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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실록 4권, 명종 1년 8월 29일 계축 4번째기사 1546년 명 가정(嘉靖) 25년

대사헌 윤원형 등이 허자·신거관·이수경 등을 벌할 것을 청하니 윤허하다

대사헌 윤원형, 집의 원계검(元繼儉), 장령 심봉원(沈逢源)·윤우(尹雨), 지평 이추(李樞), 헌납 강위(姜偉), 정언 이감(李戡) 등이 아뢰기를,

"원훈(元勳)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임금의 형세를 굳건히 하고 인심의 삿된 것을 진정하여, 조정이 평화롭고 국맥(國脈)을 당당하게 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전번에 사림(士林)에서 말하는 물망이 있다는 자들이 흉도(凶徒)에게 달라붙어 그 역모에 말려들어가는 것을 알지 못했으니, 그들에게 아무리 미생(尾生)의 신의(信義)와 효기(孝己)의 효행(孝行)205) 이 있다 한들, 전하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 여얼(餘孽)이 아직까지 남아서 생명을 보존치 못할까 걱정하고 자기의 세력을 굳히기 위하여 온갖 계략을 다 쓰고 있습니다.

사간(司諫) 진복창은 천성이 본시 강개한데다가 저번부터 흉도들의 정상을 환히 알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말 중에 시사(時事)에 방해되는 말을 들으면 그 시비를 바로 논박하여 기피함이 없었으므로 간사한 무리가 두려워하고 꺼려 왔습니다. 지금 난(難)이 진정된 뒤에도 시론(時論)이 야기되어 국가에 해독을 끼치므로 진복창이 듣고 분개함을 금치 못하여 그 친구와 더불어 시사와 인심의 불순함을 개탄하다가 드디어 공론에 오르게 되었으나, 삼성 교좌(三省交坐)로 추국할 즈음에 조금도 관계된 일이 없었습니다. 비록 정흥종과 은밀히 결탁하였다 하나, 간서를 보내 초청한 일은 대지를 매입하기 위한 것이요, 다른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허자는 원훈 대신(元勳大臣)으로 국사를 생각지 않고 사의(私意)를 품어 갈팡질팡하면서 물망이 없다느니, 또는 정흥종과 결탁했다느니 하다가 상소까지 올려 논박하였으니, 신들은 소위 물망이 날때 타고나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은밀히 역류(逆類)에게 붙어 자취를 숨기고 화를 모면하는 자가 진정 물망이 있는 것입니까? 진복창이 사간이 된 것에 대해 감히 말할 수 없는 것인데도 감히 노여워하니, 이것이 어떤 부류의 사람입니까? 이것이 과연 공심(公心)이 있고 사의(私意)가 없는 자입니까? 모든 사람에게 말을 규제하여 사언(邪言)과 역론(逆論)을 듣고도 모두 입을 다문 채 위에 아뢰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진정 아름다운 세상의 일입니까? 나라를 걱정한다고 가탁(假托)하여 몰래 흉도를 두둔하고 위국(爲國)하는 사람을 배척하여 시비를 전도시키고 인심을 분열시키는가 하면, 성우(成遇)남기(南沂) 등의 원수를 갚아주려는 것처럼 하니, 너무 한심스럽습니다. 나라의 원훈(元勳)으로서 임금을 위하는 것이 과연 이러한 것입니까?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관계되는 바가 가볍지 않으니 파직시키소서.

신하로서 임금에게 두 마음을 품는 자는 모든 신하들이 다 분개해 하는 바입니다. 성우남기 등의 흉패한 정상은 국법에 용서할 수 없으므로 조금도 애석해 할 것이 아닌데, 대사성(大司成) 구수담(具壽耼)이 전일에 특진관(特進官)으로 입궐하여 경연(經筵)에 들다가 공공연히 발론하기를 ‘남기의 죽음은 전혀 진복창 때문이다. 정원에 불려갔을 때 그 정상을 직계(直啓)하지 않았다면 그가 어찌 죽음에 이르렀겠는가? 우리 마을 사람들이 다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였습니다. 남기를 애석해하는 뜻이 뚜렷하니, 역시 놀라운 일입니다. 이는 사람의 사생(死生)은 지중한 것인만큼 아무리 흉도가 위에 저촉되는 말을 한 것을 들었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전파시키지 않아야 한다고 여긴 것입니다. 또 임금의 하문에도 사실을 숨기고 아뢰지 않았으니, 자신을 보존하는 것이 귀한 줄만 알고 군신(君臣)의 대의(大義)는 알지 못한 것입니다. 만약 사람마다 구수담과 같은 마음을 갖는다면 아무리 역적이 일어난다 하여도 반드시 수수방관만 하고 있을 뿐 누가 감히 발설하려 하겠습니까? 관계되는 바가 매우 중대하므로 징치(懲治)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파직시키고 다시는 서용하지 마소서.

호조 판서 신거관(愼居寬)은 본디 학식과 주견이 없는데, 정유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蝨]나 서캐[蝨]처럼 붙어 현직(顯職)에 눌러앉아 겉으로는 근실한 체하면서 속으로는 사곡(邪曲)된 짓을 하고, 동서(東西)로 아첨하여 공교히 시변(時變)을 벗어났으므로 그때 사람들이, 장마나 가뭄을 타지 않는 밭이라고까지 비유하였습니다. 또 전번에 유인숙(柳仁淑)과 함께 전조(銓曹)에 들어가서 아첨하여 빌붙은 사실이 없지 않았는데, 지금 그 정적(情迹)을 엄폐하고 도리어 육경(六卿)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성은(聖恩)이 지중하여 영행(榮幸)이 이보다 더 클 수 없으므로 마음을 고쳐서 나라를 위하는 데 딴 마음이 없어야 할 터인데, 오히려 불안해 하는 마음을 품고 자기의 세력을 굳히려는 계책으로 은밀히 사의(私意)를 시도하여 조정을 어지럽히려 하니, 그 용심(用心)이 매우 음흉합니다. 관작을 삭탈하소서.

사예(司藝) 이수경(李首慶)은 전번에 역적 이휘(李煇)이중열(李仲悅)·정황(丁熿)과 붕당이 되어 왕래한 사실을 사람들이 다 알고 있고, 이휘를 자기 집으로 불러 함께 잤으니, 흉역에 관한 의논을 들었음이 분명합니다. 이휘 등이 죄를 받은 뒤에도 오히려 현직(顯職)을 보존하고 있으니, 이미 만족하다 하겠는데, 이중열은 국가에서 버리지 못할 인재라느니 혹은 역류(逆類)에게 가죄(加罪)를 논한 자는 끝내 일신(一身)이 복(福)되지 못할 것이라느니 하였습니다. 이중열의 흉상(凶狀)은 그의 계사(啓辭)에 뚜렷이 드러났으므로 이수경이 구출할 수 없으며, 임금을 위하여 역류를 다스린 사람에게 도리어 화가 장차 미칠 것이라고 하였으니, 이 국가를 마침내 어디로 몰고 가려는 것입니까? 그 말이 그처럼 음참(陰慘)하니 너무도 놀라운 일입니다. 이같이 경박하고 삿된 사람은 도하(都下)에 둘 수 없으니, 속히 먼 곳에 찬배(竄配)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지금 아뢴 바를 보니 너무도 놀랍다. 나는 간흉이 이미 제거되었으므로 인심이 절로 안정되리라 여겼는데, 그 여얼(餘孽)이 아직도 남아 있어 사론(邪論)이 끊이지 않는다 하니,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니겠는가. 허자(許磁)는 국가와 그 휴척(休戚)을 함께 해야 할 원훈 대신으로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일에 치중해야 할 터인데 그 용심이 그러하니, 내가 누구를 믿겠는가? 파직은 너무 과중하니 체직만 하라. 신거관·구수담·이수경은 모두 아뢴 대로 시행하라.

근자에 내가 인심을 진정시키기 위하여 협종(脅從)한 자는 불문에 붙여서 관인(寬仁)한 아량을 보였으니, 의당 스스로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터인데도 사론(邪論)이 이처럼 끊이지 않으니, 어찌 천변(天變)의 경고가 없겠는가."

사신은 논한다. 허자 등이 진복창을 추대하여 독사(毒蛇)나 미친개와 같은 악(惡)을 양성시켰다가, 토혈(土穴)을 점령하고 울타리를 뛰어넘은 뒤에야 그 참혹한 물림을 금지하려 하였으니, 아 이미 늦었다. 그의 기염이 극에 이르러 생살 영욕(生殺榮辱)이 그의 말 한마디에 달려 있게 되자 전일의 행동을 뉘우치고 두려워하여 생각을 바꾸고 원한을 풀면서 함께 다시 상종하려 하였으니, 너무 구차하고 전도된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사예 이수경을 함경도 온성(穩城)에 찬배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이수경진복창과 이웃에서 살았는데, 진복창은 한때 버림을 받았었고 이수경은 현직(顯職)에 있었다. 사림(士林)중에 정황·이휘의 무리가 진복창의 문 앞을 지나면서도 들어가지 않고 계속 이수경과 왕래하므로 진복창이 원한을 품은 지 오래였다. 그러다가 윤춘년(尹春年)의 인진(引進)으로 대간이 되어 국론을 장악한 뒤에는 이수경이 도리어 죄를 얻게 되었으니 인정(人情)이 참으로 두렵다.


  • 【태백산사고본】 4책 4권 36장 A면【국편영인본】 19책 446면
  • 【분류】
    왕실(王室) / 정론(政論) / 인사(人事) / 사법(司法) / 변란(變亂) / 가족(家族) / 신분(身分) / 사상-유학(儒學) / 역사-사학(史學)

  • [註 205]
    미생(尾生)의 신의(信義)와 효기(孝己)의 효행(孝行) : 맹목적인 신의와 경중을 모르는 효도를 말함. 미생은 춘추 시대 사람으로 어떤 여자와 다리 밑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여자는 오지 않고 비가 내려 물이 붙어나자 그대로 교주(橋柱)를 잡고 그 자리를 옮기지 않은 채 죽었다고 한다. 《사기(史記)》 소진전(蘇秦傳) 효기(孝己)는 은 고종(殷高宗)의 아들로 효행(孝行)이 있었다. 생모(生母)는 일찍 죽었고 고종이 후처(後妻)에게 고혹되어 내침을 받았고 드디어 죽었다고 한다.《사기(史記)》 진승상세가(陳丞相世家).

○大司憲尹元衡、執義元繼儉、掌令沈逢源尹雨、持平李樞、獻納姜偉、正言李戡啓曰: "所貴乎元勳者, 固人主之勢, 鎭人心之邪, 使朝廷和平, 國脈堂堂而已。 頃者士林之所謂有物望者, 趨附兇徒, 不知流入於逆謀, 雖有尾生孝己之行, 何補於殿下哉? 餘孽尙存, 恐不自保, 欲固己勢, 百端爲計。 司諫陳復昌性本慷慨, 自曩時, 洞知此類之情狀。 苟聞人言, 有妨於時事, 則直論其非, 無所違避, 奸邪之徒, 側目忌憚。 今者定難之後, 尙有時論, 害及國家, 復昌聞之, 不勝憤發, 與朋類, 慨嘆時事與人心之不順, 而遂發於公論, 三省推鞫之際, 少無干涉之事。 雖曰陰交鄭興宗, 其所爲邀簡, 只欲買家(代)〔垈〕 , 而非有他意也。 許磁以元勳大臣, 不念國事, 內懷私意, 向東指西, 以爲無物望, 且謂昵交興宗, 至於疏論, 臣等未知人之物望, 與生俱生乎? 陰附逆類, 掩迹免禍者, 是眞有物望者乎? 復昌爲司諫, 不敢言而敢怒者, 是何等人輩耶? 是果有公心而無私意者乎? 使人人以言爲戒, 雖聞邪言逆論, 皆緘口結舌, 不得發聞于上, 是乃美世事乎? 托以憂國, 陰護兇徒, 排斥爲國之人, 使是非顚倒, 人心不一, 似爲成遇南沂輩報仇, 至爲寒心。 許國元勳, 爲君上之心, 果如是哉? 事甚駭愕。 所關非輕, 請罷其職。 爲人臣, 而懷二心於君上者, 則臣子之所共憤。 而成遇南沂兇悖之狀, 在法不赦, 固不足惜, 而大司成具壽聃, 往日以特進官詣闕, 將入經筵, 公然發說曰: ‘南沂之死, 專由於陳復昌。 當招問政院之時, 若不直啓其情狀, 豈至於死乎? 吾里之人, 皆言如此。’ 云。 顯示愛惜之意, 亦爲駭愕。 其意必以爲人之死生至重, 雖聞兇徒觸上之言, 不可傳播於人也。 且於君上之問, 猶以爲匿情不輸, 是徒知保身之爲貴, 不識君臣之大義也。 若使人人, 皆如壽聃之心, 則雖有逆賊將起, 勢必袖手傍觀, 孰敢發於口哉? 機關甚重, 不可不懲。 請罷不敍。 戶曹判書愼居寬, 素乏學識, 中無所主, 自丁酉年, 至于今時, 曲爲蟣蝨之附, 叨占淸顯之職, 外示謹實, 中藏回曲, 媚東悅西, 巧脫時變, 時人比之水旱勿論之田。 頃者與柳仁淑, 俱入銓曹, 不無謟附之事, 及今掩覆情迹, 反躋六卿之列。 聖恩至重, 幸莫大焉, 宜其改心易慮, 爲國無他, 而尙懷不自安之心, 謀固己勢, 陰試私意, 欲使朝廷不靖, 其用心極爲陰譎。 請削奪官爵。 司藝李首慶, 往者與逆賊李煇李仲悅丁熿, 朋比往來, 人所共知, 招宿李煇于其家, 其聞兇逆之論, 必矣。 等被罪之後, 尙保顯職, 已云足矣, 反以爲李仲悅, 國家終不可棄之, 人或以謂論加罪逆類者, 竟非一身之福云。 李仲悅之兇狀, 昭著于自啓之辭, 非首慶所可救拔, 爲君上治逆類者, 反謂禍將及己, 其欲竟致國家於何地乎? 所言陰慘如此, 至爲駭愕。 如此輕邪之人, 不可使在都下, 請速遠竄。" 答曰: "今觀所啓, 至爲駭愕。 予意以謂奸兇已除, 人心自定矣, 餘孽尙存, 邪論不止, 豈不寒心哉? 許磁以元勳, 與國同休戚大臣, 愛君憂國之念爲重焉, 其用心如此, 予所孰恃? 罷職過重, 祗遞其職。 愼居寬具壽聃李首慶, 竝如啓。 近者予欲鎭定人心, 或罔治脅從, 以示寬仁大度, 必自有愛君之心, 邪論如此不止, 豈無天變之警懼乎?"

【史臣曰: "許磁等推奬復昌, 養成毒蛇猘犬之惡, 及其憑依窟穴, 跳踉藩籬而後, 反欲禁止其噬囓之酷, 吁亦晩矣! 彼氣焰熾極, 生殺榮辱, 在於立談之間, 則又悔懼前日之擧, 易慮釋仇, 相與唯諾, 無乃苟且顚倒之甚乎?"】

竄司藝李首慶咸鏡道 穩城

【史臣曰: "首慶陳復昌, 接隣而居, 復昌爲一時所棄, 首慶職帶淸顯。 士林如丁熿李煇之輩, 過復昌之門而不入, 長與首慶往來, 復昌懷恨久之。 及復昌尹春年所引, 爲臺諫執國論, 則首慶遂得罪, 人情可畏哉!"】


  • 【태백산사고본】 4책 4권 36장 A면【국편영인본】 19책 446면
  • 【분류】
    왕실(王室) / 정론(政論) / 인사(人事) / 사법(司法) / 변란(變亂) / 가족(家族) / 신분(身分) / 사상-유학(儒學) / 역사-사학(史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