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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실록 3권, 명종 1년 2월 1일 무자 1번째기사 1546년 명 가정(嘉靖) 25년

표류하여 유구국에 갔던 박손 일행이 돌아와 그 풍속을 기록하다

정원에 전교하기를,

"동지사(冬至使)의 문견 사건(聞見事件)을 보니, 본국의 박손(朴孫) 【제주(濟州) 사람으로서 모두 12인이다.】 이 표류하여 유구국(琉球國)에 이르니, 그 국왕이 지성껏 후히 대하고 또 궁궐 뜰에서 궤향(饋享)하였다 한다. 교린(交隣)의 후의를 사례하지 않을 수 없는데, 다만 통할 수 있는 길이 없다. 그러니 본국 사신이 만일 중조(中朝)에서 유구국 사신을 보거든 마땅히 이 일을 치사하도록 하라."

하였다. 【박손(朴孫)이 복건도(福建道)의 수차(水車)를 보고 그 제도를 상세히 익혀가지고 본국에 돌아와서 장인(匠人)을 가르쳐 제작하니, 그 용도가 농작에 매우 이로왔다.】 주서(注書) 윤결(尹潔)박손 등의 말에 따라 유구국의 풍속을 기록하였는데,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그들의 풍속은 남자는 귀천이 없이 모두 머리 좌각(左角)에 크기가 주먹만한 상투를 틀어감는데 머리숱이 많으면 깍아서 감하고 비단 헝겊으로 싸서 돌린다. 그 비단 헝겊의 색깔은 푸르기도 검기도 붉기도 한데 귀인(貴人)은 누런 색을 사용한다.

신은 신지 않고 말을 타거나 보행할 때도 모두 맨발이다. 의복 제도는 우리 나라 승려의 옷과 같고, 오직 조아(朝衙)에서만 사모(紗帽)를 쓰고 금·은·옥의 띠를 하는데 한결같이 중국의 제도처럼 하였다. 여자는 귀천을 막론하고 치마[裙]를 입지 않고 상(裳)을 몇 겹으로 둘러서 살을 드러내지 않으며, 머리 뒤에 쪽을 틀고 장식은 하지 않았으며, 오직 귀인만이 화잠(花簪)을 쪽을 튼 곳에 꽂았다. 다닐 때는 항시 얼굴을 의령(衣領)속에 숨기고 두 눈만 내 놓을 뿐이다. 의복 제도는 역시 승려의 옷[僧衫]과 같았다.

그 지방은 항시 따스하고 춥지 않아서 남녀의 살결이 곱고 윤택하였는데, 여자는 미색이 많고 화장을 하지 않았다. 또 여자도 관직이 있어 모든 여정(女政)은 다 여관(女官)이 재결하고, 조아(朝衙)도 국왕에게 하지 않고 왕비에게만 한다. 여관이 나다닐 때에는 말을 타도 안장에 걸터앉지 않고 안장 위에 웅크리고 앉아 두 발을 한 등자(鐙子)에 얹되 마치 호상(胡床)에 앉듯 한다.

말 머리에서 벽제(壁除)하는 소임이나 복종(僕從)들은 모두 여인을 쓴다. 경상(卿相)의 자제로서 연소한 자를 택하여 그들에게 은냥(銀兩)을 많이 싸 주어 바다를 건너 남경(南京)에 들어가 유학하면서 남북 양경(兩京)의 어음(語音)을 겸해 익히게 하고, 그들의 학문이 성취되기를 기다려서 배를 보내어 데리고 돌아온 다음 그들이 배운 바를 시험하여 능통한 자에게는 관직을 주고 능통하지 못한 자에게는 은냥을 도로 징수한다. 그러기 때문에 자제로서 남경에 들어가 유학한 자는 자신의 학문이 성취되지 못함을 알면 감히 돌아오지 못한다.

국속(國俗)은 관후(寬厚)·정직(正直)하고 교사(狡詐)·기망(欺罔)하는 풍습이 없다. 공사(公私)간에 모두 형장(刑杖)을 쓰지 않으며, 여리(閭里)에서는 서로 헐뜯거나 비방하지 않았고 서로 싸우거나 다투지도 않았다. 죄과(罪過)가 있으면 유사(有司)가 이를 기록하여 세 번 범죄한 연후에야 먼 외딴섬으로 내쳐서 종신토록 나오지 못하게 한다. 상인이 보화(寶貨)를 가게에 벌여 놓고 팔다가 혹 무슨 일이 있어서 밖에 나가고 지키지 않아도 도둑질해 가지 않는다.

농사는 정월에 씨앗을 심어 5월에 수확하고 6월에 심어 10월에 수확하고는 10월 이후에는 토란을 그 전지에 심어서 연말에 캐는데, 토란은 우리 나라에서 심는 것과 같으나 맛이 향긋하여 익히지 않아도 목구멍을 찌르지 않았다. 밭곡식도 1년에 두번 수확한다. 11월의 기후가 우리 나라의 3월∼4월과 같아서 본래 빙설(氷雪)이란 없다. 주민들은 단자(緞子)를 입거나 혹은 사릉(紗綾)을 입는데 갖추어지는 대로 사용하고 귀천의 등급이 없었다.

사람이 죽으면 삼년 동안 흰 것을 덮어 쓰고, 조상(弔喪) 등의 일은 대략 우리 나라와 같은데 초상 중에도 고기 먹는 것을 폐하지 않았다. 장사(葬事)를 지낼 때는 바위를 깎아 궁옥(宮屋) 형태로 만들고 그 안을 파내어 공허하게 한 다음 목판(木板)으로 문을 만들고 널을 그 속에 두는데, 한집안에서 죽은 자는 모두 그 속에 넣었다. 제사 때에는 문을 열고 제사가 끝나면 즉시 닫았다. 재력이 불능한 자는 바위 구멍이 궁옥처럼 생긴 데를 구하여 그 속에 널을 두며, 땅에 묻지는 않았다.

화폐(貨幣)는 동전(銅錢)을 쓰는데 1백 전(錢)은 그 가치가 쌀 2 두(斗)에 해당한다. 혼인(婚姻)을 할 때는 신랑 집에서 먼저 돈을 신부 집으로 실어보내면 잔치 등의 모든 예식은 다 신부 집에서 베풀고 신랑 집에서는 한가지도 준비하는 일이 없다. 혼인 기일이 이르면 신랑은 성장(盛裝)을 하고 말에 오른 다음 여러 족속들이 뒤를 옹위하고 간다. 두 은합(銀榼)을 사용하여 폐물(幣物)을 담고 꽃을 꽂고는 말 머리 앞에서 인도한다고 한다. 또 그들 풍속은 승불(僧佛)을 성대하게 섬기며 사가(私家)나 관청에서나 모두 불상을 벌여 놓는다.

산천(山川)은 기준(奇峻)하고 토지(土地)는 비옥(肥沃)하였으며 사슴과 노루는 있어도 승냥이나 범은 없으며 또한 꿩도 없었다. 나무로는 잎사귀가 일산과 같은 것이 있는데 매우 부드럽고 질겼으며, 부인 중에 귀부인들은 그 잎사귀로 관(冠)을 만들어 쓰고 다니는데 그 잎사귀를 허리까지 드리워서 남이 얼굴을 보지 못하게 한다. 또 모든 포장(包裝)을 하는 데도 다 이 잎사귀를 사용하고 농부가 밭갈이하거나 김맬 경우에는 역시 이 잎사귀를 사용해서 삿갓을 만든다. 풀로는 큰 파초같은 것이 있는데, 기둥처럼 된 것을 베어서 겉껍질은 버리고 속껍질을 취하여 3등급의 베(布)를 만드는데 그 껍질의 안팎에 따라 베가 거칠고 가는 것이 다르게 된다 한다. 제일 속에 있는 것은 극히 가늘고 윤택하며 색깔이 깨끗하기가 눈과 같아서 그 곱고 정밀하기가 비할 데 없다. 여자들의 의복 중에서는 이것을 최상으로 삼는다 한다.

국왕이 임어하는 궁전은 그 높이가 5층인데 판자로 덮었고 왕은 홍금의(紅錦衣)에 평천관(平天冠)을 쓰고 한 중[僧]과 마주 앉아서 망궐례(望闕禮)041) 를 행하였다. 【명나라를 섬기기 때문에 망궐례를 행한 것이라 한다.】 백관들은 관직의 서차별로 반열을 나누어 뜰 아래에서 하는데, 박손(朴孫) 등을 백관의 반열 뒤에 세워서 일시에 절을 하도록 하면서 ‘그대의 나라도 명나라의 신하이니 절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박손이 돌아올 때 그 나라 왕비가 불러 보고 후한 선물을 주었다 한다.】


  • 【태백산사고본】 3책 3권 19장 A면【국편영인본】 19책 388면
  • 【분류】
    외교-명(明) / 외교-유구(琉球) / 농업-수리(水利) / 공업-장인(匠人) / 인사(人事)

  • [註 041]
    망궐례(望闕禮) : 여기는 중국의 궁전을 향해 절하는 예식임.

○戊子朔/傳于政院曰: "見冬至使聞見事件, 則本國朴孫 【濟州人, 凡十二人。】 漂到琉球國, 國王至誠款待, 又於闕庭饋享。 交隣厚意, 不可不謝, 但無路可通。 本國使臣, 若於中朝, 見琉球國使臣, 則宜以此致謝。" 【朴孫見福建道水車, 詳習其制, 還本國, 敎匠人造作, 其用甚利於農作。】 注書尹潔, 因朴孫等之言, 記琉球國風俗, 其略曰:

其俗男無貴賤, 皆結髻於頭左角, 大如拳, 髮多則剃減之, 用帛裹繞。 或靑、或黑、或紅, 其貴者用黃。 不着靴鞋, 騎步皆赤足。 衣制如我國緇徒之衫, 唯於朝衙, 着紗帽金銀玉帶, 一如上國制度。 女無貴賤, 不穽裙, 圍裳數重, 亦未嘗露其肌體, 結髻於頭後, 而無戴飾, 唯貴者揷花簪於結處。 行常隱其面於衣領中, 但出兩目而已。 衣制亦如僧衫, 其地常暖不冱, 男女肌膚鮮潤, 女多異色, 不施脂粉。 且女有官職, 凡女政皆決於女官, 朝衙不於國王, 而獨於王妃也。 女官之行也, 騎不跨鞍, 踞于鞍上, 兩足一鐙, 如據胡床。 然馬首行辟與僕從, 皆用女人。 擇卿相子弟年少者, 多齎銀兩, 渡海入南京, 遊學兼習南北兩京語音, 力俟其學就, 遣船率還, 試其所學, 能者授之以職, 否者徵還銀兩。 以故子弟之入南京遊學者, 自知其學不就, 則不敢還也。 國俗寬厚正直, 無狡詐欺罔之習。 公私竝不用刑杖, 閭里不相詆詬, 不相鬪鬩。 有罪過有司記之, 至三犯然後放之絶島, 終身不得出。 爲市者列貨寶於肆, 或以事出去不守, 而無或竊取。 爲農自正月種苗, 五月而穫, 六月而種, 十月而穫, 十月而後藝芋於其田, 歲終而採, 芋如我國所種, 味香厚, 雖不烹熟, 亦不刺喉。 田穀亦一年兩穫。 十一月如我國三月四月, 本無氷雪。 居人或衣段子, 或衣紗綾, 隨所備而用, 無貴賤等級。 人死則三年蒙白, 弔喪等事, 略如我國, 而初喪不廢食肉。 其葬也斲削巖, 作爲宮屋形, 鑿其內空曠, 以木板爲戶, 置柩於其中, 凡一家之死者, 皆入其中。 祭則開戶, 祭訖卽鎖。 力不能者, 求得巖穴如屋者置柩焉, 不用埋瘞。 貨幣用銅錢, 錢一百, 當米二升。 其婚娶也, 夫家先輸錢婦家, 宴飮凡禮, 皆自婦家設之, 夫家一無所措。 期至, 夫盛衣服上馬, 諸族擁後而行。 用二銀榼, 盛以幣物, 植以花萼, 當馬首前導云。 且其俗盛事僧佛, 私居及官府, 皆列佛像。 山川奇峻, 土地肥厚, 有鹿獐無豺虎, 且無雉焉。 有木其葉如傘, 蓋甚柔韌, 婦人之貴者, 以其葉爲冠而行, 葉垂於腰, 欲人不見其面也。 且凡包裹, 皆用此葉, 農人耕耘者, 亦以此爲笠。 有草如芭蕉大者, 如棟柱, 刈之去外皮, 取內皮爲三等布, 以皮之, 內外而布之, 麤細異焉。 其最內者, 極爲細潤, 色潔如雪, 姸密無比。 女服之好者, 以此爲最云。 國王所御之殿, 高五層, 以板覆之, 王具紅錦衣, 戴平天冠, 與一僧對坐, 行望闕禮。 【事大明, 故爲此禮云。】 百官以職次, 分班拜於庭下, 立朴孫等於百官班後, 令一時拜曰: "爾國亦爲大明臣, 不可不拜。" 云。

【朴孫之還, 其國王妃, 召見厚饋。】


  • 【태백산사고본】 3책 3권 19장 A면【국편영인본】 19책 388면
  • 【분류】
    외교-명(明) / 외교-유구(琉球) / 농업-수리(水利) / 공업-장인(匠人) / 인사(人事)