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복창이 양전의 팔자를 추점하고 말한 정흥종의 일에 대해 아뢰다
진복창이 아뢰었다.
"정흥종은 풍덕 사람으로 신과는 동향(同鄕)이고, 그 아내는 신의 얼속(孽屬)이므로 그의 흉패한 행위를 신이 자세히 알고 있습니다. 그 역시 신이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 줄 알고 있으므로 서울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신의 문을 지나도 들어오지 않은 지가 오래였습니다. 다만 남기와는 어려서부터 절친하여 의식(衣食)을 일체 남기에게 의탁하였고, 남기 역시 복설(卜說)을 약간 터득한 터이므로 남기의 집에 머물러 있게 한 지가 1∼2년이 아니었습니다. 작년부터는 남기가 담장 밖에 있는 조그마한 집을 그에게 빌려주어 살도록 하였는데, 신이 그 이웃에 있으므로 남기가 무뢰배와 결탁하여 잡술을 의논한 것을 늘 통분하게 여겨 왔었습니다.
금년 정월에 신이 부평 부사(富平府使)로 신병이 있어 사직하고 시골집에 내려가 있었는데, 정흥종이 마침 신의 병석(病席)을 찾아왔기에 여러 족속(族屬)이 모인 자리로 안내하였더니, 족속들이 신의 병에 대해 길흉(吉凶)을 점쳐 보았습니다. 또 그가 가지고 있던 음양서(陰陽書)를 펼쳐 보았더니, 양전(兩殿)의 오주(五柱)가 그 안에 아울러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를 괴이하게 여겨 그 까닭을 물었더니 ‘내가 늘 보기 때문에 기록한 것이다.’ 하고 이러서 ‘후분(後分)이 선분(先分)만 못하다.’ 하는가 하면 ‘유관(柳灌)과 유인숙(柳仁淑)의 팔자도 다 좋으나 불길한 시운(時運)을 만나 끝내 흉종(凶終)하게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은 마침 인후증(咽喉症)이 있어 말을 할 수가 없었으므로 그의 말만을 듣고 몹시 통분하게 여겨, 즉시 사촌 매부(妹夫) 유세공(柳世恭)을 시켜 내보내고 나서 족속들에게 ‘어떻게 감히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하면서, 병중에서도 통분한 마음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신의 병이 조금 나아지자 지난 4월 그믐경에 장령(掌令)에 제수되었으므로 경연(經筵)에 입시하면 의당 그의 무엄한 행동을 아뢰려 하였는데, 미처 입시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체직된 때문에 이를 아뢰지 못한 일이 항상 마음에 걸려 신의 벗들에게 이야기하곤 하였습니다.
지난달에는 남기가 신을 방문하였기에 신이 ‘어찌 아침 일찍 찾아왔는가?’고 하였더니 ‘마침 찾아볼 사람이 있어 이 앞을 지나다가 들었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평소에 정흥종을 통분하게 여겨 온 터이므로 ‘정흥종이 아직도 그대의 조그마한 집에 있는가?’고 하였더니 ‘지금은 이미 동학(東學)193) 근처로 이거(移居)하여 오랫동안 서로 만나지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이어서 ‘정흥종이 양전의 오주를 그 음양서 안에 기록하여 가는 곳마다 펼쳐놓고 흉패한 말을 수 없이 지껄이니, 그 정상이 오래지 않아서 발각될 것이다. 그가 만약 그대의 집에 계속 머물러 있다면 그 누(累)가 그대에게 미치지 않으리라는 것을 누가 보장하겠는가? 그대가 그를 내보낸 것은 참으로 잘한 일이다.’고 하였더니, 남기가 깜짝 놀라며 돌아갔었습니다.
또 계묘년경 통간(通簡)한 일에 대하여는, 정흥종에게 공대(空垈)194) 가 있어 매각하여 한다고 하기에 신이 그것을 매입(買入)하기 위하여 남기를 인연하여 정흥종을 초치한 사실이 과연 있었습니다. 그 뒤 정흥종이 올라왔기에 신이 그 공대를 매입하였는데 듣기로는 정흥종이 합집195) 해서 매각했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그들 형제가 분집(分執)한 물건이었으므로 즉시 한성부(漢城府)에 소송(訴訟)하여 환퇴(還退)시켰던 것입니다."
- 【태백산사고본】 4책 4권 27장 A면【국편영인본】 19책 442면
- 【분류】사법(司法) / 변란(變亂) / 가족(家族)
- [註 193]동학(東學) : 선비를 배양하기 위하여 서울의 중앙과 동·남·서에 세운 학교의 하나로, 중학(中學)·서학(西學)·남학(南學)·동학(東學)이 있었음. 이를 통틀어 사학(四學)이라고 함.
- [註 194]
공대(空垈) : 집을 지을 터전.- [註 195]
합집 : 노비나 전택(田宅) 등을 상속자들이 나누는 것을 분집(分執)이라 하며, 이를 혼자 독차지하는 것을 합집이라 한다.○陳復昌啓曰: "興宗, 豐德人也, 與臣同鄕, 而其妻又臣之孽屬, 故其兇悖之行, 臣備知之。 興宗知臣不悅己, 故雖長在京中, 過臣之門而不入者久矣。 但與南沂, 自少交結, 衣食皆托於沂, 沂亦稍解卜說, 故留住沂家, 固非一二年。 自去歲, 沂借與其墻外小家, 使之居焉, 臣在其隣, 常以沂交結無賴, 留與論議雜術, 爲痛憤焉。 今正月, 臣自富平府使, 病辭歸于鄕家, 興宗適到臣臥病之所, 引入于族屬衆坐之處, 族屬等推占臣病之吉凶。 且披閱其所持陰陽書, 則兩殿五柱, 竝錄於其中。 怪問其所錄之意, 應曰: ‘吾常見之, 故所以錄之也。’ 仍言: ‘後分不及先分。’ 又曰: ‘柳灌、柳仁淑八字皆好, 而但逢時運不吉, 以至凶終。’ 臣方患咽喉證, 不通言語, 故但聞其言, 而極爲痛憤, 乃令四寸妹夫柳世恭, 卽出送, 仍語族屬等曰: ‘何敢爲如是事耶?’ 病中猶懷痛憤。 臣病小間, 去四月晦間, 乃爲掌令, 每擬入侍經筵, 則當啓以此人無狀之事, 而適未及入侍而見遞, 臣以未及啓達之意, 常慷慨言之于朋伴。 去月間, 沂來訪臣, 臣問何早來, 答曰: ‘適有往見人, 而歸路歷訪。’ 云。 臣嘗痛憤於興宗, 故問: ‘興宗尙在汝小家乎?’ 沂答曰: ‘今已移居于東學近處, 久未相見。’ 云。 臣曰: ‘興宗以兩殿五柱, 錄諸陰陽冊中, 到處披覽, 多發兇悖之言, 其情狀當不久而發。 彼若長在汝家, 安知不累及於汝乎? 汝之出送善矣。’ 沂驚懼失色而告去。 且癸卯年間通簡事, 聞興宗, 有空(代)〔垈〕 欲賣, 故臣欲買之, 因沂招致之簡, 果有之。 其後待興宗上來, 臣乃買其(代)〔垈〕 , 而旋聞興宗, 合執而賣之云。 此其兄弟等分執之物, 故卽呈漢城府還退矣。"
- 【태백산사고본】 4책 4권 27장 A면【국편영인본】 19책 442면
- 【분류】사법(司法) / 변란(變亂) / 가족(家族)
- [註 1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