아래에 ‘윤임 등을 사사하라는 전교가 내려지자, 이언적(李彦迪)·정옥형(丁玉亨)·윤개(尹漑)·민제인(閔齊仁)·나세찬(羅世纘) 등 5∼6인은 몹시 비통한 표정이었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평소와 다름없이 떠들썩하게 웃곤 하였으며 그중에는 평소보다 더 의기양양한 자도 있었다. 아, 윤임 등의 죄는 죽어 마땅하다 하겠으나, 대행왕(大行王)이 아직 빈소(殯所)에 계신데, 같은 날 세 대신(大臣)을 죽이니 이 어찌 매우 불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옛사람은 죄인(罪人)을 보고서 불쌍히 여겨 울었고, 또 「불쌍히 여길 것이요 죄인 적발한 것을 기뻐하지 말라.」는 말도 있지 않는가. 이때에 비록 마땅히 죄주어야 할 자에게 죄를 준 것이기는 하나 의당 이와 같이 해서는 안 될 듯하다.’고 기록한 사실에 대해서는 소신이 본 바에 따라 그 언소(言笑)049) 와 사색(辭色)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중에 ‘세 대신을 죽였다.’는 말에 대해서는 소신이 8월 27일에 비로소 하번(下番)에 들었다가 그 다음날인 28일에 이 일을 만났는데, 그때는 윤임 등의 정적(情迹)이 전혀 드러나지 않아 정상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죄는 있다 할지라도 아직은 대신이라 지목할 만하기 때문에 이미 ‘대신’ 이라고 써서 그들의 불행을 탄식하고, 또 그들의 불행을 보고도 자약하게 담소(談笑)를 하는 것은 인정상 온당치 못할 듯하기 때문에 이렇게 쓴 것입니다. 이 역시 어리석고 망령된 생각일 뿐 특별히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보니 매우 경악스럽습니다.
또 이언적이 말하기를 ‘그때에 대간과 시종 가운데 나이 어리고 경험이 부족한 자가 「꼭 모후(母后)께서 임조(臨朝)할 것이 아니라, 마치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을 섭정(攝政)한 것처럼 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는데, 이는 특별히 사심(邪心)이 있어서가 아니라, 창졸간에 일도 정해지지 않고 해서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어찌 다른 마음이 있었겠습니까.’라고 한 조항 아래에 ‘이언적은 전에 이미 왕대비(王大妃)께서 모르고 있는 일을 아뢰었고, 이제 또 나이 어린 사람에게 다른 마음이 없었다는 것을 반복하여 아뢰었으니, 이것이 바로 어진 사람이 보통 사람과 다른 점이다.’고 기록한 사실에 대해서는 언적이 그 당시에 한때의 헛 명예를 꽤 얻어서 명망이 가장 높은데다 그의 죄는 드러나지 않았고, 또 소신은 그 나이 어린 사람의 정상도 모르는 처지였습니다. 그런데 다른 재상들은 각각 스스로 진정(陳情)을 하였지만, 언적은 유독 왕대비께 효도하라는 말로 정녕스럽게 권면하였으므로, 어리석고 망령된 생각된 생각에 그가 어진 사람인가 싶어서 그를 아울러 칭찬한 것입니다.
또 자전(慈殿)의 전교에 ‘백인걸 같은 무리가 있다[有如白仁傑之輩]’고 한 조항 아래에 주(註)하기를 ‘매우 천히 여기고 증오하여 한 말이다.’고 한 것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때에 자전께서 바로 ‘지배(之輩)’의 배(輩) 자로 전교하신 것은 아니었고 실상은 ‘백인걸 같은 물건[如白仁傑體]’이라고 하셨는데, 소신이 단문(短文)해서 그 말을 제대로 묘사하지 못하여 우선 배(輩) 자로 기록해 놓고는 그래도 뜻이 미진하기 때문에 이렇게 주를 단 것입니다. 또 그 밑에 ‘시비(是非)를 혼동시킨 사람은 판윤(判尹)이다.’고 한 조항 아래에 주하기를 ‘판윤은 바로 윤사익이다. 이때 자전께서 매우 불쾌한 빛이 있었다.’고 한 데서 이른바 빛이란, 감히 수렴(垂簾) 안에 계신 왕대비의 안색을 가리킨 것이 아니요, 전교만을 듣고서 불쾌한 사기(辭氣)가 있음을 알고는 잘못 사색(辭色)의 색(色)으로 기록한 것이니, 이 또한 소신이 단문하여 글자를 맞지 않게 놓은 곳입니다.
또 윤사익이 아뢰기를 ‘의구(疑懼)하는 즈음에는 허위(虛僞)스러운 일이 없지 않으니, 마치 간인(奸人)이 목패(木牌)를 써서 던지는 일 같은 것이 있습니다.’고 한 조항 아래에는 ‘지난 중종 조(中宗朝) 때 누가 목패를 동궁(東宮)에 던진 일이 발생했을 적에 이를 간인이 한 짓이라고 했었는데, 윤사익은 대체로 이 일을 가리켜서 비유한 것이다.’고 기록하였는데, 사익의 일로 말하자면, 그때 소신은 어리석고 망령되어 저 사람[彼人]들의 정상을 전혀 몰랐던 터에, 사익만이 유독 다른 재상들과 달리 감히 이견(異見)을 내세웠기 때문에 소신은 실상 말의 시비도 모르면서 감히 그 일을 사실로 여겼던 것입니다.
또 ‘권벌이 이덕응(李德應)의 공초에서 「권벌이 유인숙과 더불어 윤원로(尹元老)를 의당 정부(政府)에서 때려 죽여야 한다고 하였다.」는 말을 보았기 때문에 와서 아뢴 것이다. 그 아뢴 말 가운데 「성세창(成世昌)은 바로 신의 친구입니다.」하였다.’고 한 조항 아래에 ‘처음 말로 입계(入啓)할 때에 곧장 「성세창과 유인숙은 바로 신의 친구입니다.」 하였는데 주서(注書)를 시켜 이것을 사알(司謁)에게 서부(書付)할 때에 인숙을 빼버리고 세창만을 기록하였으니, 권벌의 정직함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 인숙과 더불어 동모(同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뢰는 그 자리에서 도리어 「인숙은 신의 친구입니다.」고 아뢰었으니, 대체로 한 번 친구로 삼았던 사람은 끝내 감히 친구로 여기지 않을 수 없는 의리에서 나온 것이다. 이 어찌 얼굴을 돌리고 말을 꾸미는 자가 능히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라고 기록한 사실에 대해서는, 인숙은 당시의 죄인들과 죄를 지은 자인만큼 권벌로서는 의당 그를 기휘할 듯한데도 권벌은 곧 그를 자신의 친구라고 일컬었고, 권벌의 죄가 또한 그 당시에는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소신은 다만 그의 말을 곧은 것으로 여겼을 뿐이요, 특별히 다른 마음은 없었습니다.
또 ‘허자가 권벌에게서 원상(院相)을 체직하라고 아뢰었다.’는 조항 아래에 ‘이상(二相)도 권벌이요, 지사(知事)도 권벌인데, 어찌 직위가 같지 않다고 해서 권벌까지 다를 수 있겠는가. 권벌이 만일 그 직임에 합당한 사람이라면 지사인 권벌이 오히려 지사가 아니면서 합당하지 못한 사람보다는 나을 것이다. 어찌 직위를 가지고 논할 수 있겠는가. 이는 비록 직위를 가지고 말하였지만 실상은 권벌을 미워해서 그런 것이다.’고 한 사실로 말하자면, 소신이 권벌을 보니, 면대(面對)할 때를 당해서 지난날 저 사람[彼人]들을 영구(營救)한 데 대해 그 미안한 점을 아뢰고 곧장 나와버렸는데, 끝내 이 때문에 판서(判書)의 직이 명체(命遞)되었습니다. 일의 시비 곡직은 신이 실상 모르는 바이지만, 권벌이 시의(時議)에 영합하지 않은 것만은 벌써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신은 ‘그 원상(院相)을 체직한 것은 반드시 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허자가 사실대로 바르게 아뢰지 않고 다만 「지사(知事)는 원상이 될 수 없다[不可]」고 아뢰어 체직한 것이다.’고 여겨 망령되이 그 일이 사체에 구차스럽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른바 ‘될 수 없다[不可]’는 말은 특히 문자(文字) 사이의 범범한 말로서, 다만 권벌의 체직이 부실하다는 것을 밝힌 것뿐입니다.
또 ‘이중열(李中悅)의 서계(書啓)’ 아래에 ‘이중열의 서계가 있기 전에는 이휘(李煇)의 옥사(獄事)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때에 이르러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중열은 이휘의 친한 친구이다.’고 기록한 사실로 말하자면, 이휘의 정상을 처음에는 비록 몰랐었지만 중열의 계사(啓辭)와 이휘가 자복한 말에서 그 정상이 이미 환히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어찌 감히 다른 뜻을 가지고 그 사이에 의심을 두었겠습니까. 이른바 ‘이루어지지 않았던 옥사가 이때에 와서 이루어졌다.’는 것은 곧 그 옥사가 이루어진 절차를 말한 것일 뿐이요, 옥사를 얽어 만들었다[織成]는 성(成)자의 뜻으로 말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성(成)자가 과연 온당하지 못하니, 이 또한 소신이 단문하여 글자를 잘못 놓은 것입니다.
또 ‘이휘의 승복’ 아래에 ‘억수(億水) 등이 반복하여 논힐(論詰)하기를 「일이 이미 이렇게 되었으니 네가 아무리 변명하려 해도 아무런 이익이 없을 것이다.」 하자, 이휘가 마침내 착서(着署)하고 승복하였다.’고 기록한 사실에 대해서는 이휘의 정상이 참으로 애매하다면 아무리 형신(刑訊)을 한다 하더라도 쉽게 승복하지 않을 것인데, 더구나 힐문만을 했을 뿐인데 사실도 아닌 것을 선뜻 자복하였겠습니까. 다만 이른바 ‘일이 이미 이렇게 되었다.’는 등의 말은 소신이 듣고 본 것을 가지고 쓴 것뿐이요, 특별히 다른 뜻은 없습니다.
또 ‘윤흥의(尹興義)가 이날 죽었다. 흥의의 시체가 타락산(駝駱山) 밑에 있었는데, 한 서생(書生)이 타락산에서 내려와 흥의의 시체가 어디에 있느냐고 묻자, 지키는 자가 처음에는 기휘하여 말하기를 「이미 내다 장사지냈다.」고 하였는데, 그 서생이 굳이 캐물으므로 지키는 자가 마지 못해 그 시체를 보여주었다. 그러자 서생이 그 시체 곁에 앉아 손으로 시체를 어루만지면서 한참 동안 눈물을 흘리다가 백저포(白苧布) 한 끝[一端]을 소매 속에서 꺼내어 시체의 곁에 두고는 다시 산으로 올라갔는데, 끝내 그가 누군지 알 수가 없다.’고 기록한 사실로 말하자면, 흥의 역시 역적 윤임의 아들로서 역모(逆謀)에 같이 참여했다가 죽었는데, 어찌 이 서생이 와서 눈물 흘리고 간 일을 가지고 흥의의 죄가 애매한 게 아닐까 의심했겠습니까. 소신이 그때에 전해들은 것은 이상과 같았는데, 그 백저포를 시체 곁에 두고 간 사람이 필시 흥의의 당우(黨友)일 것이나 그 일이 심상치 않은 듯하므로 소신이 애오라지 그 들은 대로 기록하였을 뿐입니다. 소신이 어찌 감히 그 사이에 다른 마음을 두고 기록하였겠습니까.
그리고 그 말을 신에게 들려준 사람으로 말하자면, 소신은 그때 하번(下番)으로 정원(政院)에 있었는데, 막 밖에서 공사(公事)를 가지고 온 관원(官員)이 우연하게 들은 것을 소신에게 말을 주기에 소신은 다만 그 말을 이상하게 여겨 기록하였을 뿐입니다. 소신에게 그 말을 해준 사람에 대해서는 지금 벌써 4년이나 되어서 기억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감히 헛된 말을 스스로 지어내서 이런 무익한 기록을 만든 것은 아닙니다.
또 ‘이날 윤흥의가 죽었다.’고 기록한 문법(文法)에 대해서는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흥의가 미처 바른 형벌을 받기 전에 형장 아래서 죽었기 때문에 ‘복주(伏誅)’ 등의 말로 기록하지 못하고 ‘죽었다[死]’고만 기록하게 된 것입니다. 또 ‘이날[是日]’ 이라고 기록한 것에 대해서는 전에 이미 추국(追鞫) 등의 일을 기록하면서 이 일은 잊어버리고 추국 등의 일과 같은 곳에다 기록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날에 해당된 여러 기록의 끝에다 그의 죽음을 추서(追書)하여 ‘이날’이라는 말로써 그가 여러 기록의 사건과 같은 날에 죽었음을 나타내고자 한 것입니다. 그 문법은 특별히 다른 뜻이 없습니다.
또 ‘유관(劉寬)이 밀계(密啓)했다.’는 조항 아래에 ‘유관은 상인(喪人)이다. 소관(素冠)을 쓰고 궐문(闕門)을 들어가 좌우(左右)를 물리치고 은밀히 계(啓)를 올리자, 주상이 「나는 네가 특별한 계를 올릴 줄 알았는데 바로 이 계로구나.」 하였다. 유관은 스스로 「감히 공(功)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지만, 그의 마음속으로는 「이것이 공은 공이다.」라고 생각한 것이 아닌가. 유관은 무인(武人)이니 여러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 또한 유관의 죄만은 아니다.’라고 기록한 사실로 말하자면, 유관이 권성(權誠)의 일을 아뢴 것이 많이 부실한 것 같았기 때문에 소신의 망령된 생각에 그가 반드시 공을 바란 것이라고 여겨서였습니다. 당시 대사(大事)가 막 정해진 뒤에 유관이 제상(諸相)들이 녹공(錄功)된 것을 보고는 제상들이 녹공된 실상은 알지도 못하고 망령되이 부실한 일을 가지고 실공(實功)의 보답을 바랐으므로 신은 그의 정상 또한 모르는 것이 있기 때문에 이 같은 행동을 한 것이라고 여겨, 망령되이 소신의 뜻으로 기록했을 뿐이요, 이 역시 다른 뜻은 없습니다.
또 ‘정희등(鄭希登)을 용천(龍川)에 안치했다.’는 조항 아래에 ‘희등은 노모(老母)가 있었는데, 그 노모가 희등이 귀양갈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는 희등을 만나보고 결별하기 위해 성(城)을 나갔다가 희등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종자(從者)는 집으로 돌아가자고 하나 그 노모는 오히려 더 나가려고 하여 서로 다투어 더 가자커니 말자커니 하면서 노상(路上)에서 방황하며 통곡하므로 길가는 사람들이 광경을 보고는 모두 몹시 애통해 하였다. 대체로 희등은 정강이뼈가 으스러지고 끊어져 골수(骨髓)가 터져나와 겉으로 흘러내렸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그가 반드시 죽을 것으로 알았다.’고 기록한 사실로 말하자면, 희등의 죄는 드러나서 이미 자복까지 하였는데, 어찌 감히 희등의 죄가 애매하다 해서 애통하게 여길 일이겠습니까. 희등은 비록 죄가 있지만, 고어(古語)에 이르기를 ‘제 자식의 악은 모른다.’ 하였으니, 모자간의 정리가 어찌 죄가 있다고 해서 달라지겠습니까. 자식을 보고싶은 마음은 의당 한이 없는 것인데 게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집으로 돌아오려 하지 않고 오히려 더 나가려고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노상에서 허둥지둥 방황하며 울부짖으니, 길에서 보는 사람들이 그 모자간의 정에 감격하여 그렇게 슬퍼한 것입니다. 이 또한 소신이 정원에 있으면서 전해들은 것인데 말해준 사람은 기억하지 못하겠습니다마는, 이 일 역시 앞의 일과 마찬가지로 소신 스스로 지어낸 말은 아닙니다.
또 ‘을사년 8월 23일에 백인걸(白仁傑)이 밀지의 잘못된 점을 논계(論啓)했다.’는 조항 아래에 ‘어미가 그 말을 듣고 경악했다.’는 등의 말로 주석한 것은 소신이 기록한 것이 아닌데, 누가 기록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필적(筆跡)을 보니 아마 조박(趙璞)이 기록한 것인 듯합니다."
전 사맹(司猛) 손홍적(孫弘績)의 공초는 다음과 같다.
"신이 전에 검열(檢閱)로 있을 때에 기록한 병오년 9월의 시정기(時政記) 가운데 ‘상(上)이 사슴 고기를 좋아하는데 사슴 꼬리를 더욱 좋아하였다. 외방(外方)에서 진상(進上)할 때 혹 산 사슴[生鹿]을 얻지 못하여 산 노루[生獐]를 대신 잡아 바치는 자가 있으면, 임금이 근시(近侍)에게 이르기를 「산 노루 열 마리가 어찌 산 사슴 한 마리를 당하겠느냐.」고 하였다. 또 금년 6월에 상이 이질(痢疾)을 앓으면서 생선을 먹고 싶어하므로 내시(內侍)가 이 뜻을 승지에게 전하자 승지들이 그 뜻을 받들어 도모하여 산 붕어와 은구어(銀口魚) 등의 생선을 혹 외방에서 많이 들여오기도 하자 상이 정지하라고 명하였다.’고 기록한 조항 아래에 ‘주상(主上)께서 지금 상중(喪中)인데도,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이런 것이다……’고 주석을 단 사연으로 말하자면, 지난 병오년 6월 경에 승전색(承傳色) 노윤천(盧允千)이 승지들에게 말하기를 ‘주상께서 근래에 잠시 미령하시어 어선(御膳)을 드시려 하지 않는데, 산 붕어나 은구어 등의 생선이 있으면 혹 드신다.’ 하고 이어서 ‘상께서 성체(聖體)가 약한 데다 날씨 또한 몹시 더워서 이 때문에 어선을 들지 않으시고, 드디어 「산 노루 열 마리가 어찌 산 사슴 한 마리를 당할 수 있겠느냐.」는 말씀을 한 것이다.’고 자상하게 말해주었습니다. 그런데 뒤에 들으니, 상께서 생선을 원하신 것이 이토록 심한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는데, 승지들이 스스로 외방에 통하여 시끄러이 진공(進貢)하게 하였으므로, 상께서 폐단이 있다고 여기시어 정지하도록 명하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때의 승지는 누구였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소신의 어리석은 생각에 사관(史官)이 된 사람은 아무리 사사로이 듣고 본 일일지라도 의당 사책(史冊)에 기록해야 하는 법이요, 이 일은 내시(內侍)가 공공연하게 정원에 전해준 말인데 이것을 기록하지 않는 것은 잘못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기록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밑에 주석을 단 의도는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주상께서 나이 어리고 성체가 약하여 부득불 이럴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하고자 한 것뿐입니다. 이것은 소신이 임금의 허물을 감히 드러내려고 해서가 아니라 다만 들은 바를 기록한 것인데, 실상은 상께서 그만두라고 명하신 것을 훌륭하게 여기는 마음에서 또한 기록한 것입니다."
공초가 모두 끝나자, 추관들이 두 사람의 공초를 가지고 입계(入啓)하기를,
"대개는 모두 이미 승복(承服)하였으나 다만 사실을 남김없이 자복하지는 않았으니, 형추(刑推)하소서. 그리고 안명세의 공초에 의하면 ‘백인걸이 잡혀왔을 때의 일에 대해서는 내가 기록한 것이 아니고, 그 자획(字劃)을 보니 아마 조박(趙璞)이 기록한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조박은 지금 배소(配所) 【태인(泰仁).】 에 있으니 즉시 나추(拿推)하소서. 손홍적의 공초에 의하면, 사슴 꼬리에 대한 일은 승전색 노윤천(盧允千)이 승지들에게 와서 말해준 것인데, 그때 그 승지는 누구였는지 지금 기억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사해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노윤천을 잡아다가 빙문(憑問)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형추하는 일과 잡아다가 빙문하는 일은 모두 아뢴 대로 하라. 손홍적은 그때의 사관(史官)으로서 어찌 승지가 누구였는지를 모른단 말인가. 이 말이 더욱 솔직하지 못한 듯하다."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간흉 이기(李芑) 등이 흉특한 마음을 제멋대로 부려 못하는 짓이 없이 하고는 남들이 자기를 거론했을까 염려하여 기필코 사관의 기록을 보려고 한 것이다. 안명세 등은 그때의 사관으로서 모두 나국(拿鞫)을 당했으니, 그 화가 참혹하다 하겠다.
- 【태백산사고본】 6책 7권 15장 B면【국편영인본】 19책 563면
- 【분류】왕실(王室) / 정론(政論) / 인사(人事) / 사법(司法) / 변란(變亂) / 사상-유학(儒學) / 역사-사학(史學) / 재정(財政)
- [註 044]두 사람 : 안명세와 손홍적.
- [註 045]
갑진년 : 1544 중종 39년.- [註 046]
을사년 : 1545 인종 원년.- [註 047]
사대(査對) : 중국에 보내는 표문(表文)이나 자문(咨文)을 살피어 틀림이 없는가를 확인하는 일을 가리킨다.- [註 048]
신은(新恩) : 새로 과거에 급제함.- [註 049]
언소(言笑) : 웃고 말하는 것.○推官等, 令史官及撰集廳郞廳, 往撰集廳, 取《時政記》六卷 【乙巳八月望前後三卷, 九月望前後二卷, 丙午九月望前一卷。】 以來。 推官會勤政殿東古書筵廳, 以丙午九月《時政記》, 示其一時史官曰: "此 【卽鹿尾事。】 誰所書也?" 對曰: "見其書迹, 疑是孫弘績筆畫也。 然未知其必然也。" 推官令史官, 出《日記》 【丙午九月望前一卷, 乙巳八月望後一卷, 九月望前一卷。】 于春秋館, 以考之, 無其事, 【卽鹿尾事。】 又考房上日記, 則孫弘績爲上番時所書, 無疑。 於是竝拿來。 兩人被拿而來, 推官致前問之, 皆服自書。 安名世供云: "逆賊尹任情狀, 古今叛臣之中, 尤爲兇惡, 李德應招辭, 歷歷無疑。 而《時政記》中, 李德應招下, 書曰: ‘以梃與刃, 雖無有異, 然其杖殞, 不猶愈於極刑之慘
乎? 而乃欲免於杖耶? 此其意非杖則無死矣乎。 其言也慘, 其志也哀, 觀聽者莫不掩淚。’ 又於德應刑訊之下, 書曰: ‘德應之供旣書, 推官多不欲刑訊, 李芑、許磁强之。’ 又於德應遲晩取招之下, 書曰: ‘德應無一言着署而退。 蓋是時意以爲猶有生道, 不知至於極刑。 故至禁府取決案時, 始大驚。’ 云。 此等塡註情由, 小臣甲辰年僥倖登第, 時年二十七。 以新進愚妄之人, 是年十二月, 承文院揀擇, 乙巳年八月翰林除授, 出身僅十餘朔, 擢拜淸要。 上恩罔極, 無一毫一髮邪心, 日夜圖報涓埃之萬一。 況小臣一不見尹任之面, 乙巳年四五月間, 慕華館拜表査對時, 始望見而已。 李德應則生長藏義洞, 小臣則生長明禮坊, 南北懸絶, 但聞李德應文名, 未曾識面。 癸卯年間月不記, 小臣讀書事, 往三角山 僧伽寺, 則德應亦與其同生等, 前三四月先歸讀書, 小臣僅識面目。 小臣上歸第三日, 德應亦撤榻下來, 交情專不相親。 其後館學場中相逢, 則不過展揖而已。 適於甲辰年, 雖爲同年登第, 德應氣運有餘, 恢諧驕傲, 小臣則氣性疎拙, 常時待人, 言語不能快出於口。 與彼氣度不相合, 故德應, 每以殘亡目之, 專不許與。 小臣亦在前聞知德應心術, 則尹任作壻時, 欲試其能文, 得策問題二首, 招德應令製之。 德應坐任家, 終日而成篇, 任送弘文館課次, 一則三上, 一則三中, 二篇俱入格, 任以爲才, 卽定婚。 此一事固非士君子所忍爲之事, 心常薄其爲人, 小臣亦不欲納交相從。 故德應新恩時, 行齊馬首于其家, 小臣與同年, 一度往來, 而德應則不曾到小臣之門。 德應承文院免新前, 翰林秘薦, 免新後, 卽除翰林。 小臣時在承文院, 閑忙異路, 相見稀罕。 至八月小臣, 翰林除授, 則尹任事發之後, 德應已呈病不仕。 小臣與德應, 交分止此。 尹任、德應處有情, 萬萬無理, 而當此事發之時, 非徒小臣愚妄無識, 不知東西, 任等反逆情狀, 至於朝廷宰執, 亦容有所不知。 況小臣, 安敢測其端倪乎? 小臣妄意, 若有聞見則書之, 若有心志則書之, 以待後日之議定, 則後日當自有取舍者, 聞見及心志, 不敢不書, 聊以塞責。 以今日見之, 則其中書辭, 在小臣亦多驚駭。 況不以其時其情揆之, 則下問中若干條, 如此疑之, 亦固其宜。 然小臣其時愚妄無識, 不知事實, 無情所書, 別無他心。 德應招辭下所書情由, 則德應供招前, 則誠不知其情狀, 已供招後, 逆狀昭昭, 至與各人招辭, 如合符節, 無復他餘疑慮。 而德應輸服逆狀後, 歷陳平日以窮迫之故, 不得已寄托任家, 任之待其身殊薄, 平生艱苦之狀, 以悲辭哀語, 歷歷懇訴, 至曰: ‘小臣之至此, 飢寒誤之。’ 又曰: ‘如此而猶命杖, 則死外何言?’ 逆狀納招後, 陳情之言, 無非姑息免杖之計, 而不自知其參與逆謀, 其罪滔天, 已無所逃, 故小臣之意, 實愚其情狀, 標其免杖之計, 而以致譏刺。 所謂欲免杖云者, 只譏其陳情, 欲免杖等語而已。 安敢以輸服逆狀之言, 亦爲免杖而發乎? 且其掩淚之語, 則其惡雖可憝, 其辭則實爲悲切, 在傍觀聽者, 雖他人, 或有愴然者, 而若德應爲注書時, 所率政院使令輩, 無不掩淚。 此則小臣目覩之事, 故着實記之也, 非敢以德應爲曖昧而掩淚也。 第二條德應刑訊下所書, 小臣愚意以爲, 史官之職, 非徒記傳敎、啓辭而已, 一時所見辭色, 亦必隨所見, 書之可也。 而當其時見他餘推官, 則相顧無言, 其色若不欲必杖者, 而左相 【見上。】 與許磁, 則言不可不杖云, 故所以書强之也。 第三條招下所書情由, 則小臣當其時, 旣見德應, 無一言着署, 而厥後聞其決案, 大驚之語, 故所以書着署時, 意以爲猶有生道, 而至決案時, 始大驚云。 而臣意此亦(愚)〔想〕 其德應罪惡如彼, 而不自覺其當誅之甚也。 羅湜、成子澤、郭珣之招辭, 漏略而不書, 他罪人招辭, 亦多不書情由, 慶會南門推鞫罪人之際, 史官不在推鞫廳, 例退避于差備門前板墻後, 及其盡書招辭入啓之時, 承傳色下來後得見之, 忙迫之間, 不及詳記, 略其歇處, 只於其關重之語書之, 其漏略而不書, 勢不得詳也。 禁府所推罪人, 則刑房承旨, 往來推鞫, 以委官所捧招辭, 不復開見入啓。 故招辭外, 別有所啓之語。 史官得聞書之, 其招辭, 則不得見之。 只聞於色承旨而書之, 其間豈無漏略之辭乎? 小臣亦非不知其漏略之爲未安也, 但聞前例, 則一切招辭, 例入內不下, 而禁府亦無他本, 故不得取來而書之, 其漏略亦其勢也。 若德應之招, 其所詳錄者, 則德應納招時, 發聲大厲, 故小臣在板墻後, 隨說隨錄, 故得以詳盡也。 此亦非見其招辭而得書也。 八月二十八日引見後書: ‘是日也, 上終始不言, 慈殿反覆言任等之罪, 深且重矣, 不可不罪之意。 彦弼等以其平日向上之誠, 與夫任等所爲之狀, 爭自陳訴, 以冀免禍而固寵, 其言也, 猶恐不及, 此未了而彼已發, 口之訥者, 數爲利者奪矣。 芑獨言之寡, 以其首議, 無所事於言, 而大意與磁同也。 磁數以定罪人, 不疑之意, 贊之百齡, 明己之營救, 猶不害爲義士, 而其意則亦若救之者也。’ 事則自上不言及, 慈殿之敎諸相之語, 皆所以記實。 而至於無所事於言及若救等之語, 小臣不識情實, 以其愚妄之意, 庶效史官不獨記言記事之意也, 而到今思之, 果爲駭愕。 且尹任、柳灌、柳仁淑賜死, 李霖極邊安置, 權橃遞本職之下, 書 ‘任等賜死敎下, 李彦迪、丁玉亨、尹漑、閔齊仁、羅世纘等五六人, 顔色慘然, 餘盡喧笑, 無異平日, 或有得色者有之。 嗚呼! 任等之罪可誅, 大行在殯, 同日而殺三大臣, 豈非不幸之甚耶? 古人泣辜, 且曰: 「哀矜而勿喜。」 當此之時, 雖罪其罪, 似不宜若此事’, 則小臣以所見, 記其言笑辭色。 而殺三大臣等語, 則小臣八月二十七日, 始入下番, 翌日二十八日, 値此事, 其時任等情迹, 專未彰露, 未知情狀。 此人等罪則有之, 而猶可目之爲大臣, 故旣書大臣而歎其不幸, 疑其談笑自若, 似未爲宜, 故如此書之。 此亦愚妄之意, 而別無他情。 然到今爲可駭之甚也。 且李彦迪曰: ‘其時臺諫、侍從年少不更事者, 或以爲: 「不須母后臨朝, 如周公負成王可也。」 非別有邪心, 而倉卒之際, 事且未定而然也。 豈有異心乎?’ 其下, 書, ‘彦迪, 前旣啓以王大妃之不知也, 此又以年少無他心, 反覆啓之, 此賢者所以異於衆人事。’ 則彦迪其時頗得一時之虛譽, 名望最高, 而其罪未著, 且不識所謂年少輩者之情狀。 而他相則各自陳情, 而彦迪獨以孝王大妃之說, 丁寧勸勉, 故愚妄之意, 疑其爲賢而竝稱之也。 且慈殿敎曰: ‘有如白仁傑之輩。’ 下註曰: ‘辭甚賤惡之意。’ 則其時慈殿之敎, 非以 ‘之輩’ 輩字敎也, 實則曰: ‘如白仁傑體。’ 云, 而小臣文短, 不能直描其言, 而以輩字書之, 而意猶未盡, 故如是爲註。 且使是非混淆也, 判尹之下註曰: ‘言尹思翼也, 多有不肯之色。’ 云者, 所謂色者, 垂簾之中, 非敢指其聖顔之色, 但聞其傳敎, 認其有不肯之辭氣, 而誤用辭色之色而書之, 此亦小臣文短, 下字不中處也。 且尹思翼曰: ‘危疑之際, 不無虛僞之事, 如有奸人, 書木牌投之者有之。’ 之下, 書 ‘前在中宗朝, 有以木牌, 投于東宮, 時以謂奸人所爲, 思翼蓋指此諭之也。’ 思翼事, 則其時小臣愚妄, 專不識彼人等情狀, 而思翼獨自異於他相, (敢)〔取〕 爲立異, 故實不知言之是非, 敢實其事也。 且權橃見德應供, 有橃與仁淑言, 當撲殺元老於政府前之語, 故橃來啓。 啓中 ‘成世昌, 乃臣友也。’ 之下, 書 ‘始以言入啓時, 乃曰: 「成世昌、柳仁淑, 乃臣友也。」 及令注書, 書付司謁時, 去仁淑, 只書世昌, 橃之直, 於此可見。’ 方啓其不與仁淑同者, 而反以臣友, 啓之, 蓋其所友者, 終不敢不以爲友。 此豈反面飾辭者所能然乎? 事則仁淑當時之共罪之者, 宜若可諱, 而橃乃以其友稱之, 而橃之罪, 當時亦未著, 故小臣但以其言, 疑其直也, 別無他情。 且許磁所啓權橃遞院相下, 書 ‘二相亦此橃也, 知事亦此橃也, 豈以位不同而橃亦變乎? 橃苟可矣, 知事之橃, 猶賢乎非知事而不可者也。 豈以位乎哉? 此雖言以位, 其實惡其橃也歟。’ 事則小臣見權橃, 當面對之日, 以前日營救彼人之意, 啓其未安, 而徑爲出來, 卒以此故, 命遞判書。 事之是非, 則臣實不知, 橃之不合於時議, 則旣已知矣。 臣意其遞院相, 亦必以此。 故不直以其實啓之, 只托於知事爲不可, 院相而遞之者, 妄料其苟且於事體。 而其所謂不可之說, 是特文字間泛語, 而但明其遞橃之不實也。 且李中悅書聿啓下書: ‘前此煇之獄, 猶之未成, 至是成矣。 中悅, 煇之心友也。’ 事則煇之情狀, 始雖不知, 及見中悅啓辭及煇之所自服, 則其狀已無不著。 安敢以他意, 置疑於其間哉? 其所謂未成乃成者, 是特言其獄事之節次, 而非言織成之成字。 而成字果爲未穩, 則是亦小臣文短, 誤下字也。 且李煇承服下, 書 ‘億水等反覆論詰曰: 「事已如此, 汝雖欲卞明, 無益也。」 煇遂着署承服。’ 云事, 則煇之事狀, 誠若不然, 則雖用刑訊, 亦不易服, 況只用詰問, 而遽肯服其非情乎? 但所謂: ‘事已如此。’ 等語, 是特以小臣聞見者而書之, 別無他意。 且 ‘尹興義是日死。 興義屍在駞駱山下, 有一書生, 自駞駱山下來, 尋問興義之屍安在, 守者始諱之曰: 「已出葬之。」 生固問之, 守者不得已以屍見之。 生坐屍傍, 以手撫之, 流涕良久, 以白苧布一端, 出諸袖中, 置屍傍, 還上山去, 竟莫知何人。’ 如是書之事, 則興義, 亦以賊任之子, 同參逆謀而死, 豈以此事, 有間於其罪也? 小臣其時, 以傳聞得聽, 則如此云云, 其以白苧來置屍傍者, 是必興義黨友, 而其事似非尋常, 故小臣聊記其所聞而已。 小臣豈敢有情於其間而書之也? 所聞之人, 則小臣以下番在政院, 而方外持公事官員, 偶以所聞, 說道小臣, 但異其言而書之。 其人則今已四年, 久不能記憶。 非敢以自撰虛僞之言, 爲此無益之書也。 且 ‘是日興義死’, 文法則非有他意, 興義未及正典刑, 而死於杖下, 故不得倣伏誅等語書之, 而所以只書其死也。 又書是日者, 前旣書推鞫等事, 而其事則忘却, 未得一處書之, 故追書其死於是日諸書之末, 而欲以是日, 見其死於同日也。 其文法, 別無他情。 且劉寬密啓下, 書 ‘寬, 棘人也。 戴素冠扣天門, 辟左右密有啓, 吾以汝有異之啓也, 曾是之啓也。 自以爲非敢邀之, 其心以爲功則功耶? 寬, 武人也, 無足多論, 抑非獨寬之罪也。’ 事則寬之所啓權誠之事, 多若不實, 故小臣妄意, 其必邀功。 而當時大事初定之後, 寬見諸相錄功, 不知諸相錄功之實, 而妄以不實之事, 望其實功之報, 臣謂其情, 亦坐於有所不知, 故如此, 而小臣妄以己意書之, 亦非有他情。 且安置鄭希登於龍川下, 書 ‘希登有老母, 聞將竄, 欲面訣出城, 聞希登死。 從者欲返, 母猶欲行, 相與爭其行止, 彷徨號慟於道上, 行路莫不摧慟 。 蓋希登, 脛骨碎折, 髓液流注, 人知其必死。’ 事則希登之罪著矣, 旣已服罪, 安敢以希登之罪, 爲可摧慟乎? 希登雖有罪, 古語云: ‘莫知其子之惡。’ 母子之情, 豈以有罪而有間乎? 欲見之心, 宜無所不至, 而及聞其死, 猶欲行不欲返也。 遑遑號泣於道上, 則道上見者, 摧慟其母子之情而悲之也。 是亦小臣在政院傳聞, 而不記其所言之人, 則同前亦非自撰之言也。 且乙巳八月二十三日, 白仁傑論啓密旨之非下, 書註母爲驚愕等語, 非小臣所撰, 不知某人所爲, 觀其筆跡, 似是趙璞所書也。" 前司猛孫弘績供云: "臣前爲檢閱時所書, 丙午九月《時政記》中言: ‘上好鹿肉, 尤好鹿尾。 外方進上, 或有不得生鹿, 有以生獐代進者, 上謂近侍曰: 「十首生獐, 安能當生鹿一首?」 又於今六月患痢, 思極新鮮之味, 內侍傳于承旨, 承旨等承意圖之, 生鮒魚及銀口魚等物, 或多從外方而至, 上命停之。’ 註曰: ‘主上今方宅憂而年幼, 故如此。’ 云云。 辭緣則去丙午年六月間, 承傳色盧允千言于承旨等曰: ‘主上近來暫有不寧之氣, 不思御膳, 若有生魚銀口魚等物, 則或進御。’ 仍曰: ‘自上聖體旣弱, 日亦暑酷, 以此不進御膳, 遂以十首生獐, 安能當生鹿一首之語。’ 詳細言之。 其後聞之, 自上思鮮魚, 不至(此如)〔如此〕 之甚, 而承旨等通于外方, 以致紛然進貢, 自上以爲有弊而命停之。 其時承旨, 不知爲某員, 而小臣愚意, 爲史官者, 雖私自聞見之事, 固當書之於史冊, 而此則內侍, 公然傳說于政院而不書之, 恐爲非矣, 故書之。 而其所以爲註之意, 欲使後世, 知主上年幼質弱, 不得不如此之意耳。 此小臣非敢欲彰君過, 只記所聞, 而實美自上命停, 故亦書矣。" 供訖, 推官等以兩人所供入啓曰: "大槪皆已承服, 而但不輸情, 請刑推。 安名世供內: ‘白仁傑捉來時事, 非吾所書, 觀其字畫, 似趙璞所書。’ 云。 趙璞今在配所, 【泰仁。】 請卽拿推。 孫弘績供內鹿尾事, 承傳色盧允千, 來言于承旨處, 而承旨則不記其某員云。 然察之則可知矣。 盧允千, 請拿來憑問。" 傳曰: "刑推及拿來事, 皆如啓。 孫弘績, 以其時史官, 豈不知承旨爲誰乎? 此言尤似不直矣。"
【史臣曰: "姦兇李芑等, 肆其胸臆, 無所不至, 而恐人之議己, 必欲見史官之所記。 安名世等, 以一時史官, 竝被拿鞫, 其禍慘矣。"】
- 【태백산사고본】 6책 7권 15장 B면【국편영인본】 19책 563면
- 【분류】왕실(王室) / 정론(政論) / 인사(人事) / 사법(司法) / 변란(變亂) / 사상-유학(儒學) / 역사-사학(史學) / 재정(財政)
- [註 0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